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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제일 객잔》
# 제3부 ― 오늘도 영업합니다
## 제31화 ― 이름 없는 손님
아침 햇살이 천하제일 객잔의 처마 끝에 내려앉았다.
밤새 거센 바람이 불었지만,
객잔의 낡은 간판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천하제일 객잔.**
문 앞에는 흙과 먼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서 있었다.
연우와 설화.
백노인과 풍백.
설령과 설아.
비틀거리며 걷는 적연.
그리고 검은 머리의 소년.
소년은 객잔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이냐?"
연우가 문을 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천하제일 객잔입니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하제일이라고 하기에는 작군."
연우의 걸음이 멈췄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하지?"
"국수 맛입니다."
설화가 연우의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세상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국수 이야기예요?"
연우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객잔 주인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백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 같군."
그때 객잔 문이 안쪽에서 벌컥 열렸다.
청아가 빗자루를 든 채 뛰어나왔다.
"오셨어요!"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연우 일행을 맞이하다가,
낯선 얼굴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설령의 등에 업힌 설아.
온몸에 상처를 입은 적연.
그리고 연우의 곁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
청아는 한참 동안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도 청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예요?"
청아가 물었다.
연우가 대답했다.
"새 손님입니다."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손님이라고 한 적 없다."
청아가 빗자루를 어깨에 걸쳤다.
"객잔에 들어오면 손님이에요."
"내가 이곳을 부수면?"
청아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돈을 내야죠."
소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에게 돈은 없다."
"그럼 일해서 갚으면 돼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청아는 소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았다.
"머리 헝클어진 꼬마 손님?"
협곡을 뒤덮었던 무명왕의 기운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소년의 얼굴이 굳었다.
"고작 꼬마라니."
"저보다 작잖아요."
"나는 천 년을 살았다."
청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밥도 혼자 못 먹어요?"
소년이 말문을 잃었다.
설화가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았다.
백노인은 대놓고 웃었고,
풍백은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묘묘는 청년의 모습으로 객잔 지붕 위에 앉아 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청아에게는 어떤 위압도 통하지 않는군."
---
설령은 등에 업은 설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설아의 작은 발이 땅에 닿자 청아가 재빨리 달려왔다.
"네가 설아구나?"
설아는 언니의 옷자락 뒤에 숨었다.
하얀 여우 귀가 머리 위로 살짝 드러났다.
청아는 몸을 낮춰 설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는 청아야."
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청아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객잔에서 제일 일을 잘하는 사람이야."
뒤에서 연호가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청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뭐?"
연호는 객잔 안에서 나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어제 누나가 접시 세 개 깨뜨렸잖아요."
"두 개였어."
"깨진 그릇 조각을 담다가 하나 더 깨뜨렸어요."
청아가 눈을 흘겼다.
"그건 그릇이 아니라 작은 종지였거든."
설아가 언니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청아와 연호가 다투는 모습이 신기한 듯했다.
그녀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청아는 그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웃었다!"
설아는 놀라 다시 언니 뒤로 숨었다.
설령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여기는 우리를 잡아가는 사람들이 없어."
청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여기서는 싸우면 안 돼."
설아가 작게 물었다.
"왜요?"
청아는 간판 아래에 걸린 나무패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객잔의 유일한 규칙이 적혀 있었다.
**안에서는 싸우지 않는다.**
"객잔 규칙이야."
설아는 글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사냥꾼도요?"
"응."
"나쁜 요괴도요?"
"응."
설아가 검은 머리 소년을 힐끔 바라보았다.
"저 오빠도요?"
청아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응."
소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 없다."
연우가 객잔 안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소년은 문 앞에 멈춰 섰다.
"나를 쫓아내겠다는 것이냐?"
"규칙을 지키지 않는 손님은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다시 힘을 되찾으면 이 객잔쯤은—"
소년의 말이 끝나기 전,
묘묘가 지붕에서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소년의 머리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려와라."
묘묘는 꼬리로 소년의 뺨을 툭 쳤다.
"객잔을 부수기 전에 나부터 상대해야 할 텐데."
"네놈..."
"그리고 지금의 너는."
묘묘가 황금빛 눈을 가늘게 떴다.
"청아가 던진 빗자루도 피하기 어려울 만큼 약하다."
청아가 빗자루를 들었다.
"시험해 볼까요?"
소년은 청아와 빗자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객잔 안에서는 싸우지 않겠다."
연우가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소년은 묘묘를 머리에 얹은 채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묘묘는 만족한 듯 골골거렸다.
"내 머리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
객잔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청아와 연호가 밤새 화로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덕분이었다.
설령은 설아를 창가 자리에 앉혔다.
연우는 적연에게 의자를 내주었다.
"앉으십시오."
적연이 차가운 눈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왜 나를 살려 두었지?"
"죽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나는 귀문을 열려고 했다."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요괴를 사냥꾼들에게 넘겼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적연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도 나를 객잔에 들이겠다는 것이냐?"
연우는 물 한 그릇을 그의 앞에 놓았다.
"당신이 한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 책임져야 합니다."
적연의 시선이 흔들렸다.
"어떻게?"
연우가 마을에서 구해 낸 요괴 아이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객잔 한쪽에 모여 백노인과 풍백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당신이 상처 입힌 이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십시오."
"그들이 나를 용서할 것 같나?"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연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용서는 그들의 몫입니다."
"당신의 몫은 잘못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물그릇을 내려다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들어 올렸다.
한 모금 마신 뒤,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
주방에서는 벌써 국물이 끓고 있었다.
연우는 큰 솥에 면을 넣었다.
설화는 옆에서 파를 썰고 있었다.
탁.
탁.
탁.
처음에는 모양이 제각각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일정해졌다.
연우가 슬쩍 바라보았다.
"많이 늘었습니다."
설화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죠?"
"처음보다는요."
설화의 칼질이 멈췄다.
"그 말은 아직 부족하다는 뜻인가요?"
"파가 손가락보다 두꺼운 조각도 있습니다."
설화는 도마 위의 커다란 파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 조각을 연우의 그릇에 따로 올려놓았다.
"이건 특별히 당신 거예요."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에요."
연우는 웃으며 다시 면을 저었다.
그때 주방 문틈으로 검은 머리 소년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솥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만드는 것이냐?"
"국수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따뜻하게 한다는 음식인가?"
"먹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소년은 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증오보다 강한가?"
연우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다시 국자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한 그릇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소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연우가 말을 이었다.
"배고픈 한 사람을 편안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연우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소년은 다시 김이 오르는 솥을 바라보았다.
천 년 동안 그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분노를 먹었다.
그 감정들은 뜨거웠지만,
따뜻하지는 않았다.
따뜻함이 무엇인지,
소년은 아직 알지 못했다.
---
잠시 후.
객잔의 모든 탁자 위에 국수 그릇이 놓였다.
구출된 요괴 아이들도,
설령과 설아도,
적연도 한자리에 앉았다.
소년은 가장 끝자리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앞에 놓인 국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맑은 국물.
하얀 면.
파와 달걀.
아주 평범한 음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솥에서부터 맡았던 냄새가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청아가 소년 맞은편에 앉았다.
"왜 안 먹어요?"
"먹는 방법을 모른다."
청아는 눈을 크게 떴다.
"국수를요?"
"나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객잔 안이 조용해졌다.
설아가 젓가락을 들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먹으면 돼요."
설아는 면을 집으려 했지만,
젓가락 사이에서 면이 미끄러져 다시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국물이 앞치마에 튀었다.
설아의 귀가 축 처졌다.
청아가 웃었다.
"너도 잘 못하잖아."
설아는 입을 삐죽였다.
"연습 중이에요."
청아가 소년에게 젓가락을 건넸다.
"일단 따라 해 봐요."
소년은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청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아니고."
그녀는 소년의 손가락 사이에 젓가락을 끼워 주었다.
소년의 몸이 순간 굳었다.
누군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은 처음이었다.
청아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손가락 위치를 고쳐 주었다.
"위에 있는 것만 움직이는 거예요."
소년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면 한 가닥이 간신히 집혔다.
그는 승리한 사람처럼 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까지 가져가기 전에 면이 미끄러져 탁자 위에 떨어졌다.
백노인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천 년을 살았어도 국수 한 가닥은 쉽지 않은 법이지."
소년이 백노인을 노려보았다.
"웃지 마라."
"웃은 적 없네."
백노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소년은 다시 면을 집었다.
두 번째도 실패했다.
세 번째에는 면을 너무 세게 눌러 끊어 버렸다.
청아가 답답한 듯 그릇을 끌어당겼다.
"그냥 포크를 줄까요?"
소년이 물었다.
"포크가 무엇이지?"
"젓가락보다 쉬운 거요."
"나는 쉬운 것을 원하지 않는다."
소년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이것을 배우겠다."
묘묘가 창가에 고양이 모습으로 누워 있다가 눈을 떴다.
"쓸데없는 고집은 여전하군."
소년이 말했다.
"너에게는 묻지 않았다."
묘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말투부터 배우는 편이 좋겠군."
---
한참 뒤,
소년은 마침내 면 몇 가닥을 입에 넣었다.
그는 씹지 않고 그대로 삼키려 했다.
연우가 급히 말했다.
"천천히 드십시오."
소년은 입을 다문 채 연우를 바라보았다.
"씹어야 합니다."
소년이 몇 번 턱을 움직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삼켰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갔다.
소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청아가 물었다.
"맛없어요?"
소년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상하다."
"어디가 아파요?"
"아프지는 않다."
"그럼요?"
소년은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풀리고 있었다.
차갑게 굳어 있던 돌이,
따뜻한 물속에서 아주 조금씩 녹는 것 같았다.
"뜨겁다."
청아가 그릇을 살폈다.
"너무 뜨거웠어요?"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입이 아니라."
그는 가슴을 가리켰다.
"여기가."
설령이 동생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그게 따뜻한 거예요."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따뜻한 것은 아픈 것이냐?"
설아가 대답했다.
"가끔은요."
"왜?"
설아는 잠시 생각했다.
"계속 추웠던 사람은."
"따뜻해지면 눈물이 나니까요."
소년의 뺨 위로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흘렀다.
그는 손끝으로 그것을 만졌다.
"이것은 무엇이지?"
청아가 대답했다.
"눈물이요."
"나는 울지 않는다."
"지금 울고 있잖아요."
소년은 손끝의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과거에도 수많은 눈물을 보았다.
두려움의 눈물.
분노의 눈물.
상실의 눈물.
하지만 자신이 흘린 눈물은 처음이었다.
소년은 다시 국수를 한입 먹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맛있다."
연우가 웃었다.
"다행입니다."
소년은 연우를 바라보았다.
"왜 네가 기뻐하지?"
"손님이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주인은 기쁩니다."
"이해할 수 없다."
"천천히 배우면 됩니다."
---
청아가 소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소년의 젓가락이 멈췄다.
"없다."
"정말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 지금까지 뭐라고 불렸어요?"
"무명왕."
청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무서워요."
"나를 두려워하는 이름이었다."
"여기서는 안 어울려요."
소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 이름을 네가 평가하는 것이냐?"
"무명왕이라고 부르면 다들 밥 먹다가 놀라잖아요."
청아는 한참 고민했다.
"무명."
소년의 얼굴이 굳었다.
"연우도 그렇게 불렀다."
"이름이 없으니까 무명이지."
"그것은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생길 때까지만 쓰는 거예요."
소년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더 나은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청아가 웃었다.
"무명아."
소년이 즉시 말했다.
"함부로 부르지 마라."
"무명아, 국물도 마셔."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식으면 맛없어."
소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국물 그릇을 들었다.
청아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 듣네."
"나는 네 말을 들은 것이 아니다."
"네, 네."
소년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국물은 끝까지 마셨다.
---
식사가 거의 끝났을 무렵,
연우가 무명의 빈 그릇 앞에 섰다.
"잘 드셨습니까?"
무명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연우의 표정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
연우가 말했다.
"이곳에서는 이름보다 먼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명이 물었다.
"그게 무엇이지?"
연우는 빈 그릇을 가리켰다.
"잘 먹겠습니다."
무명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미 다 먹었는데?"
"그건 먹기 전에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늦었군."
"이번에는 다른 말을 배우면 됩니다."
"무엇이지?"
"잘 먹었습니다."
무명은 그 말을 입안에서 천천히 굴렸다.
"잘..."
그는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에게 감사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무명왕으로 살아온 천 년 동안,
그는 빼앗기만 했다.
아무것도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빈 그릇이 있었다.
따뜻함이 남아 있는 그릇.
무명은 연우를 바라보았다.
"잘 먹었다."
청아가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존댓말."
"나는 천 년을 살았다."
"그래도 연우 형이 밥해 줬잖아요."
무명의 입가가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연우가 환하게 웃었다.
"다음에는 먹기 전에 잘 먹겠습니다도 하십시오."
무명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배워야 할 것이 많군."
설아가 활짝 웃었다.
"제가 알려 줄게요."
무명이 설아를 바라보았다.
"너도 젓가락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지 않느냐?"
설아의 귀가 발끈 솟았다.
"그래도 잘 먹겠습니다는 알아요!"
설령과 청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풍백도 부채 뒤에서 웃었고,
백노인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설화는 연우의 옆에 서서 조용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적이었던 이들이,
한 탁자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천검성군이 천 년 동안 기다렸던 세상은 거창한 왕국이 아니었다.
바로 이런 작은 아침일지도 몰랐다.
---
식사 후,
청아는 객잔의 방을 정하기 시작했다.
"설령이랑 설아는 제 방 옆을 써요."
설아가 물었다.
"언니랑 같이 자도 돼요?"
"당연하지."
청아는 적연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창고 옆 작은방."
적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저씨?"
"무명은 연호랑 같은 방."
무명이 곧바로 거절했다.
"나는 혼자 잔다."
연호도 얼굴을 찌푸렸다.
"저도 싫어요."
청아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둘이 같은 방을 쓰면 되겠네."
"왜 그렇게 되는 것이냐?"
"싫어하는 것이 똑같으니까 잘 맞을 것 같아서."
연호가 나무 검을 꼭 쥐었다.
"잠든 사이에 저를 잡아먹으면 어떡해요?"
무명이 차갑게 대답했다.
"너처럼 작은 인간은 먹을 가치도 없다."
연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작다고 무시하지 마요!"
"나는 천 년을 살았다."
"아까 국수도 못 먹었잖아요!"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청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친해졌네."
"어디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객잔 안에 또 한 번 웃음이 번졌다.
---
오후가 되자,
설령과 설아는 객잔 뒤뜰에서 빨래를 널었다.
설아는 하얀 꼬리로 빨랫줄을 건드려 수건을 모두 떨어뜨렸지만,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청아와 함께 웃으며 다시 주워 널었다.
적연은 마당 한쪽에서 구출된 요괴 아이들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다.
아이들은 아직 그를 경계했다.
적연도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약만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러자 작은 사슴 요괴가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적연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뒤돌아보지 못한 채 한참 서 있었다.
묘묘는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지붕 위에서 햇볕을 쬐었다.
아홉 개의 꼬리와 왕궁의 힘은 다시 그의 안에 잠들어 있었다.
무명은 처마 아래에 앉아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는 왜 다시 고양이가 되었지?"
묘묘는 한쪽 눈만 떴다.
"편하니까."
"강한 모습을 유지하는 편이 낫지 않나?"
"강하다는 것을 매 순간 증명할 필요는 없다."
무명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묘묘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무엇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무명은 마당을 바라보았다.
청아의 웃음소리.
설아와 연호가 다투는 소리.
주방에서 면을 치는 연우의 소리.
파를 너무 크게 썰었다며 설화가 투덜대는 소리.
천 년 동안 무명은 침묵을 원했다.
모든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을 꿈꿨다.
그런데 지금은,
이 소리들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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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 무렵,
낯선 나그네 한 명이 객잔으로 들어왔다.
"식사할 수 있습니까?"
연우가 주방에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청아가 뛰어나가 자리를 안내했다.
무명은 처마 아래에 앉아 손님을 바라보았다.
나그네는 무명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청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내놓았다.
"무명아."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왜 부르지?"
"새 손님 왔어."
"그래서?"
"인사해야지."
무명은 나그네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청아가 입 모양으로 가르쳐 주었다.
무명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서..."
그는 잠시 멈췄다.
"오십시오."
나그네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무명은 뜻밖의 대답에 눈을 깜빡였다.
아주 평범한 인사였다.
하지만 그 짧은 말 하나가,
소년의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연우는 주방 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설화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을까요?"
"무엇이요?"
"무명을 이곳에 두는 것."
연우는 처마 아래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무명은 청아가 시키는 대로 탁자를 닦고 있었다.
행주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 같은 곳만 계속 문지르고 있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연우가 대답했다.
"괜찮아질 겁니다."
"확신해요?"
"아니요."
설화가 그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괜찮아질 기회는 주어야 하니까요."
설화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 앞에서 객잔의 등불이 하나씩 켜졌다.
오늘도 천하제일 객잔은 영업 중이었다.
상처 입은 이도.
길을 잃은 이도.
이름을 잊은 이도.
문을 열고 들어오면 손님이 되는 곳.
그리고 따뜻한 한 끼를 먹은 뒤에는,
어제와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는 곳.
무명은 등불 아래에서 나그네의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왔다.
그는 연우에게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손님이 잘 먹었다고 했다."
연우가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렇습니까?"
무명은 잠시 망설였다.
"내일도..."
"국수를 먹을 수 있나?"
연우가 웃었다.
"일을 도우면 드리겠습니다."
무명의 얼굴이 굳었다.
"무명왕에게 일을 시키겠다는 것이냐?"
청아가 뒤에서 외쳤다.
"탁자부터 닦아!"
무명은 청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묵묵히 행주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같은 자리만 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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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화 예고
## 제32화 ― 무명의 첫 번째 심부름
객잔 생활을 시작한 무명에게 첫 번째 일이 주어진다.
산 아래 마을까지 두부 한 모를 사 오는 간단한 심부름.
그러나 사람들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무명에게,
시장처럼 수많은 마음이 뒤섞인 곳은 전쟁터보다 더 혼란스럽다.
분노와 욕심,
두려움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무명은 다시 힘을 사용하려 한다.
그때 함께 따라온 설아가 그의 손을 잡는다.
"무명 오빠."
"사람 마음은 먹는 게 아니에요."
평범한 두부 한 모를 사기 위한,
무명의 길고 험난한 첫 외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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