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사진) "다정가"로 이름높은 이조년의 아버지 이장경의 묘소는 본래 지금의 세종대왕자태실 자리인 태봉에 있었다(사진은 선석사에서 바라본 태실 방면). 그러나 왕궁에서 왕실의 태실 자리로 이 곳을 지목하면서 이장경의 무덤은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로 옮겨졌다. 이장경, 이조년 등을 모시는 안산영당은 벽진중학교 지나 기국정 지나, 초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도로의 맨 꼭대기에서 왼쪽으로 산길을 따라 들어가면 나타난다. 안산영당 주위에는 아무 인가도 없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ㅣ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 전문이다. 이 시조를 신위(申緯)는 ‘자규제(子規啼)’란 제목을 붙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梨花月白五更天
啼血聲聲怨杜鵑
覺多情原是病
不關人事不成眠
신위는 ‘다정가’를 왜 한문으로 번역하였을까. 아마도 다정가가 너무나 아름다운 시였기 때문이리라. 아니, 신위가 다정가를 번역한 데에는 어쩌면 작가 이조년에 대한 이황의 평가가 한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황은 말했다. ‘이조년은 고려 500년 제1의 인물이다.’ 그랬으니 이황보다 250년 가량 후세 인물인 신위가 다정가를 한문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은 데는 시 자체의 품격도 작용을 했겠지만 작가인 이조년에 대한 흠모의 마음도 크게 작용했을 법한 일인 것이다.
이조년(1269년 고려 원종 10년 출생, 1343년 충렬왕 복위 4년 사망, 향년 75세)은 세종대왕자태실이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선석사 왼쪽 태봉에 안치되기 이전 그 곳에 무덤을 썼던 이장경의 다섯째 아들이다.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이 그의 네 형인데, 조년을 포함하여 다섯 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문득 가문 전체가 나라 안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게다가, 이 다섯 형제에 그치지 않고 그 후손들도 대대로 고려, 조선에 걸쳐 끊임없이 고위 관직을 역임함으로써 성주 이씨 이장경의 집안은 명문 거족으로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된다.
다정가를 쓸 때 이조년은 성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서울을 떠나 고향 성주로 와서 산 세월이 무려 13년이나 되었다. 이조년은 자신의 집에다 백화헌(百花軒)이란 현판을 붙였는데 백 가지 꽃이 만발한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만큼 그는 꽃을 재배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살았던 셈이다. 그러나 이 무렵 남긴 시를 보면 그가 꼭 온갖 꽃을 심고 키우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백화헌시’를 읽어보자.
이 꽃 저 꽃 주섬주섬 심을 것 있나
백화헌에 백화를 피워야 맛인가
눈 속에는 매화꽃 서리 치면 국화꽃
울긋불긋 여느 꽃 부질없느니
울긋불긋 철 따라 빛깔이 변하는 여느 꽃들은 다 부질없다. 권력의 향배를 따라가며 잽싸게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하는 기회주의자들이 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이조년은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다정가도 성주에서 썼으니 어쩌면 백화헌시와 대동소이한 착상에서 작품이 태동되었는지도 모른다.
배나무꽃에는 달빛이 은은하고 은하수는 밤 12시 전후를 흐르는데, 한 가닥 나뭇가지에서 배어나오는 봄의 기운을 소쩍새가 어찌 알고 울겠냐마는, 다정다감한 것도 병인 듯하여 나도 이 밤을 잠 못 들고 있노라
이조년은 이 무렵 성주에 귀양 와 있었다. 원의 실질적 지배를 받던 당시, 중앙 관리들은 자신과 친한 왕족을 권좌에 앉히기 위해 파벌을 이루어 원에 줄을 대며 싸워댔다. 이조년은 중립을 지켰지만, 결국 권력을 잡은 쪽의 미움을 받아 귀양을 와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간신들이 무고(誣告)를 원으로 보내 왕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조년은 1322년 단신으로 원나라 조정을 찾아가 사실을 설명하고 원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 후 1331년과 1339년에도 이조년은 비슷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원나라를 찾아갔다. 1339년에는 그의 나이가 무려 71세였으니, 그러한 고령에 멀리 중국까지 찾아다니며 옥에 갇힌 임금을 구출한 충정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조년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73세 때다. 국정 살피기에 소홀한 왕을 여러 번 충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낙향한 것이었다. 벽진면 자산리 안산영당에서는 이조년을 비롯한 다섯 형제와 그의 아버지 장경 등 여러 선현(先賢)들을 제향하고 있으며, ‘눈 속에는 매화꽃 서리 치면 국화꽃, 울긋불긋 여느 꽃 부질없느니’ 하고 선비의 대쪽 같은 충성심을 노래한 조년의 영정도 고이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