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게 그래드그라인드 철학의 기본원칙이었다. 무엇이든 공짜로 주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되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살이의 모든 면면이 계산대 위를 오가는 거래여야 했다."
◇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영국의 국민작가
한국인에게 찰스 디킨스는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기억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절대왕정시대의 궁정과 상류계층의 생활사를 아름다운 시어와 함께 접하게 된다면, 디킨스의 작품에서는 번성하기 시작한 근대 도시에서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며 돈과 젠틀맨 신분을 쥐려고 애쓰는 근대인의 모습을 풍성한 산문을 통해 접한다. 산업혁명의 시발지로 제일 먼저 근대로 입문한 영국사회는, 현대 우리사회가 시작되었을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디킨스의 입지전적인 생애도 뛰어난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근대인의 성공신화를 대표하는 듯하다. 책을 살 돈이 없어 주막에서 누군가 디킨스의 소설을 크게 낭독해 주는 것을 들으며 즐겼던 서민에서부터, 문학적 심미안과 비판의식을 갖춘 상류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영국 국민들은 디킨스의 소설을 사랑하였다.
당시의 신분구조 속에서 디킨스 집안을 굳이 분류해보자면 디킨스는 중하류계급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귀족의 집사였고 할머니는 그 집의 가정부였다. 아버지는 그 귀족의 추천으로 해군기지 사무소의 서기로 일했다. 그는 낙천적이고 유머 있는 사람이었지만, 경제관념이 희박했다. 항상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많아서 계속 빚을 졌다. 어머니도 야무지게 살림을 꾸려가는 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디킨스 가족은 더 가난한 지역으로 이사를 다녔다. 급기야는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가 다다르게 되는 채무자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다.
그때 디킨스는 12살이었다. 대략 6월 정도였으니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이 경험은 그에게 평생 기억될 심리적 외상을 입힌다. 장남인 디킨스를 빼고는 동생들과 어머니도 감옥에 들어가 살았다. 디킨스는 감옥 앞의 허름한 집에 세들어 살며 구두약 공장에서 일했다. 소설을 즐겨 읽고 꿈많던 소년 디킨스는 공부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가난한 아이들 속에 끼여 일해야 하는 상황에 깊이 상처를 입었다. '학식 있는 유명한 사람이 되겠다는 어린시절의 희망이 내 가슴속에서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고, 어떤 말로도 내 영혼 속에 숨겨놓은 그 고뇌를 표현할 수는 없었다'고 그는 후에 토로한다.
말년에 자신의 전기작가에게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로 할 정도로 디킨스에게 심리적 상처를 남겼던 이 경험은, 그러나 작가로서는 유익한 경험이었다. 풍족하고 순탄하기만 한 삶 속에서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작가로서 필수적인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공감적 이해가 양육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시 소위 산업혁명시대에는 이제 열 살도 채 안된 수많은 어린이들이 산업현장에로 내몰렸다. 가장역할을 하면서 학대받고 방치된 어린이들의 고통에 특히 민감했던 디킨스의 작품에는 불쌍한 어린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런던의 영세민층 속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디킨스는 소설사상 처음으로 도시의 빈민지역 주민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킨다. 심지어 평생 런던에 산 사람들도 여태껏 가보지 못했던, 경관조차도 일행 없이는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는 그런 지역을 다룬다. 어린시절의 경험은 도시빈민을 변두리적 인물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사회계급 전체가 예술적 재현의 위엄을 부여받는 예술상의 민주화작업을 이룬 토대가 된다.
◇ 가난한 소년가장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디킨스의 생애는 자수성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출감한 뒤에도 가정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아 디킨스는 15세까지만 학교교육을 받았다. 그후로는 다양한 직업전선에 뛰어든다. 그는 법률사무소에서 온갖 잔심부름을 했고 밤으로는 열심히 속기술을 익혔다. 녹음기가 없던 시절에 속기술은 법원직원이나 기자들에게 아주 경쟁력 있는 기술이었다. 그는 탁월한 문장력과 부단한 노력으로 고등법원에 출입하는 기자가 된다. 나아가 의회에 출입하는 가장 유능한 기자로 성장하여 1832년 당시 제1차 선거법개정에 대한 논쟁이 분분했던 의회를 실제 취재하기도 했다. 무지와 이기심에 가득찬 국회의원들에게 느낀 당시의 크나큰 환멸은 평생 지속된다. 그리고 이 시절 그는 작가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그의 첫 소설은 《피크위크 문서 Pickwick papers》다. 이것은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 것이 아니라, 신문에 매일매일 삽화와 함께 일정 분량 실렸다가 월간본으로 묶여 판매되었다. 이후 디킨스의 모든 소설은 이렇게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씌어지고 출판된다. 이 소설은 사람 좋은 중년신사인 피크위크가 영국의 풍물을 여행하며 겪는 모험과 인정 넘치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피크위크를 일약 영국민이 매우 사랑하는 인물로 만들었다. 이 소설이 출판되었을 때 당시의 비평잡지들은 디킨스의 놀라운 문학적 재능에 대해 모두 호평했다. 그들은 관찰의 넓은 폭과 정확성에 대해, 소설을 재미있게 만드는 위트와 유머에 대해, 인물들과 사건의 독창적인 창조에 대해, 마술적인 숙달된 언어조작능력에 대해 감탄했다. 또한 이 같은 문학적 재능만이 아니라 작품 속에 배어나는 디킨스의 온화하고 따뜻한 품성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사회의 불의와 그릇된 제도에 대한 정당한 분노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했다. 이 같은 천재적인 문학적 재능과, 인간미와 정의에 기초한 개혁의식은 이후 디킨스의 모든 작품에 꾸준히 이어지며, 그의 독보적인 명성과 인기의 비결이 된다.
디킨스만큼 왕성히 활동한 작가도 없다. 그는 25세에 첫 소설을 출간하고 58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거의 매년 대작을 써낸다. 또한 연극대본을 직접 써서 연출하고 아마추어 배우들에게 몇 달에 걸쳐 연기를 지도하는가 하면 스스로도 역할을 맡았다. 다른 배우들의 역할을 너무 잘 알고 그것에 몰입하여, 때로는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가정의 말들 Household Word》과 《일년내내 All the Year Round》라는 당시 인기 있던 두 주간지를 차례로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900명의 자유기고가의 글을 하룻밤에 읽고서, 그중 11개만을 취해 그 기사를 거의 자신이 다시 새롭게 썼을 정도로, 기사를 읽고 거절하고 승인하고 다시 쓰는 작업을 혼자 도맡다시피 했다. 또한 하루 몇십 통의 독자와 작가지망생들의 편지에 일일이 충실하게 답장했다. 디킨스가 이토록 지치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로서의 투철한 소명의식 때문이었다. '문학에 의해서, 문학을 위하여, 문학으로서, 문학이 내 안에 서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맹세는 사회와 대중에 대한 디킨스의 투철한 작가의식을 보여준다.
◇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엔터테이너
40대 중반에 디킨스는 명망과 재산을 모두 성취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즈음 매우 불안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가 애써 외면하려 한 불행한 결혼생활이 더이상 다독거려 수그러들 수 없게 불거져나왔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20세 즈음에 만나 결혼한 아내 캐서린은 본디 순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느긋한 아름다움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무한정으로 노력하고 활약하며 성공을 거듭하는 디킨스와 감정이 덤덤하고 매사에 서투른 캐서린은 점차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부가 되어갔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포스터에게 '인생에서 한 가지 크나큰 행복을 놓쳤다는 것, 그리고 친구와 동반자를 만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왜 이렇게 나를 짓누르는지' 알 수 없다며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고백한다.
이 즈음에 디킨스는 연극활동 중 19세 소녀인 엘렌 터넌을 만나게 된다. 이후 15년 동안 그녀는 디킨스의 베일에 싸인 애인이 된다. 그녀를 만난 다음 해에 그는 아내와 별거를 하게 되어, 국가적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다. 여지껏 디킨스의 가족은 그야말로 모범적인 중산계급 가정의 모델처럼 보여졌기 때문이다. 열 명의 자녀와 따뜻한 아내와 함께 '가스힐 Gad's Hill' 의 품격있는 저택에서 저녁시간을 보내거나, 해외로 가족여행을 떠나는 모습은 모든 보통 사람이 꿈꾸는 이상적인 가정으로 보여졌다. 평생 대중들의 환호와 인사와 관심에 에워싸여 살아온 만큼, 부인과의 별거에 대한 대중들의 지탄도 대단했다. 심적으로 자신도 큰 상처를 입은 디킨스는 '허황된 수많은 소문들을 나의 명성과 성공의 빛과 떼어놓을 수 없는 그림자로서 나는 항상 받아들였다'고 토로한다.
디킨스 생애의 빛은 바로 작가로서의 대중적 성공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어린 여배우와 연애했지만, 어떤 평자가 지적했듯이 '그의 인생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과의 연애'였다. 그는 평생 대중과 연애하듯이 그들에게 충심을 다했다. 그가 노년에 대중을 대상으로 작품낭독을 강행한 것도 사람들과의 감정적 결속을 향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10년 동안 작품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세계를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어린 환대와 장관이나 시장들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낭독여행은 개인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거의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는 그의 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엔터테이너일 뿐 아니라 특별한 숭배를 불러일으키는 인사였다. 그의 이야기는 진정 그 시대의 화제였다. 거의 정치나 뉴스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윈저성의 여왕은 '그 엄청난 손실'에 슬퍼했고, 시장의 과일장수 딸은 '디킨스가 죽었다고요. 그러면 크리스마스 할아버지도 죽었겠네요'라고 했으며, 노동자들이 모이는 주막에서는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애도했다. 그만큼 디킨스는 계급과 나라의 경계를 가로질러 사랑받은 작가였던 것이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토마스 그래드그라인드는 학교이사장이자 코크타운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다. 그는 '상상'보다는 '사실'에 충실한 교육을 통해, 자녀와 학생들을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인간으로 키우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그의 자식으로서 철두철미하게 교육받은 루이자와 톰의 인생이 원만하고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코크타운의 은행가·상인·공장주로서 그래드그라인드의 원칙을 실천하는 바운더비는 완벽한 교육의 수혜자인 루이자와 결혼하지만 루이자는 행복하지 않다. 학교의 모범생인 빗저 역시 무섭도록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으로 굳어진다. 도대체 그래드그라인드의 교육에 무엇이 잘못된 걸까......
글쓴이 장남수
울산대학교 영문과 교수.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Charles Dickens의 Hard Times와 Little Dorrit 연구: 산업사회비판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미문학연구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며, 최근 논문으로 〈'매리 바튼'과 산업소설〉, 〈모리스와 유토피아적 상상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