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암세고(磊庵世稿) 소재 강세응의 시문고(詩文考)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권 태 을
I. 머리말 ≪뇌암세고(磊庵世稿)≫는, 상주 출신 진주강씨 뇌암(磊庵) 강세응(姜世鷹?1746~1821)을 비롯한 6세(六世)의 유고(遺稿)를 엮은 세고이다. 본 문중은 문장에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데도 현재 그 분들을 상세히 알 만한 문집이 많은 편은 아니다. 앞으로 계속 발굴되리라 믿으며, 먼저 이번에 발간된 ≪뇌암세고≫를 소개한다. 이 세고는 후손 강영석(姜永錫)씨가 다년간 자료 수집에 온갖 정력을 쏟고, 집록(輯錄)하여 발간함으로써 상주인물사에 훌륭한 선비를 부각시키고 나아가 상주한문학의 영역을 크게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하겠다. 필자가 감히 세고의 서문(序文)을 닦는 인연을 입어 먼저 본 세고의 내용을 알 수 있었기에, 본 세고의 몇 가지 존재 의의를 소개하기 겸하여 우선은 뇌암의 시문(詩文)을 간략히 살펴 뒷날 사학의 연구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데 일조를 하고자 한다. 뇌암의 시문(詩文)은 상주문학사에서 뿐 아니라 한국문학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었다고 본다.
Ⅱ. ≪뇌암세고(磊庵世稿)≫ 개관 ≪뇌암세고≫는 여섯 분의 유고(遺稿)를 국역하여 차례로 싣고 별록(別錄)에 원고(原稿)를 영인하여 수록함으로써 세고의 신뢰성을 드높혔다. 본 항에서는 해제(解題)와 후지(後識) 등을 참고하여 요약하는데 그침을 밝혀 둔다.
1. 세고(世稿)의 작자와 유고(遺稿) 뇌암 강세응(1746~1821)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司諫)에 이른 정치가요 문장가로 ≪상산지(商山誌)≫ <인물>편에 등재되었다.(뒤에 상론) 항창(巷倉) 강정흠(姜鼎欽?1772~1835)의 자(字)는 치현(穉鉉)이요 호는 항창이다. 아버지는 뇌암이요 어머니는 밀양박씨 사덕(師德)의 따님이며, 상주 낙양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하고 기개와 도량이 청일(淸逸)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으로 이름이 나 음직(蔭職)으로 통덕랑(通德郞)이 되었다. ≪상산지≫ <은사(恩賜)?신편(新編)>에 등재되었는데 효우(孝友) 독실하고 수조(守操)가 장하였다고 소개하였다. ≪항창유고(巷倉遺稿)≫를 남기었는데, 시 237제(題)로 288수와 제문 1편, 서(書) 2편과 부록에 제후(題後)?묘갈명(墓碣銘) 등을 수록하였다. 특히, 시 속에는 1810년 북유(北遊)하여 함경도 경성?함흥?길주와 회양 등지를 유람하며 보고 느낀 바를 시로 읊어, 당대 북쪽 지방의 민속?민심 등을 통하여 사회상(社會相) 일면을 엿보게 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하겠다. 또한, 당대 상주에 있던 죽우사(竹友社) 선비들과도 수창한 시가 많아 상주시사(尙州詩社) 연구에도 기여함이 크다 하겠다. 나사(懶史) 강인영(姜麟永?1807~1887)의 자는 효옹(孝翁)이다. 아버지는 항창이요 어머니는 안동권씨 통덕랑 상병(尙炳)의 따님이며, 낙양에서 태어났다. 가학(家學)으로 경학과 문학을 전수하였는데 독려가 없이도 열심히 하였으며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다. 39세(1845) 2월 19일, 충청도 감영에서 실시한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더욱 저명해졌으며, 필법(筆法)이 경건(勁健)하고 단아(端雅)하였다. ≪상산지≫ <은사?신보>에, 정흠(鼎欽)의 아들로 문명(文名)이 높았다라고 소개하였다. 상주 임곡리(壬谷里?옛 보은 묵정리)에 시거(始居)하였다. ≪나사유고(懶史遺稿)≫에는 6언(言) 30구절의 부(賦?科試文) 1편(1845. 2. 19 작)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갑진년(甲辰年) 가을의 중궁전(中宮殿) 가례(嘉禮)를 축하하기 위하여 충청 감영에 과거장을 설치하고 초시를 치를 때 합격한 자필본의 부(賦)다. 부록에 서(書) 1편과 묘갈명(李源榮 찬)이 수록되었다. 학포(學圃) 강문형(姜聞馨?1832~1888)의 자는 성학(誠鶴)이다. 아버지는 나사요 어머니는 고령신(申)씨 통사랑 광모(光模)의 따님이며, 보은 묵정리(현 상주 임곡)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순후하고 총명함이 크게 뛰어나 가학(家學)으로 경학과 예학을 전수하여 박통(博通)한 선비로 이름을 얻었다. 21세(1852)에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초시인 세자 국제(世子 菊製)에서 차상(次上)으로 입격(入格)하여 원근에 문명이 났다. 그러나, 과거운이 불리하여 초야에 덕을 감추고 큰 뜻을 다 펼치지 못하였다. ≪학포유고(學圃遺稿)≫에는 초시에 차상으로 입격한 과시문(科試文)인 <청문하민부(淸問下民賦)> 6언 30구절 1편을 남겨,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한 요(堯)?순(舜)의 성덕(聖德)을 칭송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이념을 드러내었다. 부록에 서(書) 1편과 묘갈명(金宗熙 찬)이 수록되었다. 수당(睡堂) 강춘희(姜春熙?1856~1902)의 자는 호인(?人)이다. 아버지는 학포요 어머니는 단양장씨 진사 지순(志淳)의 따님이며, 상주 임곡에서 태어났다. 독려가 없어도 독서를 좋아하여 약관에 이미 경서는 물론 제자백가서에 두루 통하였으며 특히 과거문에 장하였으나 항상 겸손하였다. 효우 지극하고 학문에 열중하여 가풍 진작을 모두가 기대하였다. 1888년(고종 25) 2월 25일, 무자(戊子) 사마 진사시(司馬 進士試) 입격인 324명 중 2등 제10인으로 입격하여 경향에 명성이 났고, 합격을 축하해 준 고관 대작(판서?참판?승지?교리 등)과 많은 선비들의 하객 방명록인 영문록(榮問錄)이 남아 당대 선비 사회의 한 풍습을 엿보게 하였다. 대과운(大科運)이 불리한데다 성균관에서 강학 도중 괴질로 급서하니 아는 이가 다 애석히 여기었다. ≪상산지≫ <과제인물(科第人物)>편에, 세응(世應)의 현손이요 진사였다라고 입전하였다. ≪수당유고(睡堂遺稿)≫에는 시(詩)?부(賦)?책(策) 각 1편과 소지(所志) 7편이 수록되었고 부록에 서(書)?묘갈명(姜信昌 찬) 및 영문록(榮問錄)?소지(所志)?명문(明文) 등 각 1편이 수록되었다. 앞의 소지(所志) 7편은 수당(睡堂)이 선고의 묘소와 6대조(휘?절, ?)의 산소를 보전하기 위하여 성주(城主?목사)?관찰사?정부상공(政府相公)?순무사(巡撫使) 등에게 진정(陳情)한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 효우가(孝友家)의 가풍을 엿보게 하였다. 부(賦) 1편은 32세(1888)에 작성한 과시문으로 짐작(解題 참조)되는, <문왕의 교화가 북에서부터 남에게까지 뻗친 데 대한 부(文王之化自北而南賦)>요, 책(策) 1편은 1892년(고종 29) 정시문과에 응시할 때 자필로 기술한, ‘마음이란 한 몸의 주제로서 모든 일을 알고 모든 이치를 꿰뚫는다(心者一身之主宰而該萬事徹萬理云云)’는 주지를 담은 대책문이나 아쉽게도 등(等)에는 들지 못하였다. 금상(錦上) 강신만(姜信萬?1890~1964)의 자는 득중(得衆)이다. 아버지는 수당(睡堂)이요 어머니는 고령신씨 정모(貞模)의 따님이며, 상주 임곡리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종조부 호촌(皓村)의 훈육을 받아 선비도(道)의 바탕을 닦았으나 조선의 운이 다 하였고, 1911년에는 금산리(錦山里)로 이주하여 금천서당(錦川書堂)을 개설, 후진을 양성한 바도 있다. ≪금상유고(錦上遺稿)≫에는 서(書) 1편과 부록에 선고 금상부군 가장(先考錦上府君家狀 ; 子 永錫 찬)과 묘갈명(姜信昌 찬) 등이 수록되었다. 그 외의 유고는 경인란(庚寅亂, 6.25동란)에 흩어졌다. 별록(別錄)에는, 본 세고에 수록하기 어려운 선대의 유문과 행적을 알 만한 글들로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진산 강공 홍윤묘표(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晋山 姜公 弘胤墓表)>를 위시하여 <효행천거문>, <경차범월운(敬次泛月韻)> 등 18제(題)를 수록하였다.
2. 세고(世稿)의 특징과 가치 ≪뇌암세고≫의 특징을 살피기 전에 세고 편찬에의 어려웠던 점을 <해제(解題)>를 통하여 보면, “본서가 낱장이거나 권자본(卷子本) 또는 체재(體裁)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미정고본(未定稿本)인데다, 그 중에는 난해(難解)한 초서(草書)와 고체(古體)로 된 장편의 과시문(科試文) 등이 함께 포함되어 있어 편집과정에서의 배열 문제는 물론, 탈초(脫草) 및 활자화(活字化) 그리고 우리말로 표현하여 소개하는데도 어려움이 매우 많았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본 세고의 특징을 지적하여, “첫째, 뇌암공 일가의 남다른 독특한 행적(行蹟)이 잠재(潛在)해 있음은 물론, 별록(別錄)을 제외하고서도 한 집안에서 6세(世)의 자료(資料)가 함께 전래(傳來)되고 한 데 종합(綜合)되어 문장가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고 있다. 둘째, 조선시대 정조대(正祖代)에서 고종대(高宗代)에 이르기까지 한 집안에서 연 6세에 걸친 명신(名臣)과 학자들의 희귀한 자필본(自筆本) 필적(筆蹟)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문치시대(文治時代)의 고풍(古風)을 감상(鑑賞)할 수 있다. 셋째, 본 자료에서 느낄 수 있듯, 명문(名門)의 체통(體統)을 지키고자 하는 후예(後裔)다운 선조들의 끈질긴 자부심(自負心)과 이를 토대로 하여 당시의 풍속(風俗) 또는 생활상(生活相)을 엿볼 수 있다.” 라고 하였다. 필자는 ≪뇌암세고≫의 <서문>에서 본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첫째, 6세(世)에 걸쳐 끊이지 않고 문한(文翰)이 이어져 대대(代代) 문장(文章)의 가성(家聲)을 드높이고 절의가(節義家)의 후예답게 효제(孝悌) 우직(友直)의 가업(家業)을 지켜 상주사(尙州史)에 인물을 더하였다. 둘째, 문이재도관(文以載道觀)에 입각하여 제작한 부(賦)?소(疏)?책문(策文) 등에는 각 시대상(時代相)이 반영되니, 우수한 작품이 많아 문학연구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셋째, 숭조상문(崇祖尙門)에의 효사상(孝思想)으로 점철된 각종의 소지(所志)나 통문(通文), 관료사회의 풍습을 엿보게 한 명경과(明經科) 과시문, 7사(七事), 영문록(榮問錄), 성균관 수학시 물품구매 내역을 기록한 물목기(物目記) 등이 당대는 예상사(例常事)였을지라도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그 하나하나가 관련분야 연구에는 구하기 어려운 자료적 가치가 있다. 한 마디로, ≪뇌암세고≫가 비록 양적으로는 많지 않으나 질적으로는 높은 가치를 지닌 세고로 상주문학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리라 믿는다. 이울러, 세고(世稿)의 격(格)을 갖추고, 한글세대에게까지 그 진가를 바로 깨닫게 해 준 편집과 해제, 국역에 참여하신 분들의 노고와 필생의 사업으로 ≪뇌암세고≫를 간행?탄생시킨 6대손의 성심도 본 세고에 숨은 가치성이라 할 만하다. 이에, 연 6세(世) 유문(遺文)의 특장에 대하여 요약한 국역인(國譯人)의 말을 끝에 놓아 이 항의 결론을 삼도록 한다. “그 유려(流麗)한 문장력과 해박(該博)한 지식과 조리있는 논리는 학문의 깊이가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不可能)한 것으로 읽는 자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일반적으로는 한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한 두 사람이 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연 6세(世)에 걸쳐 훌륭한 인물이 계속하여 배출(輩出)되었다는 것은 매우 존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Ⅲ. 뇌암(磊庵)의 시문고(詩文考) 1. 가계(家系)와 학문 뇌암(磊庵) 강세응(姜世鷹?1746~1821)의 자(字)는 양노(揚老)요 뇌암은 그 호다. 10대조 대사간 형(?)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연산조에 입절(立節)하여 아들 별제 영숙(永叔?尙州始居) 3형제도 한 날 참화를 입음으로써 절의 숭상의 가풍(家風)이 대대로 전승되었다. 별제공의 뒤로 진사(進士) 택(澤), 사용(司勇) 사익(士翼), 찬(纘)으로 이어졌고 5대조 증 좌승지(贈左承旨) 홍윤(弘胤)은 상주 봉대(鳳臺) 시거조(始居祖)며 고조는 명(王名), 증조는 석사(碩師), 조는 절(?)로 다 유업(儒業)을 계승하였다. 아버지는 효자로 문명(文名)이 높았던 인재(仁齋) 필옥(必玉)이요 어머니는 남양홍(洪)씨 통덕랑 순(洵)의 따님이며, 뇌암은 상주 낙양에서 태어났다. 절의 숭상의 가풍에서 처세의 근본 정신을 함양하고 경학(經學)을 바탕으로 한 문장을 익혀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실만으로도 뇌암가(磊庵家)의 가학(家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하겠거니와 사우(師友)의 깊은 영향도 입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뇌암에게는 행장(行狀)이나 연보(年譜)가 없고 묘갈명도 근자(1983)에 지어져 뇌암의 학문 형성이나 그 구체적 경향을 밝히지 못함이 아쉽다.
2. 행적(行蹟) 뇌암의 행적을 알 만한 자료도 족보를 비롯하여 상소문, 묘갈명 등에 불과하다. 각 벼슬의 시기 전후도 정확치 못함을 미리 밝혀 둔다. 뇌암은, 1780년(정조4) 3월 식년문과(式年文科)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으로 벼슬길 올라, 1788년(정조12) 정월에서 1808년(순조8) 6월에 이르기까지 내직(內職)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사헌부 지평(持平), 경모궁령(景慕宮令), 종묘령(宗廟令), 이조좌랑(吏曹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성환 찰방(成歡 察訪)과 경성도호부 판관(鏡城都護府 判官) 등을 역임하였는데 경성판관으로 전직된 것은 당시의 정승이었던 채제공(蔡濟恭)에게 거슬림을 받은 때문이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는데 비록 동당(同黨)일지라도 정사(政事)가 정도에 맞지 않으면 그 그릇됨을 지적하였기 때문이었다. 뇌암이 종묘령(宗廟令)이 되었을 때 마침 전배례(展拜禮)가 있어 임금의 수레가 작은 문으로 납시려 하자 즉시 문을 가로막고 간하기를,
“전배(展拜)의 예(禮)란 문로(門路)의 출입이 막중하오니 원하옵건대 정문(正門)으로 드시옵소서” 라고 하였던 바, 다음 날 사간원으로부터 탄핵(彈劾)이 있었다. 그러나, 정조(正祖)는 원칙을 고수하는 뇌암을 두둔하여,
“옛날에는 등혼(鄧渾)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강세응(姜世鷹)이 있다.” 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1798년 12월 3일에는 성환찰방(1797년 부임)으로서 당시의 폐단 8조목을 들어 그 폐해를 논하고 구제책을 진언하여 정조로부터 우비(優批)를 얻어 특별히 시행할 것을 허락받았다. 이로써도 뇌암이 민정을 살피는 목민관의 소임을 다하려 했던 사명감과 나아가 신도(臣道)로써 왕도(王道)를 보좌하려 했던 정치관이 투철하고도 신실(信實)하였음도 알 수 있다. 1809년 경성판관시에 올린 8조목의 상소문은 다음 항에서 살피기로 한다. 1795년(정조 19) 8월에서 1821년(순조 21) 6월에 이르기까지 4회에 걸쳐 장령을, 3회에 걸쳐 정언, 지평을 각각 역임하였고 이어 사간(司諫)과 용양위 부사직(龍?衛副司直)을 역임하였는데, 직언(直言)으로 조야에 명성이 났다. “또한 노론(老論)의 벽파(僻派) 류성한(柳星漢)의 상소에 정조가 경연(經筵)을 폐기하고 예악(禮樂)을 즐긴다고 하는 무고(誣告)가 원인이 되어 1792년 4월 27일 10,057인의 서명을 받은 영남 유생들의 사도세자(思悼世子) 신원(伸寃) 만인소(萬人疏)에 종형 세로(世魯)와 함께 참가하였으며, 특히 뇌암은 평생동안 처신(處身)과 접물(接物)에 있어 털끝만큼도 겉치레나 가식(假飾)이 없었고 명리(名利)나 사욕(私慾)에 뜻을 두지 않음으로써 진신(搢紳)들이 그 의리를 가상(嘉尙)하고, 장보(章甫)들이 그 교화(敎化)를 칭송하여 집안간이거나 사림(士林)에 이르기까지 풍문(風聞)을 듣고 존모(尊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정조(正祖)의 특별한 신임으로 대관(大官)의 물망에 올랐으나, 직언(直言)이 용납되지 못하던 정치 풍토에서 큰 뜻을 펼칠 기회는 얻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뇌암은, 절의가(節義家)의 후예로서 선비의 자존(自尊)에 일호의 부끄러움 없는 의리를 실현하였고, 문장가(文章家)의 후예로서도 길이 가치있는 시문(詩文)을 한문학사(漢文學史)에 남긴 선비였다고 하겠다.
3. 시문고(詩文考) 이 항에서는 시(詩)와 부(賦)와 소(疏)만 살피기로 한다.
1) 시(詩) 먼저 입춘일에 쓴 시, <입춘시(立春詩)> 陰從何處去 음(陰)은 어디로 가고, 陽從何處來 양(陽)은 어디서 오는 걸까. 分陰分陽處 음이 갈리고 양이 갈린 곳에서, 一縷添一縷 하루에 또 다시 하루가 더해지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기점의 입춘일을 맞아, 뇌암은 설리적(說理的)인 시 한 수를 창작하였다. 표면적으로는, 겨울철이 가고 봄철로 접어들었음을 노래하였으나 이 면적으로는 염계(濂溪) 주돈이(周敦?)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원용하여, 음(陰?겨울)이 극(極)에 이르러 물러나고 양(陽?봄)이 되돌아 온 현상을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로 표현하고, 나아가 음(陰)으로 나뉘고 양(陽)으로 나뉘는 교차점(轉句?제3구)을 입춘일에 확인함으로써 하루?한 달?한 해가 무궁히 반복되는 자연의 이치(結句?제4구)를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설리적(說理的)인 시가 범하기 쉬운 예술적인 미감(美感)을, 입춘일을 통하여 만상(萬像)의 존재 이면에 내재한 이치(理)를 깨닫게 한 발견에의 기쁨으로 대신해 놓았다고 하겠다. 다음은, 선비 본연의 자세 일단을 엿보게 한 삼백재(三白齋)에 차운(次韻)하다라는 <차삼백재운(次三白齋韻)>의 두 수 중 제2수를 살피기로 한다.
敗楫曾回漢水陽 낡은 배를 저어 한강 북쪽을 돌아오니, 殘春梅月照寒墻 늦봄의 매화와 달이 씁쓸한 담장을 비추네. 三盃酒興思?渴 석 잔 술의 흥취에 목마름 달랠 생각이지만, 半架詩書不待凉 시렁 위 서책은 시원한 때를 기다리지 않네. 卷裡瓢空猶坦坦 누항의 표주박 비었으나 마음은 편안하고, 雨餘屋漏任床床 비만 오면 지붕이 새어 자리마다 축축하네. 可憐白首靑氈業 가련토다 청전의 가업을 이은 늙은 몸, 獨守殘年四友房 남은 생애 홀로 문방사우를 벗하네.
기구(起句 ; 1?2구)는, 오랜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공간적 배경)으로 늦봄(시간적 배경)에 돌아온 사실로 시상(詩想)을 일으키고, 승구(承句 ; 3?4구)에서는 귀향했다 하여 공간적?시간적 제한에서 완전 벗어날 수 없는 심정을 읊었다. 벼슬길에서의 ‘목마름’을 석 잔 술로 달래고, 다시 선비의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릴 수 없음은 등하가친(燈下可親)의 가을을 기다려주지 않는 시렁 위의 서책이 있다고 기(起)의 상(想)을 잇고 점층시키었다. 전구(轉句 ; 5?6구)에서는 표주박이 비어도 마음 동요치 않고, 살 집조차 구차하여도 역시 감내할 수 있음을 노래하여 시상(詩想)을 일변시켜 결구(結句 ; 7?8구)의 주제 의식을 드러내었다. 곧, 늙으막에 귀향하여서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일은 대대로 이어받은 가업(家業)을 다시 전승시키는 일이기에 혼자라도 문방사우(文房四友)와 벗하지 않을 수 없음을 노래하였다. 학문을 은유한 문방사우와 벗하는 궁극적 목적이 가업의 이음과 내림에 있음을 노래하여, 절의 숭상(節義崇尙)의 가풍과 유업(儒業) 전승의 가학(家學)이 곧 가업(家業)의 근본임을 전편에 은밀히 우의(寓意)해 놓았다. 이 시는, 선비가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자수(自修)함에 그 정신은 한결같음을 보인 시로, 담담한 표현 너머에 선비의 지난(至難)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펼쳐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무기교(舞技巧)의 기교미(技巧美)를 보인 시라 하겠다. 다음은 병자호란(1636)에 순국한 충신을 읊은 시를 보도록 한다. 제목은, <마침 언양에 머물면서 삼가 정공의 순의 유시에 화답한 시첩에 차운한다.(適留彦陽 謹次 鄭公殉義遺詩和帖)>이다.
唾乎獻陽赴難時 헌양에서 용기내어 호란(胡亂)에 나아갈 제, 鄭公遺計不堪悲 정공의 남긴 계책(計策) 몹시도 슬프다네. 身蹈白刃憂生免 흰 칼날 밟고 죽으니 삶의 근심 면하고, 墨濕靑篇惜死遲 청사(靑史)의 붓글씨 쓰니 애석한 죽음 드디구나. 千古留名經亂識 천고토록 남긴 이름 난리 뒤에 알겠고, 九重?節聖朝爲 구중궁궐 절의(節義) 장려 성조(聖朝)에서 하였네. 榮光及裔令人感 자손에게 끼친 영광 사람 마음 감동케 하니, 罔極天恩不負期 그지없는 임금 은혜 저버리지 않으리.
기구(起句 ; 1?2구)는, 병자호란을 만나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전장에 나아갈 때의 심회를 읊은 시의(詩意)가 비창(悲壯)하였음을 환기시키고 승구(承句 ; 3?4구)에서는 구차한 삶보다는 떳떳한 죽음을 택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함으로써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충신이 되었음을 더욱 부각시키었다. 나아가 시상(詩想)의 전환을 꾀한 전구(轉句 ; 5?6구)에서는,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松栢)의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듯, 죽음을 각 싫어하는 전란을 겪고 난 뒤에라야 천고에 남을 순의인(殉義人)의 참삶을 이룩한 충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음과, 충신의 절의를 나라에서도 높이 천양한 사실을 특기함으로써 죽을 자리에서 죽음이 곧 영원한 삶임을 정점으로 삼아 놓았다. 그러기에, 결구(結句 ; 7?8구)의 주제 의식은 정충신(鄭忠臣)의 충혼(忠魂)은, 자손들에게만 만대의 감화 요소가 될 뿐만 아니라 충신을 기리는 모든 이들에게도 나라 위한 참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감화의 핵(核)이 될 것임을 노래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시로써도 뇌암(磊庵)이 선비의 덕목으로서 양선(揚善)함에 솔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善)을 택하여 굳게 지킴으로써 성실(誠實)한 천도(天道)에 가까워짐을 인격수양의 궁극으로 삼아 성실히 하려 한 자(誠之者)가 곧 뇌암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상에서 살핀 세 수의 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다. 설리적(說理的)인 시로써 현상 너머에 내재한 자연의 무궁한 운행 이치를 깨닫게 하여, 시로써 재발견에의 기쁨을 선사하였다. 선비의 삶은 벼슬길에서나 물러나 초야에 있을 때나 본질적으로 한결같아야 함을 노래하되, 무기교(無技巧)가 기교임을 실증물로 보여 주었다. 또한, 구차한 삶보다는 떳떳한 죽음을 택한 충신을 천양함으로써 참삶이 무엇인지를 노래로 일깨우려 하였다. 뇌암에게 시편이 많지 않으나 세 수를 통하여서도 뇌암의 시재(詩才)나 제재(題材)?주제(主題)의 선정 등에의 넓이와 깊이을 가늠할 수도 있겠다 하겠다.
2) 부(賦) 부(賦)란, 일(事)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거리낌없이 바로 말하는 표현 방법으로 ≪시경(詩經)≫ 육의(六義)의 하나이던 것이 문체(文體)로 굳어진 글이다. ≪뇌암유고≫에는 세 편의 부가 수록되었는데, 먼저 <택토부(宅土賦)>부터 개관하도록 한다. 이 부(賦)는, 과거에 응시한 글로 중국 하(夏)나라 우(禹) 임금이 9년 동안의 홍수로 백성들이 살 수 없게 된 것을 8년 동안 물길을 잘 다스려 9주(州)를 삶터(낮은 땅에다 집을 지음)로 만든 공적을 찬양한 글을 제재(題材)로 하여 6언(言) 56구로 제작한 글이다. 이에, 이 부(賦)의 내용을 3단으로 대분하여 간략히 살피기로 한다. 서사(序辭?1~8구), 순(舜) 임금의 명을 받은 우(禹) 임금이 치수(治水)하여 전 국토를 상(上)?중(中)?하(下) 세 등급의 토양(三壤)으로 나누어 백성들에게 삶터를 마련해 준 공덕을 전제하였다. 본사(本辭?9~40구)는, 8년 치수(治水)로 9년 만에 기주(冀州)?청주(靑州)?형주(刑州)?양주(揚州)?연주(?州)?양주(梁州)?옹주(雍州) 등의 구주(九州)에 홍수의 근심이 사라져 인간 생활의 3대 요소인 의(衣)?식(食)?주(住)가 안정되고, 교화는 이민족에게까지 미치어 그 공은 산천 초목에까지도 미치게 된 사실을 서술하였다. 이같은 공덕의 이면에는 오로지 백성과 함께 하려는 우(禹) 임금의 멸사봉공(滅私奉公)한 성덕(聖德)이 있었음을,
“아들인 계(啓)가 앙앙 울어도 돌봐주지 못하고 / 분주히 토목공사에만 전념하였네 / 사재(四載)를 타고 산맥을 따라 나무를 베었으니 / 하천을 터놓는 일을 어찌 게을리 할 수 있으랴 / 물길을 따라 순리대로 다스리니 / 구년(九年)이 걸려서 다 평정이 되었네 / 저 기주(冀州)와 청주(靑州)를 바라보니 모두 평정되었고 / 형주(荊州)와 양주(揚州)를 둘러보아도 업적을 이루었네 / 교화가 이미 모든 오랑캐까지 이르렀고 / 그 공이 초목에도 이르렀네.”
라고 서술하였다. 우(禹) 임금이 성군(聖君)으로 칭송되고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된 사실을 뇌암은, “물길을 따라 순서대로 다스리니(循其道而順治)”란 말 속에 다 응축시켜 놓았다. 우(禹) 임금의 치수(治水)와 교화(敎化)의 공덕을 치하는 속에 뇌암이 당시 임금에게 염원한 바가 무엇인지는 저절로 함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사(結辭?41~56구)는, 인간 삶의 3대 요소인 의(衣)?식(食)?주(住)의 근본을 마련해 준 우(禹) 임금의 치수(治水) 공덕을 재삼 부각시키었다. 아울러, 우(禹) 임금이 보여준 치도(治道)의 근본을,
“그 많은 구주(九州)의 땅에 / 모든 지역 결함없이 잘 다스려졌네 / 가장 저지대(低地帶)인 연주 백성까지도 / 낮은 지대까지 다 드러나 살 수 있게 되었네”
라고 표현하였다. 겉으로는, 가장 피해가 심각한 저지대인 연주까지도 치수의 공덕을 입었음을 서술하여 구주(九州)의 모든 땅이 결함없이 잘 다스려졌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같은 말의 이면에는 뇌암이 추구하고 염원하는 왕도정치에의 이상(理想)을 함축시키었으니, 홍수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던 ‘저지대인 연주 지방의, 낮은 지대까지 다 드러나 살 수 있는 땅’으로 변하였다고 한 데에서 독자는 작자의 속뜻을 감지할 수 있다 하겠다. 이 부(賦)는, 뇌암(磊庵)이 우(禹) 임금의 치수(治水) 공덕을 천양한 가운데 은밀히 자신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에의 염원을 우의(寓意)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서민유성부(庶民惟星賦)>를 살펴 본다. 이 부(賦)는, 1780년 식년문과 급제 때의 작으로 생각되며, 서민유성(庶民惟星)이란 뭇 백성들이 밤 하늘에 떠 있는 별이나 다름 없다는 말로, 인민이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마치 별들이 하늘에 부착해 활동하는 것과 같다는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의 “서민유성(庶民惟星)”에서 온 말이다. <홍범> 아홉 조목(九疇) 중 여덟째는 ‘여러가지 징험을 생각하며 쓰는 것(念用庶徵)’으로, 서징(庶徵)은 곧 비올 때, 가물 때, 더울 때, 추울 때, 바람이 불 때 등 자연 현상에 선악의 징조가 나타나는 것을 관찰하여 길흉(吉凶)을 살피듯이, 왕은 지상에 살아가는 백성도 별과 같은 것(庶民惟星)임을 알아 그들의 삶 역시 각기 실정에 맞게 살게 함이 중요한 것임을 설(說)한 것이다. 이 부(賦)는, 6언 60구이니 그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서사(序辭?1~8구)는, 땅에 사는 백성들이 하늘에 있는 별과 같음은, 별들이 북신(北辰?북극성)을 향하듯 백성들이 임금(北辰)을 향함에는 같은 이치라 하였다. 나아가, 백성이 하늘에 있는 별과 같다 한 것은 홍범구주(洪範九疇)였다고 하였다. 본사(本辭?9~44구)는, 임금이 나라 다스리는 준책(皇極)을 세워 역조창생의 마음이 갖가지로 다름을 살피되, 위로 하늘의 별 중에는 필성(畢星)의 빛을 관찰하여서는 큰 비를 예상하고 기성(箕星)의 모양을 살펴서는 큰 바람을 예상하듯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하늘의 별을 관찰하여 아름다운 징후(휴징?休徵)와 나쁜 징후(구징?咎徵)을 징험(徵驗)하듯, 땅의 백성들 민심의 지향(志向)하는 향배(向背)를 살펴 휴징(休徵)과 구징(咎徵)을 징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임금은 위에 있으며 아래에 임하여 / 백성의 덕을 보고 도움을 베푸네 / 천만인(千萬人)의 같지 않음을 바로잡으면 / 삼삼오오 찬란해짐을 보게 되리 / 한 해와 한 달 단위로 높고 낮은 이를 살피되 / 별자리(星辰)의 형상으로 이를 관찰하네 / 백성들은 땅에서 많이 모여 살고 / 별들은 하늘에서 하나하나 밝게 빛나네 / 백성을 관찰하여 터득함이 있으면 / 별이 아닌 것으로도 별을 이해한다네”
이 말은, 왕도(王道)와 천도(天道)가 같은 이치에 있음을 서술한 것이다. 끝 구(句)는 곧, 만상의 형상 뒤에는 그같은 형상을 짓는 이치가 있음을 알면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징험(徵驗)이다. 별은 꼭 별을 통해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한 말은, 또한 백성은 꼭 백성을 통해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서민유성(庶民惟星)’의 본지를 묘하게 표현한 것이라도도 하겠다. 결사(結辭?45~60구)는, 홍범(洪範)의 가르침을 잘 연구하면 뭇 징후(徵候)를 경험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하여,
“천상(天象)은 높은 은하(銀河)에서 잘 드러나고 / 민이(民彛)는 아래에 사는 백성과 동등한 것이네 / 헤아릴 수 없는 백성들의 마음의 반응은 / 별자리의 현상을 검토하면 쉽게 할 수 있네 / 아래에 있으면서도 위의 것과 부합하니 / 그 현상을 강구해 보면 위나 아래가 한 이치네
라고 하였다. 이같은 이치를 알게 한 소중한 글이 홍범구주(洪範九疇)임을 재차 강조하여 글을 맺았다. 이로써도 뇌암(磊庵)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으니, 임금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백성들과 한 이치상에서 살 때에만 왕도정치는 그 실효를 거둘 수 있음을 우의적(寓意的)으로 직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핀 <택토부(宅土賦)>에 담은 정치사상과 같음을 확인할 수 있어, 뇌암의 선비 철학이 얼마나 확고했던지를 거듭 알 수 있다 하겠다. 끝으로 <구월재호부(九月在戶賦)>를 살피도록 한다. 이 부(賦) 역시 과거에 응시한 글로 6언 60구이다. <빈풍 7월>편은, 주(周) 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즉위하였으나 어려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주공단(周公旦)이 총재(?宰)로서 섭정하면서 주(周)의 시조요 순(舜) 임금 때 농관(農官)이었던 후직(后稷)과 그의 증손 공유(公劉)의 선정과 교화를 서술하여 시 한 편을 지어 성왕을 경계한 시다. 이 부(賦)의 내용을 개괄한다. 서사(序辭?1~10구)는, 철을 따라 거처를 달리하는 귀뚜라미같은 미충(微蟲)에게서 계절의 변화를 징험(徵驗)하여 그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함을 은유하였다. 본사(本辭?11~48구)는, 귀뚜라미가 더우면 들에서 지내다가 추위가 오면 사람이 사는 집을 의지하여 들어옴을 서술하여 계절에 맞게 대처해야 함을 우의하였다. 본사의 끝 구절에서,
“창문에서 찌르륵 찌르륵 우는 때는 / 바로 추위가 시작되는 구월이네 / 절기가 서로 바뀜으로 인하여 / 우둔한 동물도 절기 따라 옮기네”
라고 하였다. 5월에는 사종(斯?)으로 들에서 다리를 떨며 울고, 6월에는 사계(斯?)로서 깃을 떨며 울다가 9월이 되면 따뜻한 사람의 집을 의지해 창문으로 들고, 10월이면 실솔(??)로서 상(牀) 아래로 듦을 통하여 절기의 바뀜을 아는데 사람이 우둔한 귀뚜라미만도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반문의 여운을 남기었다. 위로는 왕정(王政)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절후 따라 대처해 가듯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인 자세로 적응해 감이 중요하다는 경계심은 언외(言外)에 우의하였다 하겠다. 결사(結辭?49~60구)는, 백성들은 교화 따라 집으로 들고 귀뚜라미는 절기에 맞는 세 이름(사종?사계?실솔)을 얻을 정로 자연 환경에 순응하여, 9월이면 사람도 귀뚜라미도 월동 준비에 듦을 서술하였다. 뇌암은 끝 두 구절에서,
“아름다운 소리는 사물을 읊조리는 듯 / 토고(土鼓)에 화답하며 편안하게 있는 듯 / 천 년 이후인 오늘까지도 / 그 곤충은 곧 출입문 안에 있네”
라고 글을 맺었다. ‘사물을 읊조림(?物)’은 곧 사물의 이치를 읊조림이요, ‘토고에 화답함(和土鼓)’은 곧 때와 자리를 알맞게 얻은 즐거움이며, 끝 두 구(句)는 곧 하찮은 미물(귀뚜라미)은 천년이 지나도 자연의 이치에 순응할 줄 앎을 은유한 것이라 하겠다. 이 부(賦) 역시,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환경의 변화(자연의 이치)에 어긋남없는 슬기로운 삶을 영위할 줄 알아야 함을 귀뚜라미의 행동을 통해 은밀히 경계하였다고 하겠다. 부(賦) 세 편이 다 주어진 제하(題下)에 작자의 평소 포부와 이상을 우의(寓意)한 것이라 하겠다. <택토부(宅土賦)>로서는 인간 삶의 삼대 요소인 의(衣)?식(食)?주(住)의 근본책을 마련해 준 우(禹) 임금의 공덕을 찬양하고, <서민유성부(庶民惟星賦)>로서는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제8 서징(庶徵)을 통하여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이치가 한 궤도임을 깨달음이 중함을 강조하였으며, <구월재호부(九月在戶賦)>로서는 위로 왕으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환경의 변화(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이 슬기로움임을 일깨우려 하였다. 요약하면, 세 편이 다 뇌암(磊庵)이 평소 추구하였던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에의 세 모습을 제시한 부(賦)라고 할 수 있겠다.
3) 소(疏) 뇌암은 상소문으로 성환 찰방(成歡察訪) 때와 경서도호부 판관(鏡城都護府判官) 때에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구제책을 건의한 구폐소(救弊疏) 두 편이 있다. 필자는 역참(驛站) 제도나 북방 군정(軍政)에 소양이 부족하여 각 상소마다 뇌암이 지적한 폐단의 큰 조항을 일별하고 특기할 만한 작자의 시론(時論)을 개괄하도록 한다.
<구폐소(救弊疏; 成歡察訪)> 서사(序辭)는, 성환 찰방이 된 이듬 해(1798. 12. 3. 정조 22)에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성환역이 안고 있는 폐단의 조목을 들고 그 구제책을 상주(上奏)한 것이다. 먼저 역참(驛站)의 중요성을 전조 왕(영조)의 유지(諭旨)를 인용하여,
“나라에서 팔도에 각 역을 설치하는 것은 마치 사람 몸에 혈맥이 있는 것과 같아서, 혈맥이 통하지 않으면 사람이 죽게 되고, 완급(緩急)의 호령(號令)이 행해지지 않으면 나라의 맥도 끊어진다.”
는 사실을 특기하고, 성환(成歡?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역이 북으로 경기, 동으로 영남, 남으로 호남과 통하는 직로(直路)로 수백 리에 뻗어있어 사역(使役)의 번거로움과 이졸(吏卒)들의 고달픔이 다른 역보다 몇 곱절인데도 전혀 폐단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전제하였다. 그 원인은, 왕의 명령이나 법령(경국대전經國大典?대전속록大典續錄?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의 제도가 시행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고 나아가 뇌암은, 자신이 상소하는 근본 취지는 완전 구비된 옛 제도를 회복함에 있음을 밝히었다. 본사(本辭)는, 성환역참(成歡驛站)이 안고 있는 심각한 폐단 8조목을 들어 그 구제책을 진언(陳言)하였다. 첫째, 마정(馬政)에 대해 엄격한 조항을 세워야 한다. 한 폐단의 예로 관원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의 등급제가 문란해졌음을 지적하여,
“조정에서 역참을 설치하고 말을 준비할 때, 3등급으로 구분하여 그 벼슬의 고하에 따라 타게 하였습니다. 처음 이 제도를 정할 때에는 임금의 명을 받든 당상관이 아니면, 감히 삼등마(三等馬)를 탈 수가 없었으니 법의 취지가 매우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아래로 당하관과 감영(監營)?병영(兵營)의 비장(裨將)에 이르기까지 모두 상등마를 타려고 하니, 기강이 한심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아가 구제책은, 급마(及馬)의 규정과 법령이나 규정을 어기고 역마를 함부로 탐(남기濫騎)을 엄격히 금하는 시행을 실시해야 함을 들었다. 둘째, 역속(驛屬)을 양역(良役)에 편입시키는 폐단 역에 딸린 역리(驛吏)?역졸(驛卒) 등의 역속(驛屬?驛入)들을 양인(良人)이 지는 부역에 함부로 편입시키는 폐단은 국법으로 금하고 왕조차 그 금지를 엄히 하교하였는데도 수령들이 조정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않음을,
“역로(驛路)를 마치 군더더기처럼 쓸모없다고 여겨, 한결같이 역속들을 양역(良役)에 편입시키면서 마치 기이한 재화를 얻은 듯이 단단히 지키며 변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개선토록 하는 공문을 보내어도 귓전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여길 뿐만 아니라, 한 가지도 시행하지 아니하여 서로 공경해야 하는 도리를 잃어서 장차 역속들을 모두 군정(軍丁)으로 삼으려 하니, 결국 역로(驛路)는 공허하게 될 것입니다.”
라 하여, 마치 역속을 양민의 장정 대용으로 여겨 역참 제도의 근본이 파괴됨을 고발하였다. 나아가 뇌암은,
“오직 저 군읍(郡邑?수령)들은 다만 양민의 장정(良丁)을 구하기 어려운 것만 알고 역참을 두는 본뜻을 생각지 않아, 반드시 자신에게 더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니, 이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여, 스스로 혈맥(血脈)을 끊는 어리석음을 엄히 고발하고 폐단을 짓는 죄과에 따르는 처벌의 사목(事目)을 시급히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복호(復戶)를 줄여서는 안 되는 일 복호(復戶)는 역졸들의 생계 수단으로 명(命)을 전달하는 일의 바탕인데도, 신축년(1781)에 경기 지역 밖에 있는 각 역의 복호를 줄여 경기 지역으로 옮겨 지급하라는 명이 있어, “본도(本道)의 각 역(驛) 중에 직로(直路)로 가장 긴급하고 중요하게 명을 전하는 곳으로는 성환(成歡)만한 곳이 없고, 또 본도의 역참을 통털어 가장 피폐하고 열악한 곳도 성환만한 곳이 없으니, 조정에서 배려하는 다스림이 다른 역보다 나아야 하는데도, 도리어 다른 역에 미치지 못하니 참으로 의아한 일입니다.”라고, 역참 운영의 허실을 폭로하였다. 한 예로, 본도(本道) 외 다른 역들과의 복호의 토지 면적 단위(結)를 비교하였는데 금정(金井)과 연원(連源)은 1천 2백 70결(結)이요 율봉(栗峰)은 1천 2백 60결이나 성환(成歡)은 1천 2백결에 불과하다 하였다. 나아가, 임자년(1792)에 찰방(李挺龍)과 관찰사가 먼 계책으로 역참 운영을 위한 토지(位土)를 매입하여 5년이 지나면 세금을 면제받을 조치를 취하였는데도 7년이 지나도 세금을 내야 하는 등의 부조리한 현황을 뇌암은,
“약간의 위토(位土)를 구입한 것은 흡사 벌겋게 달아오른 솥에 물방울을 뿌리는 것과 같고, 복호(復戶)의 결(結)을 줄이는 것은 입속에 있는 물건을 빼앗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라고 하여, 역참(驛站)의 피폐가 크게는 위정자(爲政者)들의 현실을 무시한 탁상 공론(空論)의 결과물임을 신랄하게 풍자 고발하였다. 넷째, 역보인의 수를 더하고, 이를 규정으로 정하여 배정하는 일 역보인(驛保人)은 주졸(走卒)들의 의복을 마련하는 바탕이 되는 자들로 보인을 배정하는 규정은 직로(直路)의 경우는 3인, 벽로(僻路)인 경우는 2인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갑진년(1784)에 제도를 변경하였으나 그 시행의 실효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역참의 부역을 돕게할 목적으로 일수(日守)를 배정하였으나 역참 이외의 부역에 동원되어 보인과 일수가 항상 부족함을,
“근래 각 고을에서 모자라는 인원을 보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대대로 이어온 역역(驛役)들도 군역(軍役)으로 빼앗아 가니, 이는 매우 조정의 명을 받들어 국사(國事)를 수행하려는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라고 하여, 역참의 존재 가치를 망각하고 역속(驛屬)의 존재를 천시하여 국사(國事)를 바로 닦으려는 국정에 위배되는 큰 과오를 범함을 비판하였다. 그러기에 뇌암은, 역보인(驛保人)이나 역일수(驛日守) 등의 역속(驛屬)의 충당만이 역참 기능의 실효를 거둘 수 있고, 또한 폐단을 제거하는 첩경임을 주장하였다. 다섯째, 위토(位土)를 측량하여 다시 역참에 귀속시키는 일 역참의 성쇠는 그 운영을 위한 토지 곧 위토(位土)와 직결되는데 성환역(成歡驛)의 위전(位田)은 모두 돌이 많고 메마른데다, 여러 차례 홍수로 모래에 덮인 것이 열에 아홉이며 민전(民田)으로 전용된 것이 많은 까닭에,
“대마(大馬)위 위토로 말하면 명목상으로는 7결(結)이지만 실제로는 3에서 4결에 불과하며, 기복마(騎卜馬 ; 짐을 싣는 말)의 위토는 명목상으로는 4에서 5결이지만 실제로는 2에서 3결에 불과하니, 백성들이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말들이 어찌 노둔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위토를 가지고 좋은 말을 갖추도록 질책한다면, 거북이 등에서 털을 깎고 메마른 우물에서 물을 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마호(馬戶)가 계속 도망가더라도 이들을 다시 모을 대책이 없는 것은 진실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라고, 시폐(時弊)의 요인을 밝힘에 위언(危言)조차 서슴지 않은 강직성을 엿보게 하였다. 이같은 일은, 의리숭상의 가풍에서 자라 선비정신의 발현에 용감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나아가 구제책은, 역에 딸린 위토가 다른 데 전용된 것을 찾아 원대로 귀속시키되 특히 토호(土豪)나 토족(土族)들이 무단으로 점유한 위토는 시급히 환수할 일임을 역설하였다. 여섯째, 환적(還?)의 절반은 남겨 두는 일 뇌암의 다음 말 속에 환곡제도(還穀制度)의 운영의 모순과 병폐는 물론, 그 모순과 병폐를 개선할 방책이 다 들어 있어 이에 역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환곡 제도는 백성들이 삶을 기탁하는 것으로 나라의 근본이 됩니다. (중략) 그런데, 근래 명색(名色)이 분분함이 마치 얽힌 실타래 같아, 관아(官衙)의 다스림이 각기 다르고 대출하고 남기는 조례(條例)도 제각각이어서, 아전들은 이를 이용하여 간악한 짓을 행하니, 백성들은 고스란히 그 폐해를 당하는 것이 진실로 이런 까닭 때문입니다. (중략) 슬프게도 이 역속(驛屬?역인)들은 원래 농사에 힘쓰지 않기에 약간의 복호(復戶)로는 삶을 영위할 수 없고, 오로지 목숨을 보존하는 방법은 이 환곡뿐입니다. 그런데 닥쳐올 수화(水火)의 재앙은 미루어 생각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작은 물방울을 생각하여, 많은 대출에만 급급한 나머지 주는 대로 받아, 많은 자는 수십 석이나 되고 적은 자도 10여 석을 넘습니다. 그러니 비록 풍년이 들었다고 해도 ‘어디서 양식을 빌린다는 말인가.’ 하는 탄식을 하게 되거늘, 하물며 올해처럼 흉년이 든 경우는 어찌 다른 곳으로 떠도는 우환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이러한 이해(利害)가 상반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절반은 대출하고 절반은 남겨두는 법’을 시행하는 데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이 구제책 진언은, 왕의 윤허를 얻어 전국적으로 뇌암의 계책대로 시행되었음은 특기할 만하다 하겠다. 일곱째, 한결같이 법에 의거하여 역로(驛路)의 노비를 추쇄(推刷)하는 일 역로(驛路?驛道)의 노비 역할이 중요하여 노비의 법이 유래된 것이 오래인데도, “신해년(1731) 정령(政令)에 따라 양민(良民)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게 되자, 역노(驛奴)들은 모두 공천(公賤)의 두 글자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온갖 방법으로 면천(免賤)코자 도모” 함에 사대부가 관여되었음은 말로 하지는 않았으나 역노의 범법은 도우는 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임은 암시하였고 나아가, “무릇 역에 관한 모든 일은 역참의 관리들이 맡아 처리할 일인데, 어찌 현읍(縣邑)의 수령이 월조(越俎)하고 침범하여, 마음대로 권세를 행세함이 이처럼 심한지요. 신은 진실로 놀라 탄식할 뿐입니다.”라고 하여, 관리가 국법(國法)을 어기고 있음을 엄히 꾸짖고 비판하였다. 나아가, 이같은 폐단의 구제책을 헌책(獻策)하여,
“신은 생각컨대, 한결같이 형지안(刑止案)에 기록된 바에 의거하여, 본 역의 노비 중에 속임수를 써서 명부에서 누락시키거나 세력을 등에 업고 면천(免賤)을 도모한 자들은 모두 추쇄하여 본 역으로 다시 편입시켜 열악한 역참을 다시 일으키고 국전(國典)을 대략이나마 펼 수 있는 터전을 삼는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여덟째, 관대전(官垈田)을 구별하는 일 관아의 터와 그에 딸린 토지를 구별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성환역은 관아만 있고 토지가 없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밝혔으니 곧, 나라에서 관리하는 공공의 토지(공결?公結)는 모두 토호(土豪)와 양반들이 차지하여 경작하고, 혹 역촌(驛村)에 멋대로 무덤을 쓰고, 넓은 전원(田園)을 둔 경우도 있다. 마치 원래부터 저들의 소유인 양 멋대로 사용하면서, “그렇지만 아전들이 살고 있는 터에는 도리어 세금을 매기고 해마다 독촉하여 아전들이 견디기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병들고 힘든 가운데 또 이러한 폐단이 더해지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격분하였다. 위정자는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흡사 자신들의 사욕을 펼치도록 존재하는 양 여기는 현실, 암울한 이 현실의 단면을 성환역의 안은 현실을 통하여 속속들이 보여주었다. 나아가, 구제책은 정해진 법대로 측량하여 본 대로 돌리게 하고, 세금 내는 고통을 덜게 해 줌에 있다고 하였다. 결사(結辭)는, 이상의 8조목의 폐단을 구제하는 길은, 폐기된 옛 제도를 되살리는 데 있음을 전제하고 나아가 그 효과에 대하여, “신이 속한 역만이 아니라 8도의 모든 역에서 북치고 춤추게 하는 덕화(德化)에 감화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작은 성환역이 안은 병폐를 치유함이 크게는 나라의 한 병폐를 치유함임을 경각시키려 하였다. 이에, 뇌암의 우국과 애민 정신의 일단을 여실히 보여 준 대목을 인용하여 이 항의 마무리로 삼는다.
“무릇 행차(行次) 때에 남루한 옷차림으로 역마의 앞을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보고는 답답하고 상심하여, 지난 해(필자주?1797년)에 신이 영문(營門)에 논보(論報)하고 각 고을에 이문(移文)을 돌려 세세하게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찰사는 각 관아에 공문으로 내려 보내 채근하지도 않고 여러 고을에서도 이를 거행할 뜻이 없었습니다.”
<위 상소에 대한 정조(正祖)의 비답(批答)>
“상소를 살펴보니 모든 내용이 잘 갖추어져 있었소. 진술한 여덟 가지의 조항은 그대의 억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금석(金石)같이 중요한 상전(常典)에서 누락되어 시행하지 못한 것으로, 나라의 기강(紀綱)으로 볼 때 자못 할 말이 없소. 더구나 지난 해 내린 교지(敎旨)가 지극히 밝고 엄하였는데도, 어찌 감히 한결같이 이를 따라 행하지 않았다는 말이오. 여러 조항에 대해 바로 조정에 명을 내려 좋은 방안을 마련하여 아뢰도록 하였지만, 그 중 환곡(還穀)을 반분(半分)해 달라는 요구는 어려운 일이 아니고, 또 후관(候館)에 필요한 물품을 쌓아두는 것은 우선으로 하여 경사(京司)나 순영(巡營)의 곡식을 논할 것도 없이 특별히 그대의 말을 따랐으며, 지금 이후로 반분(半分)의 일은 모두 상평청(常平廳)에 맡겼소. 대개 역로(驛路)를 설치할 때 관문(關門)의 제도는 어떤 것이겠소. 옛날에는 한 시(市)에 려(廬)를 두고, 10리마다 우정(郵亭)을 두어 그곳에 관문을 설치하여 사명(使命)을 전하였는데, 고족(高足)?중족(中足)?하족(下足)은 우리나라의 세 등급의 역마로, 그대가 말한 폐단이 한결같이 그럴듯하니 어찌 등한시 하여 지나칠 수 있겠소. 이미 이러한 폐단을 들었으니 마땅히 바로잡아 밝힐 것이며, 이러한 과인(寡人)의 뜻을 조정에서도 살펴 잘 알고 있소.”
위 제2문단은, 환곡의 반은 남겨 더욱 급한 일에 대비해야 함을 헌책한 일로, 왕이 직접 뇌암의 건의에 응하여 시행토록 한 사실을 밝힌 대목이다. 찰방(察訪)은 미관이나 이룬 일은 고관(高官)의 일과 동등한 것이었음을 보여주어, 뇌암의 목민관으로서의 경륜 수준을 여실히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구폐소(救弊疏) ; 鏡城都護符判官>
이 상소문은, 뇌암(磊庵)이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함경도 경성도호부 판관 겸 경성진(鏡城鎭) 병마절제도위로 있을 때인 1809년(순조 9) 4월 13일에 올린 상소다. 이에, 서사(序辭)?본사(本辭)?결사(結辭)의 각 단락에서 주요한 사항만 약술하도록 한다. 서사(序辭)는, 1798년 성환역 찰방으로서 8조목의 구폐소를 올린 뒤 불운한 환경에 처한(낙척, 落拓) 10년 만에 경성도호부 판관이 되었음을 먼저 밝히고, 현명한 제왕과 훌륭한 보좌관은 백성을 부릴 수는 있으나 지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함을 전제로 하였다. 경성은 나라의 군사상 요지로서 함경도의 북병영(北兵營)이 있는 도호부(종3품, 도호부사)로서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실책은 어느 지역보다도 심각한 피해를 받는 곳으로, 조적법(??法)의 병폐가 고질적임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나아가 명목상으로는 백성을 돕는 일로 절미(折米)하여 돈으로 만드는 법이 경성민에게는 원망과 비방의 대상이 된 근원을, 본디 경성은 쌀이 넉넉지 못한데다 돈(錢)을 활용하지도 않는 곳임을 들었다. 수 삼십 년 전에 만든 신법(新法)이 구법보다도 못함으로 경성민이 겪는 고통을 미루어 열 고을의 고통을 알 수 있다 하였고, 열 고을의 고통을 미루어 팔도(八道)의 고통을, 팔도의 고통을 미루어 온 나라의 고통을 미루어 알 수 있기에, 경성이안은 시폐(時弊)를 조목을 지어 앙진(仰陳)할 것이오니 정무의 여가에 살피시고 채택?시행하시어, “전하의 마음을 백성들이 사계절처럼 믿게 하시고, 금석(金石)에도 통하게 하시고 돼지(豚)나 물고기까지도 감응이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본사(本辭)는, 경성도호부가 안은 고질적인 병폐로 12조목을 들었다. 먼저 12조목을 열거하고, 이들 중 몇 폐단에 대한 뇌암의 소신과 대책 등을 살피기로 한다. 그 폐단은, 첫째, 환정(還政)의 폐단.(一曰 還政之爲弊) 둘째, 진상(進上)하는 녹용(鹿茸)에 대한 폐단. (二曰 進上鹿茸之弊) 셋째, 대동미(大同米)와 속포(續布)가 부족한 폐단. (三曰 大同續布不足之弊) 넷째, 영문(營門)의 진곡(賑穀)으로 돈을 만드는 폐단. (四曰 營賑穀作錢之弊) 다섯째, 제수(祭需)를 급대(給代)하는 폐단. (五曰 祭需給代之弊) 여섯째, 영문(營門)의 모곡(耗穀)으로 돈을 만드는 폐단. (六曰 營耗作錢之弊) 일곱째, 북쪽 병영(兵營)에서 운영하는 군사(軍士)의 폐단. (七曰 北兵營營軍士之弊) 여덟째, 북쪽 병영(兵營)에서 향선(餉船)을 운영하는 폐단. (八曰 北兵營運餉船之弊) 아홉째, 연해(沿海)지역 민가(民家)의 전결(田結)에 대한 폐단. (九曰 海戶田之弊) 열 번째, 북쪽 병영(兵營)에서 날로 사용하던 땔감의 폐단. (十曰 北兵營日用柴炭之弊) 열한 번째, 북쪽 병영(兵營)에서 각 관아(官衙)를 수시로 헐어내고 수시로 고치는 폐단. (十一曰 北兵營各公?隨毁隨改) 열두 번째, 족보를 위조하여 군역(軍役)을 도피하는 폐단. (十二曰 僞譜謀避之弊) 등이었다. 이들의 폐단은,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실책이 파생시킨 경성의 병폐였을 뿐 아니라, 함경도와 나아가 조선 8도 전역의 폐단이었음을 뇌암은 서사(序辭)에서 먼저 밝혀 놓은 바가 있다. 이에, 뇌암이 주장하고 대책을 우러러 드린 한두 사실만 살피기로 한다. 먼저, 영문(營門)에서 흉년에 대출하고 풍년에 환수하는 곡식인 진곡(賑穀)을 돈(錢)으로 환산하여 내게 하는 폐단(네 번째)에 대하여 뇌암은,
“돈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는 본래 돈으로 시행하지 않은 곳에서 그 환민(還民)으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천 리 밖에서 무납(貿納)토록 했다가 고황(膏?)의 병이 생기게 된다면, 이는 실로 나라에서 함경도 백성을 위하여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한 미봉책의 좋은 의도였으나 결과는 소만 보았지 양은 보지 못한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의 한탄을 면치 못할 것이옵니다.”
이는 곧, 영문(營門)에게는 이로우나 백성에게는 병폐가 됨을 헤아리지 못한 위정의 실책으로,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임을 본질적으로 깨닫지 못한데서 비롯된 결과임을 경각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아홉째인 연해(沿海) 민가의 전결(田結)에 대한 폐단을 지적한 전문을 살피기로 한다.
“해부(海夫)의 전결(田結)이 급복(給復)의 예(例)에 의해 상정(詳定)한 기록이 있으나 명분과 실재가 전연 같지가 않습니다. 의영고(義盈庫)의 다시마(昆布)와 봉상시(奉常寺)의 대구 등 단연히 행해야 할 일이 육지에 사는 백성의 결역(結役)에 비해 몇 배 이상이 되며, 다시마와 대구 등 진상물(進上物)의 수요(需要)는 결단코 해부(海夫)가 아니면 상납(上納)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 바, ‘연해(沿海) 지역 민가(民家)의 전결(田結)은 모두 바닷가 산꼭대기에 있는데, 비록 묵혀서 버려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관례대로 세금을 물게하니 뼈에 사무치는 원망을 사는 것은 면하기 어려운 형편이옵니다. 현재 변통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어선(漁船)의 머릿수에 따라 당연히 바쳐야 할 다시마와 대구 등 진상물의 수요는 해전(海田) 결역(結役)을 한결같이 육지 백성들의 예(例)에 따라 시행한다면 편리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홉째 폐단에 대한 상소는 단문(短文)이나 서(序)?본(本)?결(結)의 삼단 구성을 취하여, 주장은 명쾌하다. 서(序)는, “해부(海夫) ~ 명분과 실재가 전연 같지가 않습니다.”까지로, 해부(어부)의 논밭에 대하여 물리는 세금(田結)은, 세금 면제의 특전(復戶)에 의하여 상세히 정해져 있으나, 명분과 실재가 전혀 다름을 전제하였다. 해부(어부)에게 명분상은 세금의 혜택이 주어졌으나 그 실재(실상)에 있어서는 세금의 혜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의 전제다. 본(本)은, “의영고(義盈庫) ~ 어려운 형편이옵니다.” 까지로, 어부(海夫)의 전결(田結 : 논밭에 대하여 물리는 세금)에 대하여 명분과 실재가 다름을 밝히었다. 육지의 백성이 농산물로 진상하는 결역(結役 : 논밭 면적에 따른 부역)에 비해 어부가 진상하는 다시마나 대구 등에 따른 결역이 몇 배나 더 과중함을 지적하였다. 곧, 바닷가 민가의 전지(田地)는 모두 척박한 산꼭대기에 있는데다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 묵밭이 많은데, 거기에다 내륙의 농토와 같은 세금을 부과하니 백성의 뼈에 사무친 원망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이같은 고질적 병폐는, 어부와 농부의 생활 실태를 동일선상에 놓인 과세제의 맹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結)은, “현재 ~ 편리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까지로, 농부에게는 전결(田結)에 따른 결역(結役)을 실시하듯이 해부(어부)에게는 고기잡는 어선(漁船)의 머릿수로 해전(海田)을 삼아 결역을 시행함이 온당하다고 진언하였다. 이같은, 시폐(時弊)의 분석과 구제책의 근거는 하나같이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현장의 실태를 바로 파악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뇌암의 시폐 구제책은 탁상의 공리 공론에 일침을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사(結辭)는, 뇌암의 말로 대신한다. “생각하오면, 신이 이번에 말씀 올리는 것은 자잘하게 미세한 것으로 성상(聖上)께서 듣기에는 별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실지 모르겠사오나 모두가 숨김없는 진정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국가에서 백성을 걱정하고 백성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심(苦心)하여 성혈(誠血)을 기울이는 것도 높고 원대하여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경솔하고 망녕스런 죄를 용서하시고 굽어 살피시어 하나 하나 채택하여 시행하시는 은택(恩澤)을 베푸시면 함경도 백성에게 매우 다행이오며 전국 백성에게도 매우 다행이옵니다.” 라고 하여, 상소하는 폐단이 ‘자잘하고 미세한’ 것들일지라도 그 폐단의 구제는 단순히 함경도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온 나라 폐단의 구제가 될 것임을 겸양한 가운데 단호하게 주장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핀 성환역참(成歡驛站)의 폐단 8조목이나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의 폐단 12조목은 다, 부득이 하여 생기는 사회 현상이 아니라 중앙으로부터 지방 말단에 이르기까지 공직사회의 기강 해이로 사리사욕이 곳곳에 독버섯처럼 돌아 ‘혈맥이 끊겨 사지가 마비된 몸’처럼, 조선 전역의 전 분야에 이미 고질적인 병폐가 깊었음을 진단하고 치료책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로는 왕명(王命)이 밑으로 내려 시행되지 못하고, 아래로는 신하의 직언(直言)이 위로 전달되어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사회와 국가는 이미 고황(膏?)의 고질적인 병을 앓고 있음을, 뇌암은 속속들이 진단하여 그 치료책을 진언하였다. 더구나,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신법(新法)의 해독이 구법(舊法)의 말폐(末弊)보다 심각함을 전정(田政)?환정(還政)?군정(軍政)의 실책에서 그 실상을 여실히 보인 점에서, 뇌암(磊庵)은 이미 당시에 19세기 중반 이후에 현실화된 삼정문란(三政紊亂)의 망국적 병폐를 예견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뇌암과 같은 유능한 인재가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은 까닭에 크게 쓰이지 못한 것은, 뇌암 개인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Ⅳ. 맺는 말 뇌암(磊庵) 강세응(姜世鷹?1746~1821)은 연산조에 입절(立節)한 대사간 강형(姜?)과 그 아들 별제 영숙(永叔?尙州入鄕祖)의 후예인 증 좌승지 홍윤(弘胤?鳳臺始居)의 5대손이요, 효자로 문명(文名)을 얻은 아버지 인재(仁齋) 필옥(必玉)과 어머니 남양홍씨 통덕랑 순(洵)의 따님 아들로 상주 낙양에서 태어났다. 절의가(節義家)의 가풍(家風)과 문장가(文章家)의 가학(家學)을 전수하여, 1780년(정조 4)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으로부터 벼슬길에 올라 내외의 벼슬을 역임하고 사간원 사간(司諫?종3품)에 이른 정치가요 문장가다. 벼슬길에서의 주요 행적은 정의 구현에 앞장서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을 특기할 수 있다. 1788년(정조 12)에는 종묘령(宗廟令)이 되어 왕이 전배례(展拜禮)에 협문(夾門)으로 납시려 하자 문을 막아서서 정문(正門)으로 드시게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은 도리어 뇌암의 충직을 크게 장려하였다. 1792년(정조 16) 4월 27일에는, 영남 유생들과 사도세자 신원(伸寃)을 청하는 만인소(萬人疏)에 동참하였다. 1798년(정조 22) 12월 3일에는 성환찰방이 되어 8조목의 구폐소(救弊疏)를 올려, 왕으로부터 시폐(時弊)의 실상(實相)을 가장 적실하게 파악하고 그 구제책을 명쾌히 밝힌 명상소로 인정하고 거의 시행케 하는 비지(批旨)를 내리었다. 1809년(순조 9) 4월 3일에는 경성도호부 판관으로서 12조목의 구폐소를 올렸는데, 경성판관이 된 것은 당시 재상이었던 채제공(蔡濟恭)과는 같은 당(黨)이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좌천되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러서는 민란으로까지 치닫게 된 환정(還政)?군정(軍政)?전정(田政)의 삼정문란의 망국적 병폐를 예견하고 그 구제책을 진언하였다. 홍목연(洪穆淵)은 뇌암의 제문에서 대기(大器)에 가득 채울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나, 춘추시대 진(晋) 나라의 사관(史官)으로 공자로부터도 양사(良史 ; 左傳, 宣公 2年)로 칭송된 동호(董狐)와는 직필(直筆)로 남게 되었다고 한 것과 같이, 뇌암은 직언(直言)으로 득명(得名)하여, 구폐소(救弊疏) 두 편으로서도 직신(直臣)의 문장가로 길이 남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뇌암세고(磊庵世稿)≫는, 강세응(姜世鷹?1746~1821)의 ≪뇌암유고(磊庵遺稿)≫를 위시하여 강정흠(姜鼎欽?1772~1835)의 <항창유고(巷倉遺稿)>, 강인영(姜麟永?1807~1887)의 <나사유고(懶史遺稿)>, 강문형(姜聞馨?1832~1888)의 <학포유고(學圃遺稿)>, 강춘희(姜春熙?1856~1902)의 <수당유고(睡堂遺稿)>, 강신만(姜信萬?1890~1964)의 <금상유고(錦上遺稿)> 등 6세(世)의 유고를 1책으로 엮었다. 한문본을 국역하여 뇌암의 6대손 강영석(姜永錫)씨가 발행하였고, 국역(國譯)은 유도회 한문연수원(儒道會漢文硏修院) 장재한(張在?) 원장, 해제(解題)는 이필용(李弼龍) 전 국회 고전연구관(前國會古典硏究官) 제씨가 맡았으며, 세고의 각 유문(遺文)은 사본(寫本)으로 첨록하였다. 필자는, 본 문집의 서문에서 ≪뇌암세고≫의 가치를, 첫째, 6세(世) 문한(文翰)이 이어진 문장가(文章家)요 절의가(節義家)의 후예답게 효제(孝悌)?우직(友直)의 가법(家法)을 지켜 상주사(尙州史)에 남을 인재가 많이 배출된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문이재도관(文以載道觀)에 입각한 부(賦)?소(疏)?책문(策文) 등을 제작하여 선비 정신은 물론 각 시대상(相)이 잘 드러난 우수한 작품을 남김으로써 향토문학뿐 아니라 한국 한문학의 영역을 넓혔음을 들 수 있다. 셋째, 효 사상(孝思想)으로 점철된 각종의 소지(所志)나 통문(通文), 관료사회의 풍습을 엿보게 한 명경과 과시문(科試文), 칠사(七事), 영문록(營問錄), 성균관 수학시 물품 구매 내역을 적은 물목기(物目記) 등은 관련 분야의 귀한 자료적 가치가 있음을 들 수 있다. 뇌암(磊庵) 시문(詩文)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시(詩)를 보면, 5제(題) 8수(首)로 양적으로는 적다. 그러나, 뇌암의 시 세계(詩世界)가 넓고 주제 의식이 다양함을 엿볼 수 있었다. 곧, 입춘(立春) 시로써는 만상(萬像)의 존재 이면에는 그렇게 된 까닭의 소이연(所以然)의 이치가 내재함을 설리적(說理的)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는 ‘발견에의 기쁨’을 맛보게 하였다. 척형(戚兄) 강사흠(康思欽?호 三白齋)의 시에 차운(次韻)하여서는 절의 숭상(節義崇尙)의 가풍(家風)과 유업(儒業) 전승의 가학(家學)을 성실히 잇고 지키려 한 선비 본연의 모습을 노래하였다. 또한, 충신 정대업(鄭大業)의 사생취의(舍生取義)한 숭고한 정신을 천양하여서는 양선(揚善)에의 미덕(美德)과 참삶에의 의미를 새삼 음미하게 하였다. 부(賦)는 세 편을 남겼는데 다 과시문(科試文)이요 장편들이다. <택토부(宅土賦)>는 32세(1777) 때 응시한 과시문으로 6언(言) 56구(句)로, 우(禹) 임금이 9년의 홍수를 8년 간 다스려 구주(九州)를 삶터로 만든, 우 임금의 치수 공덕(治水功德)을 찬양하였다. 멸사봉공(滅私奉公)에의 우국애민으로 치수의 공적을 이룬 우(禹) 임금의 행적이 바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근본이 됨을 찬양함으로써 작자의 왕도정치 실현에의 염원은 은연 중에 우의(寓意)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민유성부(庶民惟星賦)>는 35세(1780)때 식년문과 급제시의 과시문으로 추정되며 6언(言) 60구(句)이다. 홍범구주(洪範九疇) 제8조목의 서징[庶徵 : 뭇 현상을 관찰하여 길흉의 징후(조짐)를 앎]으로써 왕도(王道)와 천도(天道)가 한 이치상에 있음을 징험(徵驗)토록 하였다. 곧, 별자리의 현상을 통하여 천기의 변화를 예견하듯이, 백성들 민심의 지향(志向)하는 향배(向背)를 살펴 선악의 징후를 예견함이 천도(天道)와 왕도(王道)의 순행을 이끄는 일이 됨과 같기 때문이다. 이 부(賦) 역시 천인 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르는 왕정(王政)을 염원한 부라 하겠다. <구월재호부(九月在戶賦)>도 과시문이며, 6언(言) 60구(句)이다.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어진 왕이 되기를 경계한 사실을 제재로 한 ≪시경?빈풍≫ <7월>을 원용한 부(賦)로,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환경의 변화(자연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슬기로운 삶을 영위할 줄 알아야 함을, 미물인 귀뚜라미의 행동을 통하여 깨닫게 하고 경계하였다. 한 마디로, 세 편의 부(賦)는 다 뇌암(磊庵)이 평소 추구하였던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에의 이상을, 한 주제(主題) 아래 세 모습으로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소(疏)는 두 편을 남겼는데, 성환찰방(成歡察訪)이 되어 1798년(정조 22) 12월 3일에 올린 것과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어 1809년(선조 9) 4월 13일에 올린 것들이다. 전자는 시폐(時弊)의 구제책을 묻는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상소한 것이고, 후자는 스스로 상소한 것이나, 두 상소가 다 목민관의 소임은 우국 애민(憂國愛民)함에 있음을 신도(臣道)로 알고 충정(衷情)에 직언(直言)도 서슴지 않았다. 성환역참(成歡驛站)이 당시 안고 있던 고질적인 병폐를 8조목으로 갖춰 진언하되 하나같이 현장의 실상을 소상히 밝힌 것임을 왕(王祖)도 비답(批答)을 내리며 인정하였고 나라의 기강(紀綱)이 그토록 해이한데 대하여는 할 말이 없다고까지 하였다. 나아가, 예거한 시폐(時弊) 8조목에 대하여서는 뇌암의 앙진(仰陳)한 구제책을 다 수용하도록 해당 부서에 영을 내리고, 특히 제6조목의 환곡(還穀)의 절반은 남겨 두어 불의의 재난에 대비해야 한다는 뇌암의 주장에 대하여서는 왕이 직접 상평청(常平廳)에서 명하여 그대로 시행토록 하였음도 밝히었다. 이로써 보면, 찰방은 미관이나 국사(國事) 관여에는 고관(高官)의 역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서 올린 당시의 폐단 12조목도, 중앙으로부터 지방 말단에 이르기까지 공직 사회의 기강 해이로 사리사욕이 곳곳에 독버섯처럼 돋아 ‘혈맥이 끊겨 사지가 마비된 몸’처럼 조선 전역?전 분야에 치유조차 어려운 고질적 병폐가 만연한 것임을 진단한 것이다. 진단한 결과의 진언은 고발?비판의 직언이었고, 그 구제책은 임기응변의 신법(新法)으로 인하여 백성의 고통이 가중됨을 지양하고 구법(舊法)의 장점을 최대한 살림으로써 민심과 민생이 도리어 안정되리라 역설하였다. 특히, 주된 병폐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망국적 민란을 야기하기 전에 삼정(三政 ; 전정?田政, 환정?還政, 군정?軍政) 문란을 조목 조목으로 진단하고 치유책을 제시한 점에서도 뇌암(磊庵)의 국가관이 얼마나 투철하였던가는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한 마디로, 두 상소가 다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조사 분석을 통하여 사회악적 병폐를 고발?비판하고, 나아가 그 구제책을 제시함에도 현장성을 바탕으로 한 최선책을 제시함으로써, 왕의 적극적 수용 의지를 담은 비답(批答)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뇌암(磊庵)의 직필(直筆)?직언(直言)은, 직신(直臣)의 명예는 드높혔지만 대기(大器)와 대용(大用)을 맞게 함에는, 왕조차도 어찌하지 못할 정치적 장벽을 허물지는 못 하였다. 결론적으로 본 고찰은, ≪뇌암세고(磊庵世稿)≫의 특장과 가치성을 개관하고, 뇌암 강세응의 유고(遺稿) 중 시문(詩文)만 고찰하여 개성있는 작품을 남긴 문장가(文章家)요 선비도(道)에 충실한 직신(直臣)이었던 뇌암(磊庵)을 향토사나 국사에 소개함에 그침을 밝혀 둔다. ≪뇌암세고(磊庵世稿)≫의 전면적 가치 부여는, 각계의 다양한 고찰을 기다려야 가능하리라 믿는다. |
출처: 빛마당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빛마당
첫댓글 2016.08.23 서울 강남구 남부터미널 근처 <진란회관>에서
박사공 9세 대호군(휘)공파 회장 신해 대부께서 제게 주신 뇌암세고(발행인 영석)에
서문을 쓰신 권태을 박사의 책 소개의 글(글 제목의 소재는 소개의 오타?)로서
통계공파 뇌암 세응 선조님은 박사공 21세 입니다.
저의 직계선조로서 한글동명의 휘 세응(世應 : 1475~1540 자 영칙)께서는 박사공 11세로
충렬공 휘 수남(壽男)의 조부가 되시는데 여기에 함께 소개하고 싶군요
박사공손들이 문장으로 현달하여 世槁의 始作을 알리는 晋山世槁로 세상을 驚歎시켰는데, 뇌암세고로 世家文翰의 家風을 繼承하였으니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