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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31) 2023. 7. 5
마음의 빗장을 지르지 말라
삼하 13:15-22
<암논의 욕정과 범죄>
다윗의 첫째 아들인 암논은 이복동생 다말의 미모에 흠뻑 빠졌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면서 근친상간을 금지하셨습니다.
레 18:9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이나 집에서나 다른 곳에서 출생하였음을 막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레 18:11 “네 아버지의 아내가 네 아버지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가족 간의 성적인 관계를 철저히 금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논이 자신의 이복동생인 다말에 대하여 욕망을 품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율례를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암논이 다말을 사랑하여, 그 결과 ‘울화로 말미암아 병’(상사병)에 걸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암논이라는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배려도 없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다말을 범한 이후 벌어질 가족의 상처, 곧 다말과 그의 오빠 압살롬은 물론 아버지 다윗이 받은 충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다말을 범할 기회를 찾고 있을 때, 심히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찾아옵니다. 그는 다윗의 형의 아들이므로 사촌지간입니다. 그런데 그는 암몬이 병에 걸린 이유를 듣고는, 간사한 자답게 간교한 꾀를 냅니다. 아픈 척하다가 아버지가 병문안을 오면, 다말을 통해 떡을 만들어 먹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답은 진정한 친구가 아닙니다.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가 망하는 길로 인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답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다윗의 가문을 질투하고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상대적 박탈감)
그는 지금 다윗 가문과 암논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너짐을 보면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간교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미련한 암논은 요나답의 내면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요나답이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버지 다윗이 찾아오자, 누이 다말이 와서 과자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명을 받고 자신을 위해 과자를 만들어 온 다말을 힘으로 욕보입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위대한 왕 다윗의 집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나단의 예언대로 다윗의 집에 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리석은 암논>
더 큰 문제는 암논이 다말을 범한 이후에 일어납니다.
15절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암논의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암논의 사랑은 단순한 욕정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다말을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 하였습니다.
율법에는 처녀와 동침한 경우 어떻게 해야 한다고 기록되었을까요?
출 22:16~17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17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납폐금이란 여인을 아내로 맞는 대가로 그 여인의 부모에게 비치는 돈(지참금 - 신22:28-29은 50세겔, 1,400만원?).
율법상 결혼하지 않은 처녀와 동침하였으면, 그 처녀와 결혼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다만 강간을 당한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강간한 자에게 주는 것을 거절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암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찾아가 다말과 결혼시켜 달라고 요청하든지,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암논은 다말을 그냥 내어 쫓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마음을 다스릴 시간적 여유도 안 주고 “일어나 가라”고 명령조로 말합니다. 그의 행동에서 다말을 배려하거나 존중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암논이 지독한 ‘자기애성 성격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집중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그가 다말을 범하고 그녀를 내어 쫓음으로써 자신의 경쟁자인 압살롬까지도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석합니다. 경쟁자를 모독하고, 자신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암논의 이런 행동은 이방인보다 못한 행동입니다.
창34장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이방 민족인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부끄러움을 당한 내용이 나옵니다.
창34:1~4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4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잘못한 행동이었지만, 적어도 세겜은 디나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암논은 이방인만도 못한 처신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사랑관(결혼관)을 가져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인격적이며 영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엡5:22~28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표현은 구시대적일 모르지만, 그 원리는 분명합니다. ‘존중’과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가 건강하고 행복한 부부관계를 이루는 기초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청년이 올바른 ‘사랑관’을 갖게 되기를, 모든 부부가 건강한 ‘부부관계’를 통해 행복한 가정을 일구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의 빗장을 지르지 말라>
암논의 행동에 충격은 받은 다말은 암논을 설득하려 합니다.
16~18절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17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18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다말은 자신을 쫓아내는 것이 자신을 겁탈한 것보다 더 큰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호소하며 자신을 쫓아내지 말도록 호소합니다. 그러나 암논은 종을 시켜 다말을 집 밖으로 쫓아내고 문빗장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저는 ‘문빗장을 지르라’는 말이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집의 문을 닫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의 ‘양심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는 결국 그 자신을 스스로 멸망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암논이 다말을 범하고 그녀를 쫓아내려고 하였을 때 그녀의 말을 듣고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 회개하며 다말을 책임지려는 자세를 가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훗날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였을까요? 만약이란 것은 없는 것이지만 암논의 다말을 범한 후에 그녀를 향한 마음의 문빗장만 지르지 않았다면 그는 최소한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도 한순간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밧세바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충신을 살해하는 죄까지 범했습니다. 죄의 크기만 본다면, 암논의 죄보다 다윗의 죄가 더 큽니다.
그런데 다윗은 암논과 달리 나단으로부터 죄의 책망을 들었을 때, 나단을 쫓아내고 문빗장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빗장을 지르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즉시 회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자신의 생명의 보존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비록 그 죗값을 치러야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언제든지 죄를 범할 가능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 알게 모르게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 삽니다.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항상 ‘마음의 빗장을 지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될 때 책임지려는 자세, 회개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주위 사람의 책망을 통해서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성령님의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를 통해서도 우리의 ‘마비된 양심’을 깨우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억울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의 빗장을 지르지 마시고’, 열린 자세로 ‘나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속히 회개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쫓겨난 다말의 반응>
그러면, 쫓겨난 다말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19절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머리에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재는 슬픔과 재앙의 표현입니다.
처녀임을 나타내는 채색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자기 처소로 돌아가서 크게 울었습니다. “손을 머리 위에 얹은 것”은 참담한 슬픔의 표현입니다(참조. 렘 2:37).
다말은 마치 과부가 된 양 애곡하는 자와 같이 행동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공식적으로 부끄러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암논을 고소한 것입니다. 암논은 아버지처럼 자신의 잘못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덮이기를 바랐을지 모르나 다말은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이 당한 일을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압살롬의 반응>
이 소식은 압살롬에게 전해졌습니다.
20~22절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22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압살롬은 다말에게 ‘지금은 잠잠히 있자’고 말합니다. 압살롬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 다윗이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암논에게 복수할 좋은 묘책이 떠오를 때까지는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암논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복수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입니다. 암논이 방심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치밀한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22-29절).
<다윗의 대처>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대처에 만족했을까요?
21절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다윗은 분개했습니다. 당연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어떻게 했을까요?
율법에 의하면, 암논의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레20:17).
그러나 다윗은 홀로 분노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자식의 잘못을 징계하는 것도 역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암논에 잘못에 대하여 아무런 징계도 하지 못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암논의 장자였습니다.
다른 자식들보다 더 아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70인 역(LXX)은 "암논이 장자인고로 다윗이 그를 사랑하여 암논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 왕가의 명예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범한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밧세바를 범한 그가 큰아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암논을 꾸짖는데 결코 당당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밧세바를 범한 이후, 약점이 드러나다 보니 모든 일이 '내로남불'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 아들의 죄를 심판할 자격을 이미 상실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자가 죄에 대하여 더욱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지도자의 권위는 ‘신뢰’에서 옵니다. 죄는 ‘신뢰’를 갉아 먹습니다. ‘신뢰’가 상실되면, 지도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다윗은 암논에 대해 ‘사형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거운 징계를 내렸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나라와 왕실의 공의를 세우고, 나라의 기강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징계가 있어야 암논도 회개할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야 압살롬의 분노와 보복 심리도 완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무기력한 아버지에 대한 실망은, 형에 대한 보복뿐 아니라, 다윗에 대한 반역까지 유발하였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방관이 앞으로 더 큰 비극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첫째, 부부간에 ‘존중과 사랑’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십시오.
둘째, ‘마음의 빗장을 지르지 마십시다.’
열린 마음으로 언제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혹시 나의 잘못이나 실수로 인하여 상처받은 사람이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서로 용서를 구하고, 치유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부모로서 우리의 자녀가 주 안에서 바로 세워지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준엄하게 징계하여 그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곧 부모의 참된 역할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러기 위해선 부모가 먼저 신앙의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신앙의 본을 보임으로, 자녀들에게 ‘신뢰’를 얻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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