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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변호사, 민족 지도자 허헌의 삶과 뜻
긍인(兢人) 허헌, 이 분도 가인 김병로 선생과 함께(긍인 선생이 가인 선생보다 선배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우리 동포들을 대표하였던 민족변호사의 한 분입니다. 비타협적이면서도 호방하고, 엄격하면서도 소탈한 그는 1908년 조선(대한제국)에서 실시된 최초의 변호사시험으로 배출된 우리 민족의 대표 변호사였고, 동시에 일제시대에는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 그리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 직으로 추대될 정도로 명망 높은 민족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허헌 선생은 결국 해방 공간 남북의 대립 구도 속에서 북쪽을 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 대학 총장까지 역임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여 그처럼 훌륭한 인품의 민족지도자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을 택하였을까? 이는 현대 우리들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허헌 선생이외에도 북을 택한 민족 지도자,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오판을 했을까요? 그 문제는 끝에 다시 돌아가기로 하고, 우선 긍인 허헌의 삶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허헌은 1885년 함경북도 저 북쪽 명천 지방의 허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의젓하고 기개있는 소년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일화 가운데 호랑이에게 물린 사건이 있습니다. 소년 허헌은 자연 속에서 호젓이 생각에 잠겨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와 맞닥뜨리게 되었답니다. 급히 몸을 피하여 나무에 오르는데, 오른손을 물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허헌은 정신을 놓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위로 기어 올라가 버텼다고 합니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격언을 새겼다고 합니다. 마침내 저녁에 마을 어른들이 찾아 나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오른손 상처가 심하여, 결국 그 후 왼손잡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른손은 언제나 주먹을 꼭 쥔 채로 다녔다고 합니다.
허헌은 고향에서 과거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복시(覆試)를 보러 부친과 함께 상경합니다. 그러나 마침 갑오경장(1895년)이 선포되어 과거는 폐지되었고, 대신 새로 설립된 재동소학교 고등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재동소학교는 갑오개혁 후 최초로 설립된 학교 중의 하나인데, 허헌은 제1기생으로 입학한 것입니다. 재동초등학교는 지금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후 허헌은 한성중학교로 진학하여 계속 신학문을 익힙니다. 부친이 한성부(漢城府)의 벼슬을 하고 있었고, 당시 실세였던 이용익 대감과 가까운 사이였던 까닭에 허헌은 별 걱정없이 착실하게 신학문을 익힐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용익 대감의 고향 또한 허헌과 같이 함경도 명천이었습니다. 당시 한성 정계에는 함경도 출신 인물들이 많지 않았던만큼 허헌 집안과 이용익 집안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입니다. 이용익에 대하여는 보부상 출신의 ‘불학무식한’ 상민(常民)이 민비와 고종의 환심을 사서 정권을 농단하고 러시아에 경도되어 조선 말기 국운을 그르쳤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용익은 조정의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며, 정권의 실세였지만, 개인적인 부정과 치부는 일체 없었으며, 왕권과 국권을 튼튼히 하고 민족자본의 형성을 위해 진력한 경세가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용익은 인재양성과 교육을 위하여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1899년, 허헌이 15세 되던 해에 부친이 갑자기 병환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맙니다. 고향 명천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룬 허헌의 심정은 허허로울 따름이었습니다. 허헌은 갑자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갑니다. 블라디보스톡에는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 금광개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허헌은 세계열강의 하나이자, 한반도에서 일본과 패권을 다투고 있던 러시아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5세의 소년이자 장부인 허헌은 노무자들을 모집하여 500리를 걸어 국경을 넘어 다시 목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톡까지 갑니다. 허헌에게 맡겨진 일은 서기직이었습니다. 허헌은 거기에서 어떤 비젼을 보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홀로 배를 타고 청진항으로 돌아옵니다.
허헌은 청진에서 선친과 막역하였던 ‘강씨 아저씨’라는 분을 찾아가 사정 얘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강씨는 당나귀 두 마리와 엽전 한 자루를 주면서 격려를 하였다고 합니다. 허헌은 그것을 여비로 하여 상경하여 학업을 속개합니다. 한성 외국어 학교에서 독일어를 공부하였고, 야학에서 일어와 영어도 공부하였습니다. 열강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면서 국권이 위태롭게 흔들리던 시절, 허헌은 국제적 소양을 익히고 시각을 넓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한성 외국어 학교를 마치고 허헌은 관료 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1905년 이용익 대감이 세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합니다. 전공은 법학이었습니다. 낮에는 법부(法部)의 주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허헌이 법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직접적으로는 세계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국권 유지를 위해 국제법 등 법이론을 습득하기 위함이었다고 얘기되지만, 근본적으로는 ‘공정’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허헌이 남긴 문장으로서 가장 강렬하고 또 법사상과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공정(公正)>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자구 하나하나를 족히 되뇌어 봄직하여 전체를 인용해 봅니다.
1.
공정은 사회의 생명이니라. 공정이 있어야 사회가 생존하고 공정이 있어야 사회가 진보하나니라.
2.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공정이 없었나니라. 공정이 극히 무세력하게 되었나니라. 이 공정이 무세력하게 됨으로 사회가 쇠퇴하고 사회가 열패(劣敗)하였나니라.
어떤 서양 인사가 이런 말을 하였다. “조선에는 오래 공정이 행하지 못하였다”고 운(云)하였다. 과연이니라. 조선 수백년래에는 공정이 없었나니라. 공정이 없고 오직 불공정이 우리 사회를 쇠퇴시키고 열패시키니라.
이제 우리는 공정을 회복하리라. 공정을 진흥하리라. 공정하게 생각하고, 공정하게 처사하고, 공정하게 접물(接物)하리라. 곧 일점의 사루(私累; 사사로이 연루됨) 없이, 청천백일의 기상으로 공정한 사상 행위를 작하리라.
3.
여(余; 나)는 이에 공정을 대성(大聲)으로 질호(疾呼; 소리를 크게 질러 급히 부름)하노라. 이 공정이 래(來)하야 우리 사회가 생존 진보하리라.
(허헌, <서울>, 1920년 2월 38쪽, 허근욱, <민족변호사 허헌>, 지혜네, 2001, 64쪽에서 재인용)
참으로 비장한 호연지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 수백년래에는 공정이 없었다”, 바로 그것이 허헌이 바라본 조선 망국의 병이었습니다. 아니 눈밝은 이들,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는 적폐(積幣)였던 것입니다. 조선은 고려말 권문세가의 전횡을 타파하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찬가지의 병증을 드러내었습니다.
조선의 양반이란 무엇입니까? 도학의 의(義)와 리(理)에 따라 본분에 충실하였던 선비가 몇이었습니까? 또 그 선비들 가운데 진실에 겸허하고, 인간을 경외하였던 분이 또 몇이었습니까? 조선 양반이란 대개 남 부리며 놀고먹는 기생(寄生) 계급이 아니었던가요? 특권의 허세와 허영에 사로잡혀 호사와 낭비를 일삼던 계급이 아니었던가요? 그러는 가운데 민족은 도탄에 빠지고,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어느 사회든 부패, 특권, 수탈, 불로소득, 즉 불공정이 구조화된 상태에서는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한말 청나라, 러시아, 일본의 다툼 속에서 한민족은 이리저리 치이다가 결국 일본에 합병됩니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나라는 떨어져 나갔고, 우리는 외형상 ‘자주권’을 회복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일본과 러시아가 새로운 지배자로 각축하였습니다. 우리는 러일전쟁에서 ‘중립화선언’을 하였습니다. 이는 이론상으로는 우리 강토가 다른 열강들의 전쟁터로 화하는 것을 막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패권전쟁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려는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통하여 조선에 자주권을 '선사'하였다고 생각한, 그리하여 조선의 ‘은인’이자, ‘후견인’임을 자부하였던 일본으로서는 한국의 중립화 선언을 ‘도발’로 인식하였는지 모릅니다. 특히 그 선언을 주도한 이용익 대감은 바로 친러파였습니다.
그에 따라 일본은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를 하면서 급히 서울로 진주하여 이용익을 잡아 일본으로 압송합니다. 그리고 노골적인 국권침탈의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합니다. 그 의정서의 3조와 4조를 보겠습니다.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그리고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수용할 수 있을 것.
제3조를 보면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영토를 보증한다고 되어 있지만, 제4조를 보면 그것은 결국 ‘러시아’ 등 다른 열강이 일본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피보호국, 속국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중립화 선언은 꺾였고, 자주독립의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어떤 이들은 이용익의 중립화 선언은 무리한 친러 정책이었으며, 결국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강압적 침탈을 초래하였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시 우리가 일본 편을 들었다고 하여, 일본이 우리를 동등한 인방(隣邦)으로 대하였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설사 일본과 우리가 ‘사이좋은 이웃’내’, 내지 동맹국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고 하여도 결국은 중일 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따라 전범국이 되는 운명을 피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러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합니다. 거기에서 일본은 한국의 지배자임을 천명하고 미국과 영국 등 세계 열강들은 그것을 승인합니다.
<일-러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 제1조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곧이어 일본은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였습니다. 이는 고종의 승인이 없는 불법적인 조약이라고 하여 ‘을사늑약(勒約)’으로 부릅니다.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이 나라 지도층 인사들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송병준은 쾌재를 불렀고, 이완용은 시대의 대세라며 주어진 상황에서 영달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민영환은 자결을, 이준은 헤이그까지 가서 분사(憤死)하였고, 또 많은 이들이 고국을 등지고 해외로 비감한 장도(壯途)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이들은 실력 배양과 자강의 길을 취합니다. 김병로가 그렇듯이, 허헌도 보성전문학교를 수료한 후 일본 유학을 결심합니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이용익 대감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불귀의 객이 되면서 마지막 남긴 유소(遺疎)는 ‘학교를 많이 설립하여 인재를 교육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소서’였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합병된 것, 세계 열강의 무도한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된 것도 결국은 우리가 깨우치지 못하였기 때문, 무지하고, 무능하고, 무력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허헌은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에 편입하여 법학 공부를 이어갑니다. 허헌의 유학생활은 경제적으로 쪼들렸습니다. 이용익의 손자이자 소시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이종호에게 학자금을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이갑이라는 분이 대신 선뜻 돈을 염출해 주었습니다. 허헌은 이 추정(秋汀) 이갑 선생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이들의 관계에 대하여는 후에 다시 나옵니다.
귀국한 허헌은 우리 민족 최초 시행의 변호사시험에 응시하게 됩니다. 조선에는 원래 변호사제도가 없었습니다. 변호사제도가 도입된 것은 사법제도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토오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있으면서 조선의 사법제도를 서구, 아니 일본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로써 우리의 사법제도의 기원이 만들어졌고, 근대적 형벌제도가 도입됩니다.
그러면 이토오 히로부미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인가? 그러한 발상이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국가발전은 일본 식민통치의 덕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감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근대화시킨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법제도 얘기하였지만, 일본에 의한 사법제도 개편은 결국 일본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 되면서 이주해 오는 일본인, 또 일본을 위해서 종사하는 조선인들을 보호하는 것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조선 산업의 근대화, 조선 사람들에 대한 교육의 확대도 결국 일본 산업의 연장 그리고 그를 위한 조선 인민의 동원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반사효과로서 조선 백성들도 혜택을 보는 경우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일본의 이익을 위한 조선의 수탈구조인 것입니다. 그 본질은 특히 일본의 위기 시에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결국 조선 사람들은 희생양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태평양전쟁을 위한 전국민적인 수탈과 징용, 징병, 정신대(위안부 포함)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가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여튼 허헌은 1907년 대한제국 시대 제1호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제1기 변호사로 배출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허헌은 변호사가 되자마자 곧 징계를 받습니다. 이는 기록상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변호사 징계입니다.
허헌이 징계를 받게 된 이유에 대하여 당시 관보는 ‘패설모매(悖說侮罵;터무니없는 말로써 모욕하고 꾸짖음)’라고 적고 있는데, ‘하미전(下米廛) 사건’ 때문이라고 얘기되고 있습니다. ‘하미전’이란 ‘상미전’과 함께 당시 경성의 주요한 쌀 도매상을 말하는데, 하미전의 한 창고 소유자가 창고 이용료를 주지 않는다는 구실로 판결도 없이 단지 법무부의 하명(下命)을 얻어 하미전의 쌀을 압류토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양 주민들이 쌀을 구입하지 못해 난리가 났고, 마침 청년 변호사로서 허헌이 분노한 시민들과 함께 가두연설로써 그와 같은 법무부의 무법적인 조치를 통박하였던 것입니다.
(허근욱, 위의 책, 104쪽 참조)
그것이 결국 법무부대신을 공공연히 능멸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의 징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법무부는 변호사들의 상급 기관으로서 변호사 등록과 징계 등 관리 업무를 법무부에서 맡았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허헌은 ‘괘씸죄’에 걸렸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튼 이는 당시 큰 화제가 되었고, 청년(당시 24세 혹은 25세) 변호사 허헌은 ‘북방(北方)에서 온 강골’라는 평판을 얻었다고 합니다. 조선 변호사 제1기의 허헌은 변호사 징계 제1호를 기록하면서 조선 백성의 ‘호민관’이 된 것입니다!
허헌의 징계는 3개월 만에 풀렸고, 이후 허헌은 당시 애국계몽운동의 본부와도 같았던 서북(西北)학회의 일을 보면서 유길준, 안창호, 이동휘, 이갑 등 민족의 지도자들과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하면서, 서북학회 핵심인 안창호, 이갑, 이동휘 등이 구금되고, 서북학회도 위축되었습니다. 허헌도 서북학회 일을 그만두고 변호사 일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석방된 이갑과 이종호가 허헌 집을 내방하고는 ‘집도 훌륭하게 지었는데...’하면서 그냥 돌아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허헌은 나중에야 그 뜻을 이해하였는데, 그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면서 허헌도 가능하면 동반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못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허헌은 새로 기와집을 지을 정도로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떠난 이갑은 이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러시아 땅에서 병든 몸으로 서글픈 최후를 마칩니다. 허헌은 그 동지들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지들은 해외로 떠나고 마침내 한일합방이 선포됩니다. 허헌은 고향 함경도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내어 경작권 및 도지권(賭地權;소작농이지만 농민이 경작 토지에 대하여 일정하게 가지는 물권적 권리)을 박탈당한 농민들을 돕고,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변론하고 또 우수한 인재들을 발굴하여 해외유학을 지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 활동을 통하여 허헌은 조선 문제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토지문제, 즉 소작문제임을 절감합니다. 허헌은 ‘현하 조선의 소작문제는 두 가지’라고 하면서 ‘소작인의 경작권 확립’ 그리고 ‘소작료의 경감과 공정표준 확립’을 얘기하였습니다.
(허헌, <조선지광>, 1929년 1월 58-59쪽)
일제시대 소작제도와 농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사회개혁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일찍이 여성소설가 강경애가 설파한 대로 근본적인 <인간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허헌을 일찍이 조선 사회가 직면한 그 인간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소작제는 해방 이후 ‘토지개혁’으로 혁파되었으며, 제헌 헌법 이후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현행 헌법도 농지에 대한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천명하고, ‘농지의 소작제는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헌법 제121조 제1항).
나아가 허헌은 변호사 보수로 모은 돈을 청년들의 학자금으로 기꺼이 희사하였고, 그것은 당대에도 숨어있는 미담(美談)으로 회자되었습니다. 그 자신 일본 유학 당시 이갑에게서 받은 그 깨끗한 호의를 잊지 않았으며, 교육에 대한 헌신은 허헌의 필생의 사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허헌은 거금이 생긴다면 어디에 쓸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기도 하였습니다.
“돈 10만원이 있다면? 나는 그런 돈 십만 원이 내 손에 들어온다면 조선에서 수재라고 일컫는 인물 3-40명 뽑아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태리, 네덜란드, 터어키, 인도, 스위스, 체코, 호주 등 각국에 2-3명씩 파견하여 그 나라의 국가나 사회의 제도라든지 인정 풍속이라든지 산업상태 국민정신 등을 정밀히 조사 연구케 하겠습니다. 가령 일본에서 터어키같은 나라에도 매년 유학생을 많이 보냅니다. 일본이 터어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이 있어 그러겠습니까만은 그 나라 독특의 무엇이 있음으로 그것을 알려고 그러는 것이외다.”
(허헌, <삼천리>, 1929년 6월 2쪽)
그리고 허헌은 거리에서 학생들을 볼 적마다, 간절히 기꺼운 마음으로 염원하였답니다.
“나는 길거리에서 학생들을 볼 때마다 기쁜 마음이 가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하여라! 지금이 너희의 때다. 공부를 많이 하여라!”하고 속으로 부르짖는다.“
(허헌, <학생> 제2권 1호, 1930년 1월, 8쪽)
드디어 3.1운동이 터집니다. 민족의 기개와 울분이 온 강토를 뒤덮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허헌은 함경도 지역을 담당하기로 하고 처가가 있는 함흥에서 영생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3.1운동을 조직합니다. 이어서 북청 그리고 그의 고향 명천까지 만세운동을 연결하였습니다.
이렇게 3.1운동 자체에도 허헌의 기여는 큰 것이었지만, 더욱 화제가 된 것은 이후 3.1운동 주동자들에 대한 재판에서의 허헌의 활약이었습니다. 허헌은 평생 이 사건 하나만은 이겨야하겠다는 일념으로 엄청난 분량의 사건 기록과 씨름합니다. 그리고 경성 고등법원의 관할 지정 판결에서 '절차적 하자'를 발견합니다.
원래 일본은 3.1운동을 단순한 보안법 사건으로 처리하려다가, 이후 다시 내란죄에 해당하는 중대한 공안 문제로 끌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안법 등 일반 형사범죄는 제1심이 지방법원이었는데 반해, 내란죄는 제1심 관할이 (당시 조선 최고법원인) 경성고등법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는 이 사건을 고등법원에 기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등법원은 아마도 그 사건을 '내란죄'로 다루는 것이 국제 여론상으로도 좋지 않고, 또 3.1운동 주모자들을 정치적으로 더욱 거물로 만드는 역효과도 있다고 보았는지, 결국 사건을 다시 단순한 보안법 사건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고등법원은 그 사건을 관할위반을 이유로 파기하면서 관할을 경성 지방법원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문제는 그 판결 주문에 '지방법원 관할 지정'만 명기되어 있고,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이송한다'는 문구가 누락된 것입니다.
변호사 허헌은 그와 같은 형사소송법적 허점을 발견하고는 지방법원 공판에서 그점을 예리하게 추궁하였던 것입니다. 즉 판결 주문에 이송결정이 없이 그저 지방법원 관할이라는 관할지정만으로 사건으로 지방법원으로 돌려 보냈으니, 이 사건은 고등법원에도 계류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지방법원에 옳게 계류된 것도 아니니 마땅히 ‘공소불수리(공소기각)’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허헌의 예리한 법리적 주장에 일본 사법당국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검사들은 강력히 반발하였지만, 일본인 재판장은 결국 허헌의 주장을 수용하여 공소불수리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론 검찰은 바로 항소를 제기하여 피고인들이 풀려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의 주모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의 공소제기가 잘못되었음을 논박하고 그것이 일본 법정에서도 인정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민족적 쾌거였습니다. 허헌 변호사는 조선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일약 민족의 대표 변호사로 부상하게 됩니다. 또 한 분의 민족 법률가 김병로 선생은 이 때 아직 변호사 활동을 개시도 하지 않은 시점이었음을 생각하면, 허헌 선생의 역사적 위상은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후 허헌은 다시 1920년 북경 국제변호사 대회에서 일본 변호사회와 별도로 조선 변호사회의 고유한 참석권을 주장하여 민족적 기개를 떨칩니다. 일본 변호사회는 하나의 제국에 두 개의 변호사회가 있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지만, 국제변호사대회가 국가별 참가를 요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독립적인 조선 변호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금지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허헌의 입론은 떳떳하였고 이치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허헌의 회고를 직접 들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편협하여 그러지요. 우리가 주장하는 요점은 조선은 재판소구성법부터 법률영역이 다르다는 것, 그것보다도 국제대회가 사적인 회합인 이상 한 민족으로 대표를 보내는 것이 정당하는 것, 셋째로 인도나 필리핀도 대회의 결의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허헌, “허헌 씨 개인 좌담회”, <동광> 제4권 11호, 1932년 11월, 436-438쪽)
이후 허헌은 민족지사들에 대한 변호를 계속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위하여 교육계 그리고 언론계에도 큰 기여를 합니다. 일찍이 함흥에서 후학양성에 힘써 왔던 허헌은 1923년 이용익 대감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가 분규로 위기를 맞자 제7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학교를 정상화시켰습니다. 1920년 4월 김성수 일가가 창설한 동아일보가 같은 해 9월 주식회사로 개편하면서 허헌은 많은 출자를 한 것으로 추측되며 감사로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동아일보가 주축이 되었던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건설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계속하여 이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조선변호사회 회장에도 선임됩니다.
한편 그가 변호를 맡은 독립투사들 가운데 공산당원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허헌이 공산당원을 특별히 선호한 때문이라기보다 당시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공산당원들이 원래 많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산당 독립운동가에 대한 변호에는 허헌만이 아니라 김병로 선생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공산당원들의 비타협적 투쟁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시 프랑스가 독일의 점령에 맞서 전개하였던 레지스탕스 운동의 대부분도 공산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허헌이 공산당 사건을 변호하면서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진실된 독립운동 혁명가라고 평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허헌은 훗날 “조국해방의 가장 용감한 투사는 공산당이었다”라는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17,8년 전에 변호사로 제1차 공산당 사건을 변호한 일이 있다. 또 그 뒤에 제2차 공산당 사건 그리고 간도 공산당 사건도 맡아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그때 공산주의자들의 말을 실지로 듣고 보고하여 그들의 투쟁과 운동의 전모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조선 무산대중을 옹호하며, 조선을 해방시기 위하여 포악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 홀로 영웅적 투쟁을 계속하여 왔다.”
(허헌, “조국해방의 가장 용감한 투사는 공산당이었다”, <해방일보>, 1946년 4월 21일)
한편 허헌의 맏딸 허정숙도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고, 나아가 유력 공산주의자인 임원근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인연이 해방 후 허헌이 좌익 쪽으로 기울게 된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해방공간의 좌우익 대립 이전까지 허헌이 생각하는 공산주의는 결코 교조주의적 공산주의는 아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허헌은 미군정 시절에도 아놀드 군정장관이 ‘당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오?’라는 질문에 대하여도 ‘아직 공산주의자가 되지 못하였소’라고 웃음으로 답할 정도로 인간적 여유와 기품이 있던 민족지사였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자유분방하고 여성해방을 갈망하는 맏딸 정숙이 공산주의에 기우는 것에 대하여 탐탁치않게 생각하였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허헌은 맏딸을 ‘우리 정숙이, 우리 정숙이’하면서 어린아이처럼 대하였고, 허정숙도 아빠에 대해 어리광을 부리듯이 스스럼없이 대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상에서의 충돌은 어쩔 수 없었는지, 간혹 집안에서 ‘활극’이 연출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허정숙은 임원근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또 다른 공산당원 송봉우와 동거를 하게 되어 세간의 입길에 크게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크게 염려한 허헌은 마침내 딸과 함께 외유를 떠나기로 작정합니다.
(허근욱, 민족변호사 허헌, 지혜네, 2001, 223쪽)
그로부터 허헌은 1년간 구미 각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는데, 각국의 방문 소감을 기행문으로 남겨 우리에게 당시 상황과 허헌의 사상에 대하여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인상적인 몇 장면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미국 선거에서의 인민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면서 허헌이 감명을 받은 부분입니다. 허헌은 뉴욕주의 선거를 직접 체험하고 또 실제로 투표장에 나온 유권자들과 인터뷰까지 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한 사람은 공화당원인데, 공화당 후보가 아니라 민주당 후보이 스미스씨를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으로부터 어떤 해코지가 없겠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일은 동양에는 있다고 들었지만, 아메리카에는 그런 불순한 일은 없다고 답합니다. 또 다른 작업복 차림의 시민에게 물으니 그도 역시 노동당계이지만, 스미스씨를 찍었다는 것입니다. 대대로 노동자계층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선 분이라서 근로층의 이익을 참으로 대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쉰이 넘은 부인에게 물으니 그도 스미스씨를 찍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어려운 사건에서 금력과 세력에 굴하지 않고 특별검사를 추진하여 정의를 바로잡은 일이 있음을 얘기하며 믿음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허헌은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의 당당하면서도 어떤 거짓도 없는 그 태도에 감탄합니다.
“선거에 있어서 그 공정함, 그 자유함,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냐. 관권의 압박, 정당파의 간섭에 의하여 선거되는 다른 곳과 미국을 비견할 때에 나는 얻은 바가 많았고, 또한 독자도 가슴에 찔리는 점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허헌, “신문기자로서 얻은 세 가지 인상”, <신동아> 제4권 8호, 1934년 8월, 35-39쪽)
둘째는 영국에서 노동당 당수 맥도날드(Ramsay Mcdonald)를 만난 일화입니다. 노동당은 주지하듯이 영국의 2대 정당 가운데 하나로서 허헌이 세계 일주에 나선 1920년대에 막 수권정당의 반열에 올랐을 때입니다. 영국 정치 역사에서 최초의 노동당 정부를 이끈 이가 바로 맥도널드 수상이었습니다. 허헌이 찾아간 1927년에는 맥도날드가 불신임을 당하여 수상직에서 물러나 있었을 때입니다. 허헌은 영국 정계의 거물의 그 질박함과 진솔함 그리고 노동당 사무실의 검소함에 경탄을 합니다. 당시 상황을 허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국 노동당 본부로 맥도날드 씨를 찾아갔다. 그는 반가이 맞아준다. 그러나 그의 차림차림이라던지 그리고 그 노동본부의 의자 등속의 질소(質素; 꾸밈없고 수수)한 비품에 대하여는 미상불(未嘗不; 아닌게 아니라) 놀내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테이블이라는 것은 모가 떨어지고 낡고 깨졌으며, 의자라는 것은 오래 앉아 있으면 볼기가 아파서 견디기 어려울만치 딴딴한 나무로 만든 것들이 아니냐. 나는 영국까지 가는 동안에 각국의 정당사무소를 많이 구경하였으나 이렇게 간소하고 질소한 곳은 처음이다.”
(허헌, “각이한 양대 정치가”, <신동아> 제4권 8호, 1934년 8월 35-39쪽)
셋째는 아일랜드의 감옥 구경입니다. 그 시설의 좋음과 수감자들의 자유로움에 허헌은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재판소에서 나와 즉시 감옥 구경으로 저는 떠났습니다. 감옥이 크고 깨끗하고 채광통풍이 잘되어 위생상으로 좋은 것은 한갓 부러울 뿐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연극장과 라디오와 대규모의 도서실이 있어 소정의 공장 노역시간 외에는 수인(囚人)들이 말쑥하게 ‘세비로(신사복으로)’ 차리고 제 마음대로 노더이다. 예컨대 그 속에서 패스볼 경기대회도 열고 무도회나 음악회도 연다 하며 또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수인(囚人)의 가족, 그 중에도 애처들이 감방에 찾아 들어와 함께 즐겁게 하루 이틀씩 지내다가 가기까지 되어 실로 문명국가의 금도(襟度;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가 다른 것을 깨닫게 하더이다.”
문명국가의 금도가 다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며 또 얼마나 가슴아픈 말인가? 허헌이 부러워하고 또 희망하였던 문명국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허헌의 기행문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허헌의 꿈은 그 개인의 꿈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꿈이고 또 단지 과거의 꿈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에도 소망스러운 꿈이 아닌가 합니다.
한가지 여담처럼 또 인용할 것은 허헌의 그 꾸밈없는 인간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탄 미국 샌프란시스코 가는 배는 무슨 대통령의 이름을 따온 3만여 톤짜리 배인데 묘령의 백인 여자들이 어떻게나 많이 탔는지 식당에나 갑판 우의 운동장이나 무도실에 들어가 보면 남성(男性) 금제(禁制)가 아닌가 하리만치 꽃같이 어여쁜 여자들이 가득 차서 재깔거리고 있는 것이 실로 장관이다. 그 등의자에 걸터 앉아 대패로 민듯 간듯하게 생긴 두 종강이를 내어 놓고 방글방글 웃어가며 저희끼리 속살거리는 모양을 바라보면 ‘브라우닝’이라는 영국 시인이
아아 다시 젊어지고
연애하고 싶다
다시 한번 사랑하고 싶다
하고 부르짖든 모양으로 또 괴테의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의 힘을 빌어 다시 청춘이 되어 즐기듯이 나도 한번만 젊어지고 싶은 생각에 가슴이 탄다. 어여쁜 여자란 남의 가슴을 집어 뜯는 것이 천직인 모양으로 태평양 상의 선중에서 나는 한참 땀을 빼었다.
그러나 나비같은 그네들을 만남으로 나는 젊어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늙어지지나 않은가 하하.”
(허헌, “미국으로 미국으로”, <학해>, 1937년 12월 114-118쪽)
42세의 중년 신사, 그것도 근엄한 민족지사 허헌이 이러한 봄날의 발랄한 꽃잎 같은 심경을 공개적인 지면에 싣는 것을 보면 그의 사람됨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또 인간적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분이 과연 ‘냉혈한 공산주의자’, ‘맹목적인 김일성 추종자’자가 될 수 있을까?
1927년 세계 일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허헌은 신간회의 경성지부의 부회장으로 선임되고, 이어서 1929년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 직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발발하자, 허헌은 그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전국 민중대회를 도모합니다. 경성의 도심에서 ‘광주학생 사건 진상 발표 대연설회’를 개최하고 시위 운동에 돌입하며, 지방의 신간회도 행동을 같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제2의 3.1운동을 해보자는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사태의 추이를 꿰뚫고 있었고, 거사 당일 새벽 허헌의 집을 급습하는 등 신간회 주모자 20명을 체포함으로써 민중대회는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허헌은 결국 그 사건으로 2년여의 옥고를 치루었는데, 신경쇠약과 신경통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허헌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신간회는 김병로에 의하여 운영되었는데, 김병로는 합법 노선을 주로 하면서 조직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데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갖던 공산계열 회원들은 마침 코민테른에서 민족 노선보다 노동, 농민 투쟁을 강조하는 지침을 내리자 바로 신간회 해체를 주장하게 되고, 결국 우리 민족 최대의 통일적 독립운동 단체는 속절없이 해체되고 맙니다. 신간회 회원들의 다수가 공산당원이었기에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허헌도 후에 출소한 후 이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고 합니다.
“신간회의 해체가 우리들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중에 일부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의해 실현된 것은 실로 유감이다.”
(허근욱, 앞의 책, 308쪽)
한편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그 군국주의적 침략을 노골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더욱 가혹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동아일보 또한 민중대회 사건으로 허헌이 재판을 받게 되자, 이사 명단에서 그를 빼게 됩니다. 허헌 본인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사실상 창립 대주주를 내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허헌은 동아일보 등 한민당계 사람들을 상종 못할 인간들로 느꼈다고 합니다. 가출옥 상태에서, 늘 감시를 받으며, 또 변호사 자격도, 언론계 지위도 박탈당한 허헌이 할 수 있는 일은 낙향하여 은둔 생활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심지연, <허헌연구>, 역사비평사, 1994, 52쪽)
한편 허헌은 첫 번 째 부인을 여의고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여성민족운동가 유덕희와 다시 열렬한 연애를 하였는데, 출옥을 하면서 재혼에 이르게 됩니다. 차녀 허근욱은 허헌이 옥중에 있을 때 출산하였고, 재혼을 한 후 3녀 선욱, 장남 영욱, 차남 종욱, 삼남 성욱을 얻습니다. 이 시기 허헌은 이렇게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그러나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의 회유를 완강히 물리치며 세계의 상황을 주의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일제 말기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일본은 조선의 단파방송(외국방송청취용) 라디오를 금지하였는데, 경성방송국 기술자들과 민족운동가들은 비밀리에 방송을 수신하고 있었습니다. 허헌도 그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43년 마침내 일본 형사들에게 발각되어 허헌은 다시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을 앞둔 1945년 4월 말 병보석으로 출감합니다.
마침내 해방의 그날, 8월 15일, 허헌은 요양차 처가가 있는 황해도에 있었습니다. 일본 총독부의 제2인자 정무총감 엔도가 여운형에게 치안문제를 협의하고, 권력이양을 부탁하였고, 여운형은 마침내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허헌이 그 부위원장으로 위촉됩니다.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이둘은 해방 공간에서 우리 민족의 명운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일본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권력이양을 부탁해 왔을까? 그것은 당시 국내에 있던 민족지사가 가운데 여운형만큼 폭넓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자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일본은 소련이 서울까지 신속히 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좌익 쪽에 가까운 여운형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정식, <몽양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493쪽)
여운형도 소련이 진주한다는 일본 총독부의 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건준을 구성하는 데에 공산당원들에 많이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 초대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 그리고 통합노선을 지지하였던 김병로는 건준을 떠나게 됩니다. 다만, 여운형을 한 없이 신뢰하였던 허헌은 부위원장직을 수락합니다. 그렇다고 연로한 허헌이 일선에 나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여운형의 일에 전적인 신임을 보탰습니다.
건준, 해방 공간에서 이러한 조직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고, 이는 한반도에 진주할 미소 양국의 협조하에 통일된 독립정부 수립으로 이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건국‘준비위원회’이므로 미소 양국의 군정 혹은 민정통치와도 논리적으로 배치될 일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후에 건준에 의하여 만들어진 인민공화국(이하 ‘인공’)입니다.
건준의 주도세력은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 전에 정부를 구성하여야 대등하고도 주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는지 모릅니다. 사실 해방공간에서 각 지역에서는 자발적인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고 우리 민족의 자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는 인민위원회 그리고 중앙에서는 그것을 수렴하는 인민공화국을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인공의 수뇌부로는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그리고 국무총리에 허헌이 정해졌습니다. 내무부장은 김구, 외무부장은 김규식, 군사부장은 김원봉, 재정부장은 조만식으로 정해졌습니다. 실제 권력은 공산계열이 보유하지만, 대외적인 명분을 고려하여 당시 가장 명망이 높고 미국과 친한 이승만 그리고 김구 및 김규식의 임시정부 요인들, 또 민족적 신망이 두터운 여운형, 허헌, 조만식 등으로 내각을 구성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각(組閣)은 본인들의 동의를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조차 모르게 발표된 것입니다. 나아가 인공은 미군정으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미국은 한반도에 자신의 전쟁으로 진주한 것이지, 한국 정부를 ‘지원’해 주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즉 미국으로서는 자신들이 유일한 통치권자로 선언하였고, 그 통치권과 배치되는 다른 세력은 그것이 인공이든, 인민위원회이든, 임시정부이든 모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하여 주권이 자동 복원되었다고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일본의 무단적 식민지배가 부정의한 것이었고, 비록 구 황실과 내각이 일본에 국권을 양도하였다고 하여도, 인민들의 고유한 권리는 여전히 존속하는 것이라고 할 때, 미국이나 어떠한 승전국도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과 전쟁을 이기고 진주한 미군이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가 그것을 국제적으로 유효하게 주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피억업 식민지 국가의 민족자존에 대하여 무심하였던 미국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미군정과 대립하는 것이 온당하고 현명한 일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허헌이 과연 그에 있어서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허헌은 인공의 대표자 중의 일인이며 또 미군정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허헌은 인공과 미군정 사이에서 매우 어려운 입장에 봉착하였고, 합당한 길을 찾기 위하여 진력하였습니다.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은 1945년 11월 13일 허헌을 불러 미군정은 조선인민을 해치려 온 것이 아니고, 조선에 두 개의 통치권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공을 해체하고 대신 하나의 정당으로서 군정에 협조하여 줄 것을 당부합니다. 그에 대하여 허헌은 인공 해체는 개인이 판단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고 인민대표자회의를 통하여 결정될 사항이라고 답합니다.
마침내 11월 20일 열린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허헌은 개회사를 통하여 먼저 미 군정에 대한 협조를 당부합니다.
“이 기회에 몇 가지 일을 참고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군정과의 관계인데, 특히 38도 이남의 미군정하에 있어서 다소 오해가 있어 마찰 알력이 있었는데, 그는 군정의 본의를 모른 오해에서 나온 것이다. 즉 군정은 조선의 영토적 야심이 있어서 실시된 것이 아니고 조선의 완전 독립 촉성을 위함이 본지인 것을 오해하여 금일까지 다소 지방에 대립이 있었다는 것은 유감한 일이다. 군정은 조선의 민족통일이 완성되고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무정부상태의 혼란을 방지하고 일본의 잔존세력을 일소하며 조선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조선을 위하여 나와 있는 것이다. 제군은 모든 오해를 풀고 조선 독립을 위하여 군정에 협력하기를 바란다.”
“지방으로부터 오신 대표 제씨는 지방에 돌아가서 군정과 그가 암운의 공기가 있던 것을 일소하고 군정에 협조하시기를 바란다. 미국 국민은 세계에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세계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이고 여론에 토대를 둔 나라이다. 조선에 진주한 미군 장교도 역시 동일하다. 고위 고관보다도 근로계급을 경애하는 사람들이다.”
(허헌, “전국인민대표자회의 개회사”, <전국인민대표자회의의사록>, 조선정판사, 1946년, 1-3쪽)
그 대표자회의의 경과는 미군정의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 진행상황을 근심스럽게 지켜보던 미군정은 회기 도중 다시 허헌을 불러 인공의 해체를 종용합니다. 조직 자체를 해산하라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름을 빼고 당의 이름으로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허헌은 다시 11월 22일 회의에서 보고하며, 곤혹스러운 처지를 하소연합니다.
“미국군이 조선에 상륙하기 전에 인민공화국은 탄생되었고, 인민위원도 선임되었던 것이다. 이런데 이것을 해산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게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그 익일에도 속회를 한 결과 국제법상으로 군정 관리하에 정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구라파 독일에 있어서도 그랬고, 또 다른 나라에서 있어서도 둘 이상 가질 수 있습니다. 10월 29일 여운형 선생이 군정청에 가서 인민공화국에 대하여 여러가지 오해를 풀기 위하여 교섭을 많이 하였습니다. ... 그와 같이 열심히 교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낙관을 불허하게 되고 기어히 해산시키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의 ‘국’자를 떼버리고 ‘당’자를 넣어 인민공화당으로 만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실로 중대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 하지 장군은 우리의 회의 진행상황을 아시는 겝디다. ‘2일간 회의에 대한 상황의 정세를 들었는데 참을 수 없어 너를 불렀다.’하며, ‘도리어 인민공화국을 선전하고, 군정에 협력한다는 것은 단지 말뿐이고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까지 말합디다. 그동안 미군정과의 교섭상황은 대략 이상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결코 흥분하시지 말고 냉정하게 검토해서 아모쪼록 좋은 결론을 지어 가지고 조선의 참된 이익이 되도록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허헌, “미군정과의 관계”,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사록>, 78-81쪽)
이러한 허헌의 솔직한 발언들은 그가 결코 인공을 교조적으로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미군정과 대립하여서는 민족 독립의 진로가 옳게 열리지 않을 것이란 인식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민대표자회의에서 인공의 해산, 인민공화당으로서의 전환은 부결됩니다. 이에 관하여 허헌의 입장이 원래 인공사수 쪽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심지연, 앞의 책, 104쪽)
하여튼 이렇게 미군정과 각을 세우고 인공이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군정은 곧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는 등 압박을 가합니다. 인공은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는 것에 희망을 걸지만, 무망한 일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자체도 미군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고, 더욱이 '인공'은 '임정'의 법통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수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시정부의 노 독립지사들은 인공에 의하여 임정의 ‘법통(法統)’을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또 인공의 주도세력의 사상적 편향성에 대하여 우려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인공은 결국 흐지부지됩니다. 초기의 포부는 결국 과욕이었음이 판명된 셈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소련은 공식적으로는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 조선 인민들의 자체적인 인민위원회를 존중하여 그들의 통치권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인공의 주축이었던 공산계열로서는 그러한 북한을 의식하고 그와 보조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이때부터 주도권 경쟁에 나섰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남한 공산계열은 미군정과의 대립각을 점점 크게 세워나갔고,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공산당은 불법화되었고, 이후 남로당이 대구폭동을 '선동'하면서 남한, 아니 한반도는 비상한 시국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군정에 의하여 외면당하고 불법이 자행되는 상황에서도 허헌은 어째서 공산계열 사람들과 계속 행동을 같이하였을까? 허헌도 박헌영등과 같이 북로당과의 경쟁의식이 있었을까? 어떤 이익도, 세력도 탐하지 않던 허헌의 담박(淡泊)한 성품이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헌이 남로당과 계속 같이 한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그 딸이 공산주의자여서 그랬을까?
그것보다 허헌은 일찍부터 공산계열 사람들이 대체로 민중들의 애환에 가까운 사람들이었고, 또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삶을 투신한 투철한 사람들이라는 판단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남한의 우익 정치세력의 중심으로 대두한 한민당은 오히려 민족반역자들을 비호하고 친일파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인식하였을지 모릅니다. 즉 허헌의 근본적 도덕적 관점인 '공정성'의 차원에서 친일 기득권 세력의 발호는 도저히 용인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출범하여 한반도의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절차가 개시되지만, 사태는 이미 국제적으로 미소의 대결 그리고 국내적으로 좌우의 대결로 인하여 어떠한 접점도 만들어지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면서 한반도 미소협력, 좌우연합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한반도 분단은 분명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분단은 김구의 예언대로 동족상잔의 참극을 예비하는 것이었고, 민족지사들은 그 진행을 막아보려는 최후의 충정으로 1948년 4월의 남북 회담을 갖습니다. 원래는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 두 분이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에 요인 회담을 제의하였던 것인데, 북한은 그에 맞서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갖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김구, 김규식에 더하여 허헌, 홍명희 등 좌익계열 그리고 조소앙, 여운홍 등 우익계열 인사들 상당수가 평양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 회의는 결국 북한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조직되고 운영되어 남한의 5.10단독선거의 정통성을 타격하려는 정치 행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은 지극히 실망하여 돌아왔고, 특히 조소앙은 ‘이번 방북길은 완전한 실패다. 우리가 완전히 모욕당하고 들러리를 섰다’고 감회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허헌과 홍명희 등은 같이 내려오지 않고, 북한에 머물렀습니다. 기정사실화된 분단의 운명에서 북쪽을 택한 것입니다.
처음에 얘기하였듯이, 당시 허헌만이 아니라 북한을 택한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미 얘기했듯이, 불후의 명작인 ‘임꺽정’을 남긴 홍명희, ‘구보씨의 일일’등으로 유명한 탁월한 소설가 박태원, ‘운문은 지용, 산문은 상허’라고 하였던 뛰어난 문장가 이태준 등도 모두 남이 아니라 북한을 택합니다. 어째서 이들에게는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었을까?
해방 공간에서 남북을 비교하자면 그 현상에 있어 북한이 훨씬 ‘모범생’과 같았습니다. 일제 청산도 철저하였고, 토지개혁도 과감하였고, 산업의 발전은 신속하였고, 교육의 확산(문맹의 감소)과 여성지위 향상에도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은 군정이 아니라 인민위원회를 앞세웠습니다. 그에 비하여 남한은 모든 것이 ‘열등생’과 같았습니다. 해방 후 민족적 과제였던 친일 청산은커녕 오히려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고, 절대 다수 민중들의 삶의 문제인 토지개혁은 계속 미루어졌으며, 경제는 안정되지 못하였고, 봉건 잔재와 구습은 여전하였습니다. 또한 미군정은 위압적인 통치를 하였고, 한국 주민들의 자치조직이었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없던 이들이 남이 아니라 북을 택하게 되는 원인들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해방 공간의 비극의 시초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운데 허헌에게 특히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일제 청산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허헌은 새로운 정부수립, 건국을 함에 있어 일제에 아부하고 추종하였던 민족 반역자들이 관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로 ‘한민당’, 남한 정부의 주축 세력이었던 한민당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 한반도에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적 회의에 마침내 한민당이 참여하게 되면서 허헌은 미국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됩니다.
지금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들의 북한 선택은 오류였고, 북한의 ‘모범생’과 같은 발전은 외관에 불과한 것, 지속불가능한 것이었음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이 성취한 토지개혁과 일제청산, 봉건 구습 타파는 결국 새로운 스탈린식의 전체주의, 봉건가부장적 독재로 이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모범생’과 같은 발전은 ‘주입식, 성과위주, 정답 강제’와 같은 것으로서 결코 북한 주민들에게 내면화된 가치로 습득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지지부진과 저열함 속에서도 인민의 주체성과 각성을 억제하지 않았고, 인민들에 앞서서 국가가 진리와 도덕을 독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몰염치한 친일기득권 세력의 득세가 지속되고 사회정의와 공정성이 가시적으로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비판과 문제제기를 통하여 교정과 발전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후 민주화 시대의 저력을 만들어 내었다고 할 것입니다.
'공정성'에 대한 철저한 희구는 폐쇄적인 인식구조를 낳고, 그 폐쇄적인 인식는 '단순한 흑백논리', '선과 악'의 이분법을 부추키고, 결국 어떠한 사상의 자유, 의심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게 되고, 마침내 진실에 대한 겸허함, 인간 본연의 자유의 정신이 실종되고 스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전개과정을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남한의 친일 반민족자들의 후안무치한 행태는 뜻있는 모든 지사들에게는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냉전 시대의 패권을 위하여 남한을 대소 전진기지로만 생각하고, 공정과 도덕의 원칙을 외면하는 미국의 이중성과 이기심은 미국을 좋아했던 이들에게 환멸을 자아내기에 족하였을지 모릅니다.
북한에 정착한 허헌은 북한에서 최고인민위원회 의장 그리고 김일성 대학 총장 직을 역임합니다. 그리고 1951년 6.25전쟁 중 평북 정주에서의 김일성 대학 임시 교사(校舍) 입교식에 참석하고자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길을 떠났다가 차가 강물에 뒤집혀 세상을 뜹니다. 구한말, 일제시기, 해방공간에서 한 인간, 우리의 순정(純正)한 민족성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인간의 서글픈 죽음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북한 정권의 들러리로 욕됨을 얻기보다 지사로서 교육자로서 깨끗한 죽음을 찾아갔다는 느낌도 듭니다. ...
첫댓글 긍인 허헌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만 알고있었습니다. 올려주신 내용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글을 정독한 이후 <<심지연, <허헌연구>, 역사비평사>> 책도 정독하겠습니다.
아, 여경수 선생님, 댓글 감사합니다! 많은 연구와 가르침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