6. 한자어와 문장
‘푸른 하늘’ 하면 ‘푸른’은 푸르다는 뜻, ‘하늘’은 하늘이라는 뜻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 음 그대로가 뜻이요 뜻 그대로가 음이다.
‘청(靑)’이나 ‘천(天)’은 한자다. ‘청천(靑天)’이라 하면 한자어다. ‘청천’이란 음이 곧 뜻은 아니다. '‘천'’란 음의 뜻은 ‘푸른 하늘’이다. 음은 ‘청천’, 뜻은 ‘푸른 하늘’, 이렇게 음과 뜻이 따로 있다.
소리가 곧 뜻인 ‘푸른 하늘’의 문장은 읽히는 소리가 곧 뜻인, 소리와 뜻이 하나인(聲意一元的) 문장이다.
소리와 뜻을 따로 가진 한자어로 된 문장은 읽히는 소리가 곧 뜻이 아닌, 소리와 뜻이 다른 문장이다.
양복을 혼자 주섬주섬 떼어 입고 안방으로 나오려니까 아씨는 그저 뾰투통하여 경대 앞에 앉아서 열심으로 가름자를 타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은 언제 들어오시라우? 회사 시간이 늦어도 좀 들러 오시지.”
돌려다도 보지 않고 연해 바가지를 긁다가 남편이 안방문을 열려는 것을 거울 속으로 보고 입을 잽싸게 놀린다.
“그 빌어먹을 전화, 내 이따 떼어버려야. 기생년하고 새벽부터 이야기하라구 옷을 잽혀가며 매었드람? 참 기가 막혀! ……그럴 테면 마루에 매지 말구 아주 저 방에 매지.”
하며 구석방을 돌려다보다가 남편과 눈이 마주치자 외면을 하더니 빤드를한 머리밑에 빨간 자름댕기를 감아서 뽀얀 오른편 볼을 잘록 눌러 입에 물고 곁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땋기 시작한다. 주인은 한참 바라보다가
“느느니 말솜씨로군!”
하고 방 밖으로 휙 나오다가 좌우 북창 사이에 달린 전화통을 건너다보았다. 네모반듯한 나무갑 위에 나란히 얹힌 백통빛 새 종 두 개는 젊은 내외의 말다툼에 놀란 고양이 눈같이 커다랗게 빤짝한다.
-염상섭의 「전화」에서
소리가 모두 그대로들이어서, 새겨야 할 말이나 구절이 없다. 생활어 그대로기 때문에 현실 광경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주섬주섬”이니, “뾰루퉁”이니, “빤드를한 머리밑에 빨간 자름댕기를 감아서 뽀얀 오른편 볼을 잘록 눌러 입에 물고 곁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니, “네모반듯한 나무갑 위에 나란히 얹힌 백통빛 새 종 두 개는 젊은 내외의 말다툼에 놀란 고양이 눈같이 커다랗게 빤짝”이니 그 얼마나 표현에 구체력이 강한가.
“나는 벌써 처녀가 아니다”라는 굳센 의식은 아직 굳지 않은 이십 전후의 어린 마음에 군림합니다. 그것은 마치 종교 신자의 파계라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으나, 단 한 번의 실족(失足)이 반동적(反動的)으로 타락의 독배(毒杯)를 최후의 일적(一滴)까지 말리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성적(性的) 감로(甘露)에 한번 입을 댄 젊은 피의 약동과 기갈은 절제의 의지를 삼키어버렸습니다.
-염상섭의 「제야(除夜)」에서
군림(君臨), 파계(破戒), 용이(容易), 실족(失足), 반동적(反動的), 타락(墮落), 독배(毒杯), 최후(最後), 일적(一適), 만족(滿足), 성적(性的) 감로(甘露), 약동(躍動), 기갈(饑渴), 절제(節制), 의지(意志) 등 한자가 많이 섞였다.
구절마다 소리 외에 딴 관념을 일으킨다. 보이는 정경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 내용이 인식되는 것이다. 눈으로 어떤 정경을 보며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며 읽게 된다. 묘사이기보다도 논리인 편이다. 같은 작가의 문장인데도, 용어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묘사 본위라야 할 데서는 아무래도 한자어는 구체력이 적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문장이 모두 묘사를 위해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대부분은 묘사지만, 학문과 논설은 묘사가 아니라 이론이다.
나는 한편으로 덮어놓고 한문학(漢文學)을 배척하기만 하는 인사에게 할 말이 있다. 한문학은 수천 년의 전통을 가지어온 세계에 가장 유구한 연원(淵源)과 풍부한 내용을 가진 인류문화의 중요한 유산이요, 더구나 우리의 문화와는 일천 년래 심심(深甚)한 관계를 맺어온 것이다. 문학 자체로 보더라도 그것이 당연히 영미문학보다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 우리의 지식의 일단층(一斷層)을 형성하여야 할 것은 저 서인(西人)이 희랍의 고전 수양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이려니와 더구나 우리 문화의 저류(底流)에는, 우리의 사유와 감정에는 아직도 한문학의 난류(暖流)와 혈맥(血脈)이 통하여 있느니만치 우리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통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도저히 한문학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자문화(自文化)의 수립 선양(宣揚)을 위하는 나머지 성급하게 한문학을 거부함이 무모한 태도임을 안다. 하물며 이 전통적인 저류를 모르고 극히 피상적인 서문학(西文學)에만 심취하여 한문학을 경시하는 태도는 성급과 천려(淺慮)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비근한 일례를 든다면 『유사(遺事)』나 『사기(史記)』나 퇴계(退溪)나 화담(花潭)이나 내지 성호(星湖), 다산(茶山), 완당(阮堂)의 학(學)을 일찍이 요해(了解)한 것도 없이 조선문학을 하노라 하면 그것은 전혀 망발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한문학의 소양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요구하는 새로운 지식은 선인(先人)의 문화유산을 먼저 그 자체를 엄밀히 조사 검토하여 그 속에 깊이 침잠유영(沈潛游泳)한 뒤에, 그것을 다시 엄정한 과학적 체계로써 새로운 방법론으로써 연구·정리·규정하는 것이다. 무론(無論) 후자 없는 전자의 지식만은 죽은 기계적·골동적(骨董的) 소재 지식에 불과하고 도리어 종종 그 소재조차 왜곡·곡해할 우(虞)가 있으나 또 한편으로 전자의 예비한 지식이 먼저 축적되지 않은 후자의 판단은 일종 모험, 무모에 가깝다. 텍스트와 체계, 고증학과 방법론은 금후 엄밀한 통일을 요구한다.
-양주동의 「한문학의 재음미」에서
화담(花潭)의 학(學)은 궁리진성(窮理盡性) 사색체험(思索體驗)을 주로 삼아 언어문자로써 발표하기를 좋아 아니하여 그 저술이 매우 적고 상기 수편의 논문이란 것도 극히 간단하여 설(說)이 미진한 감이 없지 아니하나 그래도 그의 고원한 철학적 사상은 이에 의하여 잘 규지(窺知)되고 그 의미로 보아 이들 논문을 수집한 『화담집(花潭集)』 일책(一冊)은 오인(吾人)이 귀중히 여기는 바의 하나이다. 화담의 사상의 대체(大體)는 이율곡(李栗谷, 珥)의 설파(說破)함과 같이 송(宋)의 장횡거(張橫渠, 載)류의 사상에 속하되 간혹 독창의 견(見)과 자득(自得)의 묘(妙)가 없지 아니하며 그 우주의 근저를 들여다보려 함이 비교적 심각하였다. 지금 화담의 우주본체관에 취(就)하여 보면 그는 횡거와 같이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에 불과한 양으로 생각하고, 태허(太虛)의 담연무형(淡然無形)한 것은 선천(先天)의 기(氣)로서, 이는 시간 공간의 제약에서 전혀 독립한 무제한. 무시종(無始終)·항구불멸의 실재라고 인(認)하였다.
-이병도의 「서화담 급(及) 이연방에 대한 소고」에서
이런 문장들에서 한자어들의 정당한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음 뒤에 뜻을 따로 가진 것은 글자 그 자체의 함축이다. 함축이란, 어구, 문장 그 자체의 비밀이요 여유다.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하는 문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인물과 사건을 보여주니까 독자가 시각적으로 만족하지만, 인물도, 아무 사건도 보이지 않는 문장에서 어구나 문장 그 자체까지 아무 맛볼 것이 없다면 읽는 데 너무 흥미 없이 힘만 들 것이다.
그러기에 문예문장에서도 아무 시각적 흥미가 없는 수필류의 문장은 한자가 섞인 편이 훨씬 읽기 좋고 풍치(風致)가 난다.
전원의 낙(樂)
경산조수(耕山釣水)는 전원생활의 일취(逸趣)이다.
도시문명이 발전될수록 도시인은 한편으로 전원의 정취를 그리워하여 원예를 가꾸며 별장을 둔다. 아마도 오늘날 농촌인이 도시의 오락에 끌리는 이상으로 도시인이 전원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류는 본래 자연의 따스한 품속에 안겨 토향(土香)을 맡으면서 손수 여름지이를 하던 것이니 이것이 신성한 생활이요 또 생활의 대본(大本)일는지 모른다.
이른바 운수(雲水)로써 향(鄕)을 삼고 조수(鳥獸)로써 군(群)을 삼는 도세자류(逃世者流)는 좋은 것이 아니나 궁경(躬耕)의 여가에 혹은 임간(林間)에서 채약(採藥)도 하고 혹은 천변(川邊)에서 수조(垂釣)도 하여 태평세(太平世)의 일 일민(一逸民)으로서 청정(淸淨)하게 생활함은 누가 원하지 않으랴.
유수유산처 무영무욕신(有水有山處 無榮無辱身).
이것은 고려 때 어느 사인(士人)이 벼슬을 내어놓고 전원으로 돌아가면서 자기의 소회(所懷)를 읊은 시구이거니와 세간에 어느 곳에 산수가 없으리요마는 영욕(榮辱)의 계루(係黒)만은 벗어나기 어렵다. 첫째 심신의 자유를 얻어야만 하는데 심신의 자유는 염담과욕(恬淡寡慾)과 그보다도 생활안정을 반드시 전제요건으로 삼는다.
그렇지 않으면 산수 사이에 가 있어도 무영무욕(無榮無辱)의 몸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구를 읊은 그로 말하면 아마도 그만쯤 한 수양과 여요(餘饒)는 있던 모양이다. 아무리 단사표욕(簞食瓢欲)의 청빈철학(淸貧哲學)을 고조(高調)하는 분이라도 안빈낙도(安貧樂道)할 생활상 기초가 없고서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 아닌가. 인생이 공부는 고요한 곳에서 하고 실행은 분주한 곳에서 하는 것이 좋으나 그러나 권태(倦怠)해지면 다시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이 상례이니 전원생활은 권태자의 위안소이다.
권태자뿐이 아니라 병약자에 있어서도 도시생활보다 전원생활이 유익함은 말할 것도 없다. 맑은 공기와 일광과 달큼한 천수(泉水)는 확실히 자연의 약석(藥石)이며, 좋은 산채(山菜)와 야소(野蔬)며 씩씩한 과실은 참말로 고량(膏梁) 이상의 진미이니 이것은 전원생활에서 받는 혜택 중의 몇 가지로서 병약자에게도 크게 필요한 바이다.
‘흔연작춘주 적아원중소(欣然酌春酒 摘我園中蔬).’
이것은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명구로서 이익재(李益齋: 李齊賢)의 평생 애송하던 바이다.
청복(淸福)이 있으면 근교에 조그만 전원을 얻어서 감자와 일년감을 심고 또 양이나 한 마리 쳐서 그 젖을 짜 먹으며 살아볼 것인데 그러나 이것도 분외과망(分外過望)일는지 모른다.
-문일평의 『영하만필(永夏漫筆)』에서
한자어는 술어(述語), 즉 교양어(敎養語)가 많다. 교양인의 사고나 감정을 표현하려면 도저히 속어(俗語)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전원(田園)의 낙(樂)」에서도 한자어를 모조리 속어로 돌려놓는다 쳐보라. 얼마나 품(品)과 풍치가 감쇄될 것인가. 극히 개념적인, 생기 없는 과거의 한자문체는 배격해 마땅할 것이나 한자어가 나온다 해서 필요범위 내의 한자어까지 배척할 이유는 없다 생각한다.
속어만의 문장과, 한자어가 주로 쓰인 문장이 성격으로, 표현효과로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진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러기에 자기가 표현하려는 내용이 속어로 된 문장이어야 효과적일지, 한자어가 주로 씌어야 효과적일지, 또는 속어와 한자어를 반씩 섞어야 효과적일지 한번 계획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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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름자 가르마,
백통 구리, 아연, 니켈의 합금, 은백색으로 화폐나 장식품 따위에 씀.
일적(一適) 한 방울,
천려(淺慮) 얕은 생각.
요해(了解)깨달아 알아냄.
침잠유영(沈潛游泳) 깊이 가라앉아 헤엄침.
궁리진성(窮理盡性)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다함,
규지(窺知) 엿보아 앎.
오인(吾人) 나. 우리.
태허(太虛) 음양을 낳는 기(氣)의 본체,
담연무형(淡然無形) 엷어 형체가 없음,
경산조수(耕山釣水) 산에서 밭을 갈고 물에서 낚시를 함.
일취(逸趣) 뛰어나고 색다른 훙취.
토향(土香) 흙냄새,
여름지이 농사,
대본(大本) 크고 중요한 근본.
도세자(逃世者)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
궁경(躬耕)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음,
천변(川邊) 냇물의 주변.
수조(垂釣) 물속에 낚시를 드리움.
유수유산처 무영무욕신(有水有山處 無榮無辱身) 산수 좋은 곳에, 영화도 욕도 잊고 지내는 몸.
사인(士人). 벼슬을 하지 않는 양반이나 선비,
소회(所懷) 마음에 품고 있는 회포
영욕(榮辱) 영화와 치욕.
계루(係累) 다른 일이나 사물에 얽매임, 혹은 그로 인한 괴로움. 염담과 사물에 집작하지 않고 욕심이 없음.
여요(餘饒) 흠뻑 많아서 넉넉함,
단사표욕(簞食瓢欲) 대나무 밥그릇에 담은 밥을 먹고 표주박에 든 물을 마시며 살고 싶다는 뜻으로, 청빈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음을 이르는 말.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道)를 즐겨 지킴.
천수(泉水) 샘물,
약석(藥石) 약과 침이라는 뜻으로, 여러 가지 약을 통틀어 이르는 말.
야소(野蘇) 야채,
고량(膏粱) 기름진 고기와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
흔연작춘주 적아원중소(欣然酌春酒 摘我園中蔬) ‘즐거이 혼자 술을 따라 마시며 텃밭의 나물 뜯어 안주를 삼는다.’
청복(淸福) 좋은 복.
일년감 토마토,
분외과망(分外過望) 분에 넘치는 욕심.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3.1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