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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청주목으로 존속했으며, 1395년(태조 4) 한양 천도와 동시에 양광도 일부가 경기에 이속되고 나머지 지역이 충청도로 개칭되면서 충주목과 함께 그 계수관(界首官)이 되었다. 1449년(세종 31) 충청도관찰사로서 판목사(判牧事)를 겸하게 했다가 곧 폐지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설치했으며 2개 군, 10개 현을 관할하였다.
=양녕대군과 청주
조선 초 청주는 조선왕들이 행차하던 곳으로 이곳에는 초정행궁이 있고, 세종대왕이 마셨다는 초정약수는 초정리 약수터에 있는데 현재도 청주 지역의 특산물이다. 조선 초 세종은 두 차례 걸쳐 청주로 행자하였는데 청주에 초정행궁을 짓고 117일 동안 기거하며 눈병과 피부병을 낫기 위한 요양생활을 하였다. 이후 세조가 초정 일대에 행차하였다.
조선 초에는 많은 문제를 일으켜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이 청주 읍성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양녕은 유배지에서 외부인들과 접촉해서 문제를 일으킨게 발각되자 대신들이 양녕을 탄핵해 법에 따라 양녕의 처벌을 요청하였으나 세종은 오히려 극진히 대접하여 두터운 우애를 보여주었다. 세종은 양녕이 살고 있던 청주 읍성 안 관사를 수리해주고, 자녀와 처첩과 노비를 그 전처럼 하고, 녹봉을 주었다. 이로인해 조선왕의 행차와 더불어 청주 지역이 발전하였을 것이다. 이후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단종을 폐하고 왕위의 오르는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집현전 학자들 중심으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지만 좌절되었다. 양녕은 세종보다 16세 더 살았는데 양녕은 태종의 둘째 효령대군과 같이 세조에게 단종을 죽이라고 세 번이나 요청하였다. 한편으로는 양녕이 속리산 일대를 유람하다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속리산문영월흉보〉라는 한시를 지었는데 “임금이시어 어디로 가셨나이까[龍御歸何處] / 근심어린 구름이 영월에 일어나고[愁雲起越中] / 온 산천이 텅 빈 듯 쓸쓸한 가을밤[空山十月夜] / 통곡하며 하늘에 호소합니다[痛哭訴蒼穹]” 라며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하였다. 양녕과 관련된 일화를 보면 세종에게 세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미치광이 연기를 했다는 둥 하는 일관되지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권력에 맞춰 항상 편의주의적인 노선을 택했던 모습으로 보여진다.
1505년(연산군 11) 청주목 출신 사람이 환관 이공신(李公臣)을 죽인 사건으로 청주목을 나누어 이웃 고을들에 분속시켰다가, 중종 때 청주목으로 복구하였다. 1591년(선조 24) 해미에 있던 병사(兵使)를 청주로 옮겨와 읍성 안에 머무르게 하고, 1594년 옥천에서 진을 옮겨와 영장(營將)은 성 밖에, 우후(虞候)는 상당산성에, 찰방(察訪)은 율봉역(栗峰驛)에 각각 주재했으며. 다음해 원균(元均)이 병사로 부임하였다. 또한 청주 읍성에는 이례적으로 북쪽에 청주목사의 관아가, 남쪽에 충청 병영이 있었다.
=청주목 관아 청녕각과 망선루
청주 읍성의 북쪽에는 지금의 청주 시장 격인 청주 목사가 집무를 보던 관아(관청)가 있는데 그 관아를 청녕각(淸寧閣)이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청주 목사로는 조선 중기의 율곡 이이가 있었다. 율곡 이이는 1571년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청주로 내려갔는데 현재 청주중앙공원의 서원향약비에는 이이가 서원향약을 제정·시행했던 것이 기록되어있다. 향약(鄕約)은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으로, 조선 중기 지방 사림이 농민·노비 등 하층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향촌의 공동 조직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를 지방자치의 효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향약은 또한 서원과 함께 향촌 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서원향약의 특징은 양천을 막론하고 모든 주민을 참여시키는 계조직을 향약조직과 행정조직에 연계시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청주목은 25개면으로 도계장 4인 계장 25인 동몽훈회 1인 색장 1인에 각 리마다 별검을 두도록 했다. 그리고 선행 18조목과 악행 23조목을 구별하여 서술했는데 그 내용이 구체적이다.
몇 조목만 소개하면 선행에는 유교의 기본덕목 외에 염치와 지조를 잘 지키는 것, 은혜를 널리 베푸는 것,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 조세를 잘 바치는 것, 남과 상대할 때 신의가 있는 것, 남을 선으로 인도하는 것, 남들의 싸움을 말리는 것, 남의 환난을 구제해 주는 것, 남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 남의 잘잘못을 판단해 주는 것 등이 있다.
악행에는 아내를 박대하는 것, 상을 당하여 슬퍼하지 않는 것, 제사를 공경히 받들지 않는 것, 젊은이가 어른을 깔보는 것, 술에 빠지거나 노름을 즐기는 것,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깔보는 것, 말을 만들고 무고하거나 헐뜯는 것, 조세를 잘 내지 않는 것, 법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는 것 등이 있다.
또 청주목사가 쉬거나 정사에 대해서 논의하거나 시회(詩會)를 열던 누각(樓閣)있는데 그 누각을 ‘망선루(望仙樓)’라고 불렀다. 비슷한 것으로 왕이 정사를 보던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가 있다. 본래 망선루는 고려시대에는 취경루였지만 오래되어 증축할 때 망선루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망선루의 현판은 조선 초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훈구파 한명회가 쓴 것으로 한명회 또한 청주 한씨이다. 망선루는 일제 강점기 때 많은 풍파를 겪었다. 현재 중앙공원에 조성되어 있지만 원래 객사(客舍)라고 불린 큰 건물(현 CGV 영화관) 옆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순사들이 청주 읍성의 객사를 헐어버려 경찰서를 짓고 그 옆에 망선루를 헐어버려서 무덕전(武德殿)이라고 부르는 검도와 유도를 가르치는 체육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의 무자비한 문화재 파괴에 대해서 청주 사람들은 분개하였고, 당시 청주 청년회장 김태희 선생은 제일교회 신자였는데 제일교회 신자들과 힘을 합쳐 모금운동을 통해 망선루의 건물을 구입해 청주 읍성 남문 밖에 제일교회가 있던 육거리 시장으로 옮기었다. 이후 망선루의 건물을 개조해 학교로 만들고 운영했는데 청남학교, 세광중학교, 세광고등학교, 한글학교 등 대부분 청주의 학교가 이 망선루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학교가 커지고 다른 곳에 이사를 가자 망선루는 방치되어 있다가 시청 소유의 땅인 지금의 청주중앙공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 청주와 임진왜란
청주 읍성의 남쪽에는 절도사가 충청도의 육군을 통솔하는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이 있었는데 줄여서 충청 병영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충청 병영의 문만 남아있다. 본래 청주 읍성에 충청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충청 감영도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수도 한양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가 공주여서 충청감영만 공주로 옮기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청주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 전쟁은 명·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국제전이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빌려주다)라는 명분으로 선전포고하고 20만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을 침략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당시 조선은 왜군의 침략을 알고 있었음에도 대비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선조실록》 25년 4월 13일)
고 말하고 있다. 일본군은 한반도에 상륙한 뒤에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이 부사로 있는 동래성을 공격했다. 효종때 동래부사를 부임한 민정중의 문집『노봉집(老峯集)』에서 그날의 개전 장면을
“적군은 먼저 백여 명의 사람을 시켜 나무패 하나를 가져다가 남문 밖에 세워 놓고 물러갔다. 송상현이 군관 송봉수(宋鳳壽) 등으로 하여금 나가서 보게 하였는데,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을 테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쓰여 있었다. 송상현 또한 나무패에 ‘싸우다 죽는 일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라고 여섯 글자를 써서 적진 한가운데로 던졌다.”
라고 기술했다. 송상현은 한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자 관복을 입고 왜군의 칼을 기다렸다. 애첩 김섬(金蟾)도 그 옆에 앉아 최후를 기다렸다. 그의 마지막 고민은 나라에 대한 '충(忠)'을 위해 부모에 대한 '효(孝)'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포위당한 외로운 성, 달은 희미한데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네,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가노(家奴)에게 주어 그의 아비 송복흥(宋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라고 하였다. 이 날짜 『선조수정실록』 기사는 그의 애첩 2명의 마지막을 '상현에게 천인(賤人) 출신의 첩이 있었는데, 적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굴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왜인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상현과 함께 매장하고 표(表)를 하였다. 또 양인(良人) 출신의 첩도 잡혔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공경하여 별실(別室)에 두었다가 뒤에 마침내 돌아가게 하였다'라고 적었다.
청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을 배향하는 충렬사가 있는데 송상현의 부인 성주 이씨가 청주의 그의 사당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부인 성주 이씨는 이문건의 딸로 그의 외가와 친정 모두 청주에 세거하고 있었다. 부인 성주이씨는 송상현이 41세 나이로 사망하자 젋은 시동생을 대신에 가계를 운영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외가와 친정이 포진하고 있는 청주를 남편의 반장지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동래성을 돌파한 왜군은 3진으로 나눠져 북상했다. 제1진은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 2진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3진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끌었다. 이중 구로다가 이끄는 제 3진이 창원-성주-금산-영동-옥천-보은-청주 방향으로 올라왔다. 구로다는 당시 25살 나이로 1만 2천명 왜군을 이끌었다. 구로다의 왜군은 5월부터 7월말까지 3개월 가량 청주성을 점령했다. 이 기간을 전후해 충청도에서 우리나라 전란사 중에 가장 참혹한 광경이 벌어졌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는 윤국형(尹國馨, 1543~1611)이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임란 이전에 충청감영은 청주에 있었다. 그는 재임기간 목격을 『문소만록(聞韶漫錄)』이라는 문집으로 남겼고, 여기에는 식인(食人) 풍속이 다수 등장한다.
“시체는 들에 가득하고 매장된 것은 거의 없었다.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았으며, 계사년 봄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시체를 쪼개어 앞을 다투어 먹었으며, 골육지간끼리도 서로 죽이는 자도 있었으니, 우리 동방의 변란의 화가 참혹함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積尸遍野 收瘞者無幾 父而 賣子 夫而鬻妻 至於癸巳春 則人相殺食 斫尸爭啗 骨肉亦有相戕者 自有東方變亂之禍〕”
계사년은 임진왜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이다. 백성들이 너무 많이 죽다보니 가을이 돼도 수확을 하지 못하는 등 들녘도 황폐화했다. 오희문의 일기인 『쇄미록』에도 임진왜란 기간의 식인 모습은 자주 등장한다. 전란이 길어지자 청주에서도 이른바 왜군으로 가장하고 협력하는 가왜(假倭)와 부왜(附倭) 현상이 나타났다. 사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조선의 병역의무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본래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의 원칙을 따라 양반, 상민 예외없이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성은 모두 병역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되어 정군(正軍)이 성쌓기, 길 닦이 같은 각종 요역에 자주 동원되었다. 그래서 포를 납부하는 것으로 병역을 대신하게 하는 ‘수포대립(收布代立)’ 현상이 발생하였다. 관아에서도 양반 사대부에게 포를 받아 그보다 싼 다른 사람을 고용해 중간 차액을 사용하였다. 이를 군역에서 해방시키고 포를 받는다는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라고 한다. 물론 조정에서는 금지하였지만 계속해서 횡행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36년(1541)에는 1년에 두 필의 군포만 납부하면 되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법으로 제정하였다. 문제는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군포, 즉 병역세를 내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포를 내느냐 내지 않느냐가 양반과 상놈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심지어 군포의 납부 대상 또한 갓난아이와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였다. 임진왜란 반발하기 9년 전 선조 16년(1583) 순무어사로 나갔던 김성일은 군포 때문에 도망가는 백성들이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만약 한 백성이 군포를 내지 못하면 군포의 징수 또한 구족까지 찾아내서 씌우고 이것이 안되면 이웃에게 대신 씌웠다고도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래서 김성일은 군포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도망친 백성이 군포를 납부하지 않은지 7년 이상 되었거나 도망친 백성중에 60세 이상인 자는 군포를 면제해주자고 대안을 제시하였지만 조정에서는 흐지브지하게 대응하고 말았다. 결국 일본 왜군은 전란 초기부터 조선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도 조선 백성 또한 대부분 일본군에 가담한 것도 모두 군포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양반사대부들도 병역의무를 지게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란 때 영의정 겸 전군을 지휘한 삼도도체찰사 류성룡은 속오군(束伍軍)을 조직했다. 속오군은 군역을 지지않는 양반과 일반 양인들이 조직한 군대이다. 또한 중앙에 훈련도감도 만들어 군사 1인당 1개월에 쌀 6말을 주었고 양반뿐만 아니라 공사 노비들도 함께 근무하였다. 또한 서애 류성룡은 선조 27년(1594) 노비들도 군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免賤法)을 시행하였다. 그래서 각지에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 청주성 전투
청주에서도 박춘무가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는 면천법이 시행되기전에 일어난 자발적인 의병이었다. 아마 그 지역 선비의 덕망과 일본군의 잔혹성 때문에 의병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토정 이지함의 문인으로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에 거주하였다. 청주성을 되찾기위해 박춘무는 관군과 옥천의 조헌이 이끌던 의병, 영규대사 이끌던 승병과 연합하여 1592년 7월 조헌의 의병군과 영규대사의 승군은 청주성의 서문을, 박춘무의 의병군은 남문을 나누어 공격해 왜군과 청주성 전투를 치뤘다. 약 한달간의 청주성 전투에 지친 왜군들은 북문을 통해 도망가자 청주의 의병들은 청주성을 다시 탈환하였다. 청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이었다. 현재 청주중앙공원에는 조헌 기적비, 기허당 영규대사 기적비, 화청당 박춘무의 기적비가 있다.
=병자호란과 청주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에 조선 중기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최명길신도비와 최명길묘소가 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조선이 청군에 포위될 때 조선의 사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와 화친을 해야된다고 주장한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최명길은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파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이 있기 전에 병자호란이 발생한 원인은 서인들과 인조에게 있었다. 그들은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쫓아버리고 명분 이념인 극도의 친명사대주의를 외교에 적용하였는데 그 결과 이러한 비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명나라는 망해가는 나라였고, 청나라는 떠오르는 나라였고, 두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 요청을 하자 광해군은 중립을 지키며 파병을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조선이 당시 패권을 주도할 수 없는 상황이면 강한 나라들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판단이었다. 이것이 광해군의 실리외교였다. 서인들과 인조는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를 반정 명분으로 삼아 광해군은 상국인 명나라를 배신했고 명나라와 중원을 다투는 청나라는 오랑캐 취급하였다. 더구나 당시 인조와 서인 정권은 청나라와 외교를 단절하고 청에 선전포고했지만 대항할 군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이 개혁적인 정책을 펼쳐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 백성들이 다시 조선으로 복귀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선조와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순신의 공과 류성룡이 했던 개혁정책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그 공을 망해가는 조선을 다시 세워준 은혜라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명분으로 명나라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선조의 이러한 행태도 인조와 서인들의 반정 명분이었다. 그래서 병자호란 당시에는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항복하고 신하국으로 전락하였고, 인조는 남한산성에 나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는 삼전도(현 송파구)의 굴욕을 겪게 되었다. 병자호란이후 최명길은 크게 주목할만한 활동하지 않다가 인조 25년(1647) 병으로 사망하였다.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숙종 때 영의정 8번을 하였는데 그의 할아버지의 신도비 명을 스승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에게 부탁하면서 ‘의리’라는 이름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의 병자호란 행적을 변호하고자 했다. 최석정의 부탁을 받은 남구만은 최명길의 신도비명을 쓰긴 했으나 끝내 '의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랑캐(청나라)에게 무릎 꿇은 최명길의 권도론(權道論){상도(常道)를 불규칙한 상황에 임시로 맞추는 행위규범}을 문제 삼은 것이다. 최석정은 남구만의 글을 버리고 박세당(朴世堂, 1629~1703)에게 신도비명을 부탁했는데 최석정이 ‘최명길의 행동이 의리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당당하고 떳떳한 충정의 행동이었다’라고 말한 의견을 받아들여 박세당이 쓴 최명길의 신도비명이 완성된다. 박세당은 당파로는 소론이고 노론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공격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끝으로 최명길의 가장 절친한 벗이었던 이시백(인조반정 공신 이귀의 아들)이 최명길을 평가한 글을 보도록 하자.
“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연양 이공(이시백)이 공에 대해 논하기를 ‘완성(完城:최명길의 봉호)의 업적이 매우 많은데, 그 중에 큰일이 7가지가 있다. 계해년(1623) 반정 때 도와서 나라를 바로잡은 일이 첫 번째요, 병인년(1626, 인조4)에 예제(禮制)를 의논하여 부자의 인륜을 밝힌 것이 두 번째요, 병자년(1636) 난리에 혼자 말을 타고 적에게 가서 적의 예봉을 늦춘 것이 세 번째요, 남한산성이 포위됐을 적에 비방을 무릅쓰고 화친을 주장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한 것이 네 번째요, 무인년(1638)에 군사를 징발할 적에 의(義)로써 거절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다섯 번째요, 천조(天朝)에 편지를 보냈다가 끝내 위기가 닥치자 몸소 감당한 것이 여섯 번째요, 마음가짐과 일 처리에 확실히 자신하여 무리에 물들지 않은 것이 일곱 번째이다. ’ 라고 하였다. 이공(이시백)은 공과 뜻을 같이하는 벗이어서 공을 특히 잘 알았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았다. ”
〈최명길 신도비〉
=청주성과 이인좌의 봉기
조선 후기에 청주는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봉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인좌의 봉기는 이인좌 중심으로 소론강경파와 남인이 무신년에 청주성에서 일으킨 봉기를 말한다. 무신년에 일어나서 무신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봉기에 가담한 청주의 인물로 신청영이 있다. 그는 고령 신씨로 청주의 대표적인 남인 가문이었다. 그의 5대조는 신식(申湜)인데 그는 신숙주의 5대손으로 그의 외증손은 청남 영수 윤휴이고, 그의 외손녀는 소현세자의 빈인 강씨였다. 신식의 외손서가 탁남의 영수 권대운이었다. 신천영의 조부는 석헌 신경제로 기사환국(집권당 노론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여 정권을 바꾼 사건) 때 우암 송시열을 「반송시열소두(反宋時烈疎頭)」로 탄핵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고령 신씨를 비롯해 교하 노씨(交河盧氏), 진주 유씨(晉州柳氏) 등 청주 지역의 남인들은 1695년(숙종 21) 청주의 대표적인 노론계 서원인 신항서원(辛港書院)에 신청영의 5대조 신식을 제향하여 노론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사되지 않자 남인들은 별도로 쌍천서원(雙泉書院)을 세워 독향(獨享)하였다. 이처럼 청주 지역 남인들은 노론에 대한 반감이 많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인좌(李麟佐)는 충청북도 괴산군 송선면 출신으로 그의 종조부 이운징은 탁남의 영수 허적의 추천으로 군권을 쥔 훈련대장 관직에 있었고, 처조부는 청남의 영수인 윤휴였다. 그는 남인의 명문가였다. 이인좌가 청주성에서 봉기를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 신청영이 청주목에 거주하며 당시 청주 지방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주 지역에서 봉기가 발발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인좌의 봉기가 일어난 직접적인 배경은 남인과 노론 사이의 원한보다는 경종이 노론과 영조에게 독살당했다는 ‘경종독살설’과 영조가 즉위하고 과거 노론 명문가 자제들의 객관적인 역모 사건인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소론강경파의 무고로 보고 소론강경파를 처벌한 ‘을사처분(乙巳處分)’에 있었다.
숙종 때 환국을 통해 정권이 여러번 서인과 남인으로 바뀌었는데 최종적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세자는 남인가 출신 장희빈의 아들이었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세자는 남인이었다. 그래서 노론은 차기 임금을 노론 가문에서 배출하기 위해서 남인 출신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켜 흠을 잡아 노론 가문 출신 세자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이 사망하고 세자가 즉위하는데 이이가 경종이다. 노론은 당론을 우선시해서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을 사용했는데, 왕조국가에서 택군은 객관적인 역모였다. 실제로 노론 대신들은 경종에게 자식이 없고 몸이 안좋다는 이유로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게 하였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서두르게 하였다. 그래서 경종 1년(1721)에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은 상소를 올려 노론4대신을 사흉(四凶)으로 공격해 탄핵하자 경종은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강경파에게 주었고, 경종 2년(1722) 3월 목호룡의 고변이 발생하였는데, 고변의 내용은 노론 대신들과 노론가 자제들이 경종에게 삼급수(三急手:실제 칼, 독약, 폐출의 세 가지 수단으로 왕을 죽이거나 내쫓는 것)를 시행해 연잉군을 추대하려던 역모 사건이었다. 이로인해 노론4대신과 많은 노론가 자제들이 사형을 당했다. 이를 신임옥사(辛壬獄事)라고 말한다. 신임옥사 중에 연잉군은 역모의 수괴로 밝혀져 사형에 해당되었지만 경종이 보호해서 살아남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원칙을 중시한 소론온건파는 경종이 영조의 왕위정통성을 인정한 것으로 보고 정권에 참여하게 된다. 신임옥사 이후 김일경 중심의 소론강경파가 정권을 주도했지만 경종 4년(1724) 경종이 갑자기 병석에 누워 극심한 흉통과 복통이 일어나 36세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게된다. 경종의 사망원인은 연잉군과 대비 인원왕후가 의가(醫家)에서 가장 꺼리는 게장과 곶감을 와병 중인 경종에게 바치고 위독해져 사망했다고 전해졌는데 이 말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이것이 경종독살설이다. 조선왕의 독살설은 대부분 조선의 임금과 집권 여당의 갈등이 극에 달해 정권을 다른 당으로 바꿀 때 조선왕이 갑자기 죽는 것을 말하는데 효종과 현종이 그랬고 경종도 마찬가지였다. 남인과 소론강경파는 경종독살설을 사실로 믿었다.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5일 후 영조가 즉위하는데 영조는 재위 1년(1725) 노론4대신들의 역모 사건인 신임옥사를 소론강경파의 무고 사건으로 보고 김일경과 목호룡 등의 소론강경파를 죽이고 노론4대신을 신원하면서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된다. 이를 을사처분(乙巳處分)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조치는 남인과 소론강경파를 더 분노하게 하였다. 노론은 소론강경파에 대한 처벌을 소론온건파에 대한 처벌로 연결시키려고 하였으나 영조는 소론온건파를 적으로 돌리는 것까지는 위험하다고 판단해 영조는 재위 3년(1727)에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 온건파로 일부 정권을 주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한다.
그 다음해 영조 4년(1728) 3월 15일 이인좌를 중심으로 소론강경파와 남인들이 함께 청주성을 함락하고 병마절도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을 참살하였는데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인좌 군은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해 조석으로 곡을 하면서 선왕의 복수를 다짐하였다. 이인좌는 자신을 대원수(大元帥)로 칭하고, 정세윤(鄭世胤)을 부원수, 권서봉(權瑞鳳)을 청주목사, 신천영을 충청병사로 임명하였다. 영남에서 정희량이, 호남에서 박필현이 호응하여 이인좌 군의 기세가 올라가게 되었다. 영조는 충격을 받게 되는데 소론온건파 오명항(吳命恒)과 박문수(朴文秀)가 봉기 진압에 나선 것이 큰 다행이었다. 오명항과 박문수의 군대가 이인좌의 군대를 안성과 죽산에서 진압하자 한달 만에 이인좌의 봉기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당시 이인좌의 나이는 34세로 능지처참을 당하였고 이인좌의 부인 윤자정 또한 사형을 당하였고, 신천영은 청주의 상당산성(上黨山城)을 지키다가 반란에서 이탈한 무리들에게 체포된 후 의병(義兵)에게 넘겨져 참살당하였다. 성호 이익은 이인좌의 봉기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해 “무신변란(이인좌의 난) 후 명문거족, 이름난 사람, 유명한 선비, 고관대작, 지위가 낮은 사람을 불문하고 모두가 형벌을 당해 죽었고, 수년 동안 기상이 꺾여 무너진 것이 파멸적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된 것과 진배없다. 오직 우리 여주 이씨만은 노소귀천 모두 형옥의 죄안에 오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봉기로 청주는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40년 청주목으로 복구되었다. 현재 청주시에서 이인좌의 봉기과 관련된 유적으로 표충사가 있는데 1728년 이인좌의 봉기 때 청주성을 지키다 순절한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 3분의 충신을 제향하는 사당으로 삼충사라고 불렸다. 표충사는 영조 7년(1731) 청주 읍성 북문 안쪽에 세워졌지만 현재 청주시 상당구 수동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