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합니다.” 어떤 특별한 시작을 맞이한 사람에게 흔히 건네는 관용적인 인사말.
하지만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건 몸으로 아는 일이다. 심장이 저릿해지는 일이다. 가슴 저릿하게 한 존재를 위해 복을 빌어본 적이 있었던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던, 존재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 행복하길...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빌어준 적이 있었던가?
수수께끼투성이 낯선 우주에서 언제나 미소 지으며 너의 빛으로 충만하길.. 너와 함께 하는 이 순간, 너의 빛을 느끼고 있는 이 순간을 영원처럼 간직하고 싶다고. 그리하여 칠흑같은 낯선 어둠 속을 흘러갈 때도 나는 너의 빛을 느끼며 안도할 수 있을 거라고. 한 존재의 광휘를 느끼며 기꺼이 받아들인 적이 있었던가? 축복이란 이런 마음이라는 걸 한 번이라도 알아챈 적이 있었을까?
언젠가부터 시작된 의례. 오전 산책을 마친 땅꼬가 늦은 식사를 준비하는 나를 조르면, 포옹의 시간이다. 식사 준비를 중단하고, 또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소파로 이동해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쓸어주는 시간, 땅꼬가 드물게 골골송을 부르는 순간. 오침에 들기 전 이 통과의례를 요청하는 땅꼬. 양 어깨에 올린 앞발, 왼쪽 볼을 마주대고 심장을 포갠 후 땅꼬의 보드라운 감촉과 따뜻한 체온, 골골거리는 울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베란다 창 건너 봄 하늘과 산을 바라본다. 심장에서 몽글몽글 무언가 부풀어 올라 안개처럼 번져가는 내 몸 안으로 한 줄기 빛이 뚝 떨어져 흘러간다. 그 빛줄기를 내감으로 응시하던 중...“축복합니다.”라는 말이 차올랐다.
동거한지 7년째...
공동현관까지 아침 산책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일은 7년차 집사에겐 그저 동거를 위해 치루는 번거로운 일과로 다가오지만, 그건 평화로운 시기, 긴장감을 놓았을 때 허락되는 귀찮음이다. 땅꼬가 돌아오지 않는 마중의 순간, 배웅과 마중은 일상이 아닌 중대사가 되어 버린다. 이 산책이 우리의 영원한 이별이 되지는 않을까? 아침 산책 후 포옹을 요청하는 땅꼬는 어쩌면 영원한 이별의 위험에서 생환한 기쁨, 재회의 안도감을 맘껏 누리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땅꼬에게 아침 산책의 목적은 산책 그 자체보다도 이 재회의 안도감을 누리데 있는 것은 아닐까. 매너리즘에 빠져버릴 수도 있는 관계를 기적으로 갱신하는 땅꼬만의 관계의 기술은 아닐까. 서로의 존재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것을 매일 일깨우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 땅꼬.
사람으로 사람 속에서 55년을 살아왔으면서도, “축복합니다”라는 말을 남발하면서도... 7년을 함께 산 삼색이 고양이를 안고 나는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사랑, 정의, 신, 영원... 인간으로 살면서 남발하는 개념들. 알지도 못하면서 쓰는 거창한 말들. 축복은 안다고 생각했다.
부끄럽지만...늦었지만...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