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가을 쯤 '진주 강씨 종친 회보' 에 실은 글
쓴 이는 나의 아버지이시며 2001.1.1 돌아 가셨다.
강감찬(姜邯贊)장군 묘소 실전 연유와 되찾은 경위
강영원(姜永遠)
(중앙종회 원로 고문)
중앙종보 1999년 5월, 7월호에는 충현사에서의 인헌공, 은열공 숭모비 제막식 기사가 실렸다.
충현사(忠顯祠)는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장군과 그의 부장(副將)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장군을 모시는 사우이다.
충현사 앞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강감찬장군의 묘소가 ‘잠시 실전하다 이곳에서 찾아지니 1967년 추모비를 세우고 다음해에 사우를 건립하여 향사를 하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고 어찌하여 실전했으며, 실전된 묘소를 어찌 찾아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이에 그 실전된 연유와 다시 찾아 확인한 경위를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1.실전(失傳)한 연유
역사는 병자호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636년 조선조 인조대왕은 청 태종의 침략을 받아 남한산성으로 피난, 농성하다가 삼전도에 내려와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후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두 왕자 부부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게되었다.
여기에서부터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싹트기 시작했다.
즉 1645년 인조 23년에 소현세자와 세자빈인 강빈이 청나라에서 풀려나 귀국한 후 인조의 후궁 조소용(趙昭容)과 반목하던 중 소현세자가 죽었다. 이것을 기화로 강빈이 세자를 죽이고 또한 왕실을 저주한다고 무고하여 강빈은 후원에 유폐되었다가 1646년 3월에 왕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렇게 죽은 강빈(姜嬪)은 누구인가?
강감찬장군의 17대 손이 되는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었다.
옥사가 일어나자 삼족을 멸하는 화가 두려운 강감찬장군의 후손들이 변성도 하고, 조상의 묘소에도 성묘를 안 하게 되니 이로부터 점점 잊혀져 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잠시’가 아니라 300여 년이 되었던 것이다.
“개구리가 울지 않는다”, “모기가 물지 않는다”, “칡덩굴이 못 뻗는다” 등등 조선팔도에 널리 알려진 고사의 주인공 묘소가 이렇게 오랜 기간 실전되었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보다 450년 전 신라 김유신(金庾信)장군의 경주 묘소와 출생지 사우인 진천읍 길상사(吉祥祠)에는 지금도 인적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2. 다시 찾은 경위
실전하였던 그 묘소를 충북 청원군 옥산(玉山)에서 찾은 경위는 다음과 같다.
중앙종회의 고문을 역임한바 있는 필자의 맏형인 우림(羽林) 강상원(姜相遠)이 1929년 4월에 교사로서 부임한 초임지 옥산공립보통학교에 근무할 때 주민들이 나무하러 갈 때 ‘강감찬장군 뫼 있는데로 가자’ 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다. 강감찬장군의 묘가 실전되었다는 말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묘가 옥산에 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무꾼들을 따라 가 보았더니 옥산면 국사리(國仕里)에 큰 봉분만 있고 석물은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세월이 흘러 1958년 4월에 그가 옥산국민학교 교장으로 다시 부임하여 3년간 근무할 때 옥산에서 약방하는 김재룡(金在龍)씨와의 대화에서 강감찬장군의 묘소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오가고 서로의 관심이 깊어졌다. 김재룡씨는 안동 김씨로서 진천군 백곡면 출생으로 성장은 청원군 오창면 주성리에서 한 사람이다.
이후 1964년 4월에 필자가 청원군 교육청 학무과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사백은 이때 진천읍 상산국민학교 교장으로 전출하면서 옥산에 있는 강감찬장군의 묘소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라고 당부하였다.
그 당시는 교육청 학무과에서 고적, 사적, 극장의 흥행업무등 소위 문화업무를 관장하던 때였다.
강장군의 묘소 이야기가 점점 알려지게 되어 중앙의 문교부로부터 확인하라는 지시가 오게 되었다. 동시에 비용 5만원도 교부되었는데 이 금액은 지금의 500만원에 상당하는 금액이다. 이에 김성균(金聲均) 국사 편찬위원회장을 초빙하여 분묘발굴 확인작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 글의 초고를 쓰기 전에 현재 청원군 교육장인 민병구(閔丙求)씨에게 당시의 관계 서류를 조회했더니 문서보존기간인 30년이 지나 당시 서류는 폐기되었다하여 필자의 비망록과 기억을 되살려 적는다.
현장에 가보니 커다란 봉분만 하나 덩그러니 있고 전후좌우에 문무관석, 묘비등 석물은 하나도 없이 아주 황량한 모습이었고 봉분 앞 상석이 있을 자리 즉 그 밑에 지석이 묻혀있을 자리에는 조그만 무주허묘(無主虛墓)가 투장되어 있었다. 봉분앞 삼사십메터 거리에 잡석무더기가 있었는데 이 돌무더기를 건드리면 청천벽력이 떨어진다는 전설이 마을에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 지석을 여기에 묻어놓고 금기사항으로 말을 퍼뜨린 것 같았지만 그 돌무더기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근처에서 인상석 두부(人像石 頭部)가 뒹구는 것을 발견하였고 개울 뚝에 세워진 석주(石柱)를 뽑아다 이 두부와 맞춰보니 딱 맞았다. 이 인상석의 모습은 정삼품이상의 고관을 지낸 사람의 분묘에 세우는 것으로서 강장군의 묘소로서 단서가 되었고 약 1000년 전부터 인근에 내려오는 전설은 믿을 만 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장군은 천수남(天水男) 식읍 300호, 천수후(天水候) 식읍 1000호에 봉해 졌었는데 여기가 당시의 천수현(天水縣)인 것은 이곳의 서쪽에 흐르는 하천이름이 지금도 천수천(天水川)으로서 옥산면 금계리로 흐르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이 묘를 자기네 조상묘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 강감찬장군의 묘소가 틀림없다고 단정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 묘소 발굴확인 당시에 청원군 미원면 부면장을 역임한 강한석(姜漢錫)씨가 장군의 직손으로서 참여했고 시흥 금천에서도 4인이 참석하였다.
이렇게 하여 실전한 묘소를 되찾아 확인함에 따라 1968년 4월 28일 강장군 추모비를 세우고“백성이 하늘이라 천도가 무심함이 없어...........” 장장 1,145자의 비명(碑銘)을 ‘청주대학교수 최정여(崔正如)가 짓고 서예가 이상복(李相馥)쓰고 충청북도교육위원회 청원군 교육장 세우다’ 로 되어있다. 당시 교육장의 성명은 김영국(金榮國)이었지만 교육장이라는 기관장이 세우는 것이지 개인 자격이 아니라 하며 성명 삼자 넣는 것을 극구 사양하여 넣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수 백년 실전했던 강장군의 유택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 이듬해 즉 1969년 김재룡씨와 김효영(金孝榮) 충북지사가 주동하여 강태봉(姜泰鳳) 청원군수의 협력으로 대지 1,220평을 매입하고 하천용지 2,425평을 제공받았으며 사림유지들의 지원과 은열공 후손들의 협조로 1969년 10월에 충현사를 건립하여 두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 때 그 현장에 있었던 후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증인의 한사람으로 인헌공 강감찬 장군의 유택이 실전된 연유와 되찾은 경위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이다.
강감찬장군의 묘소를 확인하고 단정한 것은 오로지 김성균(金聲均)국사편찬위원회장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추호도 견강부회는 없음을 첨언하며 글을 맺는다.
첫댓글 인터넷 글을 읽다가 <살아있는 분의 증언>이라 소중히 여겨져 우리카페에 옮겨 싣습니다.
물론 진주강씨중앙종보에 실린 내용이기도 하고...
충현사 사진은 권식님과 기중님이 이미 올리셨기에 생략합니다.
장군께서 청주에서 말년을 보낸 건 맞지만,
고려 시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분의 묘를 설마 작은 시골(충현사 : 충북 청주시 옥산면 국사리)에 모셨을리는 없다는....
역사학자들과 문화재 고증담당자분들의 합당한 추측 때문이라고...
(당시 수도였던 '개경'에 모셨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측하신다고~)
현재까지 문화재로의 등록이 어려운 입장
출처: http://bestcheongju.tistory.com/93 [일등경제 으뜸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