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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33) 2025. 3. 5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열왕기상 13:33~14:20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여로보암의 잘못된 종교정책에 대하여 하나님의 책망을 전한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가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고 하셨다는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의 집에 가서 떡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 결과,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들었고, 결국 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그를 죽이기만 했지, 시체를 훼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타고 가던 나귀도 물어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이 그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그의 시신을 자신의 묘실에 두었고, 자신이 죽으면 그의 옆에 눕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여로보암은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기에 당한 일을 보고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13:33~34절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34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이런 일이 생긴 뒤에도,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일반 백성 가운데서,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산당의 제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본래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출 28:1-4)].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을 견디지 못하고, 신앙의 자유와 참된 제사를 갈구하던 사람들은 부득이 남유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대하 11:13-17).
<아들이 병이 들다>
14장에서는 여로보암의 가정에 있었던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3절 “그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2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 3 그대의 손에 떡 열 개와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그가 그대에게 이 아이가 어떻게 될지를 알게 하리라.”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든 것입니다.
‘아비야’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여호와’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좋은 의미를 담아 짓듯,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짓습니다. 여로보암이 아들의 이름을 ‘아비야’라고 지은 것은 그가 아들을 낳을 때만 해도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 역시 자신의 아들 이름을 ‘아비야’로 지었습니다(대상3:10). 둘이 상의해서 아들을 낳으면 ‘아비야’라고 짓자고 약속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서로 원수지간 아닙니까? 아마도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은 남북으로 나누어진 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서, 자신의 왕국이 그리고 자신의 왕위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나의 아버지는 여호와’라는 뜻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로보암이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계속해서 유지했다면 그의 왕국은 멸망의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
아마도 아들 ‘아비야’의 병은 의술로는 고치기 어려운 중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로보암은 아들의 질병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세 가지 행동을 합니다.
(1) 아히야 선지자를 생각해 냅니다.
아히야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이전에 자신이 왕 될 것을 예언했던 분입니다(11:29-40). 평소에 옆에 두고 그분의 지도를 받았다면 이렇게까지 하나님과 멀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가 없을 때에는 자기 맘대로 행하다가 감당치 못할 문제가 생기니 그제야 선지자 아히야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야 선지자는 ‘실로’에 있었습니다. '실로'는 벧엘 북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입니다. 이곳은 여호수아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 동안 법궤와 성막이 머무른 바 있는 종교 중심지입니다(삼상 4:3~4). 그런데 17절은 당시 여로보암의 집이 '디르사'에 있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데 디르사에서 실로까지는 48km 이상의 거리입니다. 물리적인 거리만큼 심정적으로도 멀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멀어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분이기에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이 직접 아히야와 대면하기를 꺼렸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히야가 권고한 순종의 길(11:37~38)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에게 다윗의 신앙을 본받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의 왕조가 계속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3) 자신의 아내를 대신 보내는데, 혹시 아내도 알아볼까 두려워 평범한 아낙네로 변장시켜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를 찾아갈 때 자신의 수준에 맞는 예물을 가져가는 것이 상례(常例)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떡 열 개와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평민이 보통 선사할 수 있는 정도의 예물입니다. 즉 겉모습만 속인 것이 아니라 예물도 평민의 수준으로 속여 가져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어리석은 잔꾀에 불과하였습니다.
4~5절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 5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자기 아들이 병들었으므로 네게 물으로 오나니 너는 이러이러하게 대답하라 그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 체함이니라.”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중심을 보시는 분).
당시 아히야 선지자는 나이가 들어서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히야 선지자에게 여로보암의 아내가 자기의 병든 아들의 일을 물으려고, 네게로 오리라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여로보암에게 심판을 예고하는 아히야>
여로보암의 아내가 문에 들어설 때에, 아히야는 그의 발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6~9절 “그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아내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을 네게 전하리니/ 7 가서 여로보암에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8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내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따르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9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아히야 선지자는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직설적으로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고 책망하고는 여로보암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여로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을 담은 내용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7절).
나라를 찢어서 맡기셨을 때,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다윗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기를 기대하셨습니다(8절).
그런데 오히려 이전 사람들보다 더 악을 행하고, 다른 신을 만들고 우상을 부어 하나님을 노엽게 했습니다(9절).
이러한 여로보암의 행위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9절). 이 표현(겔 23:35)은 하나님을 최대한으로 경멸하고 무시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결과로 여로보암 집을 향한 무서운 재앙을 선포합니다.
10~11절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11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하셨나니.”
정말 무서운 재앙입니다. 여로보암 가문에 속한 남자는, 종이거나 자유인이거나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두 끊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컨대 마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리는 것같이 말갛게 쓸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름’(갈랄)은 원래 '구르다'는 뜻의 동사인데, '길에 굴러다니는 것', 즉 '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라고 표현했는데, 누가 똥을 치울 때 아쉬워하겠습니까? 똥을 치우는 것처럼 남김없이 치워버릴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람이 성읍 안에서 죽으면 개들이 먹어 치울 것이고, 성읍 바깥의 들에서 죽은 사람들은 하늘의 새들이 와서 쪼아 먹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로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노여움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입니다. 시체가 무덤에 안장(安葬)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은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큰 수치였습니다(13:30). 더구나 시신이 야수(野獸)의 밥으로 먹히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최대의 오욕과 불명예라 할 수 있습니다(삼상 17:46, 시 79:2, 렘 7:33, 16:4, 34:20, 겔 29:5).
이 심판의 말씀은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의 때에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14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한 왕을 일으키신즉 그가 그 날에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리리라 언제냐 하니 곧 이제라.”
여로보암 왕조는 2대로 그치고 멸절되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즉위 2년 만에 살해당하면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것입니다. 잇사갈 지파의 바아사가 일어나 여로보암의 집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쓸어버립니다(15:25-30).
<아이의 죽음을 예고하는 아히야>
그렇다면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12~13절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읍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지라/ 13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선지자는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이제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가 성읍 안에 들어설 때에 아이는 곧 죽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실제로 여로보암의 아내가 집 문지방에 이르렀을 때 아비야는 죽습니다.
17~18절 “여로보암의 아내가 일어나 디르사로 돌아가서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그 아이가 죽은지라/ 18 온 이스라엘이 그를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슬퍼하니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비야의 죽음이 안타깝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다니 얼마나 아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오직 그만이 여로보암의 집안에 내려진 저주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은 이렇습니다.
(1)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 '슬퍼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왕자는 지금까지 백성의 촉망을 받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오직 이 아이만 들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훗날 아무 데나 버려져 짐승의 먹이가 될 다른 가족의 주검에 비하면 이는 거의 축복에 가까운 죽음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비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던 것입니다(13). 이때 아비야가 몇 살쯤 되었을까요? 우리말 ‘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는 ‘청소년’ 혹은 ‘젊은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비야는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분명한 의지에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뜻’을 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무엇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여로보암에 대한 책망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금송아지 제의에 대해서 어떤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편 유대교 랍비 전승에 의하면, 이 아들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백성들을 저지하라는 부친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길에 세운 장애물을 치워 주었다고 합니다(B hr,Pulpit Commentary).
아무튼, 아비아는 여로보암의 모든 권속에게 닥쳤던 참화를 겪지 않고 죽었다는 점에서 축복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57: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아비야’를 일찍 데려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높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지혜로 따라잡을 수 없음, 사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만일 ‘아비야’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때까지 하나님을 향한 선한 뜻을 계속 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북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의 종교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던 아비야 보다는 자신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 나갈 나답을 더 좋아했기에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나답은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왕상15:25-26).
<북이스라엘을 흩으시는 하나님>
문제는 한 사람의 범죄로 끝나지 않는 데 있습니다.
15~16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같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그의 조상들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뽑아 그들을 강 너머로 흩으시리니 그들이 아세라 상을 만들어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음이니라/ 16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여로보암은 자기도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된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북이스라엘이 뽑혀 강 너머로 흩어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앗수르에 망함).
<여로보암의 죽음>
여로보암은 22년 동안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있다가 죽었습니다.
19~20절 “여로보암의 그 남은 행적 곧 그가 어떻게 싸웠는지와 어떻게 다스렸는지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20 여로보암이 왕이 된 지 이십이 년이라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로보암은 스물두 해 동안 다스린 뒤에, 조상들과 함께 잠들고, 그의 아들 나답이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습니다.
아히야의 불길한 예언(10~11, 14~16절)에 비하면 열왕기의 간략한 기록은 마치 여로보암이 평온한 임종을 맞은 듯이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역대기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유다 왕 아비야에게 벧엘마저 빼앗기는 패전의 수모를 겪은 후 죽었습니다. 그리고 역대기는 그 사실을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대하 13:13-20).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여로보암이 패전의 여파로 얻은 지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몇 가지 신앙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아무리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택을 했더라도, 만일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빨리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은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남유다와 구별되어 자신들만의 신앙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유다에서 온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이 도입한 금송아지 제의가 우상숭배로 흐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여로보암이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면 빨리 고쳐야 합니다. 그러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여로보암은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정, 교회, 일터에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선한 동기로 시작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만일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면 절대로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지혜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내 생각으로 무조건 밀어붙이다가는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됩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변장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시 33:13~15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 15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 미래의 일을 궁금해하기보다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아이가 살지 죽을지에 대한 것보다 여로보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고, 오직 아이가 나을지 그 미래의 일만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미래의 일을 궁금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십니다. 미래가 불안하게 보여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불안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넷째, 우리는 늘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코람 데오 – 하나님 앞에서).
여로보암의 행위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9절). 이 표현(겔 23:35)은 하나님을 최대한으로 경멸하고 무시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태도를 가리켜 종종 '눈을 하나님을 향하여 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시 25:15, 119:37, 123:2, 141:8). 그런데 여로보암의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돌렸을 뿐 아니라, 아예 등을 돌려 버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맹인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은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을 무비판적으로 따른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 전체가 뽑혀 강 너머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앗수르에 망함).
예수님의 교훈 – 마15:14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로보암의 비참한 생애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은혜로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책망으로 생애를 마칠까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고 경고했습니다.
바라기는 마지막에 하나님께 칭찬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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