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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이로구나.
스님이 찾아오셔 천문을 읽히라면서 책도 한 권 주고 가셨습니다.
아직 지리도 못해서 땅강아진데, 천문으로 인도하신 분께 고맙습니다.
유불선을 함께 어울려 세상이 돌아가야 된다는 경이었습니다.
마음을 채워 본다지만, 모두 공허할 뿐 어리석음 탕자에게는 늘
한치 세상이 보일턱이 없지요.
곧 그날이 문을 연지 1년이 다 되가네요. 그간 희망 속에 지냈다고 봐야지요.
얼마나 성원을 해주셨는데요. 한 살 먹어가니 철이 들어 더 원숙하고, 분위기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데 어떠신지. 늘 저의 맘속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지요.
알찬 강좌, 열띤 토론, 즐거운 답사프로그램이 지속되어
진정으로 문화사랑방의 역할을 해 나가야겠지요.
그냥 단순히 차나 마시고, 취기에 쉽싸인 푸념의 공간이 아니라
활력이 넘치는 문화의 집이 되어야 편하겠소. 날마다 좋은 얘기, 마당을 마련하여
신선한 분위기가 샘솟는 곳!. 아 탁 뭐가 스쳐가는 열망의 공간이 되게 하겠소.
철학이 필요하지요. 다 하늘에 맞겨야지요. 제가 아웅다웅 또 하면 저만 그렇고...
익산 보석대잔치와 왕궁성 답사를 마치고, 오는 길 다짐했지요.
더 소박하게 더 푼수같이 낮추어 임하라!
절집을 둘러보도록 이끄네요. 누구인가 모르겠어요.
신비에 싸인 운주사를 보듬으라고 해 자료들이 도착하고 있군요.
성춘경님께서 낸 전남의 불상을 김위원님께서 보내왔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곁에 두고 있습니다. 문화재협동과정님들께서 없어진 절터를 찾아나서는데, 길잡이로
저를 지목하고 동참을 원하고 있고요.
나경수 교수님이 쓴 마한신화와 서동요를 스치니 온통 미륵세상이 궁금해집니다.
우리 지리선생님이 낸 책도 골라 넘기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이우평 선생님이
지형산책을 두 권으로 나눠 펴내시고, 박종관 교수가 쓴 레츠고지리도 칼라책이라
사진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심경호 교수님이 또 두틈한 산문기행집-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를 냈군요.
우리 남도의 월출산(김정협,허목), 무등산(고경명,정약용), 금골산(이주), 덕유산(임훈)편도
있네요. 고경명의 유서석록은 박선홍님의 무등산 책에 소개된 바 있지요.
허목의 월악기에는 매향비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 군요
번역자의 능력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부분이 있고, 심교수의 해석이 함께하니
무등(서석)산과 월출산 부분에 대해 밤을 새 입력해 봅니다. 이번에도 좀 질어부네요.
고경명(1533-15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의 의병장이다. 나이 42세 되던 해 (선조7,1574)4월 20일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초청으로 24일까지 5일간 걸쳐 지금의 무등산인 서석산에 올랐다. 그 때 지은 기행문이 서석유람록인데, <고제봉유서석록>이라고도 한다. 목판으로 간행되어 1631년(인조9)에 서광계가 쓴 발문이 있다.
고경명은 서석산에 오르게 된 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서석은 우리 고을 광주의 산이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하기까지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매달린 듯한 벼랑이나 끊어진 바위 절벽이나 깊은 숲과 그윽한 시냇물 등에 내 신발 흔적과 발자국을 남겨 놓으려 해왔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 왔기 때문에 묘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나무 하는 시골아이나 소치는 동자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홀로 가서 마음을 상해서 유의조(유종원)가 남간에서 느낀 그런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산에 자세히 알았다고 말한다면 옳거니와, 산의 정취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아직 그렇지 못하다 할 것이다. 이제 다행히 임 선생의 뒤를 따라 산에 올라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게 되었으므로, 활홀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회오리바람의 바퀴와 깃 우산 달린 수레를 타고 낭풍과 현포(곤륜산령에 있으며, 신선이 살던 곳이라 함)위에 노닐게 된 것과 같으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이에 일흥이 비동하여 소매를 떨치고 약속 장소로 향하여, 정오도 채 못 되어 이미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고경명은 4월 20일에 증심사에 묵은 후, 21일에 임훈과 취백루에서 만났다. 당시 동행한 사람으로는 신형 이억인 김성원 정용 박천 이정 안극지 등이 있었다. 취백루는 누대 앞에 오래 묵은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술을 두서너 순배 한 후 밥을 먹고 떠났다. 임훈은 야복차림으로 죽여에 올라 증심사 주지인 조선스님의 안내로 증각사로 향하였던 것이다.
고경명 일행의 산행코스는 다음과 같았다.
4월 20일 갑자 취백루 - 증심사
4월 21일 을축 사인암 - 증심사 - 증각사 - 중령 - 냉천정 - 입석대 - 불사의사 - 염불암 - 덕산너덜 - 지공너덜
4월 22일 병인 상원등 - 정상삼봉 - 서석대 - 삼일암 - 금탑사 - 은적사 - 석문사․금석사․대각사 - 규봉암 - 광석대 - 문수암 - 풍혈대․장추대 - 은신대
4월 23일 정묘 영신골 - 장불천 - 창랑천 - 적벽 - 소쇄원 - 식영정 - 환벽당
또한 4월 21일의 기록에서 고경명은 입석대의 장관을 다음과 같이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석양에 입석암에 닿으니 양사기(중국 명나라 초의 문인 정치가)의 시에 이른바 십육봉장사라는 곳이 바로 여기로구나 싶다. 암자 뒤에는 괴석이 곧추서서 죽 늘어서 있어서 마치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도 하며, 희디희어서 마치 연꽃이 처음 필 때와도 같다. 멀리 바라보면 마치 높은 관모를 쓰고 몸이 큰 귀인이 단정하게 홀을 쥐고 공손히 흡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마치 철웅성과도 같은 튼튼한 요새에 일만의 병사가 숨어 있는 듯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무런 의지 없이 홀로 솟아서 형세가 더욱 홀로 빼어나니, 마치 세속을 떠난 선비가 무리를 벗어나 홀로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네 모퉁이를 깍아내어 아주 반듯하게 갈아서 층층이 쌓고 겹겹이 포개어 도끼질한 듯한 모습이라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음은 듯하다. 생각건대, 혼돈에서 천지개벽이 이뤄질 때 기가 무심하게 엉켜 우연히 이렇게도 괴상하게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신공귀장이 바람과 우레를 명하여서 이런 교활한 농간을 부린 것일까. 아아, 누가 구어냈으며, 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아미산의 옥으로 된 문이 땅에서 솟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성도의 석순이 해안을 둘러 진압한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할 일이다. 돌의 형세를 보니 둘쭉날쭉하게 떨기져 뽑혀나고 무리져 나와서 아무리 계산 잘하는 자라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열여섯 개 봉우리라고 하는 것은 다만 눈으로 보이는 것만 근거로 삼아 그 대강만 헤아려 둔 것일 따름이다. 암석대의 봉우리들이 길게 이어져 날개를 핀듯한 형상을 한 것은 마치 사람이 펼쳐서 깍지끼고 있는 듯한데 암자는 바로 그 중간에 있다. 우러러보면 위태로운 바위가 높이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버리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바위 밑에 샘이 있어 모두 두 곳인데,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다. 하나는 서쪽에 있다. 아무리 큰 가뭄에도 줄지 않는다 하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사실 무등산은 육산, 즉 토산이지만 그 특색은 오히려 암석의 아름다움에 있다. 그 대표적인 바위가 서석대 ․ 입석대 ․ 규봉이다. 또 의상대 ․ 새인봉 ․ 중봉 등 직립형 돌무더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절경이다. 그 돌무더기를 ‘선돌’이라 부르는데, 뜻을 취해 ‘立’이라고, 음을 취해 ‘瑞’라 하였다 한다. 정상을 중심으로 서쪽에 서석대, 남쪽에 입석대가 있다. 규봉은 두 봉우리의 깍아지른 모습이 마치 홀圭과 같은 봉우리이다. 이 가운데 특히 서석대는 수정 병풍을 둘러친 것 같다. 아름다운 바위 줄기들로 이루어진 총석叢石이다.
그런데 대체로 고려 이후로 무등산을 ‘서석산’이라고도 불렀던 듯하다. 무진주를 광주로 고쳐 부른 것은 940(태조23)인데, 고려사지리지는 무등산을 무진악, 서석산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고려사의 기록을 인용해서 “산 서쪽 양지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100척이나 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석이라 하였다”라고 밝혔다.
한시기행에서 밝혔듯이, 전라도 일대의 산수는 시름하는 마음을 위한하여 줄 만큼 좋은 곳이 많다. 그 산수가 구성진 가락, 섬세한 미감을 낳았다. 조선 중기, 호남에 여러 가단이 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남 가단은 기촌, 성산, 장흥, 영암, 해남, 고산에서 발달하였다. 그 중 담양군 남면 지곡에 있는 식영정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 성산사선이 활동한 중심지이다. 그들은 식영정 부근과 식영정에서 바라보이는 풍광을 선별하여 <식영정제영>이라는 연작시를 지었다. 그들이 선별한 승경의 첫째가 ‘서석산에 감도는 한가로운 구름’이다. 고경명이 서석산에 노닌 것은 바로 자기 고장의 산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자 성산사선이 미적 감각을 공유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경명은 면앙정삼십영의 <서석청운>에서 마음과 같이 읊었다.
뾰죽뾰죽 향불 연기 나부끼고/뭉텅뭉텅 옥비녀를 꽂은 듯/지령이 유독 보배를 아껴/구름 기운으로 낮에도 향시 가리누나.
구름은 꼿꼿하게 오르는 향불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서석산 봉우리는 여기저기 뭉쳐 있는 여인의 옥비녀 같다. 서석산의 봉우리가 직립형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것을 두고 옥비녀들이 여기저기 떨기져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형상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지령이 구름을 피어오르게 해서 대낮에도 서석산의 일부를 살짝 가려준다고 하였다. 지령이 호걸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지령이 서석산이라는 보배를 유독 아낀다는 것은 지령이 이 지바의 인재를 유독 사랑한다는 뜻을 빗댄 것이다.
또 식영정이십영에서 <서석한운>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어지러이 버들솜이 하늘로 튀더니/산마루에 멈춰 긴 눈썹으로 모이네.
짙거나 옅음이 아주 어울리니/시의 소재 많아서 싫지 않구나.
무등산의 한가로운 구름들이 마치 버들솜처럼 하늘을 날더니, 산마루에 멈춰 산 모양을 긴 눈썹처럼 만들어 주며 그 짙고 옅음이 아주 적절해서 시로 노래할 만하다고 하였다.
서석산은 험준하고 커서 일곱 개의 군 ․ 현에 걸쳐 있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적상산이 바라보이고,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멀리 보인다. 그리고 월출산과 송광산 같은 산은 모두 어린 자식이나 손자 격이다. 위에는 열세 개 봉우리가 있고, 항상 흰 구름이 둘러 있으며 거기에 사당이 있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벼락과 번개, 구름과 비의 변화가 항상 이 산의 허리에서 일어나서 자욱하게 아래로 내려가지만, 산 위는 그대로 푸른 하늘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가운데 봉우리의 정상에 서면 날듯이 세상을 가볍게 보는 홀로 특별히 다른 길을 가는 기분이 들어 인생의 고락은 마음에 둘 것이 못 됨을 깨닫게 된다. 정약용이 <서석산유람기>에서 남긴 말이다.
젊은 시절 정약용은 호남 광주의 금소당에 거처할 때, 동복의 적벽에 노닐고 다시 서석산에 올랐다. 그에게 서석산 유람을 부추긴 사람은 화순사람 조익현이었다. 정약용이 서석산은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답다고 하자, 조익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벽의 뛰어난 경치는 여자가 화장을 한 것과 같아서 붉고 푸르게 분을 바른 모습이 비록 눈을 즐겁게 할 수 있으나, 가슴속의 회포를 열고 기지를 펴게 해주지는 못하네. 그대는 서석산을 보지 못하였는가.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과 위사가 말하지도 웃지도 아니하고 조정에 앉아 있어 비록 움직이는 흔적은 볼 수 없되 그의 공화는 사물에 널리 미치는 것과 같네. 그대는 그 산을 가보지 않으려나?”
서석산을 거인과 위사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 산을 닮아 고경명은 그토록 고결한 정신을 드러냈던 것이 아니랴.
고경명은 서석산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그려내었지만 사실 활달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장편 고시 <취시가>에는 호걸의 기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남산으로 돌아와 크게 누어 사적만 지키는 것은 답답하기 짝이 없으며 그렇다고 선술을 익히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고, 차라리 젊은 날의 기백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시의 후반부만 보면 이러하다.
이름은 스님 명부에 들었고 계책도 낮지만/근력은 그래도 말안장 시험할 만하기에/늙은 나이에 유주, 병주의 젊은이들과 사귀어/평원에서 사냥 싸움해서 말을 달리나니/어느 때야 깃발 끼고 변경으로 나아가/활 당겨 높이 쏘아 적의 깃발 떨구랴/옛 교하의 모래 벌에서 밤을 새우니/온 군영에 소리 없고 서릿발만 희구나
월출산의 절정은 구정봉이다. 사방 모서리는 모두 험준한 벼랑이 가파르고 아슬아슬하다. 다만 서쪽 벼랑 아래에는 지름이 겨우 한 자 남짓한 굴혈이 위로 뚫려 절정에 이른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굴혈 속으로부터 길을 취한다. 그 굴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엉금엉금 기고 뱀처럼 나아가서야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관모나 망건을 벗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마치 쥐가 또아리처럼 몸을 웅크리고 굴혈로 들어가는 것처럼 한다. 그러다가 굴혈에 들어가면 비로소 사람처럼 간다. 하지만 여전히 굴혈 속으로 가는 것이며, 굴혈은 길둥글고 좁으므로, 그 속을 가는 사람은 두 벼랑 사이에 몸을 움추려, 그 귀를 마치 담벼락에 붙인 것처럼 하고 가기를 서서 걸을 해야 굴혈이 끝난다. 굴혈이 다하면 비로소 위로 나오니, 마치 우물 속에서 나오는 듯한데, 거기를 나오면 곧바로 절벽에 이르게 되며 벼랑 아래는 디딜 땅이 없다. 사람이 갈 수 있게 통하는 틈새는 가까스로 한 발을 놓을 수 있게 할 뿐이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반드시 발을 앞뒤로 번갈아 디뎌야 마침내 벼랑을 건널 수 있다. 바야흐로 앞발을 벼랑 위에 두었을 때는 뒷발을 여전히 구멍에 끼워두고 있으므로 위태롭지가 않다. 그러다가 뒷발을 앞발과 교대하여 벼랑 위에 두게 되면 이것은 전적으로 몸을 벼랑에 맡기는 것이라 위태로움이 심하다. 하지만 이것을 거너기만 하면 곧 절정이어서, 마치 신발 밑을 보듯 큰 바다를 굽어보게 되므로 역시 상쾌하다.
이 유람기는 월출산 구정봉의 최정상에 오르는 과정에만 초점을 두어, 그 험준함과 기괴함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글을 지은이는 김창협(1651-1708)으로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다. 농암이라는 호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노론의 영수 김수항의 아들로 과천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일찍부터 학문에 재주가 있었지만 기사환국(1689,숙종15) 때 부친이 송시열과 함께 사사되자 자연 속에 은둔하였다. 특히, 그는 농장이 있던 경기도 영평의 응암에 농암수옥을 짓고 살았다. 이는 세상이 나를 속일지라도 청산은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자연 속에서 자연에 의지하며 살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김창협은 월출산의 구정봉에 올라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절벽의 위태함이며 조심스럽게 절벽을 올라가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 특히, 둥굴이 좁아서 “뱀처럼 기어가야 한다”는 구절이나 “귀를 양벽에 착 붙인 듯이 한다”는 구절들이 인상 깊다. 게다가 마지막 정상에 올라갔을 때의 감동을 “역시 상쾌하다”라고 간결한 말로 완벽하게 표현하였다.
월출산은 전라남도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에 있는 소금강이다. 신라 때는 월나산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이라고 불렀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이란 칭하기도 하고,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조계산이라고도 한다. 사실은 ‘달내뫼’의 한자 표기인 듯하다. 구림에서 보면 달이 마치 이 산에서 생겨나 떠오르듯 보이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천황봉(809m)을 최고봉르로 구정봉, 사자봉 등 많은 봉우리를 일으키면서 기암절벽을 이루고, 국사봉(613m), 흑석산, 주지산(491m) 등이 곳곳에 있다. 월출산의 줄기에 밤재, 감재, 도갑재 등이 있어 장흥, 강진, 해남으로 연결된다.
서쪽 봉우리인 구정봉은 높이 783m이며 회문리, 교동리와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경계에 있다. 실은 금강산에도 구정봉이 별도로 있다. 영암의 구정봉은 높이 10여 자 되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그 곁에 사람이 하나 드나들 만큼 좁은 굴이 있다. 그 굴을 타고 올라가면 20명쯤 앉아서 놀 만한 곳에 웅덩이 아홉 개가 있다.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은 우물처럼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아홉 마리의 용이 거기에 산다는 전설이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 16권 지리전고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구정봉에 우물 형태는 옛날 동차진이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벼락을 맞아 죽을 때 생긴 것이라고도 전해온다.
동차진은 구림에 유배되어 내려와 살던 어는 장군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 겨드랑이에 깃털을 달고 왔으며 백일이 되자 이빨이 났다. 3세가 되자 맷돌을 번쩍 들어 올렸다. 7세에 어른들처럼 나뭇짐을 지고 다녀 ‘구림에 장사났다’라는 말을 들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어떤 노인이 들러 “사람이란 때를 만나야 하고 사람을 만나 기량을 닦지 못하면 비운에 빠지게 되는 법이라오”라며 아들을 맡기라고 하였다. 동차진은 괴 노인을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도술을 익혔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동차진이 노모를 찾아 집에 오자 어머니는 자식에게 내기를 걸었다.
“내가 밥을 지을 동안 너는 저 산봉우리에 올라 석석을 쌓아라.”
시합에서 노모가 이기자 동차진은 억울해 하며 돌을 내던지고 깨뜨렸다. 이를 본 노모는 아들더러 자만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 무렵 북쪽 오랑캐들이 국경을 넘어 침공해 오자 노모는 아들에게 나가 싸우도록 일렀다. 동차진은 구정봉에 올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오랑캐들의 머리 위에 돌멩이가 수없이 쏟아져 그들을 몰살시켜버렸다. 이때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그것을 보고 “인간을 제도하는 데 도술을 쓰기보다도 공명심이나 만용을 부려서 결국 화를 자초할 것이므로 살려둘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벼락을 아홉 번 내려 동차진을 죽여버렸다. 그 후 사람들이 이 봉우리에 오를 때마다 동차진은 봉우리를 세 번 움직여서 다시는 자신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응징하였다. 그래서 그 바위를 신령암 혹은 삼동암이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구정봉이 삼동석이 아니라 별도의 것을 가리킨다는 말이 있다. 월출산에는 열 사람이 움직이거나 한 사람이 움직이거나 그 흔들림이 똑같은 동석 세 개가 있는데, 그것을 삼동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영암이란 지명도 삼동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허목의 <월악기>에 따르면 구정봉 위, 도갑사의 아래, 용암사의 아래에 각각 동석이 하나씩 있으며 영암이라는 고을 이름은 동석 때문에 생겨났다고 하였다.
김창협은 구정과 동암의 전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노선을 취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허목은 78세 되던 현종 13년(1672) 맹동 10월 초길(1일)에 월악을 등반하고 <월악기>를 적어 여정을 밝히고, 이동 중에 바라보이는 자연 풍광이나 들어서 알게 된 사찰의 소재에 대해서도 적었다. 그는 9월에 탑산을 내려와 그 길로 월악에 들어갔는데, 등반의 노정은 다음과 같다.
도갑 - 용암사(구층부도) - 구정봉(구룡정,동석,소년대) - 구절폭포,칠지정사 - 청청대(쌍석봉의 하나) - 죽사(봉선암의 말사).
허목은 도갑사에 대해 신라 승려 도선(827-898)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밝혔다. 도선은 도를 배워 신통력을 지녔기 때문에, 천 년 이후의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조선 초에는 승려 학조가 거처했으며, 허목의 당시에는 그 불주(염주),가사,포단,철학(鐵鶴)이 모두 남아 있었다. 허목은 그러한 사실들을 적은 후, 가보지 못한 신이한 지역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구정의 남쪽에는 한 쌍의 석봉이 있는데, 그 중 높은 것이 청청대이다. 그 남쪽에는 불정봉이 있고, 그 아래에는 백운사가 있다. 구정봉의 북쪽 벼랑이 원효대인데, 거기에는 감천이 있다고 도선 옹의 산수기는 말하였다. 용암의 아래에는 삼석거가 있다. 그 가운데 운거는 소년대 동쪽에 있다. 마거는 운거의 북쪽에 있다. 녹거는 가장 아래에 있다. 모두 산속의 기이한 자취이다. 녹거가 그 가운데 가장 크므로 그 동구를 녹거동이라고 말한다. 그 동북쪽의 별도로 떨어진 봉우리는 고산이며, 그 아래에는 고산사가 있다. 남쪽으로 구정과 마주하여, 바위 벽과 기이한 벽이 많다. 도갑의 서북쪽 석봉 사이에는 상견성과 하견성이 있다. 또 아래로는 봉선암이 있다.
허목은 등반기의 뒤에 부록을 첨부하여 세 가지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곧, 월출산에서 나는 손초蓀草, 도갑 아래 바위의 국장생과 황산바위의 황장생, 구림과 서포 석포의 매향비에 대해서도 밝혀 놓았다.
지난들 들으니, 월악의 북쪽 비탈에는 혜초蕙草가 난다고 하였으나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은 알지를 못하였다. 오직 시내와 바위 사이에 손초가 무성하여 가지와 임핑 모두 향기로웠다. 남해의 여러 산들에는 대부분 이 손초가 있어서, 빙설의 위에서 모두 푸릇푸릇하다.
도갑의 아래에는 바위를 세워 국장생을 새겼다. 또 아래 황산에는 바위를 세워 황장생을 새겼다. 동네의 나이 많은 노인들이 전하기를 도선승려가 그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만력 연간에 원수 서평공(한준겸)이 호남으로 순력을 와서 이곳을 지나다가 국장생을 파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각석으로 사좌석을 표시해 두어, 깊이 땅속으로 들어가 있었으므로 파내려고 하다가 아무 쓸모없다고 여겨서 다시 묻었다고 한다.
구림에도 입석이 있고 서호의 석포에도 입석이 있다. 거기에 새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매향을 하다”라고 적혀 있는데, 아무 해 아무 달의 글자는 인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매향비는 매향갈이라고도 한다. 매향은 불교에서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하여 향을 강이나 바다 속에 묻는 일이다. 그 의식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큰 돌에 새기고 옥개석을 씌운 것을 비라 하고, 작은 돌에 새기고 옥개석이 없는 것을 갈이라고 한다.
첫댓글 밤은 길지 않습니다. 잠은 항상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밤은 잠을 위한 침대입니다. 자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