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당대]
전차가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보이기 시작하는 승강장 벽에는 “신정(은행정)”이라고 쓰여있었다. 신정역 1번 출구 쪽 요금 정산 장치 옆 벽면에는 “은행정(옛)정경”이라는 이름의 대형 흑백 사진이 걸려 있는데 그것은 1969년에 지금의 신정1동에서 바라본 은행정 일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정역은 은행정이라는 마을 자리에 만들어진 역이었던 것이다. 그 사진 속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도당대라는 이름이었다. 아마도 한자로 도당대(都堂臺) 혹은 도당대(禱堂臺)일 것이다. 도(都)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니, 도당대(都堂臺)는 신령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신령을 모신 집이 있는 산마루가 되고, 도(禱)는 기댈 수 있을 만큼 크고 강한 존재에게 작고 약한 나의 바람을 이루게 해 달라고 빈다는 뜻이니, 도당대(禱堂臺)는 바람을 가진 나와 신이 만나는 장소가 있는 산마루가 된다.
1969년에 신정1동 쪽에서 찍은 사진
1번 출구를 나서서 뒤돌아 선 후 조금 걸으면 충남슈퍼가 보이고 거기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왼쪽에 파란코끼리 커피하우스가 보인다.
신정역 1번 출구 - 오목로의 경사도가 역이 상당히 고지대에 있음을 보여준다.
파란코끼리 커피하우스 옆 계획적으로 만든 주택단지 속에
주차장 공간 구석의 멋진 바위 왜 이런 공간이 남아있을까
그 정면에 작은 녹지가 하나 보인다. 잔뜩 들어서 있는 건물들이 없다면, 그 녹지에서 사방을 다 내려다 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예로부터 신성시되어 온 큰 나무나 바위가 있었다거나 신을 모신 당집이 있었기 때문에 주택단지를 조성할 때도 함부로 손대기 어려워서 그냥 남겨두었던 땅이 녹지로 새 단장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거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커피하우스 옆의 멋진 바위가 예사로 보이질 않았다.
[숭정각]
충남슈퍼 앞으로 나온 후 바로 옆 양강중교앞교차로에서 양강중학교 쪽으로 길을 건너 계속 걸어서 SC제일은행 앞에서 농협 쪽으로 길을 건넌 후 농협을 왼쪽으로 끼면서 걸어가다가 왼쪽에 보이는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의 아파트 옆을 지나면서 앞을 보면 숭정각(崇旌閣)이 있다. 그 속에는 “열녀 학생 원정익 처 유인 전의 이씨 지 문(烈女學生元鼎翼妻孺人全義李氏之門)”이라고 쓰여 있는 열녀문이 있다.
숭정각 속 열녀문
숭정각
열녀문에 이름이 올라있는 이씨는 원주 원씨 가문에 출가하였다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조정에서는 영조 5년[1729년]에 원씨 가문에 열녀문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이 문은 본래 신월동 606번지 3호에 있다가 2004년 3월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문의 높이를 보니 사람들이 그 앞에서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 옛날에는 한 집안에서 열녀를 대대로 배출하게 되면 그 집안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왕이 벼슬을 내려주었다고 하니 열녀문은 권력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세워졌다는 숭정각의 “숭정(崇旌)”이란 말도 “열녀문[정문(旌門)]을 높이 떠받듦”이라 풀이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열녀문을 기리는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이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자살한 여성 이씨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잠시 궁금하였다.
[정랑고개]
열녀문을 뒤로 하고 길 건너의 정은sky빌 1차, 2차, 3차아파트를 확인하며 걸어가다가 3차 아파트 앞에서 길을 건너면 인근에 신정119안전센터가 있고, 안전센터 뒤 목민교회 주차장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예은사랑요양복지센터 옆에 시멘트를 버무려 만든 계단이 있다. 거기서부터 한 방향으로 걷다보면, 길은 가빈미용실 앞에서 오른쪽으로 휘고, 곧이어 중앙로 29가길이 장수산까지 이어진다. 산으로 접어들어, 지도에는 능골 약수터라고 되어있는 다락골 약수터를 왼쪽에 두고, 계단을 올라 능선에 선 뒤 오른쪽으로 능선을 조금 타다보면 왼쪽 숲 속에 저명한 정치가 송진우 가묘가 있다. 1945년 죽은 송진우는 처음에는 망우리에 매장되었다가, 장수산에 이장되었다가, 다시 국립현충원에 이장되었다. 별다른 장식물이 없지만 혼유석이나 봉분이 웅장하고 산신제석도 갖추어져 있어서 품위와 권세가 느껴졌다. 혼이 와서 놀다가는 장소라는 뜻의 혼유석은 봉분 앞에 놓인 상 모양의 돌을 말한다.
송진우 가묘
송진우 가묘 산신제석. 여기에서 묘소를 쓴 지역의 산신에게 고사를 지낸다.
묘역을 나서 장수산 정상 장군정에 들렀다가 북쪽을 향하여 산을 내려가다 보면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거기서 오른쪽의 흙길을 따라가면 산림문화강연장과 계남생태통로가 나온다. 생태통로는 편하고 빠른 찻길을 내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정랑고개 자리에 만들어진 것이다.
장군정. 소금 길목을 지키는 군대의 지휘본부였을 법한 자리에 세워진 정자.
장수산 쪽에서 본 계남생태통로 서쪽에서 본 계남생태통로
정랑고개는 한강 유역과 인천 공촌동 서곶 염전 사이의 고개다. 권력자들은 소금의 이동통로를 장악하기 위하여, 감시하기 좋은 어느 한 지점을 정하고, 소금은 반드시 그 지점을 통과하여 운반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개 인근에 “성넘어”라는 지명이 있고, 1988년에는 고개 인근에서 토성(土城)도 발굴되었다. 제물포에서 한양으로 소금을 운반하던 사람들이 고개 마루에 올라 신의 바닥에 묻은 흙을 털며 쉬어간 곳이라서, 이곳이 신털이 고개라고도 불렸고, 거기에서 신트리라도 지명이 나온 듯하다.
계남생태통로 아래 정랑고개 표석
그러나 원주민들은 이 고개를 정릉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선조의 딸 정선옹주가 구로구 궁동에 살다 죽어 묻혔는데 그 무덤을 정릉이라고 속칭하였던 듯하다. 옹주 부부의 집[궁]과 무덤[묘]을 만들러 가던 사람들이 거치는 길목이 정릉고개, 정녕고개로 불리다가 정랑고개가 된 것이 아닐까? 아무튼 그 정랑고개를 파내고 서울과 인천을 잇는 빠른 길을 만들었던 것인데, 얼마 전에 그 자리에 아치를 만들고 흙을 부어 계남생태통로를 만듦으로써 장수산과 신정산이 연결되었다.
[우렁바위]
계남생태통로를 통하여 장수산의 계남 근린1공원에서 신정산의 계남 근린2공원으로 건너간 후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쭉 걸으면 신정배수지가 나온다. 중간에 이정표가 있다. 먼저 만나게 되는 작은 체육공원을 오른쪽에 두고 지나쳐 신정산 정상 배수지의 체육공원에 다다르기 바로 전 왼쪽에 우렁바위[명암(鳴岩])가 있다.
우렁바위
소등받이[길마]처럼 생겼다 하여 길마바위라고도 불리는 바위다. 십자 모양의 4개의 바위 틈 사이로 바람이 통하면서 공명현상이 일어나 사람들은 그 바위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던 듯하다. 바위는 1990년 신정배수지 공사로 인하여 산 정상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바위 놓임새가 미세하게 달라졌으니 소리가 달라졌거나 아예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산 신씨 묘역]
우렁바위와 계남생태통로 사이 이정표로 길을 되짚은 후 구로구 방향으로 걷다보면 고척고등학교 뒤쪽 산자락에 평산 신씨 묘역이 있다. 세운지 얼마 안돼 보이는 묘갈명(墓碣銘)을 읽어보니, 위의 봉분은 연산군 집정기의 사대부 신효민과 영일 정씨의 합장묘였고, 아래의 봉분 한 쌍은 신효민의 계자(系子)인 중종 집권기 유생 신호와 파평 윤씨 부부의 묘였다. 갓난아이를 데려와 젖 물려 친자식처럼 키우는 것이 양자(養子)라면, 장성한 후 대를 잇기 위해 족보에 입적하는 것이 계자(系子)다.
올려다 본 평산 신씨 묘역
문인석들은 표정이 있다
신효민 부부의 묘와 신호 부부의 묘에는 묘역 최초 조성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인석 2기, 산신제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잘 만든 산신제석들은 제자리를 잃고 엉뚱한 곳에 놓여있었다. 신효민 부부 합장묘에는 표기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된 묘표도 남아있었다. 오래되어 닳고 때 묻은 석물들의 표정이 눈을 즐겁게 하여주었다. 묘역 아래, 아파트와 고척고등학교 사이, 푸성귀들이 잘 자라고 있는 텃밭을 통과하니 도레미어린이공원 앞 구로 05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은행정 대동제를 기록한 영상물 정자에서 사람들이 대동제를 준비한다
답사 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블로그[http://blog.daum.net/pakkhoon]에서, 은행정이라는 동네가 있었으며, 그 동네 사람들이 지금도 신정4동에 은행정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매년 대동제를 올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블로거는 일제강점기 때 안양천 제방을 쌓고 지금의 목동 신시가지를 농토로 간척할 때 유입된 노동자들이 정착하면서 은행정이라는 꽤 큰 마을이 이루어졌다가, ‘조국 근대화’의 시기에 신정 철거민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이후 마을 공동체가 점차 소멸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신정동을 그저 목동 신시가지의 옆 동네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정말이지 세상 천지에 누군가의 고향이 아닌 곳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