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45코스, 걸을 수 있는 데까지
이원근
◉ 2026.10.4
◉ 대사정류소-청포리-46코스중현보건소-노구리보호수-염해선착장-작장마을-예게선착장 약 17.5km
걸을 수 있는 데까지
7월과 8월, 9월을 쉬고 오랜만에 다시 남파랑길에 나섰다. 사정이 있어 한동안 길을 떠나지 못했다. 지난번에 46코스를 마쳤으므로 이번에는 45코스를 거꾸로 걸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 이쪽이 오히려 편했기 때문이다.
망운산 자락을 따라 내륙의 숲속 농로와 한적한 마을길, 기암이 늘어선 해안과 자그마한 몽돌해변이 번갈아 나타나고 바다를 끼고 걷다가 어느새 숲길로 들어서고, 다시 마을을 지나면 눈이 시원해지는 해안길이 나온다. 길이 단조롭지 않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바다 건너편에는 광양이나 여수 쪽 공단인 듯한 시설물들이 아스라이 보였고, 길가에는 예쁜 펜션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적한 농로에는 가을 햇살이 내려앉고, 몽돌해변에는 파도가 낮게 밀려왔다. 오랜만에 나선 길이라서인지 평범한 풍경도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풍경보다 자꾸 친구들 생각이 났다.
작년부터 친구 네 명이 의기투합하여 코리아둘레길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해파랑길, 750km를 무사히 마쳤고, 남파랑길도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23구간에서 거제의 최고봉인 가라산을 넘으면서 한 친구가 크게 고생했다. 결국 체력적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으로 길을 포기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올해 6월과 7월, 유례없는 폭염 때문에 한동안 걷기를 쉬었다. 그 사이 건강검진을 받은 두 친구에게 심장과 혈관에 문제가 발견되었다. 의사는 당분간 걷기를 쉬라고 했다. 코리아둘레길을 함께 완주하자며 시작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길에서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완주라는 말이 우리를 묶어주는 약속 같았다. 함께 시작했으니 함께 끝까지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길을 계속 걷지 못하게 된 친구들을 생각하니 완주가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걱정이 앞섰다. 앞으로 혼자 남은 길을 어떻게 이어갈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보다 친구들의 건강이 더 마음에 걸렸다.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친구, 혈관에 이상이 있다는 친구를 두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잘 치료받고 몸을 돌보라는 말, 그리고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혼자서라도 이어가 보자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때 고맙게도 선배 한 분이 함께 걷겠다고 나서셨다.
나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다. 하지만 1대간 9정맥을 마쳤고, 해파랑길 750km와 해남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의 국토대종단 800km, 지리산둘레길을 혼자서 해내신 분이다. 특히 24시간 이내 100km 주파 기록까지 보유하신 분이다. 걷기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나보다 뜨겁다. 많이 걸어본 사람답게 길을 대하는 마음도 여유롭고, 삶을 바라보는 눈도 깊다.
오늘 우리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 속에서 숲속 농로와 마을길, 기암이 즐비한 해안과 몽돌해변을 느긋하게 걸으면서 선배가 말씀하셨다.
“우리야 꼭 완주했으면 좋지. 하지만 완주를 꼭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걸을 수 있는 데까지 걸으면 되는 거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단단히 매달아 놓았던 무언가가 툭하고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코리아둘레길이라는 긴 길의 끝을 바라보며 걸었던 것 같다. 몇 구간을 남겼는지, 언제까지 끝낼 수 있을지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걷는 일 자체가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길은 원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걷는 길을 걸으면 되고, 오늘 만나는 풍경을 보면 되고, 오늘 곁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 것이었다. 내일 걸을 수 있으면 내일 또 걸으면 되고, 더 이상 걷기 어려운 날이 오면 그곳에서 멈추면 된다.
완주라는 목표를 내려놓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가야 할 거리가 줄어든 것은 아닌데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끝을 생각하지 않으니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더 잘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길이지만, 이제는 누구도 서운해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길을 걸으면 될 것 같다.
친구들이 다시 건강을 되찾아 언젠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을 기다리며 조급해하지는 않으려 한다.
나는 나대로 걸을 수 있는 데까지 걷고,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몸을 돌보며 자기 길을 걸으면 된다.
완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래 함께 걷는 일인지도 모른다.
길의 끝까지 가는 것이 꼭 완주인 것은 아니다.
걸을 수 있는 동안, 함께 걷고 싶은 사람과 걷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길을 걷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첫댓글 지난 6월이후 오랜만에 남파랑길을 재개하셨군요.
전체 90구간중 절반까지 진행하셨으니 이제부터는 조급한 마음보다는 여유로운 트레킹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고문님의 버킷리스트가 코리아둘레길이지만 체력과 건강이 우선이며, 완주보다는 오래도록 걷는게 더더욱 중요한 일이니까요.
남은 남파랑길은 산너머와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힘내십시요. 화이팅!
응원 말씀 고마버요.
말씀처럼 완주에 연연하기보다 건강을 살피며 오래도록 걷는 즐거움을 누리겠습니다.
남은 남파랑길은 산너머와 함께 여유롭게 걸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몇 명 정도 충원하도록 노력할께요.
늘 응원해 주셔서 고맙고요. 함께 건강하게, 즐겁게 걸어갑시다. 화이팅입니다!
ㅡ 권기호
대장님 끊임없는
전국 순회길 답사에 박수를 보냅니다! 축하!
ㅡ 김대관
함께 걸을 때가 좋았네요. 상태가 좋아지면 또 걸을 수 있는데까지 걷고 싶어요. 함께하지 못해 많이 아쉬워요.
ㅡㅡ 건강 되찾는 게 먼저다. 수술 마치고 내년엔 함께 걸을 수 있기를 기대함세.
ㅡ 김현봉
덕분에 어제 좋은 구경(?) 했습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인상적인 몽돌 해변과 반짝이는 바다.
잠든 역마살이 다시 도지는듯 합니다.
어제 참 수고 많았습니다.
여러가지 불편함을 무릅쓰고 트래킹을 계속하시는 모습이 내게는 더 크게 다가옵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ㅡ 김종철
남해의 잔잔한 파도를 옆에 하고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십니다. 어느 선배님께서 그러시더군요 ... 걸을 수 있을 때 까지가 인생이다... 라구요 ... 선배님의 글을 접하니 그말씀이 생삼 생각이 납니다. 늘 안산 즐산을 그원드립니다.
ㅡ 권수문
친구분들이 하나, 둘 중도 하차를
하셨다니 참 안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엄청난 능력과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계시는
선배님께서 합류하셨다니 다행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꼭 완주라는 목표를 위해 다 출발은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쉬운 여정이 아닐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걸을 수 있는데 까지,
갌 수 있는데 까지 가면 될것입니다.
저 역시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지만
갈 수 있는데 까지 갈 것입니다.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할
때도 있겠지만 갈 수 있는데까지
가겠습니다.
ㅡㅡ 따뜻한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누구에게나 뜻하지 않은 고비가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멀리 가느냐보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겠다”는 말씀에 저도 큰 응원을 보냅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힘들 때는 잠시 쉬어가면서 끝까지 함께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우리, 완주보다 중요한 건강을 지키며 갈 수 있는 데까지 힘차게 가봅시다. 화이팅입니다!
ㅡ 김수봉
차분히 쓰내려간 글보며 중도하차한 친구들 아쉽고 안타깝기도합니다 이대장 참으로 대단하신 이대장이요 건강하신 모습 부럽기도하고요 오늘도 내일도 화이팅입니다 ♡오늘 부산 놀러간 마눌이 부캉이 만나 찍어보내줬네유 ~
ㅡ 권태문
교장 선생님 끝까지 화이팅!
ㅡ 최숙희
멋지십니다. 또 대단하심을 느끼고요. 저는 이젠 하루에 17km 이상은 좀 무리일까 싶긴 합니다만.
ㅡ 김진호
"걸을 수 있는데 까지..."
참 좋은 생각이네. 삶을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일세.
이제 우리 나이쯤 되면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삶 자체를 감사히 여길 때가 아닌가?
남파랑길 45코스 기행기
잘 읽었네.고맙네.
ㅡ 박재석
선생님의 여행기를 계속 받아볼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합니다.
선생님의 건강을 늘 기원합니다.
ㅡ 최천기
이제 연세도 있으시니 몸 아껴야될듯 합니다,
말씀되로 걸을수 있는데까지 가십시요,
편한밤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