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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요를 찾아서 32]
노을 (1984년)
작사·이동진 / 작곡·최현규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허수아비 팔벌려 웃음짓고
초가지붕 둥근박 꿈꿀 때
고개 숙인 논밭의 열매
노랗게 익어만 가는
가을바람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도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놀
<들어가는 글>
‘노을’은 1984년 제2회 MBC 창작동요제 최우수상곡으로 지난 2004년도에 우리나라 남녀노소가 가장 좋아하는 동요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MBC 창작동요제는 1983년부터 2010년까지 문화방송에서 개최하였던 대한민국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동요제였다.
이동진 작사, 최현규 작곡한 동요 <노을>은 1984년 제 2회 MBC 창작 동요제 최우수상 수상곡으로 창작동요로 국민동요의 반열에 오른 곡이기도 하다.
작곡가는 원래 최현규였으나, 당시 창작동요제는 초등학교 교사만이 작곡가로 응모할 수 있어서 이 곡은 당시 교사 신분이 아니었던 최현규가 아니라 평택 성동초 교사 안호철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고 한다.
후에 작곡가가 수정되어 최현규의 이름이 이 노래의 작곡가에 쓰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984년이면 아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이 팍팍하던 시기였고, 내 기억 속에도 그리 넉넉한 삶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붉게 물들어 타는 노을이, 황금빛으로 물든 논밭이 주는 그 넉넉함이, 동요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감상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주었던 것아라 생각된다.
또한 동요 <노을>의 이름을 따서 만든 노을동요제가 있는데 평택시에서 열리는 창작동요제로 계속되고 있다.
https://youtu.be/YAFIhdyi70U
작사·이동진
이동진은 함경도 출신으로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미술 작품 활동뿐 아니라 많은 동화책의 삽화도 그린 작가이기도 하다.
동요 ‘노을’은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노을을 보며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 노을은 평택시 군문동에서 팽성읍으로 넘어가는 안성천 '군문교' 위에서 바라 본 '대추리 들판의 노을'로 출신지역의 특색을 담은 가사이다.
평택의 자연을 담은 노래이고 대상을 받았다는 높은 인지도로 평택 지역방송국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창작동요제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작곡·최현규
1983년, 한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음대에 입학한 최현규가 군 제대 직후 스승 이동진 화백이 운영하는 ‘맥화실’ 문을 두드렸다.
‘MBC 창작동요제’에 참가할 곡에 알맞은 노랫말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스승은 화가이지만 동화작가이기도 했다.
이동진 선생은 군문동에서 안성천 너머 소사벌로 저무는 노을 보며 노랫말을 써내려갔고 최현규 씨의 아름다운 선율을 입은 ‘노을’로 탄생했다.
최현규는 이후 모스, 해인의 비밀 등의 소설을 출간했으며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부천대 교수를 역임했고 동국대 외래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부천작가회의 회장도 맡고 있다.
음악 관련 일도 꾸준히 해서 1997년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주제곡을 작곡하고 실버합창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노래를 부른 권진숙
노래를 부른 권진숙은 당시 인기도 상당하였다.
MBC 창작동요제 1회에서 새싹들이다를 부른 이수지가 제주도에 살아서 서울에 오기 힘든 것에 비해 권진숙은 경기도 평택에 살아서 자주 나온 이유도 있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했다.
2022년 이대학보에서 인터뷰를 했으며 제약 영업 컨설팅 회사의 대표로 있다.
그리고 1985년(조용필과 함께), 1986년, 1988년, 2001년 MBC 창작동요제에 출연하여 이 곡을 불렀다.
2016년에는 엠넷의 위키드에 출연하기도 했다.
https://youtu.be/Lye8eCWzkXU
<리뷰 1>
“동요 노을, 석양 떠올리며 만들었죠”
동요 ‘노을’ 작곡, 20년 만에 찾은 저작권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동요를 꼽으라 했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노을’이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풍요롭고 넓은 가을 들판에서 저 멀리 가족을 위해 모락모락 밥 짓는 풍경이 그려지는 동요 노을은 가사 만큼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마치 엄마의 품처럼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끌어안는다.
1984년 봄, 동요 ‘노을’ 탄생
“노을은 군대 제대를 앞두고 있을 때 우연히 신문에서 ‘MBC창작동요제’가 열린다는 광고를 보고 즉흥적으로 작곡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 곡을 스승님인 이동진 선생님께 보여드렸죠. 어떤 의도로 곡을 썼냐는 질문에 석양을 생각했노라 대답했더니 선생님이 직접 군문동쪽에 발갛게 펼쳐진 노을을 보시고 그 풍경을 담은 가사를 쓰셨다 하시더라구요”
평택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동요 ‘노을’의 작곡가 최현규(55) 선생은 당시 서울대 음대에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어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대회 출전 자격이 교사로 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최현규 선생은 이 곡으로 대회에 참가할 교사를 알아보던 중 지인을 통해 당시 성동초등학교 모 교사에게 부탁해 출전하게 됐다고.
“당시에는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다행히 ‘노을’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제 이름은 묻히게 됐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땐 저작권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분위기였고 저 역시도 그분에게 피해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이름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최현규 선생의 제자리 찾기는 이 동요의 시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와 당시 대회에 참가해 노을의 작곡자로 널리 알려졌던 선생님의 동의가 모아져 결국 2005년 뜻을 이뤘다. 최초의 작곡자에게서만 들을 수 있었던 동요 노을의 숨겨진 이야기는 특별하다. 바로 ‘초가지붕 둥근 박 꿈꿀 때’라는 가사가 처음에는 ‘초가지붕 바가지 꿈꿀 때’였다는 점이다. 그 가사는 최현규 선생의 지인이 발견해 전달했고 이후 스승님께 부탁드려 현재의 가사로 변경하게 됐다고.
고통과 좌절, 소설에서 길을 찾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망가졌고 그때 돌파구처럼 찾은 것이 바로 소설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선생님이 도서관 열쇠를 제게 맡길 정도였죠. 막상 음악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니 할 줄 아는 게 글 쓰는 것 밖에 없더라구요. 노을이라는 동요를 작곡하게 된 것도 군대에 있을 때 쓴 단편소설 영향이 컸어요. 그 소설 제목이 바로 ‘석양’이었거든요”이젠 그만 잊고 싶다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사코 손사래 치는 최현규 선생에게서 유년의 아픔의 색깔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으나 본인의 의지가 아닌 이유로 음악을 포기해야 했던 마음은 아무리 덤덤하게 이야기해도 아프게 와 닿는다. 그러나 최현규 선생은 그 아픔을 글을 쓰는 것으로 대신했다. 1994년 봄, 8개월 만에 완성한 3권의 장편소설 <모스>는 30만부가 판매되면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그를 단번에 촉망받는 소설가로 변모시켰다.
“후속 작으로 쓴 것이 2000년에 세상에 나온 <해인의 비밀>이었어요. 도인들의 정신세계와 수행과정을 그린 소설인데, 소설을 쓰기 위해 전국에 있는 도인들을 만나면서 동양적인 정신세계에 매료됐죠. 소설을 쓰면서 마음공부를 했고 모든 것들이 다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됐죠”
최현규 선생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마음공부를 결심했다고 말한다. 예술은 결국 인간을 그리는 것이고 그 인간의 마음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것은 결국 내 마음을 아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기도 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2006년에 명상학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한 최현규는 ‘너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정진하라’고 했던 말을 실천적이면서도 내 마음을 알아가는 명상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최현규 선생은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명상’이라고 말한다. 현재 동국대학교에 출강해 명상학을 가르치고 있는 최현규 선생은 마음을 치유하고 마음의 근원을 들여다보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의 장점 등을 설명하며 실천을 권유한다.
“30대 중반에 평택을 떠나 지금은 부천에서 살고 있지만 평택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포근하고 따뜻해져요. 어릴 적 친구들이 나를 반겨주고 내 고향에서 동요 노을이 불리는 걸 보는 것도 참 좋구요. 음악도 했고, 소설도 썼고, 지금은 명상에 매료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내 마음의 움직임을 알고 내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는 지금이 참 편안하고 좋아요”
1997년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주제곡도 작곡하고 실버합창단을 지휘하는 등 음악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최현규 선생, 명상을 통해 인간에 대해 성찰하며 많은 것을 깨닫는다는 최현규 선생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전하며 환하게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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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사신문
<리뷰 2>
노을의 작곡자 논란
* 작사자 이동진의 블로그에서 전재)
1984년에 열린 MBC 문화방송 주최 제2회 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동요 '노을'은 라디오와 TV 방송을 타고 퍼지며 전국적으로 모든 사람들 귀에 익숙한 동요가 되었습니다.
2004년에는 남녀노소가 가장 즐겨 부르는 동요로 선정되면서 동요 '노을' 노래 부르기는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MBC 창작동요제는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이 작곡한 노래에만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동요 '노을'은 클래식 기타 연주자로 작곡을 하던 최현규君이 군 생활을 하면서 일부분 작곡을 해두었던 것을 제대를 하면서 바로 완성한 곡입니다.
그런데 MBC 창작동요제의 초등학교 교사 작곡이라는 제약에 최현규君은 MBC 창작동요제에 참가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요 '노을' 작곡자 이름을 당시 성동초등학교 안호철 선생에게 동요 '노을' 작곡자 이름을 빌려주었습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예상 밖으로 대상을 받게 된 기쁨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아이들만 부르는 노래인 줄 알았던 동요가 어른도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안호철 선생은 부상(副賞)으로 받은 문교부 장관상장 덕으로 바로 근무지를 서울로 옮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던 서울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요제가 끝나면 곧바로 작곡자 이름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던 안호철 선생이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차일피일 미루며 안호철 선생은 최현규君에게 작곡자 이름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0년도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요 '노을' 작곡자가 제 이름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더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평택 안중 안일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셨으며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이신 신귀복 선생님께서 이 내용을 전해 들으시고는 최현규君에게 작곡자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신귀복 선생님, 최현규君,안호철 선생과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안호철 선생은 동요 '노을' 작곡자는 자신이 아니라 최현규君임을 신귀복 선생님에게 분명히 밝히고 그 해 가을까지만 기다려 주면 작곡자인 최현규君에게 이름을 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지나고 또 해가 바뀌고 여러 해가 지나도 안호철 선생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한 신귀복 선생님의 도움으로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동요 ‘노을’ 작곡자는 ‘최현규’로 등록을 마쳤습니다.
음악도였던 최현규君은 그 뒤 독학으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동요 '노을'을 아름다운 노래로 만든 작곡자가 최현규 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밝히기 위해 지나간 시간에 있었던 일을 글로 적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동요 '노을' 작곡자는 바로 '최현규'입니다.
첫댓글 Trynowjhj: 저도 이 노래 참 좋아합니다 ㅎㅎㅎ 가사도 예술이고~!!!
최정미:
덕분에 예쁜 노래를 알게되었습니다!
가을들판 선선한 바람을
미리 느끼어 무더위를
잠시 잊습니다
와우!
무더위를 노래의 가사를 통해 잠시 잊는 방법도 있군요.
샬롬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