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산 이순순(二山 李旬旬)
조법중(덕이)
***신입교도를 위한 구인 선진 이야기
I. 이산 이순순의 생애와 인품
이산 이순순은 1879년 9월1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 수리봉 아래 천기동에서 부친 이다익(李多益)선생과 모친 金여사의 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속명은 인명(仁明)이다. 남의 땅을 밟지않고 다니노라 할 정도로 부유한 살림을 가졌다.
천성이 호걸다워 활달 호협하고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는 남자다운 성격을 가진 반면 온순다정하기도 하였다. 온유선량(溫柔善良)한 성품과 솔성(率性)의 정직함은 교단 초창기 인화(人和)의 표본이 되었다.
몸집이 크고 뚱뚱한 편이며 키가 크고 기상이 늠름하고 의용(儀容)이 활달하였으며, 한때는 어떤 인연으로 서울의 신여성과 가정적 향락생활을 한적도 있었으나 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된 후에는 세간의 향락생활을 일시에 청산하고 결연히 수도에 발심한 무서운 용단력의 소유자였다.
대종사와 교분을 갖고 내왕하던 이산 이순순은 원년(1916)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성취하자 삼산 김기천 종사의 인도로 12살 연하인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여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었다. 또 다른 자료(원불교 통신 강좌)에 의하면 대종사의 외숙인 유성국(劉成國, 七山 劉巾)을 통하여 입문하였다고 한다.
원기 2년(1917) (음) 7월26일 교단의 최초 통치단인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감방(坎方)단원으로 임명되어 허례폐지(虛禮廢止)와 미신타파(迷信打破), 금주(禁酒), 단연(斷煙)등으로 저축조합 (貯蓄組合) 자금조성(資金助成)에 심혈(心血)을 경주하였다.
원기3년(1918) (음)3월 간석지 방언공사(干潟地 防堰工事)가 시작되었을 때 이산 이순순은 동지들과 함께 흙짐을 져 나르는 등 온갖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일호(一毫)의 사심(私心)도 없이 모든 난관을 감수하며 정성을 다했다.
원기 4년(1919) (음)3월26일부터 대종사의 지도를 받으며 다른 단원들과 함께 창생(蒼生)을 구원 할 새 회상창립을 위하여 혈심으로 기도하였고 마침내 사무여한(死無餘恨)의 대서원(大誓願)을 올림으로써 천지신명(天地神明)의 감응을 얻어 백지혈인(白指血印)을 나투었다. 이때 대종사로부터 세계공명(世界共名)으로 봉수받은 법명은 이순순(李旬旬), 법호는 이산(二山)이다. 그 후 전무출신을 단행하지는 못했으나 거진출진(居塵出塵)으로서 회상(會上)의 발전에 협조하였다.
원기 26년(1941) 63세를 일기로 영광에서 열반하였다. 유해는 영광군 백수면 구수산(靈光郡 白岫面 九岫山)에 안장되었다가 원기 70년(1985) (음)3월 왕궁 영모묘원 법훈 묘역(王宮 永慕墓園 法勳 墓域)에 이장했다. 제1대 성업봉찬회시 법위(聖業奉讚會時 法位)가 정식법마상전급(定式法魔相戰級)이요, 사업등급(事業等級) 정4등으로 원성적(元成績)은 거진출진(居塵出塵) 준3등 77인중 37호였다.
법위는 원기 62년(1977) (음)3월29일 제2대 2회말 결산시 수위단회에서 정식법강항마위(正式法强降魔位)로 추존(推尊)되었고, 이어 원기 70년(1985) 3월20일 제103호 임시수위단회의 결의에 의해 대호법(大護法)의 법훈이 증여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본일화님과의 사이에 딸 이진친과 사위 배영록이 있었으나 사망하였다.
II. 소태산 대종사와의 관계 일화
1. 대종사의 부채 청산(負債 淸算)을 도와 주다
이산 이순순은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하기 전부터 대종사의 외숙인 유성국(七山 劉巾)과의 친분으로 이미 교분이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하기 6년 전인 21세(1911년)시 이인명(李仁明)의 나이가 32세였다. 이산 이순순은 인근 동네에 사는 소태산 대종사가 세상을 알지 못하는(不知世上) 가운데 분별없이 입정에 들어 생활의 곤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고 배편을 마련하여 전라남도 서해상의 안마군도에 속해있는 작은 섬인 타리섬으로 장사를 떠나기로 작정한 이인명은 대종사를 찾아가 함께 장사 가기를 권하였다.
대종사가 귀영바위집에 있는 가족과 상의하고 응낙하여 이산 이순순(이인명)에게 보리 석섬을 빌려 민어파시(民魚波市) 떠날 준비를 하였다. 수 개월간(6월~10월)의 장삿길에서 배꾼에게 필요한 물자와 먹고 살 살림도구를 장만하여 외삼촌인 유성국(칠산 유건,1880~1963)과 바랭이네(사타원 이원화, 四陀圓 李願華 1884~1964)와 함께 떠났다.
장사가 예상외로 잘 되어 대종사의 가정으로 하여금 곤경을 면하게 하여 대종사의 부친이 남긴 부채를 청산하고 대종사는 다시금 구도에 정진 할 수 있었다.
2. 대종사 집의 지붕 고치다.
대종사가 23세(1913년) 귀영바위집이 무너지고 노루목(장항,獐項)으로 이사하여 입정상태에 들어 있을 무렵 어느 비오는 여름 날, 사나운 비바람이 지붕나래를 걷어가 버렸다.
대종사는 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입정삼매(入定三昧)에 들어있었다(入定頓忘). 이때 이산 이순순은 불가사의한 힘에 이끌려서 자신도 모르게 노루목(獐項)의 소태산 대종사의 외딴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지붕을 고쳤다.
3. 대종사가 재가공부 하는 법을 지도하다
[재가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소태산 대종사는 익산에 총부를 건설한 후 영산에 내려갔다가 이산 이순순에게 정정(定靜)을 얻는 외정정(外定靜)과 내정정(內定靜)의 두 가지 길과 관련하여 물으시기를 “그대는 재가공부를 어떻게 하는가?” 하였다. 순순이 사뢰기를 “마음 안정하기를 주장하나이다” 또 물으시기를 “어떠한 방법으로 안정을 주장하는가?” 순순이 사뢰기를 “그저 안정하고자 할 따름이옵고 특별한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무릇,사람에게는 항상 동과 정 두 때가 있고 정정(定靜)을 얻는 법도 외정정과 내정정의 두가지 길이 있나니, 외정정(外定靜)은 동하는 경계를 당할 때에 반드시 대의(大義)를 세우고 취사를 먼저하여 망녕되고 번거한 일을 짓지 아니하는 것으로 정신을 요란하게 하는 마(魔)의 근원을 없이하는 것이요.
내정정(內靜定)은 일이 없을 때에 염불과 좌선도 하며 기타 무슨 방법으로든지 일어나는 번뇌를 잠재우는 것으로 온전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것이니 외정정은 내정정의 근본이 되고 내정정은 외정정의 근본이 되어 내와 외를 아울러 진행하여야만 참다운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리라.] (대종경 수행품19장) 며 재가공부(在家工夫) 하는 법을 지도하였다.
참고사항
1. 송인걸 교무의 [대종경 속의 사람들, 월간 원광사, 1996년]에서의 주장과 서문성 교무의 [원불교 성지, 원불교 출판사, 1999]와는 다르게 서문 성 교무의[대산종사 탄생 백주년 해설사 교재, 2013]에서는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28년에 열반하자 총부로 달려와 스승을 잃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최초 9인 제자 중 생존해 있는 동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원기 30년(1945년) 67세로 영광에서 열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원불교 용어사전과 원불교 대사전에는 이순순의 생애에서 1879년 탄생, 1941년 열반으로 밝히고 있어서 송인걸교무의 주장과 동일하다.
2. 타리섬 : 임자면에있는 섬으로성어기(盛漁基)만 되면 계절적으로 일어나는 해상 어시장이 형성된곳이다. 당시 유명한 민어파시로 유명하며 음력 4월부터 8월까지가 성어기이다.
3. 파시(波市): 풍어기(豐漁基) 뱃사람들에게 식량 등 물자를 대주고 바다위에서 잡아온 생선과 교환, 방매하는 생선시장
4. 바랭이네는 대종사 21세(1911년)에 만나서 뒷바라지를 해준 사타원 이원화로 전무출신 제1호이다.
5. 부채: 월말통신에 의하면 대종사 20세인 1910년 11월 30일(음 10월 29일) 부친상을 당하고 가세가 기울어져 영광 읍내 부자집에서 빌린 부채라고도 한다.
6. 지붕고치는 일화: 손정윤 교무의 [소태산 대종사 일화]에서 인용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