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는 일제 때 조선,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일했고 신간회 간부로서 항일투쟁에 앞장섰었기 때문 에 그의 권위는 대단했다. 송재욱(당시 구미국민학교 교사·72)의 증 언에 따르면 박상희는 구미에 있던 선산경찰서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 았다고 한다. 예비검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8월16일에 박상희는 마을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통운회사 건물을 인수하여 '건국 준비위원회 구미지부'간판을 내걸었다. 박상희는 구미국민학교에 주 둔하고 있던 일본군인들의 무장해제도 지휘했다고 전한다. 박상희의 활약 덕분에 적어도 구미에서는 이승만보다는 여운형의 존재가 더 알 려져있었다. 송재욱에 따르면 구미국민학교 교사 20여명 가운데 3분 의2가 좌익화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폭동 때도 앞장서고 대부분 6·25 동란중 월북하고 만다. 송재욱은 몇 안되는 우익교사중 한 사람이었 는데 좌익들의 아지트로 끌려가 매를 더러 맞았다.
박상희는 신탁통치 반대 시위도 지도했는데 좌익들이 찬탁으로 돌 아버리자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6척 장신에 힘은 장사이고 인간적인 포용력이 컸던 박상희가 구미폭동을 지휘한 덕분에 이곳에서는 유혈 사태가 빚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구미사람들의 한결같은 견해이다. 박 상희가 구미폭동을 기획했는지 아니면 사건이 터진 뒤에 수습하는 과 정에서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구미에서의 폭동도 "면 사무소에서 오늘 쌀을 나누어 준다더라"는 소문이 발단이 었다. 구미면사무소로 몰려간 사람들이 쌀을 달라고 요구하자 직원들 은 어리둥절했다. 흥분한 주민들 사이로 파고든 좌익분자들이 선동하 여 쌀창고를 탈취하게 되고 이때 박상희가 등장한다. 그는 군중들을 지휘하여 선산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점령한다. '구미좌익정권'을 세운 것이다.
폭도들이 선산경찰서를 접수한 뒤 맨처음 시작한 일은 우익 유지 들을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구미면장을 비롯하여 의용소방대장, 이승 만계독립촉성회 간부들이 붙들려 왔다. 이들은 박상희의 마작 친구들 이기도 했다. 이들을 경찰서로 데리고 온 청년들도 "좀 들어가 있으 시오"하면서 밀어넣을 정도였다. 박상희는 선산경찰서 직원들을 포함 하여 서른 명쯤 되는 우익인사들을 데리고 갔다. 잡범들이 갇혀 있는 유치장 앞을 지나는데 잡범들이 풀려나는 줄 알고 환호성을 올렸다. 박상희는 꽥 소리를 질렀다(바로 뒤를 따르던 송재욱의 증언).
"임마들 나가면 또 못된 짓 한다. 여기 그대로 놔두라.".
박상희는 경찰관들과 우익인사들을 경찰서 본관 뒤편에 있던 자동 차부품수리 창고에 가뒀다. 송재욱은 자신의 부친과 조부가 갇히는것 을 지켜보아야 했다. 박상희는 폭도들을 향해서 말했다.
"이노무 자슥들, 니편 내 편이 어딨노. 다 같은 조선놈들이. 단추 만 바꿔 달면 일본경찰도 조선경찰이 되고 조선경찰도 인민경찰 안되 나. 이 사람들도 우리 사람으로 만들면 될 것 아닌가. 어느 놈이건 이 자물통에 손만 대봐라. 내 손에 맞아 죽는다. 알았제.".
박상희는 청년들이 뒤로 물러나자 직접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는 자신이 갖고 다녔다. 창고는 틈새가 벌어진 나무판자로 만든 것이어 서 발로 차면 부숴질 정도였다. 이날 밤 수사과장 박학림은 창고를 빠져나와서 대구까지 걸어갔다. 박상희는 경찰서로 돌아와서 책상 위 로 뛰어올라가더니 소리쳤다.
"우리는 이제 성공했다. 이제 치안을 유지하자.".
다음날(10월4일) 오후 충청도 경찰병력을 태운 트럭 두 대가 구미 역에 도착했다. 박상희의 부하인 김정수는 청년들을 데리고 가서공포 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경찰은 대구쪽으로 떠났다. 이날 밤 구미, 선 산 곳곳에는 횃불이 올랐다. 폭도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마을들을 오가곤 했다. 그러나 대구와 왜관이 미군과 진압경찰의 개입에 의해 서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박상희의 기가 꺾이기 시 작했다. 그는 창고에 감금했던 경찰관들을 풀어주고는 사무를 보도록 했다. 10월5일 새벽 대구에 파견되었던 충청도 경찰병력이 군용트럭 을 타고 구미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구-영천-왜관을 거쳐 오면서 경찰관들이 무참하게 학살된 것을 목격하여 흥분상태였다.
경찰은 총을 난사하면서 구미로 진입했다. 거리로 나왔던 민간인 수명이 사살되었다. 총소리가 나자 경찰서를 지키던 폭도들은 달아났 다.허술한 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총소리에 용기를 얻어 문을 박 차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사람들은 서장실로 뛰어들어갔다. 하루전 에 석방되었던 백철상 서장 옆에 박상희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상희, 자네는 도망가지 말게. 우리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니까.우 리가 보증을 서겠네.".
유지들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총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경찰서로 진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상희는 갑자기 창문 을 밀어올리더니 몸을 날려 뛰어나가는 것이었다. 1층에 있던 서장실 바깥은 높이 3m쯤의 축대였고 그 아래는 누런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 는 논. 박상희는 논바닥으로 떨어져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그보다 먼저 뛰어내린 사람들도 함께였다. 유지들은 그를 향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돌아온나, 뭐하러 도망가노. 우리가 다 말해줄 거라예.".
그 순간 서장실로 밀려든 경찰관들이 박상희를 향해서 집중사격을 했다.
그는 누런 벼 위로 쓰러졌다. 이걸 보고 있던 우익인사들이 모포 를 들고 뛰어나갔다. 박상희의 가슴과 배에서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을 만졌다는 김성동(64·전 통일원 비상계획국장)은 "숨 은 붙어 있었는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선산경찰서 경찰관들이 박상희의 여동생 박재희의 집으로 뛰어가 알렸다. 박재희 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한정봉이 따라나가더니 이불에 둘둘 말린 박상희를 업고 들어왔다.
모포에 둘둘 말려 피투성이인 채로 여동생 집으로 업혀들어온 박상희 는 숨이 붙어 있었다. 여동생 박재희는 "당시 오빠가 가슴과 옆구리에 세발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제가 녹두물을 달여서 떠먹이는데 한 모금 마시고는 곧 숨이 넘어갔 습니다.".
2년 전 작고한 박재희 할머니는 "오빠 가족은 피신해서 임종을 못했 다"고 증언했다.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이 유복자 박준홍에게 들려준 이 야기는 다르다. 임종을 했고 남편이 숨을 거두면서 "내가왜 죽어. 내 뒤 는 있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조귀분은 딸 넷을 낳은 뒤 박준홍을 임신하고 있었다. 친척들 사이에서 '대통령감'으로 일 컬어졌던 박상희가 죽을 때 나이는 42세였다.
구미국민학교 교사로서 구미폭동 때 줄곧 박상희를 따라다녔던 송재 욱(72)의 증언에 따르면 구미에서는 좌익폭도들에 의한 인명피해는 한사 람도 없었다. 충북경찰이 마을로 진입하면서 박상희와 함께 달아나던 김 광암 군농조위원장, 장달수 민청 간부가 사살되고 6∼7명의 비무장한 주 민들도 사망했다. 경찰에 의한 공개총살은 없었다.
구미를 장악한 경찰은 그날부터 폭도들을 붙잡아들여 분류하는 일에 착수했다. 송재욱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폭도들에 의하여 구금되었던 덕분에 '양민'으로 분류되었다. '양민1호'란 완장을 차고서 그는 경찰서 연병장에 붙들려 와 있는 수백명 가운데서 '양민'을 골라내는 임무를 부 여받았다.
양손을 깍지낀 채 머리 위로 올리고 엎드려 있는 사람들 사이를 다니 면 애절한 눈짓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일어나"하면 그 사람은 당일 로 석방이었다. 송재욱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려고 종 일 왔다갔다 했다.
5일장으로 치러진 박상희의 장례식은 그의 생전 위상에 비교하면 쓸 쓸한 편이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한밤중에 몰래 문상을 다녀가곤 했다. 구미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박상희의 원만한 인격으로 해서 희생자 가 적었다고 말하고 있다. 박상희의 큰딸 영옥은 구미국민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아버지의 사망 후 해직을 시키라는 압력이 내려왔으나 배영도 교장이 이웃한 고아국민학교로 전출시키는 것으로 수습했다고 한다.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박정희가 형의 죽음을 어떻 게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장례식에 참석하지는 못했고, 그 며칠 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올라갔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 가족 들에게 "내가 그때 형의 죽음에 대하여 알아보러 다녔다고 해서 나중에 김창룡으로부터 추궁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박준홍에게 "형님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사람이 좋고 여러 사람들이 따르다가 보니까 그 사건에 휩쓸려 든 것이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박정희가 마음속으로 어렵게도 고맙게도 생각하면서 존경했던 박상희 의 비극적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 박정희는 사상문 제에 있어서는 방관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여운형의 중도좌파 노 선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하면서도 공산당식 행태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 감을 가지고 있었다. 형의 죽음은 그러한 박정희를 왼쪽으로 확 밀어버 리는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형의 죽음을 가져온 우익경찰과 그 배후인 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박정희는 장교가 된 뒤에는 미군들 과 부딪치면서 그런 증오심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에게는 미군 이 일제를 대체한 또 다른 외세에 지나지 않았다. 심정적으로 왼쪽으로 기운 그를 공산당 조직으로 엮어버린 것은 박상희의 친구들과 만군출신 좌익인맥이었다.
박정희의 달라진 모습에 대한 1차적인 증언자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의 동기생 이한림이다. 박정희가 생도일 때 이한림 부위는 사관학교 의행정부장이었다. 만주군관 동기생 이병주 부위는 1연대 중대장이었는 데 1연대는 경비사관학교 내에 주둔했다. 만주군관 동기생 세 사람은 자 연히 자주 어울려 다녔다. 이병주는 이한림을 따라서 명동성당에 미사를 보러 나가곤 했다. 어느 날 이병주가 이한림에게 육사의숲속을 같이 산 책하자고 했다. 함께 걸으면서 이병주는 무신론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해갔다. 그동안 성당에 따라다닌 것은 "이한림 너 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였다"면서 "죽은 예수에 대한 제사인 미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한림은 우정을 생각하여듣기만 했다. 박정희가 생도로 들어온 뒤에는 3자대화에서 이병주와 박정희가 합세하여 이한림을 설득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병주가 말하는 요지는, 남한은 부패하고 혼란하여 민족통일을 이룰 수 없고 북한에 오히려 희망 이 있다는 것이었다. 10월 어느 날 명동 입구에 있던 제1호텔 다방에서 박정희는 먼저 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한림이 먼저 왔다. 박 정희는 이한림이 앉자마자 정치와 사상문제를 꺼내는 것이었다. 이한림 이 시큰둥하게 앉아 있으니 박정희는 '이병주 칭찬'으로 말머리를 돌렸 다.
"병주는 지난 날 오하의 아몽이 아니야."(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로 서 오나라의 여몽이 공부를 많이 하여 사람이 달라진 것을 노숙이 감탄 하여 한 말이다) 이한림은 박정희와 이병주가 작당하여 자신을 사상적으 로 세뇌시키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 부위는 한 마디를 던지고 일어났다.
"너희가 사상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대화로써 나를 세뇌시키려고 한다 면 앞으로 안 만나겠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도 박정희는 이한림과 자주 만났다. 하루는 두 사람이 남산으로 산책을 가서 중앙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자 불쑥 입을 열었다.
"한림이. 이곳에 포를 설치하고 저 경무대(현재의 청와대. 당시엔 하 지 미군사령관의 숙소)쪽을 포격하면 나폴레옹이 소요 진압사령관으로서 파리를 제압했던 것과 같이 경무대 장악은 문제 없겠지?".
"정희야. 그런 농담 하지마. 너는 농담이 지나칠 때가 있어.".
이한림은 박정희의 농담같은 진담을 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