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역시 수도원이 아니라 주교들의 학교를 중심으로 실시했으며
수도원 출신이 아닌 성직자와 정부가 사회의 질서를 보장해 주었다.
따라서 문화의 휴식처로서 수도원의 기능도 이젠 쓸모없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시토 수도회였다.
1098년 베네딕트의 규칙을 주장한 몰렘의 로베르 몰레즘은 개혁파 수도사들과 함께 시토 수도회를 세운다.
그들은 클루니 수도원의 과거와는 완전히 작별을 고했다.
시토 수도회는 청빈을 강조하기 위해 겉옷조차도 염색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의 백의의 수도사라고 불렀다.
클루니의 화려함을 비판하면서 조용함과 간소함을 강조하고 손으로 하는 노동을 강조했다. 그리고 귀족들로부터 토지를 기중받기보다는 직접 농토를 개간했다.
그들은 미리부터 그러한 환경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시토 수도원을 가장 황량한 곳에 세웠다. 수도원의 제3대 원장인 하딩은 수도원의 규칙을 작성했다.
[학문 대신 노동을 하고 공동 기도보다 개인 기도를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 어떤 선물이나 평신도들의 후원도 받지 않는다.
종은 고용하시조 않는다.
우리는 일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외에도 목수일이나 그 외 생활에 필요한 다른 일들도 직접 감당했다.
시토 수도원은 그야말로 평범해서 장식이나 보물이 없었다.
수도사들은 겨울에 7시간 여름엔 6시간 자고 주기적으로 공동 기도를 위해 모였다.
그들은 채소와 생선과 치즈를 매우 알뜰하게 먹었다.
가장 추운 지방에서조차 성탄절에만 불을 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1112년 무렵 수도사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었다.
수도원의 규칙이 너무 쎄서 버티는 자들이 없었기때문이다.
수도원장이 수도원 문을 닫기로 결심하고 포기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찾아왔다.
밖에는 수도사가 되고 싶어서 찾아온 31명의 사내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 가운데 클레르보 버나드가 끼어있었다.
그는 중세의 위대한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최초의 인물로서 금욕성 단순성과 개인적인 신앙심을 가르친 지도자 였다.
프랑스 다롱 근처의 귀족 가무에서 태어난 그는 교황 그레고리와 클루니의 개혁에 영향을 받았다.
젊어서부터 수사학과 문법과 논리학을 교육받은 그가
거친 손 강의 골짜기에 위치한 시토 수도원을 찾은 때가 21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1115년에 샹파뉴 지역에 새로운 클레르보의 집을 세우기 위해 12명의 시토회 회원을 데리고 갔다.
버나드는 세상의 안락함에 등을 돌리고 기도와 자기 부인의 삶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버나드는 나중에 클레르보에 세워진 65개 이상의 수도원 중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으며 대수도원장으로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경 아가서에 대한 그의 설교와 그의 작품[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이유와 방법]은 그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그는 그 시대의 권세 있는 자들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데 주절하질 않았다.
1130년 아나클레투스 2세와 이노센트2세가 서로 자기가 로마 교황이라고 주장할 때 인노센트 2세가 로마의 진정한 교황이라고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나머지 유럽 지역도 그를 후원하라고 명령한다.
그는 왕 루이7세의 봉신들을 화해 시키기도 했으며
성전 기사단을 위한 규칙을 마련해 주고
피터 아벨라르의 스콜라주의적인 합리주의를 정죄했으며
제2의 십자군 운동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세속의 일에 개입하면서도 전혀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버나드는 죽는 날까지 철저한 금요주의와 자기 부인을 실천했다.
그는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통해 사랑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
버나드의 주장은 당시 진노한 심판관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많이 달랐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역약함도 가셨다고 말해주었다.
이 후로 아기 예수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림이 나타났고
진노한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바뀌지기 시작했다.
버나드가 죽은 후에도 시토 수도회는 1300년까지 600개 이상의 수도원과 수녀회가 생겨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생삭지도 못한 곳에서 수도원의 쇠퇴는 시작되었다.
수도원을 워낙 험한 지역에 세우다 보니 그곳에서 생존하기 위한 벙법들을 점점 발전시켰다.
먼저 황무지를 비옥한 농토로 바꿔야 했고 그러다 보니 농사기술이 발달했다.
그들의 뛰어난 농사 기술은 많은 수확략으로 이어졌고 또한 유명해졌다.
그러자 점점 수도사들은 농사일을 평수사들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개간된 넓은 토지와 평수사들의 노동으로 많은 부를 쌓게 되자 이젠 그들도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세상적인 성공은 시토 수사회 내부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깨뜨렸다.
중세의 신비주의자 중에서 여성은 빙겐의 힐데가르트(1098-1179)가 단연 돋보였다.
그녀는 1098년 라인헤센 지역 베르메스하님에서 작위가 없는 귀족 집안의 열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고 5세부터는 하늘의 환상을 보곤 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녀의 부모는 당시 흔히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주께 바쳤다.
그녀는 8세 때에 베네딕트 수도원에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유타란 스승에게 훈련을 받는다.
그년는 끊임없는 환상을 보았지만 유타의 충고를 듣고 그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녀는 라틴어를 제대로 학습한 적이 없는데도 기도하면서 깨우쳤고
스스로 시편에 음을 붙이고 노래하다가 작곡도 하게 되었다.
그녀는 38세에 스승 유타의 뒤를 이어 수녀회 원장으로 선출된다.
1141년 그녀가 43세가 되던 해에 하늘로서 내리는 새로운 환상을 체험한다.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
당신에는 여성이 세상에 나선다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수녀의 신분은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자기가 보고 들은 환상들을 부인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지로 되지 않았다.
1151년 그녀는 자신이 목격한 환상을 엮어서[길을 알라]라는 책을 출판한다.
그녀는 그 책을 먼저 클레르보의 버나드에게 보이고 자문을 구했다.
그녀의 글들은 당시 교회와 세상을 향한 쓴소리들이 많아서 자칫하면 이단으로 낙인 찍힐 수 있었다. 버나드는 그녀의 글을 교황에게 보여주었고 교황은 그녀의 글에 잘못된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로 그녀는 세상에 나와 자신이 하늘로부터 받은 비전들을 빠짐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다양한 재능이 있었다.
음악가이며 예술가이며 작가에 설교자이자 예언가였고 의학 관련 책도 여러 권 집팔한, 당시로선 매우 귀한 재능을 소유한 여성 신비주의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신비주의적인 체험들을 말해 주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견고케 해주었다.
힐데가르트는 어느날 도 한 번의 환영을 받고 지금의 수도원을 벗어나서 수녀원을 만들려고 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놀랍고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그녀의 명성으로 인해 귀족과 왕들로 부터 많은 기부를 받고 있던 수도원은 그녀의 독립을 원치 않았다.
매우 파격적인 그녀의 시도를 방해하는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수녀원을 설립할 만큼 돈을 모을수 있었다.
결국 그녀는 1147-1151년에 라인강과 나에 강이 연결되는 위치에 수녀원을 지었다.
이일로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추종자들은 더욱 늘었다.
후에 그녀는 라인강 건너편 아이빙겐 지역에 새로운 수녀원을 짓고 양쪽수녀원의 원장을 겸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을 벵겐의 힐데가릍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독일 지역 전체를 순회하며 열정적인 설교를 하고 수많은 곡을 지어 주의 영광을 찬양했다.
그녀가 80세 되던 해, 마인츠의 주교가 그녀를 탄핵했고 그녀의 수녀단은 교회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녀의 열정적인 사역은 계속된다.
1400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인츠주교의 고발을 무시하고 그녀를 공식적인 성인 반열에 올린다. 중세의 암울했던 시기에 버나드나 힐데가르트 같은 신비주의자들은 영적인 갈급함에 지친 이들에게 한 줄기 빛이 도어 대중의 신앙회복에 많은 힘이 되었다.
당시 많은 수도사들이 실천적으로 청빈의 삶을 택하여 수도원에서 자기 부인과 금욕을 지키며 살았지만 청빈의 적수인 탐욕이 이들을 부유게 함으로써 공동체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계속 많은 이들이 청빈의 삶을 택하며 헌신의 삶을 살기 원했다.
수도사들의 자발적인 청빈의 생활은 일반 신자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12,13세기엔 일반 신자들이 교회 주교나 수사들의 설교에 의지하기보다
일상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따르는 현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자발적인 청빈 운동은 부패한 성직자들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되었다.
보통 사회가 급변하고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불안한 시기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설득력을 얻는다.
성직자들이 모두 돈에 눈이 멀어서 초대교회로 가기 싫은 상활을 일반 신자들은 분노하고 만다.
청빈 운동을 힘있게 외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가 영적으로 매우 갈급한 상태라는 것이다. 신자들의 영적 목마름이 갈급할 때 진정한 성직자의 모습은 매우 찾아보기 힘들었다.
잉글랜드 서포크 출생으로 1235년 링컨의 주교가 된 로버트 그로스테스트는 당시 상황을 말했다.
":현재 성직자들의 탐욕이나 부도덕은 정말 한심스럽다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의 생활은 온갖 위선과 악함투성이다
이처럼 불행한 시대를 만든 것은 바로 교황청이다"
그는 교황청이 모범된 성직자을 임명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파괴자들을 세운다고 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수도원 운동의 청빈의 외침은 늘 있어 왔다.
개혁 수도사들의 주장대로 만일 사도적 청빈이 기독교의 이상이라면
화려하고 큰 저택에 사는 주교들과 돈 많은 수도원에 사는 수도사들은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인은 아니라고 개혁 수도사들은 믿었다.
전부터 청빈이란 개혁의 구호들은 끊임없이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교회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변함없이 그대로 흘러왔다.
그런데 12,13세기에는 사도적 청빈을 주장하는 설교가들의 변화된 형태가 나타났다.
바로 제도권에 도전하는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잘못되어 가고 잇는 것을 두 눈뜨고 볼수 없고 그게 설령 교회라 해도 뜯어 고쳐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이단이란 세례받은 신자가 기독교 신앙의 계시된 교리에 부정하는 것을 말했다.
교회의 수장인 교황과 그 교회에 대항한 불복종은 이단으로 정죄당했다.
이런 정의는 교황이 조직을 유지하는 방법으론 유익했지만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니었다. 당시의 기독교권은 성경이 가르침은 신앙이 아니라 교권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다. 교회는 이단들에 대해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또 하나는 이단으로부터 기독교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다.
근데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교회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를 지킨다는 이유로 이단자를 죽이고 있는것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단에 대한 대응 방법 논란은 교회를 분쟁케 했다.
사회 평화를 위해서 교회가 폭력을 사용해도 되는가?
결국 교회가 내린 결론은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과는 전혀 달랐고 성경적이지도 않았다.
[이단들에 대한 종교재판소를 설치한다]
교회는 이단들을 처형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게 고문하는 방법도 선택을 했다.
이단이란 한 마리의 괴물을 잡기 위해 교회는 6마리의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악마적인 모습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교도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십자군을 보낸 교회가 이단자들을 처형하기 위해서도 십자군을 활용했다.
당시 상황과 정서로는 그러한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당시 청빈을 주장하며 카톨릭 교회의 세속성을 비판한 인물이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 브레스치아 수도원장 아놀드원징이다.
그는 주장했다.
"성직자와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악핟.
교회는 쌓아놓은 돈과 권력을 국가에 돌려주고 소박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진정한 교회와 그에 속한 목회자들은 부와 재산을 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쌓아놓은 재산은 구원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아놀드의 주장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교회나 성직자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이 일로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한 아놀드는 파리의 스승 피터 아벨라르를 찾아간다.
피터 아벨라르를 정죄한 클레르보의 버나드는 그에게도 분노를 발전시킨다.
"아놀드는 양가죽을 쓴이리와 같은 자다"
아놀드는 5년후에 로마에 돌아와 교황의 세력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한다.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교황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세속 정보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성직자들은 사도들같이 청빈한 생활을 해야한다.
강도의 굴혈이 누군지 아는가?
바로 추기경단이다"
-----만화, 한눈에 읽는 교회사----발췌
종교 개혁 이전의 종교 개력운동 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