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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외씨버선길(5), 오일도 시인의 길
여행일 : ‘21. 3. 6(토)
소재지 : 경북 영양군 입암면과 영양읍 일원
여행코스 : 선바위관광지→산촌생활박물관→학초정→오일도마을→성황당→영양전통시장(소요시간 : 11.5km/ 실제는 입암면사무소에서 출발 14.44km/ 3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코스와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 길인 ‘오일도 시인의 길’을 걷는다. 4개로 나누어진 영양 권역의 두 번째 구간이기도 한데, 이 구간에 위치한 ‘감천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항일 시인인 오일도가 구간의 이름으로 승화됐다. 이밖에도 이 구간에는 쏠쏠한 볼거리들이 제법 많다. 대단위로 개발된 ‘선바위관광지’에는 ‘고추홍보전시관’과 ‘산촌생활박물관’ 같은 테마시설들이 들어서있고, ‘반변천’의 자랑거리인 기암절벽과 감천수로 등도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기에 부족함이 없다.
▼ 들머리는 입암면사무소(영양군 입암면 신구리 481-3)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동청송·영양 IC에서 내려와 34번 국도를 타고 안동 방면으로 달리다가 월전삼거리(청송군 진보면 월전리)에서 우회전 31번 국도로 옮겨 영양방면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입암면 소재지인 신구리가 나온다. 트레킹의 들머리로 삼으려는 곳이다. ‘외씨버선 5길’의 원래 들머리는 ‘선바위관광지’이지만 4길과 5길의 거리를 조절하느라 지난번 4길을 걸을 때 이곳 입암면사무소에서 트레킹을 종료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입암면의 소재지인 이곳 신구리는 진보에서 영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이 되는 마을로,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마을 앞을 흐르면서 뛰어난 경관을 만들어낸다. 마을의 모양이 배와 같기 때문에 물이 생기면 좋지 않다며 우물을 파지 않는다는 곳이기도 하다. 신구라는 지명은 옛 고을인 신사(新泗)와 탑구(塔邱)에서 한 자씩 따왔다.
▼ ‘오일도 시인의 길’은 입암면의 선바위관광지에서 시작해 영양읍의 전통시장에서 끝난다. 이 구간은 영양의 젓줄인 ‘반변천’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때문에 탐방로의 대부분은 냇가를 따르게 된다. 나머지는 대부분 산허리를 헤집으며 나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국도변을 가능한 피해보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덕분에 우리 같은 트레커들은 자동차 매연 대신 자연의 숨결을 맘껏 누리며 걸을 수 있다.
▼ 북쪽 방향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때 ‘솔 다방’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스타박스’나 ‘투섬플레이스’처럼 브랜드 자체를 간판으로 내거는 게 보통이고, 그 밖의 소규모의 점포들도 하나같이 카페나 커피숍으로 이름을 바꾼 지 이미 오래여서 옛 간판이 정겨웠던 모양이다.
▼ 잠시 후 입암초등학교를 만나면 도로와 헤어져 오른편 사잇길로 들어간다. 들머리에 ‘사과·고추 으뜸마을’이라는 부제까지 단 신구2리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신구2리는 ‘탑구마을’로도 불린다. 마을 중앙에 ‘삼층석탑’이 있다고 해서 ‘탑두들’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탑구(塔邱)’로 바뀌었단다. 이 마을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 약산 조광의(約山 趙光義, 1543-1608)가 학문연구를 했다는 약산당(約山堂)도 있다. 하지만 둘러보는 것까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한 볼거리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탑구마을에 이어 나타나는 널따란 들녘을 지나자 빨간 고추와 반딧불이가 정겨운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만에 국도 31호선의 도로변에 위치한 ‘선바위관광지’에 이른 것이다. 핸드폰의 앱은 현재 1.76㎞를 찍고 있다.
▼ 국도를 따라 잠시 걷자 ‘동굴형민물고기전시관’이 얼굴을 내민다. 퉁가리·피리 등 토종어류와 납자루·쉬리 등 희귀어종, 쏘가리·꺽지 등 민물고기, 그리고 물자라·장구에비 등의 수서곤충 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도로를 건너가보지도 않았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치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참! 뒤편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는 ‘효공원’도 둘러보지 못했다. 아니 그곳에 효공원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 자! 이젠 대단위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는 ‘선바위 일대’를 둘러볼 차례이다. 투어의 시작은 ‘영양고추 홍보관’이 되겠다. 특산품인 영양고추의 가치와 경쟁력을 높이고 고추산업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예방차원이라며 문을 닫아걸었다. 테마관(고추이야기와 고추재배의 변천과정, 생활 속 고추 등 전시)과 홍보관(영양고추의 우수성, 고추축제, 재배기술 등 전시), 영상홍보실 등의 볼거리들이 들어서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 아니 세계적인 현실인 걸 어쩌겠는가.
▼ 까짓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라 하지 않았던가. 그 아쉬움을 야외광장에서 달래보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가 하면, 정성들여 가꾼 고추를 수확하고 말리는 일련의 고추재배 과정을 조형물을 통해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고추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이후로 한국의 대표 맛을 지켜오고 있다. 이 고추는 고온성 작물로 토양이 비옥하고 물이 잘 빠지는 곳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강우량이 적고 일조량이 많은 영양이 고추 재배의 적지로 평가되는 이유이다. 특히 영양 고추는 고랭지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당질 함량이 많고 비타민A와 비타민C의 함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과일이 크고 과피가 두꺼워 고춧가루가 많이 나는 특징을 갖고 있단다.
▼ 우리의 어릴 때 기억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장독대에서 일하는 엄마의 옆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와 강아지는 우리가 흔하게 접하던 풍경이 아니던가. 또한 저런 정겨운 풍경이 바로 한국의 맛을 지키고 키워왔다고 보면 되겠다.
▼ 분재테마파크는 아예 겉면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분재(盆栽)란 오랜 시간과 끊임없는 애정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가 아니라 숫제 예술품으로 꼽는다. 그런 나무들, 즉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예술품들이 231점이 전시되어 있는데도 보지를 못한다니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거기다 5000본이나 되는 야생화와 수많은 수석도 전시하고 있다지 않는가.
▼ 역시 문을 닫아 건 ‘농·특산물직판장’에 대한 아쉬움은 건물의 뒤편에 만들어놓은 ‘서석지(瑞石池)’에 대한 내용을 읽는 것으로 달래본다. 담양 ‘소쇄원(瀟灑園)’ 및 보길도의 세연정(洗然亭, 지명을 따 부용원이라고도 한다)과 더불어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담은 대표적 정원이다. ‘상서로운 돌로 이루어진 연못’이라는 뜻을 지닌 서석지는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경정(敬亭) 앞에 만든 조선시대 민가(民家)의 대표적인 연못(池塘)이다. 예천의 용궁에서 태어난 그는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에게서 수학하고 1605년(선조38年)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폭정과 병자호란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1636년(仁祖14年) 넷째 아들인 임천 제(臨川 悌)를 데리고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기슭인 연동마을로 내려와 살았다 한다.
▼ 반변천으로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강과 절벽을 사이에 두고 바위를 깎아 세운 듯한 거대한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있는 것이다. 영양을 대표하는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선바위’인데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촛대를 세워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저 바위는 오른편에 보이는 바위절벽. 그러니까 소원바위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조선 세조때 남이장군이 운룡지라는 연못에 살던 용의 두 아들이 역모를 일으키자 이를 토벌한 다음. 다시는 난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려버렸다는 것이다.
▼ 선바위를 가슴에 품었다면 이젠 ‘석문교’로 가볼 차례이다. 이때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절벽이 한눈에 가득 들어온다. 남이장군이 칼로 내려치기 전까지만 해도 선바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능선인데, 반변천 및 동천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산자락 전체가 천애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아찔하게 만든다. 참! 반변천과 동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터를 잡은 ‘남이정’도 눈에 들어온다.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휴식처 삼아 새로 지었을 것이다. 이름이야 남이장군의 전설에서 따왔을 게고 말이다.
▼ 명색이 국민관광지인데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액자형의 조형물을 만들고 그 안에다 원하는 풍경을 골라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선바위나 소원봉을 품은 바위절벽, 그리고 반변천에 지어놓은 ’남이정‘ 등 어떤 것을 넣어도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걸질 수 있는 조망 좋은 곳이다.
▼ 잠시 후 ’석문교‘에 이른다. 선바위관광지의 집단시설이 있는 신구리와 자양산 등산로 및 산촌생활박물관을 잇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로 2002년에 건설됐다. 석문이란 이름은 선바위에서 빌려다 썼다고 한다. 선바위의 모습이 마치 돌로 만든 문(門)처럼 보인다고 해서 ’돌문‘ 또는 ’석문‘으로 불리어온 데서 착안했다.
▼ 다리의 중간에는 영양을 상징하는 특산물인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빨갛고 파란 세 개의 고추 위에는 반딧불이가 올라앉았다. 이 또한 영양의 상징이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소원봉’이 올려다 보인다. 선바위를 내려다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나저나 아찔한 절벽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하며 그 아래로 난 탐방로가 아름답게 보여 다녀오고는 싶었지만 2㎞를 훌쩍 넘기는 산길이 발목을 잡았다. 1시간 가까이나 더 걸릴 시간이 부담스러웠다는 얘기이다. 아니 15㎞가까이 되는 5길을 걷기에도 힘이 부치는 내 체력으로는 애초부터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 총연장 176m에 폭이 4m인 이 다리는 야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났다. 교량의 위 76m 구간에 수윙물안개와 물터널 등의 분수시설에다 오색조명과 음악을 가미함으로써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낮. 휘황찬란하게 빛날 다리 대신 지자체에서 세워놓은 ‘안내판’ 사진을 올리는 이유이다.
▼ 석문교를 건너자 ‘남이장군 등산로 안내도’가 길손을 맞는다. 오른쪽으로 ‘남이장군 놀이터’까지 산을 올라간 후, 능선을 따라 소원봉 전망대까지 갔다가 파란색 길을 따라 내려온 후 강변을 따라 되돌아 올 수 있도록 내놓은 일종의 둘레길이다. 지도에는 ‘막둥이 선바위’와 ‘애기 선바위’라는 지명도 보였다. 아무래도 선바위가 하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참! 산촌생활박물관으로 향하는 외씨버선길은 잠시 이 등산로를 따른다. 중간에 헤어지게 되지만 이정표가 하도 잘 되어서 길이 헷갈릴 염려는 없다.
▼ 등산로는 국민관광지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등산로 초입의 나무계단하며 솔숲사이로 난 산책로 등 정성들여 가꾼 흔적들이 역력하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단풍나무도 가을철에는 또 다른 매력을 물씬 풍길 것 같다.
▼ 그렇게 얼마간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등산로와 외씨버선길이 나뉘는 지점인데, 이정표(산촌생활박물관↑ 0.6㎞/ 남이장군 놀이터← 0.4㎞/ 선바위관광지↓ 0.3㎞)와 함께 세워놓은 ‘전통정원 서석지 이야기 길’이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 둘레길의 총 길이는 28㎞. 7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며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걸으며 인근에 있는 아름다운 관광지 16곳도 함께 둘러보라고 권한다.
▼ 등산로와 헤어지고 나서도 길은 여전하다. 아니 출렁다리까지 놓는 등 오히려 한수 위라 하겠다.
▼ 다리를 건너 만나는 솔숲에는 ‘산촌생활체험마을’이 들어앉았다. 초가형태의 숙박시설(梅·蘭·菊·竹 등 4동)로 원두막과 물레방아, 장승, 그네 등의 볼거리와 놀거리를 포함시켜 산촌에서의 일상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선지 영양군의 홈페이지에도 체험마을의 앞에 ‘빛과 바람과 솔숲의 한가운데’라는 부제를 달아놓고 있었다.
▼ 조금 더 걷자 분위기가 확 바뀐다. 초가 일색이던 체험마을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대식 건물이 길손을 맞는 것이다. 이정표(영양전통시장 10.2㎞/ 선바위관광지 1.3㎞)는 이곳을 ‘영양 산촌생활박물관’으로 적고 있는데, 우리 조상의 생활상을 다양한 모형으로 재현하고 충실한 설명을 곁들여 누구나 알기 쉽도록 꾸며낸 공간이라고 한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겐 공부삼아 오기에 최적의 코스로도 알려진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굳게 문이 닫혀있었다. 물고기 잡이와 봄철 산나물 다듬기, 꿀따기 등 산촌의 생활상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받아온 안내도이다. ①본관 ②산책로 ③굴피집 ④농사 ⑤투방집 ⑥쟁기질 ⑦너와집 ⑧민속놀이 ⑨서낭당 ⑩입구 ⑪출구 ⑫사육장 ⑬효녀심청 ⑭자연관찰 ⑮별주부와 토끼 ⑯견우와 직녀 ⑰효자 조검 ⑱선녀와 나뭇군 ⑲소공연장 ⑳효자 오삼성 ㉑효부 숙부인 ㉒효자 김두행 ㉓효자 황경걸 ㉔의좋은 형제 ㉕해와달 ㉖호랑이와 곶감 ㉗석조유물 ㉘흥부와 놀부 ㉙주차장
▼ 박물관 아래에는 ‘전통생활 체험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촌의 추위와 변덕스런 날씨를 견디기 위해 발달한 다양한 형태의 집들 가운데 ‘너와집(아래 사진의 오른편)’과 ‘굴피집(같은 사진의 왼편)’이 복원되어 있다. 너와집은 ‘너와’라고 부르는 나무토막을 이용하여 지붕의 기와를 올린 집을 말한다. 그 위에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거운 돌이나 통나무를 올려두는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형태의 집인 굴피집은 나무껍질을 이용하여 지붕을 올린 집이다. 참나무나 상수리나무 등 다양한 나무의 속껍질을 사용했다는데 생각보다 수명이 길다고 한다. 두 가옥의 집안도 직접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마루와 부엌, 안방과 외양간까지 모두 감싸고 있는 재미있는 구조이다.
▼ ‘투방집’도 복원되어 있어 산골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귀틀집‘이라고도 불리는 투방집은 통나무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쌓아올린 후 그 틈을 진흙으로 메운 집이다. 위에서 거론한 너와집 및 굴피집과 더불어 목재 재료가 풍부한 산촌마을의 특색을 보여주는 집의 형태라 하겠다.
▼ 투방집 주변에는 쟁기질과 씨뿌리기 등 농사짓는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그런데 상상치 못했던 광경도 눈에 띈다. 사람 그것도 아낙네가 쟁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인걸이 쟁기질’이라는데 이제껏 나는 쟁기는 소만 끄는 줄 알아왔기에 놀랍기 짝이 없었다.
▼ ‘연자방아’도 재현해 놓았다. 발동기가 없던 옛날에 말이나 소의 힘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빻는 데 사용하던 방아의 하나이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연자방아가 있었다는데 요즘은 옛 얘기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밖에 성황당도 복원되어 있었다. 마을이 터를 잡으면서 함께 생긴 게 마을 입구 또는 마을내의 당집이었으니 어찌 빠뜨릴 수 있겠는가.
▼ 그 오른편에 꾸며놓은 ’전통문화공원‘에는 효녀심청, 별주부와 토끼, 견우와 직녀, 선녀와 나뭇꾼, 흥부와 놀부 등 모두들 알고 있는 전래동화가 꾸며져 있고. 그밖에도 효자조검, 효자숙부인, 효자 오삼성 등 귀감이 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 효녀와 심청, 별주부와 토끼 등 물과 관련된 동화들을 구현하기 위해선지 작은 호수도 만들었다. 그 호수로 오르는 계단의 위에는 아치형의 오작교를 만들고 애틋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견우와 직녀를 배치했다.
▼ 선바위관광지 투어는 대략 55분 정도가 걸렸다. 마지막 코스인 산촌생활박물관을 빠져나와 31번 국도를 건너면 ’주역(注易·駐易)‘ 마을이다. 주역이란 한자를 풀면 ’말을 갈아탄다‘는 뜻이니 이 고을에 간이역 정도의 역(驛)이 있었지 않나 싶다. 아무튼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을인데 수석(壽石)에 구멍을 뚫어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집이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문득 선사시대에 사용하던 ’돌 화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니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서태평양의 섬나라 미크로네시아(Micronesia)의 얍(Yap)섬의 주민들이 최근까지 화폐로 사용했었다는 그 원형의 돌들을 말이다.
▼ 마을을 빠져나오자 또 다시 반변천(半邊川)을 만난다. 이제 탐방로는 ’감천수로‘를 따른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이 농사용 물길은 반변천의 천변을 따라 나있다. 그러다보니 거대하진 않지만 험한 바위벼랑을 헤집기도 한다. 덕분에 우리 같은 트레커들은 몸을 비틀어가며 걷는 곡예를 펼치기도 한다.
▼ 수로는 위를 판자로 씌워 탐방로로 바꾸었다. 하지만 맨몸을 내보이는 구간도 있다. 이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평균대와 같은 묘기를 펼칠 수밖에 없다. 그게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면 신발을 더럽힐 각오를 해야만 한다.
▼ 주역마을을 지난 지 20분 만에 ’감천교(甘川橋)‘에 도착했다. 옛날. 그러니까 널따란 자동찻길을 보고 ’신작로‘라고 부르던 시절에 놓은 듯 다리는 차선을 나눌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좁다. 거기다 난간이 허물어질 정도로 낡았다. 바로 옆에다 새로운 다리를 놓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다리를 건너면 경상북도 민속자료(제64호)로 지정된 ‘학초정(鶴樵亭)’과 ‘정침(正寢)’이 얼굴을 내민다. 반변천 너머 작은 들을 거느린 고아한 솟을대문과 정갈한 토석담. 그리고 대문 옆 담장 안에서 자라난 노송이 빼어난 경관을 만들어내는 옛 건축물이다. 참! 이곳은 ‘학초정’말고도 다른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 만나게 되는 이정표(영양전통시장 8.7㎞/ 선바위관광지 2.8㎞)가 바로 그것인데, ‘외씨버선 5길’을 완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를 배경삼은 인물사진을 꼭 남겨두어만 한다.
▼ 학초정(정침을 포함한다)은 조선 효종 때의 인물인 삼수당 조규(三秀堂 趙頍)가 지은 살림집과 정자로 대문간채와 학초정 그리고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 격인 ‘학초정’은 대문의 안쪽 좌측에 있었다. 산석(山石)으로 쌓은 댓돌이 일부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누하주(樓下柱)를 세워 다락집처럼 보인다. 아쉽게도 자세한 내부구조는 살펴볼 수 없었다. 특히 ‘ㅁ’자형 기본구조에 정면 좌우 끝으로 두 칸을 더 달아 양날개집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정침은 곁눈질로도 구경할 수 없었다. 솟을대문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자는 지을 당시만 해도 ‘삼수당(三秀堂)’이었다고 한다. 건축주인 조규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러다가 고종 때 박학래(朴鶴來)로 주인이 바뀌면서 그의 호를 따서 학초정(鶴樵亭)이 되었단다.
▼ 이젠 감천마을로 넘어갈 차례이다. 인증샷 이정표에서 50m쯤 더 걷다가 오른편 임도로 들어서면 된다. 이어서 구릉(丘陵) 지대를 15분 정도 걷게 된다. 이 일대는 평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널따랗지만 대부분의 경작지는 그대로 묵혀두고 있었다. 낙동강의 수질보전을 위해서라는데 길가의 저수지 또한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 구릉지대를 통과하면 또 다시 반변천을 만난다. 그리고 잠수교를 겸하고 있는 ‘감천보’를 건넌다. 이 보(堡)가 놓이면서 상부는 인공호수가 됐다. 그 호숫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숲이 들어서 있었다. 감천마을에 살던 침벽 오현병이 문무의 수련도장 용도로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그의 뒤를 이어 정성으로 가꾸었고, 지금은 침벽공원 또는 감천 유원지라 불리며 캠핑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 ‘감천보’의 상부는 높고 긴 단애(사진은 영양군 홈페이지에서 얻어왔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수직의 절벽에 측백나무가 자생하는데, 이게 숲을 이뤄 ‘감천측백수림’이라는 대명사까지 얻었다. 깊은 물과 높은 절벽이 나무들을 보호하니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이 숲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이런 집단적 자생이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 감천보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감천마을로 향한다. 이어서 도로가에 만들어놓은 ‘감들내쉼터’를 지나자 양지 바른 둔덕 위에 터를 잡은 ‘감천마을(甘川里)’이 나타난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는 통정대부를 지낸 오시준(吳時俊)이라 한다. 당시의 땅 이름은 지곡(地谷)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오시준이 정착하면서 동곡(桐谷·東谷)이라 했고 정조 연간에는 주자(朱子)의 무이운곡(武夷雲谷)과 닮았다고 해서 운곡(雲谷)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마을 뒤 산기슭에 단맛이 나는 좋은 물이 샘솟고 감나무가 많아 감천이라 했단다.
▼ 마을 초입에 비각(碑閣)이 세워져있기에 살펴봤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오희집’의 효심이 남달리 지극하다고 해서 그의 후손들이 세운 ‘효자각(孝子閣)’이란다. 하지만 안에는 비석 대신 그의 효행을 적은 편액(扁額) 하나가 달랑 걸려 있었다. 원래는 나라에서 세워준 정려각(旌閭閣)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훼멸된 때문이란다.
▼ 조금 더 들어가면 ‘삼천지’라는 작은 연못이 나타난다. 동쪽 제방을 지키고 있는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늙은 소나무가 연못의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데, 반면에 정자는 최근에 새로 지은 듯 싶다. 연못의 연꽃이 만발할 때를 대비해서 전망데크도 만들어놓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여행객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일 것이다.
▼ 감천마을은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노변의 애가’ 등 주로 슬픈 서정시를 쓴 오일도(1901-1946) 시인의 고향이다. 그의 생가를 찾아보기 위해 제방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일도의 생가 대신 ‘낙안 오씨’의 종가집인 ‘감호헌(鑑湖軒)’을 찾아냈다. 문중에서 1800년대에 건립한 건축물로 ‘ㄷ’자 형의 정침과 ‘一’자 형 고방채가 ‘ㅁ’자 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불천위(不遷位) 사당인 충효사(忠孝祠)는 종택과 동떨어진 토석담장 안에다 별도로 배치했다.
▼ 감천마을에도 수석을 전시해 놓은 집이 있었다. 돌을 매달아놓았던 주역마을과는 달리 이곳에는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전시했다. 거기다 옹기와 솟대를 더해 멋까지 잔뜩 부렸다. 잠시 눈요기를 즐기다 뒤로 돌아가니 작은 공원이 나왔다. 마을 입구에 조성해 놓았다는 ‘문학테마공원’이 아닐까 싶다.
▼ 되돌아온 삼천지. 연못 뒤쪽에는 오일도 시공원이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누른 포도잎’ ‘그믐밤’ ‘코스모스’ ‘가을하늘’ 등 그의 시를 새겨 넣은 바윗돌들이 올망졸망하게 펼쳐진 나지막한 둔덕들 사이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시집은 한 권도 출판하지 못했다고 한다.
▼ 시인은 ‘지하실의 달’ 시비 옆에 책을 펼친 채 앉아 있었다. ‘지하실의 달’은 그의 유고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일제의 통제를 절감하며 이곳으로 낙향한 그는 절필하고 긴 칩거에 들었다. 광복 후 다시 상경해 ‘시원’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우울로 인한 폭음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간경변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의 나이 겨우 45세였다고 한다. 그래선지 책을 읽고 있는 그는 여전히 젊은 모습이었다.
▼ 조금 더 들어가자 ‘44칸’이나 된다는 오일도 시인의 생가(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8호)가 나온다. 으리으리한 느낌을 주는 숫자이지만 칸들이 조막만 해 그다지 커보이지는 않는다. 이 집은 고종 원년인 1864년 오일도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건립했다고 한다. 크게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7칸의 홑처마 팔작집으로 전체 평면은 ‘ㅁ’자 형의 뜰집이다. 참고로 오일도의 본명은 희병(熙秉)이다. 1901년 감천마을에서 태어나 14세까지 마을의 사숙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이후 영양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쿄의 리쿄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시를 썼고 25년 ‘조선문단’ 4호에 시 ‘한가람백사장에서’로 등단했다. 아버지 오익휴는 천석의 거부로 오일도는 넉넉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 대문채는 ‘一’자 형이며 대문간을 중심으로 외양간과 마굿간, 오른편에는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대문을 지나면 안채로 들어가는 문의 오른쪽으로 '국운헌(菊雲軒)'이란 사랑채가 위치하는데,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과 함께 의병활동을 한 선조 오수눌의 호인 '국헌'에다 구름 '운'자를 더했다고 한다. 대문의 왼편에는 오일도가 공부했다는 작은 글방이 있다. 하지만 마당을 트럭과 비닐하우스가 차지하고 있어 사진촬영이 썩 편치 않았다. 영양군청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빌려다 쓴 이유이다.
▼ 15분 남짓 마을을 구경시킨 탐방로는 마을의 입구로 되돌아나가는 대신 마을 뒤로 보이는 산자락으로 탐방객들을 이끈다. 차량 통행이 빈번한 국도를 피해보려는 고민의 결과겠지만, 트레커들에게는 이게 최상의 선물이 되었다. 구간 대부분이 경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만한데다. 울창한 솔숲 사이로 난 길바닥에는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 고개 하나를 넘은 탐방로는 이제 국도를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달린다. 국도의 바로 위 산비탈에다 ‘토끼비리’처럼 길을 내놓았다. 덕분에 걷는 게 약간 부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이 또한 낭만이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 그렇게 15분 정도를 걷자 ‘감천1교’가 나온다. 물론 감천마을에서부터 걸은 시간이다. 이 다리는 탐방로와 국도가 겹치는 유일한 구간이다. 반변천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이제 반변천의 제방을 따른다. 새로 보수를 하고 있는 듯 어수선한 풍경이었으나 제방의 안쪽을 독차지하고 있는 광활한 사과농원이 눈길을 끌었다.
▼ 강 건너의 벼랑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일월산에서 시작된 반변천은 영양군을 관통한 다음 청송과 안동을 지나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이 반변천은 영양군 일대를 굽이쳐 흐르면서 수많은 절경을 만들어내는데, 초승달을 그리며 서늘한 단애를 이루고 있는 이 부근의 적벽(赤壁)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 제방을 따라 걷길 15분, 잠수교가 나타난다. 이 다리를 건너면 ‘진막골’이다. 영양현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고 진을 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데, 깊숙한 골짜기 안에는 현재 20여 호가 옹기종기 살아가고 있단다. 참! 마을 입구의 오른쪽 능선에 있다는 산성은 눈에 띄지 않았다. 탐방로가 그 능선을 넘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 잠수교를 건너면 만나는 진막골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이곳에도 완주를 증명해주는 이정표(영양전통시장 3.9㎞/ 선바위관광지 7.6㎞)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 마을 앞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능선을 넘어가도록 나있는데 이게 꽤나 힘들다고 소문나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우회로는 구태여 고생길을 택할 필요가 없다며 자기한테 오라고 자꾸만 유혹을 보내온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고생길을 택하기로 했다. 이왕에 내놓은 탐방로이니 무언가 하나쯤 얻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길이 너무 가파른데다 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옆구리가 허전한 것이 영낙없이 반변천으로 떨어지는 절벽인데, 아슬아슬하게 나 있는 산길은 낙엽에 덮여 잘 보이지도 않는다. 행여 미끄러질세라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볼거리 또한 전무했다. 그저 힘들기만 한 구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 장딴지가 빡빡할 만큼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싸움을 치룬 뒤에야 만나게 되는 능선의 꼭짓점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액자 속에라도 넣으라는 듯 수제 망원경까지 박스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 전망대에 서면 반변천과 동부천이 만들어놓은 널따란 들녘과 함께 영양읍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뒤로 펼쳐지는 산릉은 검마산과 백암산, 독경산 등이 아닐까 싶다.
▼ 참! 볼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요렇게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쏙 빼다 닮은 고사목도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 산으로 들어선지 30여 분이 되는 곳에서 성황당은 만났다. 그런데 안내판에 적힌 글이 조금 묘하다. 이 성황당의 내력은 나몰라 하는 대신 요 아랫마을에 살던 어느 효자 이야기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늘어놓을 이야깃거리가 정 없었다면 스토리텔링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 성황당을 지나면서부터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른다. 울창한 솔숲 속에서 곡선을 이루는 몸매가 고운 길이다.
▼ 이어서 10분 후에는 무량사(無量寺)라는 절간을 만난다. 금당인 무량수전을 위시해 인법당과 삼성각, 천왕문, 요사 등으로 꾸며진 영양을 대표하는 사찰이지만 사세가 약해서인지 낡고 어수선한 모양새이다.
▼ 트레킹 날머리는 영양전통시장
무량사 앞에서 산자락에 들어섰다가 이를 벗어나면 탐방로는 영양읍으로 연결되는 도로에 내려선다. 이제 1㎞ 정도만 더 걸으면 5길의 종점인 영양전통시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곳에서 트레킹을 마무리 짓는 사고가 발생해버렸다. 점심을 먹은 다음 종점으로 가라는 ’깔지‘를 보고 산악회의 버스가 멈춰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 그만 트레킹까지 마감해버렸기 때문이다. 반주삼아 마신 술에 얼큰하게 취했는데 까짓 전통시장을 다녀올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전통시장은 5길의 종점이지만 6길의 시점이기도 하니 다음 번 답사 때 밟아보면 되지 않겠는가. 마지막 사진을 허총무님에게서 얻어다 쓴 이유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4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14.44㎞이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들이 많았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