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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4)>
- 숙종의 여인 장희빈
숙종 6년에 왕비 인경황후가 세상을 뜨고, 그 이듬 해에 새 왕비를 들이니 이 사람이 노론 핵심 인사인 민유중의 딸 인현황후 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현황후가 들어 오기 전에 이미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뒤에 장희빈으로 불리게 된 여인 장씨입니다.
장희빈(글의 진행상 아직 희빈이 아니나 역사의 결과물이므로 편의상 장희빈 이라 함)은 1659년 장경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 오빠이자 맏아들은 장희재입니다.
장희빈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는데, 장현은 남인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장희빈의 어릴 적 환경은 비빈의 자리에 오른 것에 비하면 매우 한미하다 할만 했는데, 이러한 배경의 여인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는데, 장차 나타날 장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 하겠습니다.
“숙종실록”에는, 장희빈 어머니 윤씨는 우의정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고, 조사석은 인조의 후궁 조귀인의 손자 동평군에게 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 부탁했으며, 그런 요청에 따라 장희빈이 나인으로 입궁했는데, 그녀는 미모가 특출나게 뛰어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희빈은 인경황후가 죽은 그 해 21세의 나이에 처음 숙종의 성은을 입었고, 이때 부터 이미 큰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장희빈 꿈은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당파적 색채가 강한 왕대비 명성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보아 그녀를 내 쫓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 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나이는 장희빈이 8세 위였습니다.
장희빈을 내쫓은 왕대비 명성왕후가 죽자 장희빈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현왕후가 명문가 출신의 현숙한 여인답게 숙종에게 “성상의 은혜를 입은 여인을 사가에 둘 수 없으니 불러 들이소서”라는 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숙종은 장희빈을 불렀습니다.
(얼씨구나~) 이 때 장희빈의 나이 25세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95)>
- 장희빈(2)
인현왕후의 청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온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습 니다.
장희빈을 숙원(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로 승급시켜 주었고, 장희빈은 이러한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실의 큰 어른 자의대비의 환심을 사는 한편,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을 통해 밀려나 있는 남인과 연대를 구축했습니다.
이에 집권 서인은 긴장했고, 부교리 이징명과 김만중이 나서 장희빈을 견제하는 소를 올렸지만, 숙종은 오히려 이들을 유배형에 처했습니다. 그 만큼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희빈의 권세가 높아지자 현숙한 여인 인현왕후로서도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은근히 장희빈을 경계하는 말을 하기도 했고, 숙종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그녀를 불러다 종아리를 치기도 하였습니다.
장희빈은 이를 악물고 종아리를 맞으며 반드시 중전 자리를 차지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688년 장희빈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왕자 윤(뒤의 경종)을 낳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습니다.
나이 28세에 처음으로 아들을 얻은 숙종의 기쁨은 참으로 컸고, 특히 그 아들이 총애해 마지않는 장희빈이 낳은 것이니 그 기쁨은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숙종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장희빈의 모친이 옥교를 타고 대궐에 들어 오자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당하관 아내가 뚜껑이 있는 옥교를 타고 왔다는 이유로
그 종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일을 알게 된 숙종은 전교에 따라 입궐한 왕자의 외조모에게 모욕을 주었다며 크게 분개해 사헌부 법리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했는데, 이들을 얼마나 세게 때렸던지 둘 모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숙종 15년 1월, 대신들을 모두 불러들인 숙종은 마뜩치 않아 하는 대신들의 뜻을 누르고 아직 뒤집기도 못하는 장희빈 소생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장희빈을 희빈(정1품) 으로 책봉하였습니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젊었고(28세와 21세), 따라서 정비인 인현왕후가 대군을 낳을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國本을 확정한 것은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상당한 부작용이 우려되는 무리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뒤집기의 달인 숙종이 또 다른 뒤집기를 위해 거대한 정치적 사건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담에 이어서 ~
<조선왕조실록(96)>
- 장희빈(3)
원자 책봉이 강행되자 팔순의 나이에도 파이터 기질이 여전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며 정면으로 반대하는 소를 올렸습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습니다. 숙종은 이미 명호가 정해졌는데도 이를 재론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 일 것이라며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 출송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어서 송시열의 토벌을 청하지 않았다 하여 도승지 이하 4명의 승지와 대간들을 파직한 후 3정승에 권대운,, 목래선, 김덕원을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조정을 남인으로 완전히 물갈이를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대간들의 청을 받아 송시열을 제주에 안치한 후 대부분의 서인을 파직하고 유배를 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기사년에 느닷없이 정치적 국면이 확 바뀌니 이것이 기사환국 입니다. 경신환국때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뒤집혀 버렸습니다.
서인 집권 시절에 있던 사건들을 재조사하여 관련자들을 잡아 들이고, 전에 김석주와 공작정치를 일삼던 김익훈이 일흔 나이에 형신을 받다가 죽었으며, 김환, 이희 등이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기사환국은 지난번 경신환국과 닮아 있었지만, 경신환국이 숙종 묵인아래 김석주가 각본과 연출을 한 것이라면, 기사환국은 숙종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각본과 연출을 직접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돌아온 남인의 핵심 표적은 서인의 우두머리 송시열과 김수항 이었습니다.
- 저들의 죄는 찰대로 차서 김안로나 정인홍을 넘어서 옵니다.
먼저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김수항이 특별한 죄명도 없이 사사 되었습니다.
숙청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즈음 숙종은 느닷 없이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중전이 "꿈에 선왕께서 말하길, 장희빈은 본디 복이 없어 아들도 없고, 궁안에 두게 되면 남인과 결합해 나라에 해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자가 탄생하지 않았느냐.
중전의 투기가 선왕까지 들먹일 정도로 극에 달했으니, 더두고 볼 수 가 없다.
아무리 장희빈 덕분에 환국되어 정권을 잡은 남인이지만, 결정적 하자도 없는 한 나라의 국모를 폐하자고 하는 일에 선뜻 동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동조했다가 일이 잘 못 되어 멸문지화를 입은 연산군 시대의 일이 떠 올랐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97)>
- 장희빈(4)
숙종이 폐비의 뜻을 거두려 하지 않자
86명의 대신, 대간이 폐비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노한 숙종은 이들의 상소가 모반 대역 보다 더 하다면서 국청을 설치하고 친국을 시작 하였습니다. 숙종은 이들이 임금을 배반하고 부인을 위해 절의를 세우려 한다며 고문을 가하였고, 박태보 등이 모진 고문에도 의연히 대처하자 이들에게 압슬을 가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주었습 니다. 결국 박태보, 오두인이 대표로 고문을 받고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압슬:죄인 자백을 받고자 무릎에 가한 고문)
숙종의 이러한 행위는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모두 숙종의 의도된 과잉 행위였습니다.
(“이래도 반대할래?”)
더 이상 반대가 없자 드디어 숙종은 1689년(숙종15년) 인현왕후를 폐서인 해 친정으로 내쫒고 장희빈을 새 중전으로 책봉하였습니다.
일국의 국모가 특별한 잘못도 없이(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
폐 서인되는 전대미문의 일이 너무나도 쉽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사가에 있는 희빈을 궁으로 불러들이라고 숙종에게 주청한,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인현왕후의 정치적 감각부재? 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곧 이어 장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부는 영의정, 조부는 우의정, 증조부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고,
이듬해 원자는 왕세자로 책봉 되었습니다. 장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이 정점에 오른 것입니다.
얻을 것을 모두 얻은 숙종은 이제 남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리라 마음 먹고, 송시열의 처분을 신하들에게 맡겼습니다.
더 이상 왈가 불가할 일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송시열의 죄상이 불충하나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국문할 필요가 없나이다” 라고 했고, 숙종은 “대신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사사하되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즉시 죽게 하라” 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제주에 안치되어 있던 송시열은 어명에 의해 바다를 건너 상경하던 중 정읍에 이르러 금부도사를 만나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조선후기의 거목이 특별한 죄목 없이 스러져 간 것입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이 사람은 사림이 ‘송시열의 조선’ 이라 할 정도로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 (宋子大全)”을 남기기도 했습 니다.
송시열은 죽어서도 서인, 특히 노론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사관의 인물평은 송시열과의 관계를 최우선의 잣대로 삼았습니다. (“김 아무개는 평생을
송시열의 뜻에 따른 사람 으로서~~~”)
숙종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거목 송시열 마저 한방에 보내 버리게 할 정도로 숙종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한 장희빈의 비기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자못 궁금하지만 전하는 문헌은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궁금해~~ 정말 궁금해~~^^ㅎ)
<조선왕조실록(98)>
- 장희빈(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했으나 집권 세력다운 면모를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의 환국을 통해 언제든지 또 다른 환국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 이었습니다.
남인은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중전의 오라비 장희재와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임금의 뜻에 순종 하는 등 복지부동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사환국이 있은지 4년이 흐른 숙종19년, 남인을 긴장 시키는 일이 있었으니, 숙종이 새로이 궁인 최씨를 숙원으로 삼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록에는 별 기록이 없으나, 야사에는 언제나 폐비에게 의리를 다 하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었다는 것입니다.
숙종은 이즈음부터 숙원 최씨를 총애하기 시작했고, 중전인 장희빈의 경계심이 커졌으며, 남인의 긴장감도 고조되기 시 작했습니다. (언제 환국이 있을지 모른다!)
한편, 기사환국으로 물러난 서인 진영에서는 일군의 무리가 비밀 자금을 모우고 궐내와 연결해 궁중 소식을 수집하는 등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이 남인 측에 포착 되었고, 남인 최고 실세 우의정 민암은 그들 중 “함이완”이란 자를 협박해 역모를 고변하게 하였습니다.
함이완의 고변에 따라 관련된 서인들을 잡아다 고문을 하던 중, 이번엔 서인 유학, 김인 등이 “장희재가 김해성을 매수해 최숙원을 독살하려 했다”라는 고변을 하였습니다.
내용상 정반대되는 고변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니, 조정 안팎은 초긴장 상태가 된 채로 숙종이 있는 대전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다시 뒤집기를 할 것 인가!)
이러한 때에, 고심하던 숙종이 드디어 비망기를 내렸습니다.
- 우의정 민암(남인)이 함이완과 혼자 만나 수작한 것은 의심 스럽기 그지없다. 증좌도 없이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럽다.
- 국청에 참여한 대신은 모두 삭탈관직해 문외출송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절도에 안치하라.
숙종은 집권 남인세력의 고변을 무고로 단정하고 영의정 권대운 이하 남인들을 모조리 쫒아 내고 즉시 영의정, 훈련대장, 병조판서 그리고 승지와 삼사 관원들을 서인들로 채워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삽시간에 일어난 환국이었습니 다.
이와같이 숙종이 1694년 (숙종20년) 남인에서 서인으로 순식간 물갈이를 해버린 일련의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