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
라 - "병든 자"란 말이 이 기사(記事)의 초두에 나오게 됨은, 나사로란 사람보다 그의
질병이 여기서 화제거리이기 때문이다(Godet). "나사로"란 이름은 "엘르아살"이란 이
름의 단축형이라고 한다.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
의 오라비러라 - 12:1-8 참조. 이 마리아는 눅 7:37-50에 관설된 여자와 동일시될 사
람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경건한 행위와 사랑이 어떻게
큰 사실을 기억한다.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병들었나이다"라고만 말하고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것은 청원에 있어서 고상한 성격을 드러낸다(Bengel). 이것은 짧은 기도이다. 우리는
길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짧게라도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근심거리를 주님에게
고하면 주님은 그것을 들어 주신다. 특별히 그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 기뻐하신다.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을 보여 준다. (1) 예수님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神性)을 보여 주고, (2) 예수님
과 하나님과의 일체(一體)이신 사실을 보여 주고, (3) 또한 이 말씀은 나사로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곧,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
이라는 의미가 여기 있다.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저 하심이었다(4 절).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동기가 여기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은 나사로와 그 형제들을 사
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특수한 이적을 행
하시게 되었다.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의 위급한 사태를 아시고도 천천히 그들을 방문코저 하신 이유는, (1)
그 사태의 수습이 오직 자기에게 달린 까닭, (2) 천천히 시간을 잡는 것이 오히려 그
당사자들에게 유익한 까닭. 그가 지체하시는 동안 그 당사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
하도록 준비된다. 그것은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천히 오심은 사랑을 베푸시기 위한 지체이다.
=====11:7,8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
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 예수님께서 천천히
제자들의 신앙 수준을 올리셨으므로, 인제는 그들이 거정 없이 위험 지대인 유대에 들
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Bengel).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겁을 낸다. 그러므로 그
들의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한 사건은 유대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 8:59, 10:31 참조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고쳐 주시기 위하여 유대 땅으
로 가시려 할 때에 제자들은 만류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주님의 신변을 위
험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신 기회가 남아 있으므로
그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기회를 식별할 수 있을까?
물론 예수님은 그것을 식별하셨다. 그는 헤롯의 죽이려는 음모를 아시고도 말씀하시기
를, "가서 저 여유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
리니"라고 하셨다(눅 13:32-33)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 칼빈(Calvin)은, 윗절(9
절)의 "낮에 다닌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혹은 그의 명령)대로 다님을 가리
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말씀에 관게 없는 환경과
사정을 가리킨 것이겠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없이 인간 자신의 심사
(心思)에 따름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인간은 실족할 수 밖에에 없다. 그 이
유는, 인간 자체 안에는 참다운 빛(진리)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밖에서(하나
님에게서) 빛을 받아야만 된다(Grosheide). 예수님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명과 말씀
가운데서 행하시는 것인 만큼, 밤에 행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전연 없으셨다.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
우러 가노라 - "잠들었다"는 것은 성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잠들었다가 깨는 것처럼,
성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때가 온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경건한 자의
죽음은 하늘 나라의 방언으로는 잠듬이다"라고 하였다.
=====11:12,13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 예수
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이다. 제자들의 오해는, 결국 모든
죄인들의 습성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준다(Grosheide).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아서도, 잠들었다는 말이 보통 수면을 의미하지 않는 사실을, 그들
은 왜 몰랐던가? 보통 수면이면 다른 사람들도 깨울 수 있지 않았으랴? 하필 예수님이
그것을 깨워야 될까?(Greijdanus).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 나사로의 죽은 사실에 대하
여, 예수님은 잠들었다는 말로 비유하셨다(11 절). 그러나 이제는, 그 제자들이 깨닫
지 못하는 고로 밝히 해석하여 주신다. 처음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신령한 지혜를 사용하여 보도록 하셔서 그들을 연단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그들
에게 명확히 그 말씀의 뜻을 알려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 방법이다. 우리를 향
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아무런 노력 없이 수확이 있도록 하시지 않는다. 마침내 주시기
는 하되, 인간으로 하여금 먼저 노력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
이라 그러나 그에게 가자 하신대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그 질병에거 건지시지 않았으
므로 그가 죽었으니, 이제 나사로의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해결하는 광경
이 미구(未久)에 나타난다. 그것을 보는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굳세어질 것이다. 제자
들의 신앙은 부절히 자라나야 할 것이었다. 새로운 난관은, 신앙이 새로이 장성할 기
회이다. 신앙은 되어가는 것이고 된것이 아니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 되어
있는 기독자는 기독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He who is Christian is not a
Christian).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
라 -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방금 신앙 연단(鍊鍛)
을 위하여 난관과 시련의 필요를 역설(力說)하셨는데(15절 해석 참조), 그는 그 말씀
끝에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였다. 곧,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한
유대 땅(7-8절 참조)으로 같이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난관
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불신앙은 디두모(쌍동이라는 뜻)라고 하는 도마의 근성이다. 이때에 도마가 죽기로 작
정하는 영웅주의는 가졌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의 박해를 당할 줄 알면서
도 예수님과 함께 가려는 모험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이 방금 말씀하신대로
(9 절)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
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비록, 그의 태도는
용감스러웠으나 신앙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9,15)을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저렇게 현실의 얕은 곳에서
잘못 움직였다. 우리는 생각하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잊을까! 아버지가
먼 곳에 갔을 때 그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아이와 같이, 주님을 잊지 말아야 된다. 하
나님 아버지를 못보는 대신 우리는 그의 말씀을 보는데, 어찌 그 말씀을 잊으랴? 그러
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를 예사로이 한다. 분주하여 잊어버리고, 평안하여
잊어버리고, 곤난하여도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어려움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과
관계하려고 한다. 그것은 악한 일이다.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 "나흘"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 얼마나 큰 권능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여기 지적한 것이다. 볼토만(Bultmann)은, 여기 "나흘"이란 말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고 기록한
의도는, 유대인의 관념에 죽은 자의 영혼이 죽은지 사흘 동안까지는 무덤에 가까이 있
지만, 나흘이 되면 그렇지 못하니 생명으로 돌아올 소망이 없다고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Das Evangelium des Johannes, p. 305). 볼토만(Bultmann)의 이 학설은, 예수
님의 이적을 그대로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요한 복음 저자가 유대
인의 미신 사상과 타협했다는 것이니 옳지 않다.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는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거기에 많이 오게 된 원인을 설
명하려는데 있다.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그들은
위문차로 많이 왔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사로 부활시
키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Calvin).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 이 말
씀을 보면, 마르다는 활동적이며 또 사업적이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집에 앉아 있었음은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았던 까닭이 아니다.
=====11:21,22
이 두 귀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듯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
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이
있었다. 그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말하고도(22 절), 다시 말하기를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
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절).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듯이 말하고, 또 그의 신앙 사상에 변동
성을 가져왔다.
마르다의 이 태도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 확신이 있어야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Charles Darwin)의 말에 의하면, 대서양(大
西洋)에는 200 척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파
도가 일어도 그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또
깊이 믿음을 가지면, 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알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줄 알 수 있다. 그는,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증거
한다. 또한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한다. 고래(古來)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
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강을 건널 때 어름이 깨질
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그 때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끄
는 네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건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건너 가기가 위태하나, 믿음으로 앞서 건너
간 성도들을 생각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11:23,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 끝날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
고, 그 때 방금 행하시려는 이적에 따라서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가리켰다(43-44). 그
러나 마르다는 그 말씀을 세상 끝날에 있을 부활 관계의 것으로 알았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 끝날에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것은 단 12:2에 근거한 사상일 것이다.
마르다가 저렇게 유대인들의 믿는 교리는 기억하였다. 그러나 부활이 주인공이신 메시
야께서 그 때에 현림하셨으니 만큼, 그 현재에도 사람의 부활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
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가 교리는 알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충분히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곧바로 "부활"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부활이란 것이 전연 없
다. 예수님과 관계 없는 독자적인 부활은 없다. 세상 끝날의 부활도 예수님 때문에 성
립될 것이고, 결코 독자적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다.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
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
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
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
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
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
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
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
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
(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
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
(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
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
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
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 )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
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
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
(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 )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
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
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 )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
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
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
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
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마르다의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믿음의 완전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믿는다고 하고서 조금 후에는 약하여져서,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시지 못할 듯이 말한다(39 절).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대하여는, 고후 8:9; 빌 2:7을 참조하여
라.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대한 합당한 신앙 고백이 있다면 무엇이나 다 고백하려는
열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실력은 실제에 있어서 아직 그와 같은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 기독 신자
들 가운데 종종 있다.
(1)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그가 진
리를 깊이 배우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본래 체계 정연한 것이
다. 그것은, 그 부분 부분에도 전체가 들어 있고 그 전체에도 부분이 들어 있다. 그러
므로 그것은 극히 정밀한 연구를 하는자들에게 알려진다. 성경 말씀은, 신령한 감동으
로 알 수 있는 방면도 있고, 또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방면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깊이 배워야 된다. 사람이 진정한 학문을 무시하면 안된다. 그 이유는, 진정한
학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무식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혜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잠언을 보면, 미련한 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정죄되었다.
(2)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한 원인은, 신앙 연단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신앙 생활에는 연단이 필요하다. 벧전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
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보석도 잘 갈아야만 귀한 보석이 된다.
암스텔담(Amsterdam)에 금강석을 정제(精製)하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금강석 한 점을
정제하는데 여러 달 걸린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배로 여기시는고로
여러가지로 연단시키시기를 좋아하신다(신 32:10-12).
====11:28-30
마르다가 "가만히...마리아를 불러" - 낸 것은, 유대인 군중의 소동이 있을까 두려
워한 까닭이다. 그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연루자(連累者)들이 섞
였을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나아갔다고 한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외(敬
畏)한 증표이다(Calvin).
====11:31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 가더니 - 유대인들이 이렇게 많이 따라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
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적을 보지 못할 번 하였다.
=====11:32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 이 말을 보
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권능은 믿었으나, 부활시키시는 권능은 믿지 못했
던 것이 드러난다.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 어떤 학자들은, "통분히 여긴다"는 말의 헬라 원어(* )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였으니, 곧, "슬퍼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뜻을 취하면, 그
가 슬퍼하신 것은, 그 우는 자들을 동정하시는 체휼(體恤)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Calvin). 이 말을 우리 한역대로 "통분히 여기시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노하신다는
뜻으로 보아야 된다. 그러면, 그가 누구에게 대하여 노하셧단 말인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1)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에게 대하여 노하셨다
는 것. 곧,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인성의 약점에 대하여 그
의 신성이 노하셧다는 것. (2) 유대인의 불신앙, 혹은 의식적 울음에 대하여 노하셨다
는 것. (3) 사망의 세력, 혹은 마귀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이 해석이 가장 자연
스럽다.
=====11:34-38
이 귀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애의 정서(情緖)를 많이 나타내셨다. 나사로의 죽
은 사건을 둘러 싸고 왜 그는 슬퍼하셨을까? 그는 이제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것을 내
다보시고 계셨는데 왜 슬퍼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곧, (1) 그에게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이들도 신앙이 부족하였고, 유대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
들의 편견을 고집하고 앉아서 예수님을 냉혹히 논단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슴에 송곳을 꽂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 앞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신다. 그는 불신앙의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적도 있다(눅
19:41). (2) 예수님은 진리이시니, 진리 그것을 그대로 느끼심. 죽음이 비애라는 것은
천정의 진리이다. 그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
는 것은 옳지 않지만, 죽음이 슬픈 것은 사실이다.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에
있어서, 거기 모인 사람들더러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라고 하신다(44절
참조). 그것은, (1)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일에도, 인간이 할 일은 인간이 해야 된다
는 진리를 여기서도 가르치고, (2)거기 모여 있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적 역사(異蹟
役事)에 수종들므로, 그들은 그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좀 더 인상 깊이, 또는 밀접하
게 체험하게 되어 확신에 이르게 된다.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이것은
마르다의 불신앙을 표시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인간의 냄새 맡는 표
준으로 측량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마르다의 이 말은, 그 이적의 위대를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게 했으니, 곧, 냄새 날 정도로 부패한 시체를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이,
만대(萬代)에 전파될 수 밖에 없다.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
냐 하신대 - 예수님께서 여기 관설하신 말씀은, 25-26절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서 예
수님이 의미하신 바는,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조건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마르다가 불신앙하면, 그 나타날 부활의 이적을 영적 눈으로 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 느낄 수
있다. 불신앙하는 유대인들도 나사로의 부활한 사실을 보기는 보았으나, 거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으로만 보며 느낀다
(Grosheide).
=====11:41,42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
씀 하옵는 것은 둘러 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
게 하려 함이니이다 - 예수님은, 자기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떤 사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언제나 계
속한다고 하여, 여기 "항상"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그는, 이 말씀으로써 자기의 하나
님 아버지와의 교통은 끊임 없는 것임을 지적하신다. 그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에
끊임 없는 교통이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신 까닭이다. 그러므
로 그는, 둘러 선 사람들이 다 듣도록 소리를 내어 그 사실을 기도로 발표하신 것이
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알기를 원하셔서 그 어느 기회에라도 가르
치셨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바로 알아야만 그들이 구원을 받겠기 때
문이다. 그는 언제나 남들의 구원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셨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그는, 진리이시며 공명
정대하시다. 그는, 마술사들의 어물어물 하거나 중얼거리는 것과는 반대로 큰 소리로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죽은 자를 산 자 처럼 불러내신 것이다. 롬 4:17; 요
5:28 참조.
어떤 재미 있는 말이 있다. 곧, 만일 예수님께서 그 묘지에서 "나사로"란 이름을
부르시지 않고 그저 "나오라"고 하셨더라면, 묘지에 묻혔던 모든 시체들이 다 일어나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 이것은,
그 살아 나오는 자가 나사로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그에게 베로 동인
것이 없었다면, 무슨 유령이 아닌가 생각될지도 모를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그 부활 이적의 역사에 무리
들이 수종들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의 진실성을 살깊이 체험하게 하시려고, 이렇
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친히 이루시고도 그 일
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일을 주신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지만, 그 기적 때문에 사람
들이 태만하여지거나 무책임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존귀
한 덕이다.
=====11:45,46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의 결과 두가지를 말한다. 곧,
예수님을 신앙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에, 그를 해하려고 바리새인들에게 고발한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11:47,48
이 부분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승인하고 걱정하
는 내막이 나타났다. 불신앙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악한 방면으로 활동하는 법이다. 예
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중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로마정부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염려였다.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
지 못하는도다 -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 그 시대에 대제사장인 로마 정부의 계획
에 의하여 해마다 변동되는 일이 있었으니 만큼, 가야바도 그 다음 해에는 그 직분을
내놓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그 해"라고 밝힌 것이다(Jos.
Antiq. 18, 2, 2).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
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 가야바의 이 말 뜻은 악한 것이었다. 곧, 예
수님을 따르는 군중 운동 때문에 로마 군대가 유대를 멸할 위험이 있으니, 예수 한 사
람만 희생시키면 유대국은 안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야바의 이 말은, 성령으
로 말미암아 전용되어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유대의 마지막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속죄 고난에 대하여 공직자(公職者)의
처지에서 예언한 것은 중대하다(49-52).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가야바)까지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한 사실은, 참으로 그 속죄의 고난의 중대함과 믿을 만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것이 마치,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에 대하여 예
언한 것과도 같고(민 24:17), 다윗의 원수 사울이 다윗의 일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다(삼상 26:25)
=====11;51,52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그런 큰 예언을 하였
다. 그의 본의는 예수님을 해하려는 악심으로 말한것이었으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
암아 예언으로 이용된다는 뜻이다.
=====11:53,54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구
주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행동은 괴이하다. 그 행동은, 착한 일일수록 반대하는 마귀의
것이다. 예수님은 이기미를 아시고 깊은 광야의 한동네로 피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심
은, 때가 이르기 전에 잡히는 것을 면하시려는데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순종하셨다.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오라갔더니 - 이것은 유월절 전의 결례(潔禮)를 가리킨다. 그것
은, 머리를 깎거나 옷을 빠는 정도의 것이었다. 창 35:2; 출 19:10,11; 수 3:5; 대하
30:17; 행 21:24,26 참조.
=====11:56,57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 때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만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사
실을 알려준다. 여기 예수님에게 대한 민중의 논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님
이 잡힐 위기에 처한 줄 알고 냉정한 태도로 논단한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