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동학은 동학이 아니다. 무극대도일 뿐이다." "동학은 혁명이 아니다, 개벽일 뿐이다." 전자는 동학의 보편주의, 그리고 민족사의 굴레를 초월하는 범 인류적 미래의 비젼을 의미하는 말이며 후자는 동학의 이념의 총체성, 그 총체성은 결코 정치사적 사건 특히 동학란, 혹은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명명되는 좌절 그 자체로 평가할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말이다.
소위 말하는 동학 혁명이 이 땅에 일어난지 어언 100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각계 각층의 목소리로 정돈되지 않은 채 논의되는 동학의 의미를 접하게 된다. 역사, 철학, 종교, 정치, 교육, 문학, 예술 등 갖가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가면서 우리는 왜 100년도 더 전에 있었던 그 동학이라는 것에 대한 의미규정을 하려고 끊임없이 시도를 하고 있는가.
그러나 동학이란 주제는 어느 하나의 틀에 담아 드러내기에는 너무도 방대하고 처절한 그 무엇이다. 동학을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최제우나, 최시형, 전봉준 등의 인물에 대한 평가와 반응은 상당히 이론이 분분한 편이다. 동학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이들 모두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부정적인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동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과 시각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학에 대한 이러한 각기 다른 입장과 시각은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하여 동학을 소재로 한 다양한 문학 작품을 창작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소설이나 시에서뿐 아니라 일찍이 희곡 장르에서도 동학을 소재로한 여러 편의 희곡들이 발표되고 공연된 바 있으며 최근에도 여전히 동학을 소재로한 희곡들이 창작되고 있다.
한국 현대 희곡사상 최초로 동학을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에서 이미 주목을 받은 바 있는 1926년에 창작된 김우진의 <산돼지>를 필두로 1931년에 발표된 조용만의 <갑오세>, 1937년에 발표된 채만식의 <제향날> 그리고 1941년에 공연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임선규의 <동학당>, 1950년에 발표된 박노아의 <녹두장군>, 1976년에 공연된 차범석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도 모두 동학을 소재로한 일련의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동학을 소재로 한 희곡의 창작은 거의 폭발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는데 특히 동학100주년이 되던 해인 1994년에 발표 또는 공연된 희곡들은 가히 동학소재 희곡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많은 편수에 달하고 있다.
1980년대 동학을 소재로 대표적 희곡으로는 1980년 5월 서울대 마당에서 총연극회가 공연한 것을 임진택이 정리한 <녹두꽃>, 1988년 제 1회 민족극 한마당의 대미를 성황리에 장식한 바 있는 극단 아리랑의 <갑오세 가보세>, 1988년에 공연되었던 배봉기의 <전봉준> 등이 있다. 이후 90년대의 동학소재 희곡으로는 1990년 2월에 대학극으로서 한양대학교 민족극회 '새벽'에서 공연된 노병갑의 <들불>, 동학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94년에 발표되고 공연되었던 김용옥의 <천명>, 김정숙의 뮤지컬극 <들풀>, 그리고 제 7회 민족극 한마당 참가작인 극단 '함께 사는 세상'의 <궁궁을을, 1894>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지면에 발표되지 않은 동학소재 희곡들이 여러 편이 더 있지만 일단 이 글에서는 문자화 되어 발표된 이상의 작품들만을 주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필자는 이들 희곡들을 단순 소재 차용으로서의 동학, 혁명으로서의 동학, 역사적 사실의 재해석으로서의 동학으로 나누어 현대 희곡 속에 나타난 동학의 의미를 살펴 보고자 한다.
2. 동학 운동의 두 가지 방향성
현대 희곡 속에 나타난 희곡문학으로 재조명된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 실제 역사속의 전봉준 등이 주도한 동학 혁명이 과연 어떠한 과정과 힘의 논리에 의해 일어났는지 대략적인 윤곽을 살펴보기로 하자.
갑오동학혁명운동을 마지막 결과물로 놨을 때 그 결과가 일어나기까지는 대강 다음과 같은 중간 과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 동학의 발생(최제우에 의한 동학 창도)
2. 동학 초기 운도의 형성(최제우의 포덕과 순교)
3. 동학 운동의 지하잠복(최시형의 도통승계와 도피)
4. 동학 중기 운동의 성립과 발전( 최시형의 교세확장 노력과 조직정 비, 집단 응집력의 강화)
5. 동학의 동원 연습-후기운동의 대두(지하잠복에서 지상 노출로, 남. 북접 대립과 탈최시형화의 실험)
6. 갑오 동학 혁명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에 대한 견해는 여전히 분분한 편이다. 최제우가 사후의 영생이나 내세관에 대한 언급이 없이 현실의 모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위주로 사상체계를 전개하였다는 점을 들어 최제우의 사회개혁자적인 성격을 앞세우는 견해와 그의 현실 비판적인 시각이 단지 개탄적인 차원에서 맴돌 뿐이고 급박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도들을 오히려 경계했다는 점을 들어 종교 창도자로서의 현실 초월성을 더 강조하는 견해로 양분할 수 있지만 대부분 종교 운동의 사회운동적인 성격을 볼 때 필자는 최제우가 창건한 동학은 기본이 종교 운동이면서 그 일부로서 사회개혁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동학을 믿게 된 민중들은 바로 그 종교운동으로서의 동학이 아니라 사회개혁적인 의미의 동학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동학이 내세웠던 그 '후천개벽' 사상이라는 것이 각자 해석하기에 따라 그 의미가 양분될 여지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첫째 후천 개벽의 의미를 인간의 정신적인 의미의 개벽으로 보는 정신 개벽적인 측면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현실 질서에 도전하는 현상 개벽적인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동학이 내세웠던 후천개벽의 이러한 양가적인 성격 때문에 동학은 그 전개 과정에서 항상 이 현상개벽적인 측면의 과격성이 정신개벽적인 측면의 온건성 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여지가 늘 잠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시형은 점진 온건 평화적 사회개량주의자였다. 최시형은 자신의 이러한 입장에 따라 30년동안 지하에서 동학운동을 전개해 왔기 때문에 이 시기는 현상개벽적인 반항의지가 정신개벽적인 의지에 눌려 겉으로 표면화 하지 않은 현상개벽의지의 잠복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동학 집단의 응집력이 커짐에 따라 이러한 집단의 응집력을 기반으로 최시형의 점진. 온건. 평화적 사회개량주의적 입장에서 뛰쳐 나가려는 세력이 서서히 대두하게 되었다.
교조신원운동을 제일 처음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선 호남의 서인주 서병학의 존재가 바로 최시형의 절대적 영도력에 도전한 세력이었고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동안 잠재해 있던 현상개벽적인 반항의지의 표면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최시형은 두 서씨의 압력에 뜻을 굽혔고 보은 집회 역시 최시형 자신의 뜻이 아니라 손병희의 제의를 받아들여 이루어진 점을 볼 때 동학의 집단 시위 과정은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점진 온건 평화적 사회 개량주의자들과 전봉준 등으로 대표되는 현상 개벽론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두 입장의 팽팽한 대결의 양상을 방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보은집회의 구호변경은 현상개벽론자들의 세력이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온건 세력을 제압하고 조만간 이들의 세력권 외로 이탈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은 집회에서 시위의 구호가 '신원금폭'에서 '척왜양'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동학내의 현상개혁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 보국안민의 능력을 상실한 정부의 위정자들이 외세의 환난을 끌어 들여 자신들의 정치적 우위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공격하면서 일반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자 했던 까닭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북접과 남접의 갈등으로 얘기되는 동학내의 이러한 두 노선은 다음과 같은 대결 끝에 결국 갑오동학혁명이라는 하나의 길을 걷게 된다.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기 이전까지 동학운동은 온건노선을 견지한 최시형을 중심으로 상당히 응집력이 있는 운동역량을 과시했다. 그런데 이러한 온건 노선에 대한 반대 급부로 제일 처음 일어 난 것이 교조신원운동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시형을 중심으로한 동학의 뿌리는 흔들림이 없었고 최시형을 중심으로 세력에 비해 이들 세력권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자들의 힘은 극히 미미한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3차에 걸친 신원운동 시위에 의해 이러한 온건 노선과 현상개벽론자들의 힘의 작용은 팽팽해 맞서게 되는 대등한 입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최시형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현상개벽론자인 전봉준 등이 고부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전봉준의 봉기에 의해 온건노선과 완전한 단절을 가져왔던 동학운동은 결국 최시형의 기포 명령에 의해 갑오동학혁명의 길을 함께 걷게 된다.
이러한 역사상 실재했던 동학 운동의 두 가지 방향성은 작가적 시각으로 재조명되어 직·간접적으로 동학 소재 희곡에 반영되어 나타나게 된다.
3. 희곡 속에 나타난 동학의 의미
1) 단순 소재 차용으로서의 동학
동학을 소재로한 희곡중 초창기에 발표되었던 대부분의 희곡들은 희곡을 통해 동학의 혁명성이나 역사성 혹은 사상성이나 종교성 등으로 대변되는 동학 자체를 문학적으로 재조명하기 보다는 동학을 단순히 소재적 측면에서 차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현대 희곡사상 최초로 동학을 얘기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김우진의 <산돼지>(1926)를 비롯해 조용만의 <갑오세>(1931), 채만식의 <제향날>(1937)이 이런 부류의 희곡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우진의 <산돼지>는 동학을 문학적으로 재조명했다고 보기에는 많은 부분에 있어 무리가 따르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희곡에서 얘기하려고 하는 주 초점은 동학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희곡에서 굳이 동학이란 구조적 장치가 필요했던 이유는 동학자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동학혁명이 있었던 당시를 살아야했던 그리고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고뇌와 비극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 희곡에서 동학이란 동학 그 자체의 의미로서보다는 원봉의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를 죽게 만든 그리고 영순의 아버지를 불행하게 죽음으로 몰고갔던 단지 정상적인 삶의 장애요소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불행한 죽음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살아 남은 가족인 원봉과 영순 최주사댁에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며 살아 남은 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작가의 이러한 의식은 이 희곡에서 동학당 진군의 때를 갑오년 즉 1894년이 아니라 갑자년인 1864년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표기가 작가의 어떠한 의도에 의한 계획된 표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희곡의 앞 뒤 상황을 통해 미루어 보건데 이 갑자년의 표기는 갑오년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 갑자년 동학당 진군 행렬의 판토마임이 지내간다. 오만년수운대의(五萬年受運大義) 글자를 쓴 오색의 기폭을 선두로 도중(道衆)의 어깨에는 [궁을(弓乙)], 등에는 [동심의맹(同]心義盟)]이라 박은 삼삼오오의 일대(一隊),
…(중략)…
元峯이네:(비틀비틀하며)제발 살려줍시오.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더 못 나가겠습니다. (목메인 소리로) 제발 적선 좀 해 주시오. 저는 동학역적놈을 남편으로 둔 죄로 이 자리에서 참형(斬刑)을 당해도 원통할 것은 없읍니다마는 이 뱃속에 든 애기를 위해서 살려줍시오. 이 뱃속 애기가 불쌍허지 않어요?
위 인용문을 보면 '갑자년'에 동학당이 진군하고 있으며 원봉의 친부가 그 동학군에 가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갑자년에는 동학군의 진군이 없었을뿐 아니라 1893년 관군에 의해 체포된 동학의 제 1대 교주 최시형이 관군에게 처형을 당한 해일뿐이다. 그리고 만약 이 희곡의 표기대로 동학군의 진군의 때를 갑자년 즉 1864년으로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 희곡의 주인공 원봉의 나이가 29세니까 이 희곡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은 아직 1894년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이라는 모순에 빠져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희곡의 앞 뒤 상황은 분명 갑자년이 아니라 갑오년에 있었던 동학혁명을 얘기하고 있음을 아래의 예문에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최주사댁 ……갑자년 겨울에 너 아버지와 같이 잡혀서 하옥을 당했을 때 어찌 서로 뜻과 생각이 맞았든지 고만 손가락을 끊고 의형제를 맺었드란다. …… 그런데 불행히 榮順이 아버지는 미처 달아나기 전에 붙잡혀 버렸단다. 그때 전봉준이는 순창(淳昌)으로 와 있을 땐데 거기 가는 길에 태인(泰仁)서 김개남(金開南)이와 같이 너 아버지도 고만 붙잡혀서 전주(全州)서 효수(梟首)를 당했고나. 그러니 너 아버지와 榮順이 아버지 사이 의리 인정이 어떠하겠니?
갑자년에 전봉준이나 김개남 등이 활약했다는 것 자체가 실제 역사상 상황전개와 대비해 볼 때 모순된 내용이다. 전봉준이나 김개남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주로 활약했던 시기는 갑자년보다 30년후인 바로 갑오동학혁명 때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실제했던 갑오년 동학혁명의 때를 김우진이 왜 하필 갑자년으로 표기했는지는 좀 더 고구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확실하건 김우진에게 있어 동학이란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崔元峯 …… 나는 어머니만큼이나 아버지도 원망이요, 아버지도! 자기는 동학(東學)인가 무엇을 들어가지고 나라를 위해, 중생을 위해, 백성을 위해, 사회를 위해 죽었다지만 결국은 집안에다 산돼지 한 마리 가두어 놓고 만 셈이야! 반백이 된 머리털이 핏줄기 선 부릅뜬 눈 위에 허트러져 가지고 이를 악물고 대드는구려. "이놈 네가 내 뜻을 받어 양반놈들 탐관오리들 썩어 가는 선비놈들 모두 잡어 죽이고 네 평생 소원이든 내 원수를 갚지 않으면…… 흐흐흐흐, 산돼지 탈을 벗겨주지 않겠다고."……
원봉의 위 대사를 통해 미루어 보건데 원봉에게 있어 동학이란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다. 따라서 그는 동학에 대해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원봉이 알고 있는 동학이란 양반 놈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탐관오리나 썩어빠진 선비놈들을 모두 잡어 죽이는 일종의 활빈당 같은 부류로 밖에는 생각되질 않는다. 이러한 원봉의 생각은 <산돼지>의 작가 김우진의 동학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의 대변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김우진이 생각했던 동학이란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당시의 민중들을 불행하게 하는 삶의 장애 요소였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살아 남은 자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삶의 장애요소일 뿐이었던 것이다.
채만식의<제향날> 역시 동학 자체를 문학적으로 조명했다기 보다는 앞서 살펴 봤던 김우진의 <산돼지>와 마찬가지로 동학을 하나의 삶의 억압기제로 보고 있다는 편이 타당할 듯 싶다. 다시 말해 영오의 외할머니 최씨의 불행의 시발이 그녀의 남편 김성배가 참여했던 동학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러한 그녀의 불행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기미 독립운동에 참여한 아들 영수 그리고 사회주의에 빠져 버린 그녀의 손자 상인 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찌보면 이는 최씨라는 한 여인의 불행만이 아니라 최씨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당 시대의 모든 이들이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채만식은 평범한 여인 최씨의 삶에 어두운 그늘을 지운 주범으로 동학과 기미년의 독립운동 그리고 사회주의를 들고 있다. 따라서 동학이나 독립운동, 그리고 사회주의는 모두 대등한 의미로서 위치를 이 희곡에서 점하고 있다고 보아도 타당하다. 그것이 동학이든 독립운동이든 사회주의든 평범한 민중들의 삶을 평범치 않게 몰아갔다는 점에서 <제향날>에서 동학의 의미는 꼭 동학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 희곡 역시 김우진의 <산돼지>와 마찬가지로 굳이 동학이란 구조적 장치가 필요했던 이유는 동학자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동학혁명이 있었던 당시를 살아야했던 그리고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고뇌와 비극성을 표현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동학에 의해 자신의 정당한 삶의 권리마저 박탈당한 사람들의 동학에 대한 감정은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최씨 …… 그해 갑오년에 너이 외할아버지가 동학(東學)을 하섰드란다.
영오 동학? 동학이 무어유?
최씨 너이는 다 모르는 거다. 새로 천지개벽을 한다고 모다 모여서 수군수군하고 시천주 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이런 주문이나 웅얼거리고
…(중략)…
최씨 너이 외징조할아버지, 그러니까 너이 외할아버지네 아버지 말이다. 그 어른이 돈을 많이 모으셨드란다. 벼를 천석이나 추수받었으니 부자 아니냐? 그랬든 걸 수령(守令)들이 토색질해가고 화적들이 노략질해 가고 그러고도 한 오백석 거리 넉넉했는데 이번에는 알뜰한 자제님 너이 외할아버지가 동학을 하느라고 그걸 또 반이나 넘겨 없앴구나! 그까짓 재물이야 없애나마나 하지만
영오 그렇게 돈을 디려서 무얼 하는 거유? 저 미두하는 거 그런 거요?
최씨 아니지, 괘-니 허왕한 소리들을 하느라고 그랬지만 뭐 천지개벽한 뒤에는 자기네 뜻대로 좋은 세상이 되고, 그런다는 거지 (間) 그래 그러더니 그해 갑오년에 동학 난리가 나는구나
위 대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동학의 희생자 최씨에게 있어 동학이란 동학 자체로서의 의미는 이미 상실한 채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게 만들었던 그 무엇이며 허황한 소리를 하던 그야말로 뭔지는 모르지만 그 무엇인가를 하는 대상일 뿐이다.
동학을 하던 최씨의 남편 성배는 동학혁명의 실패로 쫓기는 몸이 되고 바로 그 쫓기는 아들 덕분에 육십이 넘은 노인인 성배의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 놓으라는 닥달과 함께 옥에 갇힌 채 매일 온갖 고문을 당하게 된다. 결국 성배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배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온지 보름만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어 버림으로써 성배의 죽음을 더욱 더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성배의 부인인 최씨는 자신의 가족에게 닥친 이 모든 비극의 총체적인 인식 없이 오직 동학이라는 것 자체에만 그 책임을 전가시킬 뿐이다.
1931년 10월 {동광} 제 26호에 발표된 조용만의 <갑오세>는 전체 1막으로 구성된 짧은 희곡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시각에 의해 동학을 새롭게 그려냈다거나 동학의 역사적 재조명을 목표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처한 가난하고 억울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동학에 참여하고자 하는 젊은이들과 이들이 동학군으로 나가 양반들에게 당한 자신들의 한을 풀어 주기를 원하는 마을 노인들의 바람을 제시하는데 그치고 있다. 따라서 이 희곡에서 다루고 있는 동학이란 동학 자체에 대한 심도 있는 조명이라기 보다는 민란과 대동소이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동학 전체의 의미에서 보면 매우 지엽적이며 주변적인 피상적인 모습의 동학일 뿐이다. 조용만이 본 동학혁명이란 기존의 늘 있어 왔던 민란이 확대된 좀 큰 민란 이상의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이 희곡에서는 동학혁명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나 동학혁명을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했던 동학의 기본적인 사상이 전혀 들어 나고 있지 않다. 마을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양반들에게 당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모른 채 심지어 자신들이 마을 수령이나 양반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이유를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가 세력을 잡았기 때문이라고만 믿고 있다.
촌로C 그저. 대원왕(大院王)을 도루 모셔들여야해. 망헐 민씨(閔氏)네들 때문에. 제기.
이 때에 멀리서 아이들의 노래가 들려온다.
아랫녁새야
웃녁새야
전주고부(全州古阜)록두새야
청포밭에 앉지마라
녹두덩굴 다 썩는다
대원왕을 모셔와야 된다는 촌로의 위의 대사 바로 밑에 전봉준 장군에 관한 아이들의 노래가 들려 온다는 발상 자체가 작가 조용만의 동학혁명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결핍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씨 세력이 집권하던 시대에 비해 대원군 집정기 때에 민중들에 대한 양반들의 착취가 좀 덜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대원군이란 인물이 개량정책을 통해 봉건적 착취를 약화시켜 조선봉건체제를 계속해서 유지하려 함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전봉준 등이 주도한 동학 혁명은 이러한 봉건 체제를 전복시키고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 근본적인 목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 예문의 촌로의 대사 뒤에 전봉준과 관계되는 노래가 연이어 나온다는 사실은 마치 전봉준 등이 주도한 혁명이 대원군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의도로 일어난 듯한 인상을 풍기는 동학혁명의 본질을 오도할 염려가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는 이 희곡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작가 조용만은 동학혁명을 일개 민란인 동학란으로 치부하면서 짓밟힌 민중들의 양반들에 대한 원수갚기 정도로 밖에는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첨지 (눈을 흘끗 떠서 순돌을 보고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손을 꼭 쥐면서 내 웬수 갚어 다우. 돌아. 응, 양반놈. 오, 돌아 부섯버려라. 어서 어서 가서 부섯버려라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순돌 아버지, 아버지 정신채리세요 네 아버지……
첨지 (이를 무섭게 갈면서 목소리가 커진다) 가거라, 어서가, 어서 사또놈 최진사. (또 이를 간다) …(중략)…
순돌 (첨지를 껴 안고 소리쳐 운다) 아버지-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웬수 갚지요- 오늘 밤 안으로 웬수 갚지요- 아버지 눈감으세요 네-
양반인 최진사 때문에 다 죽어가게 된 순돌의 아버지 첨지가 순돌에게 자신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결국 순돌이 동학혁명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다. 또한 이 희곡의 제목인 '갑오세'란 말은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란에 가보고 참여하자는 뜻으로 해석이 되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이 희곡의 끝이 제목 '갑오세'와 표기는 다르나 소리가 같은 촌로들의 "가보세, 가보세"로 끝남으로써 이 작품은 마지막까지 동학에 대한 총체적인 조감없이 동학란이 일어난 곳에 '가보세'라는 참여의식을 강조하는 수준에 머무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초창기의 동학 소재 희곡들은 동학 자체를 문학적으로 재조명했다기 보다는 동학의 단편적인 사건이나 피상적인 모습들을 단순히 소재적인 측명에서 차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초창기 동학 소재 희곡들의 경향은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얘기하기에는 식민지 시대라는 당 시대의 자유롭지 못한 상황과 재해석된 동학을 말하기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당 시대 역사에 대한 한계상황 때문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2) 혁명으로서의 동학
임선규의 <동학당>을 과도기적인 기점으로 동학 소재 희곡에서는 차차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얘기하게 된다. 50년에 발표된 박노아의 <녹두장군>, 그리고 80년대의 대다수 동학 소재 희곡들과 90년대에 발표되었던 많은 희곡 작품들이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다루면서 동학 혁명의 선봉장이었던 전봉준과 이름 없는 농민들을 무대 전면에 등장시키는 등 많은 변화를 보여 주었다.
임선규의 <동학당>은 극단 '아랑'에 의해 1941년 5월에 공연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학당>은 충청지역을 무대로 동학 혁명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30년대까지의 대부분의 동학을 다룬 희곡들이 동학의 소재주의적인 측면만을 차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작가가 동학에 대해 어느 정도 총체적인 이해를 가지고 쓴 작품으로 생각된다. 특히 등장 인물인 박달의 입을 통해 얘기하고 있는 동학사상은 꽤 깊이가 있는 실제 동학사상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 작품의 대표적 주인공은 수만과 수영 형제 그리고 이 형제의 아버지를 무고하게 죽인 수탈 양반의 대표격인 김성현과 그의 남매인 상수와, 윤주 그리고 동학사상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있고 그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는 인물인 동학군 박달이다.
형인 수영은 아버지가 탐학한 양반 김성현에게 억울하게 죽은후 집을 나가 전라도 고부로 내려가 전봉준 장군밑에서 일을 하다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의 불을 고향 충정도에도 일으키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그리고 수영은 자신의 신분이나 당시의 부조리한 세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 양반은 아니지만 꽤 지식있는 부류의 인물이다. 그는 김성현의 아들과는 친구이고 또 그의 딸인 윤주와는 연인사이이다. 바로 윤주와의 사랑 때문에 그는 동학도에게 잡혀 죽을 수 밖에 없게 된 김성현이를 풀어줌과 동시에 동학과 자신의 형 수영을 배신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김성현은 동학이 패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국이 돌아가자 동학군에게 잡혀 있는 자신을 살려주면 윤주와의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피로써 한 수만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만다. 결국 이 희곡은 패배한 동학군이 포승줄에 묶여 가면서도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를 부르면서 고개를 넘어가는 장면과 함께 새 세상이 와야 한다는 수만의 깨달음의 독백을 오버랩 시키면서 동학군의 패배가 완전한 패배가 아님을 암시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이 희곡에서는 동학 혁명의 선봉장이었던 전봉준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전봉준의 휘하에 있던 수만의 형 수영을 통해 때를 놓치지 말고 봉기해야 한다는 남접의 입장을 대변하게 하고 있다.
수영 ……전라도 각처에선 동학군들이 머리를 됭이고 팔을 걷고 일어섰습니다. 포악무도한 양반놈들과 탐관오리배들이 겹겹으로 싸워논 굴레를 벗어 버리고 동여맨 동앗줄을 끊어 버리고 사람 노릇을 할려고 일어섰습니다. 아저씨! 그리구 여러분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짐생 같은 양반들에게 대한 원한의 불덩이는 터지고 말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권리를 찾고 우리나라를 완전히 보존하려면 이때를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갑오동학혁명 이전에도 크고 작은 민란 형태의 농민들의 봉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철종 13년 임술년에만도 도합 37건의 민란이 발생했으며 고종 년간에는 47건의 민란이 발생한 사실로 미루어 당대의 현실이 꼭 동학을 통하지 않아도 농민들이 봉기할 수 밖에 없는 사회였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 등을 위시한 동학의 남접 계통이 일으킨 농민봉기가 그토록 농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위 인용문의 수영의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전봉준 등의 남접의 동학 지도자들은 민중의 억압과 수탈이라는 당시의 시대상을 양반이라는 지배계급이 생산자인 농민을 착취하는 봉건사회이기 때문이라는 매우 혁명적인 사고로 이해했으며 봉건지배계급인 양반세력을 타파하고 농민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다는 점이다.
이 희곡은 전라도 지역의 동학 남접의 봉기가 충청도 지역의 동학 농민들에게 영향을 주는 과정을 어느 정도 꽤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결국 동학혁명이 외세와 결탁한 정부에 의해 최후의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 희곡의 수만의 마지막 대사 "형님 나는 이제 깨달았소.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김성현의 무리를 없애 버려야겠소. 그래서 우리 앞에 새 세상이 와야 한다. 새 세상이 와야 한다. 새 세상이 와야해요."라는 말처럼 비록 수만의 의식이 김성현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봉건지배세력의 타도로까지 이르지 못한 한계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희곡은 동학도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포승줄에 묶여 끌려 가면서까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망사지" 를 우렁차게 부르며 고개를 넘어가는 등 꽤 희망적으로 끝나고 있다. 이는 이 희곡의 작가 임선규가 보는 동학 혁명이란 결국 그 실패 자체로서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학혁명이 우리 나라 역사상 유례없는 민중의 무장 봉기였으며 농민들을 기본으로 한 민중들의 국내의 봉건통치와 외국 침략장에 반대한 반봉건, 방침략적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 작가적 시각의 투영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에 발표된 박노아의 <녹두장군>은 남접의 대표적 인물로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인물인 전봉준을 본격적으로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희곡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전봉준 등에 의해 주도되었던 동학혁명에 큰 비중을 두고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희곡에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은 전봉준이 대원군의 밀명을 받고 난을 일으켰다는 부분이다. 구체제의 전복을 시도한 동학이라는 사상이 구시대의 상징인 대원군의 밀명아래 이루어졌다는 이러한 박노아의 시각은 사실여부를 떠나 많은 논란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전 …… 그런데 이제 대원위 대감의 효유를 받자오니 황감무지하옵고, 우리 교지를 선포할 천재일우의 호기를 얻은 감이 있소이다.
정 선생님, 인제 그 시기가 왔습니까?
전 그렇소! 내가 기두린 것은 이 대원위 대감의 하교였소. 일군일읍의 난을 일으키나 동지를 규합하여 팔도에 난을 일으키나 실패하면 죽기는 일반이지만, 이제 한 번 크게 일어나고 보면 성공지일에는 한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노아는 이러한 시각을 계속 견지해 나가면서 대원군과 대결구도에 있던 민비를 요부로 몰아부치고 있는데 그 부분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 …… 가자! 동학천병을 거느리고 수운 선생의 유훈을 좇아 경천수심과 재세안민의 동학천도를 받들고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며 창생을 괴롭히는 요부와 역도를 치자!
과연 이런 식의 시각이라면 전봉준 등이 일으킨 동학혁명은 일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대원군과 민비의 힘의 구도 속에서 대원군의 정권유지를 위한 다시 말해 구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빚어지게 된다. 또한 역사상 실제 동학운동의 선봉역을 점하고 있던 전봉준이라는 인물이 이 희곡에서는 손병희 등의 동학의 온건세력에 의해 설득당하는 인물로도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전봉준이라는 인물과 동학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작가 박노아의 자기 혼란 부분의 반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전봉준은 관군과 적당히 화해하는 방법을 찾는데 이 부분 역시 전봉준이 동학혁명의 대표적 선봉장이었다는 점을 무시한 박노아의 일관되지 못한 시각의 반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을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이 희곡은 시종 일관 전봉준이라는 한 인물에 대해 일관되지 못한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한계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이러한 박노아의 혼란성은 아래와 같은 장면에선 극에 달하고 있다.
손병희 관군은 이미 휴전을 선언하였소. 외군의 군대를 국내에 불러들여 시방 오백년 사직이 위태롭게 되었거늘, 동족끼리 더 피를 흘릴 까닭이 무엇이오.
일동 (묵묵히 고개를 숙인다.)
全 상감마마…… (부르며 엎드려 통곡한다.)
외국군대의 싸움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전봉준이 절망에 빠져 울부짖는 사람이 바로 아이러니칼하게도 구체제의 상징인 상감마마이다. 이러한 박노아의 시각은 동학 자체가 왜 조선 후반기에 생겼났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없었다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박노아의 일관되지 못한 혼돈은 '상감 마마'를 부르며 엎드려 통곡한지 얼마되지 못해 "조선은 임금님 한 분의 조선이 아니요. 우리 백성들의 조선이요"라는 부분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더욱더 심각한 혼란에 빠지고 만다. 게다가 전봉준이란 인물이 삼감마마를 부르짖으며 통곡할 정도의 위인이라면 왜 그가 상감이 아닌 대원군을 앞세워 자신의 거사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이 희곡은 하고 있지 않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의 일관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이 희곡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봉준의 제자 조성국과 옥분의 사랑이야기나 기생 향월의 전봉준에 대한 사랑 역시 이 희곡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었나에 대해서 일말의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박노아의 이러한 일관성 없음으로 인해 그가 3막이란 짧지 않은 이 희곡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상당히 모호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노아의 <녹두장군>은 해방 이후 희곡 중 최초로 전봉준을 작품 전면에 부각시키며 농민전쟁으로서의 동학혁명을 그리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88년 4월 민족극 한마당에서 공연된 바 있는 극단 아리랑의 <갑오세 가보세>는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그리고 있는 대표적 희곡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갑오세 가보세> 역시 전봉준이란 인물이 무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희곡은 전봉준이란 인물의 영웅성이나 무용담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먹쇠, 춘복, 판동 등 동학혁명에 참가한 농민들의 이야기를 중심축에다 놓고 전봉준을 선봉으로 한 이들 농민군들이 동학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동학 혁명에 얽힌 사건들의 전 과정을 꽤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먹쇠 지주헌티 절반 주고, 군수한티 절반 주고나면 겨울 먹을 양식도 없겄다. 이놈아.
……
춘복 그것이 모다 저 오살헐 놈의 조병갑이 놈 때문이 아녀. 아, 그 자식을 작살을 내뻔져야 한당께요.
……
먹쇠 군수만 작살낸다고 일이 다 된다요? 세상이 다 뒤집어져버려야제.
위 대사중 먹쇠의 대사는 동학혁명이 단순한 민란의 확대된 형태가 아니라 민란과 틀린 생각에서 시작된 꽤 진보적인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농민이 이들이 억압과 수탈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양반계급이 생산자인 농민을 착취하는 봉건사회이기 때문이라 자각이다. 따라서 이들은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다 뒤집어 버려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이 혁명을 통해 꿈꿨던 세상은 단순히 이전보다 덜 억압당하고 덜 착취당하는 생활이 개선된 세상이 아니라 봉건지배체제를 타파해서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 희곡에서는 일부 논자들에 의해 단순히 깨달음의 노래로써만 해석되기도 하는 검가, 즉 칼노래가 무력 혁명의 실천 방법으로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때가 왔네 때가 왔어
다시 못 올 때가 와
만세 조선 장부로서
오만 년의 때가 와
장령 이것은 교주 최수운이 한울님이 뜻을 받아서 지은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게 되면 관군허고 쌈에서 이기고 도통을 하게 된다. 자 긍게 세 사람 정신 똑바로 챙기고 따라 해 봐라. 알겠나?
이와 같은 입장은 최제우가 사후의 영생이나 내세관에 대한 언급이 없이 현실의 모순에서 벗어나는 위주로 사상을 전개하였다는 점을 들어 최제우의 사회개혁적인 성격을 앞세우는 견해와 궤를 같이 하는 입장이다. 이와 같이 이 희곡은 동학 자체의 사상이나 종교성에 대한 조명보다는 조선 후기의 봉건지배 질서의 급격한 동요와 외세의 침탈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이 일어나 외세를 물리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몸부침쳤던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동학 혁명의 선봉장이었던 전봉준과 농민을 무대 전면에 내세운 내세운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그리고 있는 희곡 작품으로는 배봉기의 <전봉준>(1988), 노병갑의 <들불>(1990) 등을 들 수 있으며, 전봉준 보다는 이름없는 민중들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창작되기는 했으나 김정숙의 뮤지컬극 <들풀>(1994) 역시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그리고 있는 동학 소재 희곡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80년대 동학 소재 희곡의 대다수가 전봉준에 의해 주도되었던 무력혁명으로서의 동학만을 얘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반감적이고 적대적인 당 시대의 상황적 배경이 공연문학으로서의 희곡 문학에 반영된 때문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3) 역사적 사실의 재해석으로서의 동학
1970년대의 차범석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발표를 시작으로 동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이면과 기록의 행간을 읽어내고자 하는 동학의 희곡 문학적 조명이 시도되었다. 1980년대 공연되었던 임진택 정리의 <녹두꽃>은 풍자와 비유를 통해 최시형만이 최제우의 법통을 계승한 진정한 후계자란 기존의 동학측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90년대 들어 여전히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 많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90년대 초반 대학가에서마저 더 이상 반정부 시위를 찾아 보기 힘들었던 다양성의 시대인 90년대적 사고의 반영으로 그동안 보수 온건 논자라는 비난을 받아 오던 북접의 최시형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을 시도하는 희곡 작품인 김용옥의 <천명>, 극단 함께 사는 세상의 <궁궁을을, 1894> 등이 발표되면서 동학을 단순한 소재로서나 혁명으로서뿐만 아니라 동학 전체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려는 노력들이 시도 되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차범석에 의해 창단되었던 극단 '산하(山河)' 의해 1976년도에 공연되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체 2부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2부 모두 1894년 갑오혁명 이후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 희곡은 동학혁명자체나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 1894년의 동학혁명이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된 후 그 이후 살아 남은 동학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살펴봤던 희곡들과 궤를 달리하고 있다. 특히 이 희곡은 동학혁명 당시 남접과 북접의 갈등 그리고 북접 내에서 이용구 등이 일진회로 갈라져 나온 역사적 사실 등을 기천석과 오세정이란 인물을 통해 꽤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녹두 장군 전봉준의 수제자였던 기천석과 오세정은 동학혁명의 실패후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기천석은 계속해서 구 청국 영토 내에 있는 서간도에다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신민회 등을 조직하여 매국노 등을 처단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고 오세정은 남접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김덕삼 마저 쫓기는 몸이 되자 그나마 조직이 남아 있던 북접을 찾아 떠나게 된다.
世貞 그게 아닙니다. 재작년 충청도 보은 집회 때 교단 간부들이 최시형 선생에게 국가를 혁신하자고 진언했을 때 최시형께서는 시기상조라고 타일렀고 녹두장군께서 기포했을 때 북접도 보조를 맞춰 주기를 간청했을 때도 "현기(玄機)를 불로하고 心急히 말라" 하셨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지금은 확실히 그 때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千錫 그럼 그 때가 언제라던? 응? 언제냐구? 손자환갑 지나고서야?
…(중략)…
네가 인제 와서 북접주 최시형을 따르겠다면 그건 네 자유다. 가거라 퇫!
(그는 침을 뱉고는 뜰로 뛰쳐 나온다.) 世貞은 여전히 化石처럼 앉아서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듯 말한다.)
世貞 형님, 그건 오해입니다. 내 자신의 희생이 두려운 게 아니에요. 무고하게 죽어가는 백성이 가엾어서 그래요. 분명히 해 둘 것은 지금은 시기가 아니에요. 혁명에도 시기가 맞아야 한다는 최시형 선생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언제고 이 얘기는 다시 할 때가 올 거요.
이후 오세정은 북접의 최시형과 손병희를 찾아가게 되고 이후 북접내의 이용구 등이 이끄는 일진회의 간부가 되면서 온갖 부귀 공명을 다 누리게 된다. 그런데 이 희곡에서 주목할 점은 작가 차범석이 서 있는 지점이다. 차범석이 변절자로 그리고 있는 오세정의 변절과정을 통해 그는 동학의 온건노선이었던 북접파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오세정의 변절이 동학의 남접에서 동학의 북접으로 그리고 그 북접의 일원이었던 이용구 등에 동조한 일진회로의 변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천석으로 대표되는 동학의 남접 세력을 민족의 영웅으로 오세정으로 대표되는 북접 세력을 변절자로 그린 것은 작가 나름의 시각이겠지만 동학의 구심력격인 북접이 곧 친일파인 일진회의 전 단계의 변절 과정이었다는 식의 시각은 동학 전체를 조망하는데 있어 지엽적이고 표피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희곡에서의 표면적인 승리는 결국 오세정에게로 돌아간다. 기천석의 아들 용태의 총을 맞고도 오세정은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 남기 때문이다. 기천석의 독립자금 기부 요구마저 거부한 참판이 된 오세정이 자신의 집에서 호화 잔치가 벌어지던 날 기천석의 아들 용태는 요릿집 보이로 위장한 채 오세정의 집에 잠입해 변절자 오세정을 총으로 쏘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결국 죽게 되는 것은 오세정이 아니라 기천석이다. 아들 용태의 살인을 말리기 위해 기천석의 집에 찾아 왔던 천석은 아들 대신 잡혀서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기천석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우리는 작가 차범석이 노렸던 것이 결코 오세정에게 있음이 아니라 기천석에게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千錫 …(중략)… 역사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 되는 것이라 했소. 1894년 동학란 때나 1912년인 지금이나 어쩌면 재판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꼭 같은 소리를 되풀이 하는지 모르겠소. 정말 나는 모르겠소. 아마 앞으로 십 년 이십년 아니 백년 후에도 꼭 같은 재판이 있을 것이오.
…(중략)… 16년전 전봉준 선생께서 하시던 말씀 지금도 생생하오.
(그는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서서히 읊조린다.)
千錫 듣거라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다. 너희가 살아 있는 곳에 나도 함께 살아 있겠다.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음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않음이 있다. 작가 차범석은 기천석의 죽음을 전봉준의 죽음과 대등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타협을 거부한 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오로지 한 길을 갔던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비참하리만큼 소외되었던 기천석에게 차범석이 최종적인 손을 들어줌으로써 오세정과 같이 당 시대의 주류로 살았던 사람들을 묵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희곡이 동학 혁명의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전봉준과 그의 뜻을 끝까지 이어나갔던 기천석을 중심축에 놓고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 희곡을 창작한 작가 차범석의 동학을 바라보는 주 시각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녹두꽃>은 1980년 5월 서울대 마당에서 총연극회가 공연한 것을 임진택이 재정리한 마당극 연희본이다. 이 마당극 연희본은 1985년《한국의 민중극》이란 이름으로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작품에는 동학과 관계되는 인물인 최제우나 최시형, 전봉준 등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 극본을 읽다보면 '해동백미교'라는 종교가 동학을, 진풍운이 동학의 교주인 최제우를, 진풍운의 제자인 배달호와 유달수가 최시형을, 고막봉이란 인물이 전봉준을 그리고 화녀국과 주월국은 일본과 청나라를 빗댄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연희본은 그동안 동학을 희곡으로 형상화했던 기존의 희곡 작품에 비해 동학 자체에 대한 총괄적인 이해를 가지고 그 동학의 현재성의 의미를 오늘을 사는 우리 민중들에게 묻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연희본에서는 최시형을 풍자한 듯한 풍운의 제자 유달수와 배달호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리면서 풍운의 진정한 제자는 고막봉이란 인물임을 암암리에 암시하고 있다. 이는 {천도교 창건사}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최시형만이 최제우의 법통을 계승한 진정한 후계자란 기존의 동학측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새로운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최제우 사상의 혁명성의 부재를 주장했던 이들의 논리를 반박하면서 최시형이란 인물이 최제우의 진정한 뜻을 따르지 못했던 나약한 변절자적인 인물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이 연희본이 80년 5월 대학가에서 공연되었던 마당극의 연희본이라는 사실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당시 대학가에서 마당극을 공연했던 대학생들의 다수가 맑시즘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따라서 그러한 영향 아래 동학을 '동학농민운동'으로 규정하려 했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시형의 반폭력적인 거취, 더 나아가서는 최시형이 관군에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동학농민혁명 운동 전체에 반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러한 관점은 당시 강렬히 민주주의를 원하며 피흘리며 죽어간 80년대의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제우 즉 진풍운은 '밥이 하늘이다'라는 포교활동을 하다 관군에게 잡혀 처형을 당하고 만다. 이때 그의 수제자들인 배달호와 유달수는 더 이상 진풍운을 따르지 않고 비겁하게 뒷걸음질쳐서 피할 뿐이다. 그런 그들은 진풍운이 관군에 의해 바수다 감옥에서 처형을 당하자 그 슬픔을 과장하며 젓가락 한 자루씩을 내세우면서 서로가 '해동백미교'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내세운다.
이들과 대비해 진풍운과 같은 감옥 안에 있던 고막봉이란 인물이 소개된다. 고막봉은 백정을 아버지로 창녀를 어머니로 비천하게 태어난 인물이다. 그런 그이지만 그는 진풍운의 '밥은 하늘이다'라는 말은 이미 실천하다 감옥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막봉 …… 나는 부자들이 빼앗아간 것을 다시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혼자서 실행에 옮기다가 이렇게 붙잡혀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략)…
이러한 막봉을 진풍운은 한울님의 큰 뜻을 자신보다 먼저 실행한 이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풍운 …(중략)… 막봉이는 듣거라. 배가 고파 밥을 훔침도 죄가 아닐진대 하물며 배고픈 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려 밥을 훔친 것이 어찌 죄가 되겠느냐? 이는 한울님의 큰 뜻을 나 보다 먼저 실행한 것이다.
진풍운이 처형당하자 고막봉과 그와 뜻을 같이 하던 감옥의 죄수들은 진풍운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바수다 감옥을 탈출하게 된다. 한편 주문속에 밥이 있으니 주문만 외우면 밥이 생길 거라는 유달수와 배달호의 말에 해동백미교의 신도들은 주문을 열심히 외지만 밥은 생기지 않는다. 결국 굶주린 그들에게 밥을 가져다 준 이들은 바수다 감옥을 탈출한 고막봉과 그 일행이었다. 이들은 부잣집 곳간을 털어 굶주린 이들에게 밥을 가져다 준 것이다. 진풍운의 젓가락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진풍운의 진정한 후계자들이라고 주장하던 배달호와 유달수에게 진풍운의 신표인 숟가락을 내보이며 그 숟가락은 특정한 누군가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되며 헐벗고 굶주린 모든 백성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이 극본의 축이 누구에게 기울어져 있는가를 확연히 드러내 주고 있다.
막봉 (관중들을 둘러보며)우리가 풍운거사님을 뵈온 것은 바수다 감옥의 감방에서였소. 풍운거사님을 만나기 전 나의 목숨은 죽은 거나 다름 없었소. 하지만 한울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알고 난 후,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이 한 신명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분명히 깨달았소. 그리하여 여기 있는 동지들과 함께 바수다 감옥을 탈출하여 지금까지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구하기 위해 순례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오. 그동안 나는 가진 자들의 포악한 횡포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결코 나누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못가진 자들로부터 더욱 빼앗기에 광분하고 있었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입으로 외는 주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힘과 힘의 대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소. 여기 있는 이 밥도 그렇게 찾아온 것이오.
위의 고막봉의 주장은 동학 남접의 전봉준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전봉준은 민중들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외세를 몰아내고 민중들이 주인이 되어야 인간이 비로소 평등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투쟁방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배달호와 유달수의 동학을 성심성의껏 믿고 주문을 외우면 저절로 밥이 생길 것이며 자연 좋은 세상이 올거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북접을 대표하는 최시형의 입장을 빗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북접이 민중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관군과 타협하며 자진 해산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매우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유달수 우리가 자진해서 해산하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줄 뿐 아니라 구호물로서 밀가루와 옥수수를 하사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노라.
…(중략)…
막봉 여러분 우리는 황성에서 보낸 특사의 감언이설에 속아서는 안되오. 저들은 우리의 열매골 집회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구호물자라는 미끼를 던져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소. 그 구호물자는 바로 우리가 피땀흘려 생산한 쌀을 깡그리 뺏어간 바다건너 화녀(禾女)국과 주월(主月)국에서 구걸하여 온 것이오. 여러분 우리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일시적인 눈가림에 또다시 속아서는 안될 것이오.
그러나 결국 배달호와 유달수가 관군에게 속았을뿐더러 윗천장과 오랑캐가 결탁하여 나라가 오랑캐에게 넘어가게 된 것을 알고 막봉일행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는 전봉준을 위시한 남접의 봉기에 최시형 등의 북접이 나중에 합류하여 함께 동학 혁명의 길을 걷게 됨을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은 민중들의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마당극 <녹두꽃>에서는 결코 이러한 동학혁명을 실패로 보고 있지 않으며 여전히 현재에도 힘있게 굴러가고 있는 역사의 수레바퀴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마당판 안을 자전하던 그 역사의 수레비퀴가 크게 기우뚱거리더니 이윽고 마당판을 휩쓸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공전하는 수레바퀴인 것이다. 관중들은 그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끌면서 함께 행진하기 시작한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풍물소리에 맞춰 모두들 굶주린을 이기고 힘차게, 빼앗긴 밥을 찾아 황성으로 진격한다. 배고픔도 잊은 듯 오로지 '밥이 하늘이다' '밥이 하늘이다' 처철하게 외치면서……
바로 동학혁명의 의미가 현재에도 계속해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우리 역시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끌고 나갈 밥이 하늘인 민중들이기 때문이다.
1994년 동학혁명 백돌을 기념해 발표되고 공연되었던 도올 김용옥의 희곡 <천명>은 모두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희곡의 제 1막과 2막에서에서 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인물과 내용은 전봉준과 이른바 동학혁명이다. 그러나 이들 부분을 자세히 숙독해 나가다 보면 결코 도올이 희곡 <천명>에서 얘기하려는 것이 전봉준이란 한 인물의 영웅성이나 동학혁명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도올은 희곡 <천명> 전체에 최시형이란 어찌보면 전봉준이란 인물과 대립되는 인물을 계속해서 배치함으로써 1894년의 동학혁명이 동학이 추구하던 큰 흐름 속에서 얼마나 국부적인 사건이었나를 말해주고 있으며 과연 진정한 천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우리에게 되돌리고 있다. 도올은 이 희곡 전편에 동학혁명 의해 남편이 희생되는 한 평범한 아낙네인 복례라는 여인네를 등장시킴으로 해서 민중이 짓밟히고 그들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혁명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경군인들 동학군인들
누굴적대 한단말가
짓밟힌건 우리네 삶이요
사라진건 낭군의 음성이라
……
내 낭군없을진대
다시 개벽 무삼할꼬
도올은 이 희곡의 서문격인 哀訣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역사가 해방을 지향한다면 억눌란 자만 해방시킬 것이 아니요. 마땅히 억눌린 자에게 억눌린 자도 해방시켜야 한다" 도올의 이러한 시각을 통해 희곡 '천명'의 아래 부분의 노래를 분석해 보면 복례라는 여인이 겪는 고초란 어느 한편 즉 경군으로 대표되는 짓누른 자만의 책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늘님이 저 여인속에서
고초겪음을 깨닫는다면
누가 감히 뭇백성을
이와 같이 짓누르랴
도올은 이 희곡을 통해 한 평범한 백성이 그 평범조차 지키지 못하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고 있는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한 책임이 단지 이 여인을 짓누른 자들만의 책임만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여인과 함께 짓눌렸던 자들의 힘에 의해 이 여인은 더 큰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천명과 개벽이 무엇인가에 대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 희곡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수운의 '칼노래'는 이 희곡의 두 주인공인 해월과 전봉준에 의해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전봉준은 흔히 검결이라 불려지는 이 칼노래를 혁명에 의해 개벽이 달성될 때가 왔음을 얘기한 노래로, 해월 최시형은 아직 개벽을 이룰 근원이 차지 않았기에 좀 더 인간이 바뀌고 새로워져야한다는 수심정기(守心正氣)의 노래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듯 이들은 최수운의 칼노래마저 서로 다르게 해석했기에 보은집회의 해산을 종요하는 해월에 대항해 전봉준과 군중들은 최수운의 이 칼노래를 외치며 고부 봉기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로다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舞袖長衫) 떨쳐 입고 이칼 저칼 넌즛들어
…(중략)…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身命) 좋을시고
전봉준이나 전봉준을 추종하는 민중들은 최수운이 말한 개벽의 때가 비로소 왔다고 믿었으며 그 때는 자신들의 힘에 의해 즉 최수운이 말한 용천검 드는 칼 즉 무력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었던 개벽이란 오로지 무력적인 혁명에 의해 달성될 수 밖에 없는 바로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이 희곡의 전봉준이 민중 혁명의 노래로 사용한 최수운의 칼노래가 과연 민중들로 하여금 칼을 들고 무장봉기하라는 노래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래의 해월의 대사는 결코 칼노래가 전봉준의 무장봉기의 도구로 쓰여질 수 없는 노래임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 개벽이 무엇이오니까?
해월 인간세의 오만년 운세가 다하고 새로운 운명세가 도래한다는 말이요.
전 개벽은 오로지 혁명으로만 달성될 뿐이오.
해월 개벽은 命을 혁파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소. 命의 주체인 인간이 바뀌고 새로워져야 하오. 수운 선생임은 말씀하시었소. 개벽은 수심정기(守心正氣)네 글자에 있느리라.
그렇다고해서 해월이 전봉준의 혁명에 의한 개벽 부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위의 대화에서 해월은 개벽이란 命을 혁파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얘길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해월에게 있어 개벽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이 바뀌고 새로워져야한다는 의미로서의 개벽의 층위가 한층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입장의 해월에게 있어 수운 선생의 칼노래는 전봉준 식의 민중을 선동하는 무장 봉기의 노래로서의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하면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봉준이나 동학혁명을 연상하고 있듯이 최수운의 칼노래하면 그 때나 지금이나 모두 전봉준식의 의미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듯 하다. 동학혁명 100주년이 되던 1994년에 출간된 {동학 이야기}에서 김지하 역시 이 칼 노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수운 선생은 홀로 나무 칼을 들고 달 밝은 밤이면 교룡산성의 뒷산, 묘고봉(妙高峰)에 올라 이 [칼노래]를 부르며 칼춤을 추었습니다. 이 칼노래와 칼춤은 동학 민중 혁명의 전과정에서 혁명적인 노래의 핵심이 되었고, 가장 중요한 전투적 굿판의 핵심적인 춤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올의 희곡 <천명> 속의 해월은 그 당시 최수운의 이 칼 노래에 대한 해석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지 않음을 위 예문에서 밝힌 바 있다. 해월은 개벽이란 수심정기(守心正氣)네 글자에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수운의 칼노래 중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란 과격한 어구에 대해 해월은 과연 어떤 식으로 받아 들였기에 최수운의 뜻을 가장 충실히 따랐으면서도 전봉준 등의 무력 혁명 주장에 대해 그토록 반대적인 입장에 섰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인환은 바로 이 칼노래 즉 검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피력하면서 이 칼노래가 결코 사회적 저항의 노래가 아님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검결]은 결코 사회적 저항의 노래가 아니다. "때는 왔다. 때는 왔다."라고 할 경우의 때를 반항의 기회라고 보는 것은 전혀 그릇된 해석이다. 만년에 한 번 나오는 장부로서 5 만년에 한 번 닥치는 때를 만난다는 표현은 깨달음의 소중함을 의미한다. …(중략)… 두 차례나 거듭 나오는 '무수장삼'에 유의하여 살펴볼 때, [검결]을 민란과 연관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전쟁하는 사람이 소매 긴 적삼을 입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 "때가 왔다"고 하는 경우의 때가 깨달음의 순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좋도다 이 나의 신명, 나의 신명 좋도다"라는 [검결]의 마무리 문장은 깨달음과 환희와 깨달음의 신비를 노래한 것이다.
칼노래에 대한 김인환의 이러한 주장은 해월이 수운의 칼노래를 받아들이고 이해했던 측면과 어느 정도 유사하게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해월이 전적으로 김인환의 주장처럼 최수운의 칼 노래를 사회적 저항을 전혀 배제한 단지 깨달음의 노래로만 받아 들였다고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해월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그 때를 위해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적으로 호남에서 기포한 전봉준 등에 대해 해월은 아래와 같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하고 있다.
해월 …… 녹두가 치고 있는 것은 악인이지만 그 악인들도 역시 하늘님을 모신 자들이며 우리의 도는 그들조차 긍휼한 마음으로 구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요. …… 그의 개인적 판단이 너무도 엄청난 양민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오. 허나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소. 역사는 판단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자의 것인 것 같소. 녹두는 이미 이 시대의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겼오. 녹두의 앞날을 기원하오. 전국 도인을 총동원하는 기포의 결정은 나에게 시간을 좀 주오.
……
해월 (모두 다 죽을 것을 예견하고 허탈한 모습. 구슬땀을 흘리며 비장하고 간결하게) 기포하시오. ……
해월 천명이오!
바로 위 예문의 해월의 대사가 이 희곡에서 도올이 그리고자 한 바로 그 <천명>의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전봉준의 무력 봉기에는 끝까지 동조적인 입장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시대의 대세라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던 가장 인간적인 고뇌, 도올은 앞날의 비극을 다 알고서도 기포를 명할 수 밖에 없는 해월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희곡 <천명>을 통해 형상화 하고 있다. 또한 해월의 마지막 기포를 명하는 말 뒤의 "천명이오"라는 말은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비극조차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천명일 수밖에 없다는 해월의 입을 통한 도올 자신의 '천명'의 의미에 대한 해석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희곡> 천명은 해방 이후 역사적으로 혹은 문학적으로 많은 비난을 당했던 최시형이란 인물을 작품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그동안 동학의 무력적인 혁명 부분에 가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동학의 또 다른 부분 알리고자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용옥은 그동안 동학 하면 대다수 민중들이 떠올리는 인물인 전봉준이 주도했던 동학혁명이 동학이라는 부분에서 얼마나 국부적인 사건이었나를 희곡 <천명>을 통해 드러내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기에 도올의 희곡 <천명>속에는 전봉준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희곡 속의 진정한 주인공은 결코 전봉준이 아니라 해월 최시형이었던 것이다.
역시 동학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94년에 공연되었던 극단 '함께 사는 세상'의 공동창작 작품인 <궁궁을을, 1894>는 그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봉기 위주의 동학 혁명이라는 부분에서 탈피해서 동학이라는 사상적인 면과 신앙조직적인 면에 치중해서 동학을 조명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이 희곡 작품은 김용옥이 그의 희곡 <천명>에서 최시형을 무대의 중심축으로 끌어 올리면서 그동안 동학을 현상학적 혁명으로서만 이해 하려던 이들에게 비난받아 오던 해월을 새롭게 재조명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전봉준이라는 인물보다는 해월과 수운을 좀 더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동안 일부 맑시즘의 영향 아래 동학을 동학농민운동으로 규정하려는 사람들은 갑오동학혁명 당시 남.북접 사이의 갈등을 통해 나타난 남접과 해월 최시형 선생 간의 관계, 해월 선생의 반폭력적인 거취를 들어, 더 나아가서는 해월 선생이 당시 관군측에 오히려 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동학농민혁명 운동 전체에 반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관점을 계속 고수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이원론적인 입장이 동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얼마나 탄력성을 잃어버리는 시각을 제공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발표된 김용옥의 <천명>이나 극단 '함께 사는 세상'의 <궁궁을을 1894> 등은 그동안 동학혁명을 현상학적 개벽으로만 이해하려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수 반동 세력으로 지탄 받아 오던 최시형이란 인물의 사상과 인물됨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1980년대와는 달리 더 이상 무력 혁명을 소리 높혀 외칠 필요가 없는 1990년대 식의 사고를 반영한 작품들이라 볼 수 있다.
4.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우리 희곡 문학상 동학을 소재로 발표된 최초의 희곡으로 평가 받고 있는 김우진의 <산돼지>(1926)를 필두로 1931년에 발표된 조용만의 <갑오세>, 1937년에 발표된 채만식의 <제향날> 그리고 1941년에 공연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임선규의 <동학당>, 1950년에 발표된 박노아의 <녹두장군>, 1976년에 공연된 차범석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 1980년 5월 서울대 마당에서 총연극회가 공연한 것을 임진택이 정리한 <녹두꽃>, 1988년 제 1회 민족극 한마당의 대미를 성황리에 장식한 바 있는 극단 아리랑의 <갑오세 가보세>, 1988년에 공연된 배봉기의 <전봉준>, 1990년 2월에 대학극으로서 한양대학교 민족극회 '새벽'에서 공연된 노병갑의 <들불>, 동학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94년에 발표된 김용옥의 <천명>, 김정숙의 뮤지컬극 <들풀>, 그리고 제 7회 민족극 한마당 참가작인 극단 '함께 사는 세상'의 <궁궁을을, 1894> 등 구체적인 희곡 작품 분석을 통해 동학을 소재로 한 희곡 작품들 속에 나타난 동학의 의미를 살펴 보고자 했다. 그 결과 동학 소재 희곡들의 대략적인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흐름을 밝혀 낼 수가 있었다.
우선 초창기에 발표되었던 동학 소재 희곡인 김우진의 <산돼지>, 조용만의 <갑오세>, 채만식의 <제향날>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동학은 동학을 전체적으로 조망 하기에는 다분히 지엽적인 사건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등 이들 초창기 희곡들은 동학이라는 사건을 단순히 소재적으로만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우진의 <산돼지>에 나타난 동학이란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당시의 민중들을 불행하게 하는 삶의 장애 요소였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살아 남은 자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삶의 장애요소일 뿐이며, 제향날 역시 희곡을 통한 동학에 대한 새로운 조망의 의미보다도 김우진의 <산돼지>와 마찬가지로 단지 동학란으로 인한 일반 민중들의 애환과 아픔만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또한 조용만의 <갑오세>는 동학혁명이 일어난 곳에 '가보세' 라는 참여의식을 강조하는 피상적인 수준에서 끝나고 있다. 이와 같은 초창기 동학 소재 희곡들의 경향은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얘기하기에는 식민지 시대라는 당 시대의 자유롭지 못한 상황과 재해석된 동학을 말하기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당시대 역사에 대한 한계상황 때문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임선규의 <동학당>을 과도기적 기점으로 동학 소재 희곡에서는 차차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얘기하게 되는데 50년에 발표된 박노아의 <녹두장군> 그리고 80년대의 대다수의 작품들과 90년대의 많은 작품들이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다루면서 동학 혁명의 선봉장이었던 전봉준을 무대 전면에 등장시키는 등 많은 변화를 보여 주었다.
박노아의 <녹두장군>은 작가의 동학에 대한 자기 혼란성으로 작품 내용자체의 일관성마저 의심되긴 하지만 해방 이후 최초로 전봉준을 작품 전면에 부각 시키며 농민전쟁으로서의 동학혁명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는 동학 소재 희곡 작품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의 대다수의 희곡작품들이 무력혁명으로서의 동학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군사 정권에 대한 반감적이고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던 당 시대의 상황적 배경이 공연문학으로서의 희곡 문학에 반영된 때문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의 차범석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발표를 시작으로 동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이면과 기록의 행간을 읽어내고자 하는 동학의 희곡 문학적 조명이 시도되었다. 1980년대 공연되었던 임진택 정리의 <녹두꽃>은 그동안 동학을 희곡으로 형상화했던 기존의 희곡 작품에 비해 동학 자체에 대한 총괄적인 이해를 가지고 그 동학의 현재성의 의미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되묻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연희본에서는 최시형을 풍자한 듯한 풍운의 제자 유달수와 배달호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리면서 풍운의 진정한 제자는 고막봉이란 인물임을 암암리에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천도교 창건사}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최시형만이 최제우의 법통을 계승한 진정한 후계자란 기존의 동학측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새로운 시각이다. 특히 90년대 들어 여전히 혁명으로서의 동학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 많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90년대 초반 대학가에서마저 더 이상 반정부 시위를 찾아 보기 힘들었던 다양성의 시대인 90년대적 사고의 반영으로 그동안 보수 온건 논자라는 비난을 받아 오던 북접의 최시형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을 시도하는 희곡 작품인 김용옥의 <천명> 극단 '함께 사는 세상'의 <궁궁을을, 1894>등이 발표되면서 동학을 단순한 소재로서나 혁명으로서뿐만 아니라 동학 전체를 총체적으로 다시 재조명하려는 노력들이 시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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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山돼지 연구], {한국현대극작가론-김우진}, 태학사, 1996.
목정균, [동학 운동의 구심력과 원심작용], {동학사상과 동학혁명}, 청아출판사, 1984.
박광성, [고종조의 민란 연구], {전통시대의 민중 운동} 下, 풀빛 1981.
신아영, [채만식의 <제향날>에 나타난 서사성 연구], {한국 현대 극작가론-채만식}, 태학사, 1996.
최진옥, [1860년대의 민란에 관한 연구], {전통시대의 민중 운동} 下, 풀빛, 1981.
A study on the 'Dong Hak' in modern plays.
Shin, Won-Sun
This paper mainly focused on 13 works including "Sandeagi" written by Kim U Jin in 1926 and "Chunmyung" by Kim yong Ok published in 1994, the 100th anniversary of 'Dong Hak'
Dividing these plays into two groups, works of colonial era and post-independence by time of publication, it tried to look over the conflict aspects of Centripetal force and Centrifugal force of 'Dong Hak'.
Among works of play in colonial era such as "Sandeagi" by kim U-Jin, "Gap o se" by Cho Yong-Man, "Che Hyang Nal" by Che Man-Sik , the appearance of sorrow stricken-average people who suffered from oppression during 'Dong Hak' was mainly showed rather than a new view toward 'Dong Hak' through plays. This can be interpreted as followings. ; authors of these works tended to wirte plays in the view of Centripetal force of 'Dong Hak' under the condition of colonial era.
"Dong Hak Dang" written by Lim Sun-Gyu in colonial era, considered as a bridge between works of colonial era and post independence shows the conflict of Centripetal force and centrifugal force of 'Dong Hak' 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