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의 침투와 조선 사회의 내재적 위기 속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우면서 등장했다. 당시의 유교는 성리학적 명분주의에 빠져 변화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불교 역시 조선시대 500여 년 간 정책적으로 탄압받아왔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주도할 자체의 역량이 부족했다. 또한 서양의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사회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학의 침투에 대항하는 한편,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등장한 것이 동학이었다.
[창도 및 전개과정]
몰락양반의 후예이자 서자였던 최제우는 당시 사회에서 입신출세할 수 없었다. 그러한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면서 40세가 될 때까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1860년 4월 5일 전통적인 무속에서의 신병체험과 유사한 일종의 강신체험(降神體驗)을 했다. 이 체험을 통해 한울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고 이 한울님을 마음에 성심껏 모시는 것이 바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도를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자신이 깨달은 도를 논리적으로 정립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되어 나온 것이 〈동경대전 東經大全〉이고 일반 대중들을 위해 한글 가사체로 쓴 것이 〈용담유사 龍潭遺詞〉이다. 이 과정에서 동학교도들은 점차 늘어나 교도들을 조직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을 통솔할 책임자로 '접주'(接主)들을 임명했는데 그 지역을 '접소'(接所)라고 명했다.
동학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 정부는 동학을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해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했다. 그러나 동학 세력은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교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보려는 신원(伸寃)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마침내 최제우에 의해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비롯한 많은 동학교도들은 1890년대에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교조 최제우는 결코 서학의 모리배가 아니었으며 그가 펼친 동학은 서학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동학교도의 정당한 종교활동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조선 정부는 매우 미온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소극적인 반응에 대해 동학교도들은 의견이 2가지로 갈라졌다. 남접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들은 동학을 합법화시키기 위해서는 부패한 봉건정부를 폭력적으로 타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 강경론을,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 세력은 현단계에서 동학이 해야 할 일은 정부당국에 대한 직접적 공격보다는 지속적인 교세확장으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두 파 사이에는 단순한 의견대립을 넘어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비난이 행해지기도 했다.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조선 말기의 사회적 부패와 억압적 상황은 혁명적 상황을 예고하고 있었다. 마침내 1894년 전라남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가 기점이 되어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갑오농민전쟁). 이 전쟁에서 동학교문(東學敎門)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남접이 주장하던 봉건정부의 타도를 통한 동학교문의 합법화와 사회개혁의 논리가 이 농민항쟁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북접 세력은 전쟁의 초기 단계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동학교도에 대한 정부의 무차별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의 전반부에서는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측이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공격해 나아갔으나 후반부에 이르러 청과 일본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에 대패했다. 전쟁에 참패한 동학교도들은 그후 지하에서 동학교단의 재건을 추진해 나아갔다. 전쟁에서 잔존한 북접 접주들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단은 1900년 손병희(孫秉熙)를 제3대 교주로 내세워 천도교라는 합법적 교단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가 과연 과거의 동학을 진정으로 계승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천도교에 반대해 별도의 교단이 생겨나기도 했다.
[교리]
동학의 교리는 3단계의 발전과정을 겪었다. 교조인 최제우 단계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사상, 2대 교주인 최시형 단계에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개창된 천도교 단계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변화되었다. 물론 이 3단계의 교리발전 과정이 전적으로 단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동학의 시천주 사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시천주라는 말은 〈동경대전〉의 21자 주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즉 최제우가 종교체험을 할 때 상제(上帝)로부터 받은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至)에서 처음 등장했고 이것이 뜻하는 바가 최제우 자신에 의해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가 시천주에 대해 해석을 붙인 "내유신령(內有神靈)하고 외유기화(外有氣和)하여 일세지인(一世之人)이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의 뜻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학의 경전을 전체적으로 검토해 시천주의 뜻을 간접적으로 살펴보면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천주를 정성껏 내 마음에 모신다는 의미이다. 우선 최제우에게서 초월적 신은 상제·천주·한울님 등으로 나타나며 내재적 신은 지기(至氣)로서 나타난다. 즉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인간과 우주를 주재하는 초월적 신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내재적 신의 성격이 동시적으로 나타난다. 전자의 예는 〈용담유사〉 〈안심가 安心歌〉의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 보냐"에 잘 나타나 있고 후자의 예는 〈용담유사〉 〈교훈가〉의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단 말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최제우의 경우 한울님은 초월적 숭배 대상으로서의 성격과 내재적 성격을 상호보완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초월적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시형의 경우, 천주는 인격적·초월적 개념 대신에 천(天)이라는 비인격적 개념이 우세하게 나타났다. 즉 사인여천·양천주(養天主)·인즉천(人卽天) 등의 개념이 등장해 사람을 하늘처럼 섬길 것을 강조하고 마음속에서 천주를 기르고, 나아가 사람이 바로 하늘이라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한울님에게서 인격적 개념을 탈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만물에도 하늘이 깃들어 있다는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의 범천론적(凡天論的) 사상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최시형 단계에서는 내재적인 천의 개념이 우세해지면서 초월적인 신의 개념은 부분적으로만 수용되었다. 손병희 단계에서는 전통적인 천주개념은 거의 사라지고 인간을 천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인내천사상이 등장했다. 그것도 인간을 중심으로 천이 이해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천도교 교단에서는 시천주 사상과 인내천 사상을 어떻게 통일적으로 파악할 것인가가 주요과제로 남아 있다.
[의례]
동학 당시의 종교적 의식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고 천도교에 와서 의식절차가 본격적으로 제정되었다. 최제우 단계에서는 그가 종교체험 당시 받은 21자 주문이 중시되었을 뿐이었다. 최시형 단계에서는 전통적인 제사형식인 '향벽설위'(向壁設位) 대신에 인즉천의 입장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가 제창되었다. 이는 자기 자신 속에 천과 조상, 그리고 스승의 정령이 들어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향해서 정성껏 제사드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제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최제우와 최시형 단계에서는 주문을 외우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고 유교식의 복잡한 제사 대신에 간편한 제사행위를 행했다. 그후 천도교 단계에 와서 시일(侍日)·주문·성미(誠米)·기도·청수(淸水)의 5가지 의식을 기본적인 의례로 하는 '오관제'(五款制)를 정립했다.
[교단조직]
초기에는 별도의 조직이 없었으나 교도가 늘어남에 따라 교단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최제우 당시에는 경주 지역을 관장하는 책임자를 '접주'라고 불렀다. 그후 최시형이 교단을 이끌면서 교세가 삼남지방으로 점차 확대되자 접주 위에 '대접주'(大接主)를 임명했다. 갑오농민전쟁 당시에는 '포'(包)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접(接)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아마 포는 '기포'(起包)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접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접의 상부조직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포접제의 운영은 6임제(六任制)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교장(敎長)을 비롯하여 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6가지 직임(職任)이 교화활동을 주도했다. 이러한 교단의 총괄기관으로는 중앙에 법소(法所)가, 각 지역에 도소(都所)가 있었다. 그리고 교단의 조직원리는 연원제(淵源制)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도통연원(道統淵源)이라는 원칙하에 도를 전하는 자가 도를 받는 자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이때 새로 입교한 자는 자신을 교인으로 인도한 연원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 또 교인을 많이 끌어들인 자는 전체 교단 내에서 포교성적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획득했다. 따라서 이러한 연원제는 포교활동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원간의 파벌을 조성하고 경쟁하는 역작용도 일어났다. 결국 동학은 19세기말이라는 변혁기에 창립된 신종교로 당시 대다수 민중들의 종교적 욕구와 사회변혁에 대한 갈망에 상당히 기여했으며 후에 한국 신종교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성장기]
아버지는 옥(
)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 진립(震立)은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사후에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를 받았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한 유생으로 2번 상처를 하고 과부이던 한씨를 만나 63세에 최제우를 낳았으나 이미 동생의 아들 제녕(濟寧)을 양자로 들여 그는 서자로 자라났다.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수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10세 때에는 이미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혼인했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농사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화재까지 당하여 집안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3년상을 마친 뒤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면서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수련과 득도]
1855년(철종 6) 3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승려로부터 〈을묘천서 乙卯天書〉를 얻고 난 후 더욱 수련에 힘써 1856년 양산군(梁山郡) 천성산(千聖山)의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가 죽어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했으며 다음해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이후에도 울산 집에서 계속 공덕을 닦았으며, 1859년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 뒤에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이무렵 어리석은 세상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1860년 4월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공중으로부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사람들에게 포교할 준비를 했다.
[포교와 탄압]
최제우 동상, 대구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여러 가지 소문도 떠돌게 되고 지방의 유림과 친척 중에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하여 이듬해 3월 경주로 돌아갈 때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해 있었다. 피신중에 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는 것을 반성하고 표현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으며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 論學文〉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 安心歌〉·〈교훈가 敎訓歌〉·〈도수사 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제자 중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전도에 힘쓰게 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1862년 9월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民俗)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해줄 것을 청원하여 경주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석방했다. 이후 그는 신도들에게 세상의 오해를 받기 쉬운 언행을 삼가하도록 경계했다. 한편 그가 무죄석방되자 사람들은 관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해 포교가 더욱 용이해졌다. 신도가 늘어나자 그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11월 왕명을 받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
[저술과 사상]
최제우의 글은 그가 처형당한 후 신도들에 의해 간행된 〈동경대전 東經大全〉·〈용담유사 龍潭遺詞〉에 남아 있다. 〈포덕문 布德文〉·〈수덕문 修德文〉·〈논학문〉·〈불연기연 不然基然〉 등 한문으로 씌어진 4개 교의문은 〈동경대전〉에 실려 있고, 〈용담가 龍潭歌〉·〈몽중노소문답가 夢中老少問答歌〉·〈교훈가〉·〈도수사〉·〈안심가〉·〈흥비가 興比歌〉·〈권학가 勸學歌〉·〈도덕가 道德歌〉 등 8편의 한글 가사는 〈용담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한문으로 된 4개의 교의문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지었고, 8편의 가사는 한글로 구송(口誦)에 편하도록 쉽게 풀어썼다는 점에서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나 일반민중을 주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시천주'(侍天主)로서 한울님을 모시면 누구나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환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천주의 개념은 주술적인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고 우리 민족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교나 불교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 운(運)이 다한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봉건지배층이 위정척사적(衛正斥邪的) 입장에서 서양을 남만(南蠻)으로 파악한 것과는 달리 그는 서양열강을 무사불성(無事不成)의 강대한 외래자로 보아 현실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일본에 대해서는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왕조를 포함한 양반사회질서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혁되어야 한다는 자연적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지상천국이 건설된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주장했다. 한편 적서(嫡庶)나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누구나 천주를 마음에 모시면 신분에 관계없이 군자가 된다고 하여 만민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관을 보여주었다.
전봉준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다. 비록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숙(明叔), 호는 해몽(海夢). 왜소한 체구 때문에 녹두(綠豆)라 불렸고, 훗날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전봉준(가운데), 전북 순창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모습
전봉준 장군 동상, 전북 정읍시 황토현
황토현전적지, 사적 제295호, 전북 정읍시 하학리
[출신 및 배경]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서 전창혁(全彰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바 있는 향반(鄕班)이었던 점으로 보아서 몰락양반, 즉 잔반(殘班) 출신으로 보인다. 아버지도 의협심이 강하여 군수의 학정에 항거, 민소(民訴)를 제기했다가 구속되어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고 한다. 5세 때에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13세 때에는 〈백구시 白驅詩〉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그의 20, 30대에 조선사회는 극히 어수선했다. 개항을 계기로 하여 외세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봉건 말기의 위기적 상황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봉준 역시 나라의 장래에 대해 고민했으며,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1888년(고종 25) 무렵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 1890년 무렵에는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그는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1892년 무렵에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1893년 2월 무렵 서울로 올라가 대원군을 방문하여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전봉준은 동지를 규합했다. 그 결과 1893년 3월 무렵 전라도 금구현 수류면 원평리에서 한 무리의 동학 농민세력을 형성·영도하게 되었다. 〈동도문변 東徒問辨〉에 의하면 그 세력은 1만여 명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민란의 주체로서,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 사상을 일단 수용하여 실천적인 사회사상으로 승화시킨 농민 반대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1893년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던 동학의 보은취회에 참가하여 그 집회를 반봉건·반침략의 정치운동으로 기울게 하려고, 3월말경에 보은으로 향했으나, 보은취회가 4월 3일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봉준은 1893년 11월초 고부 고을 농민 40여 명과 함께 군수인 조병갑(趙秉甲)에게 나아가 그의 학정을 시정할 것을 등소(等訴)했으나, 전봉준은 일시 구속되고 등소는 거부되었다. 전봉준은 1893년 11월 하순에 최경선(崔景善)·김도삼(金道三) 등 20여 명과 함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고부성의 점령, 조병갑의 처형, 탐관오리의 처단, 전주성의 점령, 서울로의 진격 등을 내용으로 하는 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때마침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이동 발령되어 이 계획은 보류되었다. 1893년 12월 전봉준은 고부 고을 농민 60여 명과 함께 전주의 감영에 가서 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고부의 폐정을 시정해달라고 등소했으나,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익산군수로 이동 발령되었던 조병갑이 1894년 1월 9일에 고부군수로 잉임(仍任)되었고, 2일 뒤인 1월 11일에 고부민란이 일어났다. 이 민란은 앞의 사발통문 서명자 20명 중 전봉준·최경선·김도삼·정익서(鄭益西) 등의 사전계획과 준비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전봉준 등이 지도한 농민들은 조병갑의 일련의 악정을 시정하고 읍내에 진을 치고 있다가 1월 17일에는 마항(馬項) 장터로, 2월 25일에는 백산(白山)으로 진을 옮겼다. 한편 조정에서는 고부민란 발생의 책임을 물어 조병갑을 체포·국문하라는 처벌을 내리고,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안핵사로 임명했다. 박원명은 부임 후 회유와 설득에 주력하여 난민은 대부분 해산했는데, 3월 2일 역졸(驛卒) 800여 명을 데리고 고부에 들이닥친 이용태는 갖은 야만적인 노략질을 자행하여 난민을 완전히 해산시켰다.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가렴주구로 인해 소생산자로서의 생활을 위협받게 된 소농·빈농, 장시의 확보와 화폐경제의 발전이 흐려지자 위기를 느낀 소상품생산자들이 자발적으로 지방행정을 시정하기 위하여 봉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부민란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더 확대된 차원에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일신상으로는 조병갑에게서 별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백성'과 '세상'이라는 더 넓은 지평(地平) 위에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제1차 농민전쟁]
고부민란은 해산되었으나 이용태의 야만적 진압으로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과 동학 신도들이 크게 분개하자, 전봉준은 국면 전환을 꾀했다. 전봉준은 2월 29일경 금구 원평에서 약 3,000여 명의 농민군을 다시 결집하여 3월 11일경 금구 원평을 출발, 부안을 거쳐 무장으로 나아가 3월 20일 손화중부대·최경선부대와 합세하여 무장에서 재봉기했다. 이것이 제1차 농민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날 탐학 수령을 처벌함으로써 보국안민하겠다는 포고문을 전라도 일대에 배포하고 일제히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주로 전라도 서해안 지역의 10여 읍에서 많은 농민군이 봉기했다. 전봉준부대는 3월 23일 다시 고부를 점령했고, 25일에는 고창·흥덕·부안·정읍·태인·금구·김제 등지에서 몰려온 약 5,000여 명의 농민군과 함께 백산에서 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농민군은 제세안민(濟世安民)·축멸왜이(逐滅倭夷)·진멸권귀(盡滅權貴) 등의 4대명의(四大名義)를 발표하고, 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김개남(金開南), 총참모 김덕명(金德明)·오시영(吳時泳), 영솔장 최경선의 진용을 짰다. 그러나 농민군 전체가 단일한 지휘체계에 의하여 움직여진 것은 아니었다. 몇 개의 지역 농민군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개별 농민군부대로 나누어져서 각 부대장의 지휘에 따라 행동했다. 따라서 전봉준도 형식상으로는 농민군 전체의 총대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개별 농민군부대의 지도자였다. 3월 26일부터 개별 농민군부대는 전라도 각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 그 목적은 탐학한 수령을 징벌하고 각 고을의 폐정을 시정하는 것이었다. 전봉준부대는 4월 7일 고부의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했고, 4월 23일 장성의 월평촌에서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격파했다. 이어 정읍을 거쳐 4월 27일에는 전주에 입성했다.
전주성 함락에 놀란 조정에서는 4월 28일 청(淸)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이에 청병 3,000여 명이 5월 5일 아산에 상륙했다. 한편 어떻게 해서라도 청과 일전을 벌여 청을 압도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일본은 5월 6일 약 4,000여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갑자기 조선이 국제분쟁의 무대가 되자 조정과 농민군은 화전(和戰)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교섭 끝에 5월 8일 27개 조목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 합의하고 휴전했다. 이 폐정개혁안은 보편적이고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폐정을 시정하려는 것으로서,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민씨척족정권의 퇴진과 대원군정권의 성립을 요구했고, 봉건 말기적 현상을 시정하려는 반봉건의식, 외국상인의 침투로 말미암은 폐해를 시정하려는 반외세·반침략 의식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과 조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전봉준은 5월 11일~18일 순변사 이원회(李元會)와 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原情)을 제출하면서 폐정개혁의 실시를 촉구하고, 개혁이 실시되지 않으면 농민군의 무장과 조직을 풀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의 민씨척족정권은 그 정치적 기반이 극도로 취약해져서 폐정개혁을 단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이에 5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김학진은 농민군의 집강소를 사실상 인정하고 기존의 감사-수령의 행정질서와의 타협과 공존을 제의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집강소 질서의 통일과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6월 15일경에 남원에서 농민군대회를 열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뽑아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하령했다. 이에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의 52개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집강소질서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6월말 일본이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한 후 공주로 남하할 태세를 보이자 김학진은 전봉준과 김개남에게 편지를 보내 관과 농민군이 타협하고, 함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전봉준은 7월 6일 전라도의 군정을 자신이 맡고 집강소질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대타협을 성립시켰다. 집강소는 형식상 김학진의 예하로 되었지만, 사실상 집강소가 행정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집강소질서가 설분(雪憤) 위주에서 벗어나서 폐정의 제도적 개혁 위주로 바뀌었다. 그 결과 7월 하순에는 폐정개혁건 12개조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봉건적 신분제도는 전면적으로 철폐되었고, 봉건적 토지제도는 생산력 발전을 주안점으로 경작능력에 따른 경작 균분(均分) 제도에 의하여 크게 개혁되었으며, 반일·반침략의 자세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집강소 개혁정치는 지방자치의 차원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의 권력문제에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제2차 농민전쟁]
조선의 보호국화를 추진했던 일본은 8월 17일의 평양성전투에서 청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개화파정권의 요청을 받아들여 농민군 토벌에 발벗고 나섰다. 전봉준은 9월 14일 삼례에서 각지에 반일기의를 호소하고, 항일전쟁을 위한 군비를 준비하여 10월 14일 삼례를 출발, 논산에 둔거(屯據)하면서 농민군을 널리 모집하여 2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전봉준은 여러 차례 경군(京軍)과 충청감영군 그리고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에게 항일을 위한 민족연합전선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10월 24일 공주로 진격하여 이후 11월 10일까지 약 2,500명의 정부군 및 약 200명의 일본군과 2차례에 걸쳐 처절한 공주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제2차 농민전쟁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 전봉준이 목적했던 것은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친일적인 개화파정권을 타도하며 나아가 '몇 사람의 명망가의 합의법'에 의한 권력기구를 수립함으로써 전국의 차원에서 폐정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군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법무아문권설재판소에서 5차에 걸쳐 재판을 받은 후 사형을 언도받았고, 3월 30일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成斗漢)과 함께 처형당했다.
심한 탄압 속에서도 포교활동과 교단정비를 통해 동학을 크게 성장시켰다. 온건한 방법으로 동학을 합법화하고자 했으나 교조신원운동과 갑오농민전쟁에도 참여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아버지는 종수(宗秀)이며, 어머니는 월성배씨(月城裴氏)이다.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 등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7세에 조지소(造紙所)의 고공(雇工)이 되었다. 19세 때 밀양손씨(密陽孫氏)와 결혼한 뒤 처가가 있는 흥해(興海)에서 살다가, 28세 때 경주 승광면 마복동으로 이사하여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이 되었는데 일을 잘 처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33세 때 다시 검곡(劍谷)으로 이사했는데 이 시기의 잦은 이사는 생활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철종 12) 6월 동학에 입교했다. 한달에 3, 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설교를 듣고 의범(儀範)을 배웠으며 집에 있을 때는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기에 힘써 한울님의 말씀을 듣는 등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체험했다고 한다. 1862년 3월 최제우로부터 포교에 힘쓰라는 명을 받고 영해·영덕·상주·흥해·예천·청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포교를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었고, 8월 도통을 이어받았다. 그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관헌들의 눈을 피해 옥바라지를 하다가 최제우의 명교(命敎)를 받고 태백산·안동·평해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1864년(고종 1) 3월 최제우가 처형되자 다음해 1월 평해에서 울진으로 거주를 옮겨 최제우의 부인과 아들을 보살폈다. 같은 해 6월 영양으로 이사한 후 수도에 힘써 1년에 4차례씩 49일간 기도했으며 〈동경대전 東經大全〉·〈용담유사 龍潭遺詞〉를 외워 받아쓰게 하여 교도들에게 전했다. 1866년 10월 최제우의 탄신일에 모여든 교도들과 함께 계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1년에 2차례의 모임을 통해 흩어진 교도들을 재결속시키고 신앙을 다져나갔다. 1871년 최제우의 기일인 3월 10일에 영해부에서 이필제(李弼濟)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난에 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여 이후 다시 심한 탄압을 받게 되자 도피생활을 계속하면서 동학을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1875년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는 데 있으니 때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고 하여 이름을 때를 따라 순응한다는 뜻의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 1878년 접소(接所)를 열고 교도들에게 접제(接制)의 통문(通文)을 돌려 최제우의 뜻에 따라 도를 펼 것을 알렸다. 1880년 5월 인제군 김현수(金顯洙)의 집에 경전간행소를 세우고 〈동경대전〉을 간행했고, 1881년에는 단양 샘골 여규덕(呂圭德)의 집에 경전간행소를 마련하여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1883년에는 목천군 김은경(金殷卿)의 집에 간행소를 세우고 〈동경대전〉 1,000여 부를 간행·보급했다. 1884년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육임제(六任制)를 정하여 교단을 정비했으며 교세도 확장했다.
1892년 7월 호남의 접주 서인주(徐仁周)·서병학(徐丙鶴)이 찾아와 교조신원운동을 펼 것을 주장하자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이들이 독자적으로 충청도관찰사에게 소장을 내고, 많은 교도들도 교조신원운동을 주장하자 이에 동의하여, 11월 삼례역(參禮驛)에 신도들을 모집, 교조신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신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12월에는 정부에 상소문을 보냈으나 회신이 없자 1893년 2월 서울로 상경하여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귀가하여 생업에 종사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정부의 대답을 듣고 해산했으나 이후 탄압이 더 심해지자 그해 3월 약 2만여 명의 신도들이 보은에 집결하여 교조신원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우면서 약 20일간 시위를 계속했다. 그해 7월 서병학 등이 정부를 공격하고 국가를 혁신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때가 아니라고 하여 반대했다. 1894년 1월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으나 처음에는 때가 아니라 하여 반대하다가 5월에 전주화약을 맺고 일단 해산한 농민군이 10월 다시 봉기할 때 전체 동학교도에게 총기포(總起包)령을 내렸다. 1894년 12월말 갑오농민전쟁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1897년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8년 3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했다.
최시형은 처음 설법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귀천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피력했으며, 그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한울을 키워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 동학이 기본임을 알려주는 양천주설(養天主說), 신과 사람이 직접 합일된다는 향아설위(向我設位), 한울과 사람과 물(物)을 공경하라는 삼경설(三敬說), 세상 만물이 한울의 기운으로 생긴 것이니 사람이 다른 물건을 먹는 것은 곧 한울이 한울을 먹는 것이라는 이천식천설(以天食天說) 등많은 법설을 남겼다. 또 우(愚)·묵(默)·눌(訥)을 강조하여 새 세상이 되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니 인위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무저항의 사상을 강조했다.
천도교 지도자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밀양. 초명은 응구(應九)·규동(圭東).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손병희
손병희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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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두흥(斗興)으로, 22세 때인 1882년(고종 19) 큰조카 천민(天民)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다. 이필제(李弼濟)의 난에 연루되어 정부의 탄압을 받아 산간지방을 전전하면서 포교활동을 전개하던 동학교문은 1880년대 들어 손병희를 비롯하여 손천민·김연국(金演局)·박인호(朴寅浩)·서인주(徐仁周)·황하일(黃河一)·김은경(金殷卿)·윤상오(尹相五) 등 새로운 인물들이 입도하면서 교문(敎門)의 체제를 정비하고 교세를 삼남지방으로 급속히 확대시켜나갈 수 있었다. 1894년 4월 남접(南接) 주도하에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최시형(崔時亨)·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은 농민항쟁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집강소를 통한 폐정개혁사업을 저지하고자 했으며, 남접계열의 농민군세력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고 토벌에 나서고자 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동학교문 전체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는 한편, 교도들의 집요한 요구가 계속되자 북접은 손병희의 주도 아래 농민군에 합세했다.
[동학의 재건과 도통의 전수]
농민전쟁 이후 북접의 지도부는 지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조직재건작업을 시작했으며, 그는 1896년 1월 손천민·김연국과 함께 최시형으로부터 각각 의암·송암(松菴)·구암(龜菴)이라는 도호를 받고 교단재건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동생 병흠(秉欽)과 함께 이북지역의 개항장 부근이나 국경 근처의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를 비롯한 손병흠·이용구(李容九) 등의 포교 결과 황해도·평안도에 새로 형성된 포(包)·접(接)의 두령들이 늘어났으며, 이들은 1897년 4월 최시형에게 신 접주로 정식임명장을 받았다. 손병희가 개척한 지역의 교도들이 증가하여 그들로부터 거둔 미곡(米穀)이 중앙교단의 기본 활동 유지비의 재원을 이루었으므로 최시형은 새로이 교세가 확장되어가고 있는 관서지역에서의 포교활동을 중요시하고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7년 북접대도주가 되었으며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동학교문을 통솔하게 되었다. 1900년 풍기에서 거행된 설법식에서 스스로 북접의 법대도주(法大道主)가 되어 김연국을 신도주(信道主), 손천민을 성도주(誠道主), 박인호를 경도주(敬道主)로 삼고 교문의 종주(宗主)의 지위를 확립했다.
[근대화론의 수용]
그는 동학교문의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여 교세를 확장시켜가면서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동학교문의 진로를 전환할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이종일(李鍾一)과 자주 만나 시국문제와 동학운동의 방향에 대해 의논했으며 여러 차례 동학에 입교할 것을 권유했다. 또 개화파 인사였던 양한묵(梁漢默)·장효근(張孝根) 등을 동학에 가입시켜 교세의 확장을 도모하고 이들로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했다. 1901년 손천민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김연국 또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지자 직제자(直弟子)들과 상의하여 손병흠·이용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망명한 뒤에도 국내의 동학교도들을 계속 통솔했으며 충청도 부호 이상헌(李祥憲)이라 자칭하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조희연(趙羲淵)·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조희문(趙羲聞)·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파 관료들과 사귀면서 이들로부터 근대화론을 받아들였다. 그당시 자신의 개혁론을 정리하여 〈삼전론 三戰論〉(1902)·〈명리전 明理傳〉(1903)을 저술하고 이를 국내 동학교도들의 교양자료로 삼게 했다. 그의 근대화론은 동학교문 북접의 사상적 기반이기도 했던 유교이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식산흥업(植産興業), 즉 자본주의 발전을 통한 국부(國富)의 달성을 가장 강조했다. 국부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근면과 절약을 제시하는 한편 식산의 방법으로는 식산회사의 설립과 외국 유학을 통한 생산기술의 도입을 제안했다. 아울러 서생(書生)을 유학시켜 서구의 학문과 기술을 익히게 하고 이를 농공상업 발달의 기초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또 식산흥업의 발달과 함께 정치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서양의 근대적 정치체제의 도입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군주의 통치권을 전제로 하는 입헌정치를 구상했다.
[일본에서의 활동과 갑진개혁운동]
1903년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손병희는 러일전쟁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과 협동, 동학교도를 동원하여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한국 정부를 개혁하고 정권을 장악할 것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일본군 당국과 사전양해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고 권동진을 통해 일본군 참모총장 다무라[田村]를 만나 합의를 보고 손병흠을 국내에 파견하여 교도들로 하여금 거사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그러나 다무라가 1903년 8월 5일 갑자기 죽었으며 또 국내에 파견되었던 손병흠도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중 8월 3일 부산에서 원인 모르게 죽음으로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두령 40명을 불러 정치단체를 결사하여 러일전쟁에 공동출병할 것을 지시했다. 서울로 돌아온 두령들은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도인을 모았으나 조선정부와 동학세력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조선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려는 일본 군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때문에 같은 해 4월 박인호·홍병기(洪秉箕)를 일본에 불러 7월중으로 다시 이름을 중립회(中立會)로 바꾸어 재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호남지역과 관서지역에서 중립회가 설립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에 100원의 격려금과 함께 자신의 내정개혁론에 대한 5개 조항을 실어 중립회의 취지를 선전했으나 정부와 일본군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해 8월경부터는 그의 지도하에 갑진개혁운동(甲辰改革運動)이 시작되어 9월 하순 전국 각지에서 동학교도들에 의해 진보회(進步會)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진보회의 통고문이 각 지방에 배포되었으며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모임을 갖고 단발을 시행하고 흑의(黑衣 : 개화복)를 입기 시작했다. 또한 진보회를 통해 군용철도인 경의선·경원선 철도부설에 동학교도들을 동원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학교도들의 발기에 대응해 전국 지방관과 진위대에 이를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일본의 후원하에 있던 일진회(一進會)가 정부의 동학탄압 지시를 강력하게 비판하자 그해 11월 1일 그동안 갇혀 있던 동학교도들을 석방했다. 김연국을 비롯한 모든 동학교도들이 석방됨으로써, 동학은 40년간에 걸친 지하포교를 청산하고 비로소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1904년 12월 2일 동학이 일진회에 합동청원서를 각 도별로 제출하는 형식을 거쳐서 동학과 일진회는 공식적으로 합동했다.
[천도교 창건과 일진회와의 분립]
그동안 동학을 탄압해오던 광무정권(光武政權)이 무력해지자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1906년 1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하여, 2월 16일에는 천도교 대헌(大憲)을 반포하고 스스로 천도교 대도주가 되어 조직을 정비하여 서울에는 중앙총부를, 각 지방에는 교구를 설치했다. 교단 내에 권동진·오세창·양한묵 등 망명 개화관료 출신들과 일진회를 이끌었던 송병준(宋秉畯)·이용구 일파 및 김연국 일파가 서로 반목하게 되자 정교분리(政敎分離)를 표방하고 일진회의 지방지회 해체를 지시했다. 이에 대해 송병준·이용구는 천도교 결의서를 각 지방에 배포하여 자신들을 중심으로 교도들을 결속시키고자 했다. 이를 직접적인 계기로 1906년 8월 23일 손병희가 일진회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던 이용구 이하 62명을 출교처분(黜敎處分)함으로써 천도교와 일진회는 분립하게 되었다. 1907년 8월 대도주직을 김연국에게 이양하고 중앙총부의 간부를 개선했으나 김연국이 시천교(侍天敎)에 가담하자 이듬해 1월 차도주(次道主) 박인호로 하여금 대도주의 직을 승임(承任)하게 하고 자신은 성사(聖師)로 불리면서 활동했다.
[근대교육사업과 출판사업]
손병희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천도교의 활동을 종교 중심으로 전개하면서도 개화정책을 추진하여 근대교육을 실시하려 했다. 일본 망명중에도 동학교도의 자제 64명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적 교육을 받게 했으며 귀국 직후부터 더욱 활발하게 교육사업을 추진하여 203개의 사립학교를 원조했다. 그러나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져 교육사업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한동안은 교회의 유지에 주력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부터 다시 교육사업을 추진하여 1910년 재정난에 빠진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원조하고 같은 해 12월 보성학원(普成學院)을 인수했으며, 1912년 12월에는 동덕여학교를 인수했다. 그밖에 지방의 7, 8개교를 직접 관할했다. 한편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기와 활자들을 구입해 가지고 들어와 한영호(韓榮浩)·최석창(崔錫彰)·민건식(閔建植) 등과 협력하여 주식회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고 출판사업을 했다. 그러나 한영호와의 분규로 1910년초 새로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당국과 교섭하여 종교적 논설과 교도 상호간의 소식 등을 게재한다는 조건하에서 천도교 기관신문인 〈천도교월보〉를 발행했다. 1910년말에는 보성학원 소속 인쇄소 보성사를 창신사와 병합하여 보성사로 확대하고 〈천도교월보〉 및 학교 교과서 등을 인쇄·간행했다.
1918년 1차대전이 종결되고 강화회의의 한 원칙으로 제기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국내외 인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해외망명인사들과 일본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의 움직임은 국내인사들에게 자극을 주어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손병희는 오세창·권동진 등과 독립운동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린(崔麟)과 협의를 계속하게 했다. 이들은 협의를 통해 운동의 방침으로 독립운동을 대중화시킬 것과 일원화시킬 것, 비폭력으로 할 것 등 3개 원칙에 합의했다. 독립운동의 첫번째 연대대상으로서 박영효·한규설(韓圭卨)·윤치호(尹致昊) 등 구한국 관료와 친일파를 포섭하고자 하여 손병희가 직접 박영효·이완용(李完用)과 교섭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기독교·불교·천도교가 합작을 추진하여 3·1운동을 준비했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1910년대초부터 이종일이 천도교구국단을 조직하고 민중봉기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건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병희는 폭력적 민중시위의 경우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있을 것이며 또 서구 문명국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하면서 평화적인 만세시위 방침을 받아들이고 3·1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일본 경찰에 자진출두하여 검거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징역 3년형에 형집행정지를 언도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던 중에 1922년 5월 19일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05년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에 의해 창시되었다. 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도된 동학을 모태로 하고 있다. 현재 천도교에서는 제1세 교주인 최제우를 대신사(大神師), 제2세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신사(神師), 제3세 교주인 손병희를 성사(聖師)라고 각각 호칭하고 있다. 이것은 천도교가 동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가 동학의 근본정신을 정통적으로 계승했는가에 대해서는 천도교 등장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고 현재에도 천도교가 동학의 근본정신을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동학의 분파들이 많이 있다. 사실 천도교가 등장할 때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와 김연국(金演局)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파 사이에는 상당한 갈등이 있었고, 결국 손병희측에서 김연국·이용구 일파를 일진회(一進會) 사건을 계기로 하여 출교(出敎) 처분함으로써 동학은 천도교와 시천교(侍天敎)로 분립되었던 것이다. 그후 천도교는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집권적인 대도주(大道主) 체제로 유지되다가 후계자 문제 등으로 내적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결과 오지영을 중심으로 하여 급진적인 의회주의적 분권제를 주장했던 연합교회파(聯合敎會派)가 먼저 분립해 나가게 되었다. 교회에 남았던 파들은 결국 중앙집권적인 대도주 체제를 폐지하고 민주적인 중의제(衆議制)를 채택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제4세 교주로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를 인정할 것인가 등의 문제로 신파와 구파로 분열하게 되었다. 그후 양파는 합동과 재분열의 과정을 겪다가 1940년 최종적으로 합동하게 되었다. 8·15해방 후 분단으로 인해 당시 천도교의 90% 이상의 교인이 살고 있었던 북쪽의 교단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결과 현재의 천도교는 교세에 있어서 동학시절이나 일제강점기에 비해 매우 약세에 처해 있다. 1993년 현재 전국에 200여 교구가 있으며, 교역자 5,100여 명에 신도 100만여 명이 있다.
[교리]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을 계승하여 인내천(人乃天)으로 종지(宗旨)를 삼았다. 최제우시대에는 신앙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은 초월적·인격적 성격이 강한 '천주'로서 인간이 숭배대상으로 모셔야 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시형시대에는 이러한 하느님 개념이 '양천주'(養天主)나 '사인여천' 사상에서 잘 나타나듯이 상당히 내재적이고 비인격적인 성격으로 전환했다. 즉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하여 있으므로 인간이 잘 길러야 하는 존재로서 나타나거나 '천주'에서 '주'자(字)가 빠지게 되었다. 천도교로 개편되는 손병희시대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하느님 개념이 더 극단적으로 추상화되고 내재화되었다. 이때의 하느님은 상당히 비인격적 형태를 띤 '천'(天)으로서 성리학에서의 천 개념과 유사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후 교리가인 이돈화(李敦化)와 백세명(白世明) 단계에 이르러서는 하느님이 '한울님'으로 개칭되면서 범신론적인 형태를 취했다. 여기서의 한울님은 우주 자체를 지칭하며 변화·발전하는 생명체로 인식된다. 따라서 인간성 안에 내재한 한울님을 스스로 발견하고 깨치면 자기 자신이 한울님이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서구의 관념론 철학과 유기체적 진화론을 천도교 교리에 수용함으로써 천도교의 신관을 더욱 사변화시키고 관념화시켰다. 따라서 현재 천도교 교단에서는 최제우가 내세웠던 초월적인 하느님 사상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
[의례]
천도교도라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규정으로서 5관(五款)이 제정되어 있다. 이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교인의 자격이 박탈된다. 5관이란 주문(呪文)·청수(淸水)·시일(時日)·성미(誠米)·기도(祈禱)이다. 주문은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시천주'(侍天呪)를 비롯하여 그가 직접 수도에 도움이 되기 위해 만든 여러 가지가 있다. 주문을 외우는 목적은 도성입덕(道成立德)의 인격을 이루려는 데 있다고 한다. 청수는 민간신앙에서의 정한수(淨寒水)를 수용한 것으로서 수행할 때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시일은 매주 일요일에 공동으로 행하는 정기적인 의례이며, 성미는 교단의 운영을 위해 각 교인이 교회에 물질적으로 보답하는 행위이다. 초기에 교인 가족이 매 끼니마다 식구수에 따라 한 숟가락씩 쌀을 비축했다가 교회에 바치는 것에서 유래했다. 기도는 한울님에게 마음을 고하는 의식으로서 '심고'(心告)라고도 한다. 그밖에도 특별한 기념일로 최제우의 득도(得道)기념일인 천일(天日), 최시형의 승통(承統)기념일인 지일(地日), 손병희의 승통기념일인 인일(人日)이 있다. 그리고 특징적인 의례의 하나로 향아설위(向我設位)가 있다. 이것은 조상에게 제사지낼 때 제상을 벽을 향해 차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쪽을 향해 차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조령(祖靈)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고 나를 통해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단조직]
동학 당시에는 접주(接主)를 중심으로 하는 포접제(包接制)가 있었다. 현재는 전도인(傳道人)과 수도인(受道人)의 인맥관계로 조직되는 연원(淵源)조직과 지역단위로 조직된 교구(敎區)조직이 있다. 연원조직은 동학이 사교(邪敎)로 탄압받던 비밀시대에 포교상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속인주의(屬人主義) 원칙에 근거하여 조직된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로 합법화된 이후에는 중앙총부(中央總部)가 새로이 설립되고 그 산하에 교구와 전교실(傳敎室)이 수직적으로 편제되는 속지주의(屬地主義)가 채택되었다. 따라서 포교활동 및 교단의 비밀활동은 연원주(主)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교단의 운영이나 공개적인 활동은 교구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이원조직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천도교가 3·1운동에 대거 참여한 것은 교구단위가 아니라 연원조직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 중앙총부는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교령(敎領)을 최고직책으로 하여 그 산하에 현기사(玄機司)·종무원(宗務院)·종의원(宗議院) 등을 설치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교직자는 임기 3년의 선거제에 의해 선출된다. 이러한 민주적인 선거제는 교단의 운영활성화에 긍정적인 기능도 하지만 종교단체라고 하는 특성상 교단분열 등의 여러 가지 부정적 기능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연원제는 포교성적에 따라 연원주가 신훈(信訓)·교훈(敎訓)·도훈(道訓)·도정(道正) 등으로 승급(昇級)하는 원리가 있다. 이것은 포교를 활성화시키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지만 연원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기능도 있다. 현재 도훈 이상의 연원들로 구성된 연원회는 교령산하에 편입되어 있으므로 과거만큼 연원의 자율성이 많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교단분열을 막는 데는 일정한 기여를 하지만 교세확장에는 그만큼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활동]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상당한 탄압을 받았으며 그후에는 주로 문화활동과 계몽활동에 주력했다. 즉 〈개벽 開闢〉을 비롯한 여러 잡지를 발간하여 신문화운동을 전개했으며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등의 사회단체를 결성하여 농촌활동과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34년 오심당독립운동(吾心當獨立運動)사건, 1938년 무인멸왜기도(戊寅滅倭祈禱)사건 등의 항일운동에 동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