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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초원과 사막에서
민문자
『후허하오터(呼和浩特호화호특)』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유월 중순 일요일 오후 1시 반에 인천공항을 이륙해서 중국 항공기로 북경공항에 도착한 것은 두 시간 후였다 시차 관계로 중국시각은 2시 반이었다. 곧바로 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호화호특)행 비행기로 환승해야 했다. 중국인들의 경직된 사고로 잘못 안내를 해서 우왕좌왕 이리저리 일행 모두를 힘들게 하고 시간을 허비하였다. 에어컨도 시설부족인지 공항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바쁘게 움직여 겨우 탑승해서 예정 출발시각을 10분이나 지나게 했다. 아마도 우리 일행을 위해서 이륙 시간을 지연시킨 모양이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리의 자리만 비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무더운 열기로 비행기 안에서도 냉방이 미비한지 땀을 뻘뻘 흘리고들 있다. 마침내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높이 날아오르자 남색 하늘은 그렇게 색깔이 진하고 청정해 보일 수가 없다. 한 시간밖에 안 걸려서 목적지 후허하오터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교포가이드 안내를 받아 버스에 옮겨 타야 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져 우산을 꺼내 썼다. 하늘은 진한 회색이고 온 도시가 우울한 색상이다. 흙비인지 이상한 흙냄새가 났다. 후허하오터(呼和浩特호화호특)는 하늘색 도시(天色都市 청색의 도시)라는 뜻이고 후허하오터 공항을 백탑비행장이라고도 한단다.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는 할어버지가 경상도 분이고 길림성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온 지가 10년이 되는 이대곤이라고 소개를 하였다. 내몽골을 떠날 때까지 수고해 줄 버스기사는 한족(漢族)인 중국인이었다.
지금은 올해 60주년 내몽고자치주 기념도시 축제 기간이라고 한다. 또한 2008년도에 열릴 세계올림픽에 대비하여 국제공항 시설을 증설 중이었다.
13세기 중국을 정복하고 전 세계를 뒤흔들던 칭기즈칸의 주 무대였던 내몽고는 면적이 118만 제곱킬로미터로 이곳은 년 강우량이 40mm이므로 귀한 것은 물이고 흔한 것은 고기라고 했다. 식수도 모자라므로 양을 많이 못 키우게 수량을 제한하면서 식목도 하고 황사방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단다. 개통된 지 2년이 되었다는 8차선 도로는 거대한 시청사 앞을 달리는데 이 도로가 옆으로 인공호수를 만들어 물이 시내를 한 바퀴 돌아 흐르게 하고 있었다.
내몽골자치구의 인구는 2,400만 명이고 후허하오터의 인구는 230만 명이라고 했다. 그중 70%가 한족이며 몽골족은 37만 명에 불과하고 후허하오터에 우리 조선족 교포는 약 300명이 살고 있단다. 조선족은 50년대에 도시건설 지원을 위해서 학자, 건축 기사 등 전문분야 종사자들이 차출되어 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황사는 중국과 몽골의 국경지대인 이 내몽골자치구에 있는 고비사막과 황허강(黃河江) 상류의 황토지대, 타클라마칸 사막 등지에서 발원한다. 황토지대에서 무수히 많은 미세한 모래먼지가 바람에 의하여 하늘 높이 올라가 대기 중에 퍼져서 하늘을 덮었다가 서서히 내려오는 것이다. 황사는 봄철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최고 25도 최저 17도 일 때가 심하다. 강한 저기압을 타고 최고 3,000m 상공까지 상승했다가 강한 편서풍을 타고 평균 시속 30Km의 속도로 중국에서 우리나라 쪽으로 불어온다. 한국과 일본에 피해가 커 국제문제가 되고 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찾아간「초원성(草原城)」은 대형 요리점이었다. 겔 모양의 건물이 군데군데 있는데 우리 일행이 자리에 앉자 돌체와 양친누라는 악기를 가지고 온 악사 둘이서 연주를 하니까 여자 두 명이 흰 하다를 목에 걸어 손에 늘이고 술을 권하는데 무명지와 검지로 술을 찍어 하늘에 한 방울, 땅에 한 방울을 뿌리고 다음 조상을 상징하는 자기 이마에 한 방울 바르고 마시도록 시범을 보였다.
식탁에는 양고기 순대, 갈비, 수육과 쇠고기와 닭고기 등 육류가 푸짐했다. 서울에서부터 준비해온 김치와 깻잎, 고들빼기를 내놓고 입맛을 돋우어 전통음악을 감상하면서 몽골의 첫 만찬을 즐겼다. 식당에서 나온 후「귀족도(貴足都)」라고 간판이 붙어 있는 곳에 가서 발마사지를 받았다. 중국 여행을 할 때마다 20대의 미남미녀의 칭기즈칸 후예들에게 발 마사지 시중을 받았다. 이럴 때마다 고려역사가 떠올라 야릇한 감회에 젖는다. 고려왕조의 사무친 100년 한(恨)이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여덟 시가 되어 어둑어둑해지면서 우리가 들어간 호텔은 『빈열대주점(賓悅大酒店)』인데 시설이 훌륭했다.
여행 둘째 날, 아침은 뷔페로 차려진 식당에서 조당숙과 볶음밥과 오리고기, 야채로 가볍게 했다. 그리고 수박과 망고와 파인애플 등 열대 과일 몇 조각으로 기분을 상큼하게 했다. 우리 일행이 오늘의 관광을 위해서 버스에 오르고자 밖으로 나와 보니 안개비가 솔솔 내리고 있다. 가이드는 비가 귀한 이곳에 우리 일행이 비를 모시고 왔다고 좋아했다.
『왕소군릉(王昭君陵)』
첫 번째 목적지『왕소군릉(王昭君陵)』이다.
중국 역사에서 왕소군을 일컬어 4대 미인 중 하나라고 한다. 왕소군릉을 찾아 남쪽으로 9km를 달려갔다. 왕소군릉은 대청산 기슭 대흑하(大黑河) 북안(北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왕소군릉은 1973년 중국 인민정부에서 관광단지로 정비를 해서 그 규모가 크고 현재도 계속 시설을 보완하는 중이었다.
입구에서 좌우로 몽골전통건물형식인 겔 모양의 건물과「흉노문화박물관」「소군박물원(昭君 博物院)」한나라양식의「영빈관」등 시설물들이 있다. 잘 다듬은 화강석 넓은 보도 양편에는 흰 돌로 정교하게 조각한 말과 양의 형상이 늘어서 있었다. 보도 중앙에는 약 백 미터 간격으로 대리석 비각이 여러 개 세워져 있는데 아리따운 모습의 왕소군 흰 대리석 전신상과 기마상(騎馬像)과 청총(靑冢)이라는 비석이었다. 이 비석 너머로 멀리 꼭대기에 팔각정이 있는 푸른 작은 동산이 보이는데 바로 왕소군의 묘였다.
청총(靑冢)의 유래는 겨울이 되면 황량한 호지(胡地)의 풀은 다 말라 버리지만 유독 왕소군의 무덤은 풀이 마르지 않고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뒷날 사람들은 청총(靑冢)이라 부르고 그 영혼을 위로할 사당을 지어 주었다.
여러 개의 계단을 오르고 산기슭 같은 푸른 풀로 덮여 있는 묘를 옆으로 해서 오른 묘의 정상에는 팔각정의 비각이 있는데 비석 전면에는 「왕소군지묘(王昭君之墓)」 뒷면에는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는 모습의 왕소군을 음각한 전신상이 눈길을 끌었다. 이 왕소군의 묘는 높이가 33m나 되는 작은 동산같이 보이는데 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주변 일대가 잘 내려다보이는데 묘 아래쪽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되돌아 나오면서「소군박물원(昭君博物院)」을 들어가 보았다.
「소군이전한흉화친표(昭君以前漢匈和親表」가 눈길을 끌었다. 이 표를 보면 왕소군이전에도 한나라의 종실공주가 여러 차례 흉노의 왕에게 시집을 간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왕소군은 전한의 원제(元帝)때 궁녀로 뽑혀 입궁하였다. 많은 궁녀 가운데 단 하루라도 황제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많은 궁녀를 화공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올리게 하여 마음에 드는 미인을 선택하여 곁에 두었다. 이런 관계로 궁녀들이 막대한 재물을 화공들에게 바쳐 자신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황제의 총애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뛰어난 미인인 왕소군은 자신의 용모와 비파실력을 믿었는지라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화공은 아리따운 용모를 추하게 그리고 점 하나까지 찍어서 황제에게 바쳤다. 이 때문에 왕소군은 황제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었다.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세력이 강성해지자 한나라의 원제에게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원제는 공주를 차마 보낼 수가 없어서 궁녀 중에서 골라 보내기로 했었다. 왕소군은 이런 소식을 접하고 한과 흉노와의 화친정책을 위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자신이 시집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원제는 변방무마책으로 궁녀 중에서 제일 못 생긴 궁녀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흉노의 사신을 불러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초상화를 보고 미리 정해 놓았던 왕소군을 불러 호한왕에게 시집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초상화의 주인공은 못생긴 줄만 알았는데 궁중의 절세가인이었다. 왕소군의 미색에 반해버린 원제는 시집보내기로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사신이 보는 자리에서 시집을 가라고 명하였으므로 번복할 수가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궁녀들의 초상화를 대조해 보았는데 왕소군의 초상화는 실제와 천양지차로 그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화공 모연수가 황제를 기만한 것을 알고 분노가 치밀어 모연수와 초상화를 그리던 화공들을 모두 참수하고 가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서기 33년 17세의 왕소군은 한나라와 흉노와의 화평을 위해서 흉노 호한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왕소군이 고국산천을 떠나 사신을 따라 멀고 먼 흉노의 나라로 시집을 갈 때 슬프고 원망하는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로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黎菜芙芙 (여채부부) 명아주 푸르러 무성하기도 한데
芳葉元黃 (방엽원황) 꽃다운 잎은 원래 누런색이었다네
有鳥此處 (유조차처) 새들은 이곳에 깃들었다가
集于苞桑 (집우포상) 뽕밭으로 모여든다지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아 있는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어 그만 땅에 떨어졌다. 이리하여 왕소군을 일러 낙안미인(落雁美人)이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소군출새(昭君出塞)」로 호한 왕은 크게 기뻐하고 약 오십 년간 화평을 유지했다고 한다.
왕소군이 아들 하나를 낳고서 결혼한 지 2년 만에 호한왕이 사망하였다. 그의 큰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흉노의 관습법인 수계혼(受繼婚)으로 새 왕이 된 장남과 다시 결혼하였다. 그와의 사이에 딸 둘을 낳았었다고 한다.
왕소군은 그곳에서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 농경문화를 전파하고 중국의 문물을 펼치며 왕성한 나라를 일구는데 큰 몫을 하였다. 왕소군은 오늘날까지도 흉노족과 한족 모두에게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는 등 무수한 문인이 시문(詩文)을 지어 왕소군을 노래하게 되었다.
『우란부(烏蘭夫오란부)공원』
우란부(烏蘭夫 1906~1988.12.8) 는 중공 모택동보다 2년 앞당겨 내몽고자치주 인민해방을 시켰다고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지금도 추앙받고 있었다. 1947년 5월 1일 공산당 창설 선언을 하고 내몽고자치주 주석이 되었다. 1988년 12월 8일 북경에서 82세로 서거, 북경 팔보산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의 근무처였던 곳에 그의 동상과 기념관이 있는 공원은 숲이 많아 시내 중심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좋다고 생각되었다. 일반에게 개방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몽골인의 여자는 우유차를 잘 끓일 줄 알아야 시집살이를 잘할 수 있다고 한다. 옛날 양마차를 타고 다니는 어느 몽골인이 수많은 첩 중 어느 한 여인 집에만 자주가 그 여인을 다른 여인보다 총애하였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그 집 대문 앞에는 매일 여인이 소금을 뿌려 놓더란다. 양이 소금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한 일로 그 여인의 뜻대로 양이 매일 주인을 태우고 그 집만 찾아갔던 것이다.
안내자 말로는 몽고반점이 있는 몽골족과 조선족은 같은 민족이라고 몽골인들이 조선족들을 좋아한단다.
『시라무런 (希拉穆仁희랍목인) 초원』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는데 버스는 시라무런 초원을 향해서 한 시간 반이나 달렸다.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는 싫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대단히 기뻐하는 것이다. 높은 산맥을 넘고 넘어가는 길은 척박한 땅에 아마도 5년 이내에 여러 차례 식목을 한 듯싶은 흔적이 보인다. 아직 어린나무 들은 아랫부분에 있고 심은 지 3~4년 돼 보이는 자작나무 수림대가 형성되어 있는 곳도 지나쳤다. 계곡에는 그래도 졸졸졸 흐르는 물이 보이고 띄엄띄엄 양떼와 건물들도 보였다.
어느 소도시의 주유소 화장실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영락없는 우리의 80년대 이전의 재래식화장실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고산지방 무천현이라는 곳을 지나면서 감자와 지방밀, 유면이 주 생산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산 산맥과 대청산 등으로 고도가 높은 몽골고원은 1,000~2,000m가 되는데 엄산산맥 북쪽은 북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헝가리 등에 정착한 훈족이 되었다. 또한 엄산산맥 남쪽은 남흉노로 내몽고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다.
시라무런 초원은 넓은 벌판에 약간의 풀이 듬성듬성 보일 뿐 비가 계속 부슬부슬 내리고 있기 때문인지 멀리 지평선이 회색 하늘과 맞닿은 것처럼 보였다. 이곳도 내년 올림픽과 외국 관광객을 위한 대규모 관광단지를 건설하는 중이었다. 한편에서는 한창 마무리 단계에 있기도 하고 부대시설공사를 시작하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서 새로 건설한 최신식 파오 전통 가옥군(家屋群) 50여 채 중 610호에서 우리 부부는 투숙하게 되었다. 원형으로 된 파오의 공간 활용을 잘한다고 한 모양이지만 화장실 변기가 놓인 공간은 너무 협소하여 불편했다. 그러나 대리석 바닥에 고급침대와 장식품 조명등은 일반 호텔이상으로 신경을 써서 갖춰 놓았다. 2005년 몽골의 국립공원 테를지의 전통가옥 시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훌륭했다. 우선 식당으로 가서 양고기와 맹 간 김국과 가지 볶음, 양파볶음 배추볶음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옷이 젖을 정도의 비가 계속 내리므로 말을 탈 기회를 나중으로 미루고 몽골 전통가옥방문을 하기로 했다. 풀이 성근 초원 가운데 작은 마을을 이룬 건물은 파오도 아니고 간이상가처럼 느껴지는 일반 건물로 안내되었다. 주변에는 말이 20여 마리가 비를 맞고 서 있고 저 멀리 수백 마리의 양떼를 모는 목동이 보이는데 비를 맞으며 부족한 풀을 찾아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우리가 상상하는 목가적인 낭만은 꿈속에서나 찾을 일이지 주변에는 소와 말과 양들의 똥들이 많이 보이는데 풀이 적은 초원은 현실이 절박해 보인다.
2005년 몽골에서는 자동차로 한 시간을 달려도 탐나도록 푸른 초원이 지평선과 맞닿아 있었는데 초원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이 모습은 바로 사막화 현상이란 말인가.
옛날처럼 풀을 찾아 마음껏 이동할 수도 없는 제한적인 삶, 이곳 모습은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어보니 유목민들을 이제는 정착해서 목축을 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일정한 땅과 가축을 지원하기도 하고 제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북경 인근까지 사막화되어가는 중이라고 우리 뉴스채널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던 바를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한창 푸른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야 할 초원이 보이지 않는다.
전통가옥은 보이지도 않고 옛날 우리의 파발마가 쉬어감 직한 주막거리 같은 느낌이 드는 건물로 들어갔다. 가죽신 장갑 가다 조끼 등 몽골전통 의류가 진열된 매대(賣臺)가 있는 대리석 바닥에 탁자 댓 개가 놓인 가게이다. 순박하게 보이는 중년여인이 탁자 위에 우유를 끓이면서 생긴 딱딱한 우유사탕과 조 튀밥과 땅콩을 우유 차와 함께 내놓았다.
밖으로 나와 거닐다가 돌무더기로 된 곳으로 가보니 펌프 시설을 해놓은 샘물이었고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두 칸짜리 지붕 없는 석축을 쌓아 만든 화장실이 있다. 흙구덩이만 하나씩 파 놓은 상태였다. 외몽골 울란바토르 외곽지역 초원에서는 아예 화장실이 없고 사람이나 동물들의 분뇨가 태양이 모두 처리한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관광객을 위한 배려인가 보다.
『오보산 (오우뽀우산)』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오보산으로 올라갔다. 야트막한 작은 동산에 돌무더기가 둥그렇게 삼 층으로 쌓아져 있다. 그 중심축의 막대와 양쪽 장대에 줄을 매어 하늘색 천과 흰색 천이 어지럽게 꿰어져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우리의 성황당 돌무더기를 연상하게 하였다. 티베트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이 천을 ‘룽따’라고 했는데 이곳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자기의 소원을 빌며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면 그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왼쪽으로 돌면서 우리의 소원을 각자 기원하였다.
이곳보다 낮은 평평한 초원지대가 넓게 펼쳐져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는 곳에 한 무리의 양떼가 보였다. 사방팔방 휘둘러보니 한 청년이 조랑말을 타고 오보산을 향하여 올라오는 모습 뒤로 두세 군데 몽골 파오 촌락과 보통 일반건축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몽골인과 가무의 밤』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후 예정이던 말 타기를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데 이곳을 떠나기 전에 기회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대형 겔의 연회장에서 저녁 만찬을 즐기며 몽골전통 가무와 쇼를 관람하기로 했다. 마침 우리 일행 중에는 올해 고희가 된 분이 세 분 있었다. 윤 간사와 별칭으로 불리는 장귀비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고희재롱잔치를 열기로 하고 일회용 접시와 컵으로 빨간 비닐 끈으로 요술 모자를 만들었다. 나는 축시를 급히 준비했다. 서울에서 부터 준비해 온 <내몽고 초원에서 고희를 축하합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걸어 분위기를 돋우었다.
몽골인의 전통적인 쇼바로우 요리에 양 바비큐를 통째로 진설해 놓고 호화로운 몽골 전통 가무를 즐겼다. 개구쟁이 친구들을 동반한 혜은(慧隱)님과 그의 벗들은 귀여운 요술 모자를 쓰고 몽골전통 환영의식으로 몽골족 음악과 노래 소리에 맞추어 축배가(祝杯歌)를 불렀다. 이곳의 전통가무와 쇼가 공연되고 우리 일행은 우리 노래와 시를 읊었다. 이때 나는 급히 준비한 졸 시로 혜은님과 그의 친구 분들을 축하하였다.
내몽골 초원에서
민문자
몽골 초원에
아! 우리의 찬가
아리랑 노래
울려 퍼집니다
원(元)나라 지배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사무친 100년 한(恨)
오늘 그 한(恨)을 풀어봅니다
칭기즈칸 후예들에게
견마(牽馬) 잡히고 발마사지
시중 받았습니다
내몽고 시라무런 초원에서
양 바비큐 통째로 진설한 잔칫상에
우리 노래 우리 시 읊으며
몽골인의 민속춤도 즐겨봅니다
꿈 많던 개구쟁이 친구들 동반한
혜은(慧隱) 님과 우리 일행은
캠프파이어 불꽃 아쉬움 접고
고희재롱잔치 열어 기쁨을 나눕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몽골초원의 아름다운 별빛 아래 캠프파이어 불꽃을 높이 올리는 낭만과 젊음을 누려보려 했으나 하늘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대신 실내에서 더욱 화려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 일행이 합창한 노래『아리랑』이 시라무런 초원에 널리 널리 울려 퍼졌다. 마지막은 쇼 단원들과 함께 몽골전통 민속춤을 함께 추었다. 분위기가 고조되어 우리 일행 모두 정말로 즐거운 고희재롱잔치를 흠뻑 즐겼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헤어져 최신식 시설로 지어진 각자 자기 파오 가옥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였다. 일반 특급호텔 못지않은 쾌적한 분위기와 시설을 갖추었으나 아직 온수가 나오지 않아 아침저녁 기온 차가 심한 이곳의 한 가지 단점이었다.
셋째 날, 기온이 쭉 내려가서 서늘한 기온 때문인지 한 두 시간마다 잠이 깼다. 날이 왜 그리 더디 새는지 무척 긴 밤이었다. 다섯 시에 일어나 미리 준비를 했다. 그렇게 계속 내리던 비는 그쳤으나 아직도 하늘은 회색 하늘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가보니 말들이 집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로 말을 탔는데 올라타자마자 “아이 차가워!” 소리가 튀어나왔다. 말안장이 비에 흠뻑 젖었던 것이다. 비닐로 안장을 손보기도 하고 마른 안장으로 바꾼 말들도 있는데 내 말은 게으른 목동을 만난 모양이었다. 엉덩이가 다 젖어 찝찝한 기분으로 안내자에게 바꿔 달라고 부탁해서 다른 말로 바꾸어 탔다.
키가 조랑말보다는 조금 크고 대형 경주말보다는 적은 말이었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 열댓 사람이 한 줄로 대열을 이루어 말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우루무치 남산목장에서 큰 말을 타보고 외몽고에서 조랑말을 타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자신감을 느꼈다. 두 번 다 말잡이들의 시중을 받으며 말을 타고 달렸는데 이번에는 올라타고 내릴 때만 도움을 받았다.
대장 목동이 올라탄 말을 뒤따라 우리 일행이 탄 말들이 일렬로 섰다. 말들의 서열이 있는 것인지 질서를 아는 것인지, 신기하게도 대오가 흩으러 지지 않게 천천히 가는 것이 답답해서 기억나는 대로 소리쳤다. 삼 년 전 몽골 울란바토르 외곽지역에서 말 타기를 할 때 배운 “오당 오당!” 소리를 여러 번 질러 보았다. 그러나 묵묵히 천천히 앞말을 뒤따를 뿐이다.
큰길로 나가다 샛길로 접어들어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건너고 미루나무 숲을 지나고
넓은 초원 한가운데를 달렸다. 비가 그친 초원의 아침은 회색빛 세상이지만 더위를 느끼지 않게 미풍이 산들거렸다. 냇가에는 이름 모를 예쁜 흰 꽃 노란 꽃이 피어나 아름다운데 시냇물에는 비닐조각이나 휴지가 많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촌락이 아마도 가까운 곳에 많이 있는 모양이다. 돌아올 때는 빗방울이 떨어질 것도 같고 막 달려보고 싶었다. 잔등을 치면서 큰소리를 쳤다.
“퀵! 퀵!”
“ 아! 이 말들이 영어는 알아듣네.”
나의 말과 앞의 말이 대오를 이탈해서 막 달렸다. 나는 긴장감을 느끼며 한참을 달렸는데 앞말의 윤간사가 말 타기 경험이 처음인지라 무섭다고 소리를 질렀다. “오당 오당!”
‘아뿔싸!’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당 오당’이란 단어는 ‘천천히’ 라는 소리였던 것이다. 영리한 말, 충직한 말들이 천천히 안전하게 우리를 모셨다. 빨리 달리고 싶으면 “추!”하고 등을 두드렸어야 했다.
『대소사(大召寺)』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2시간 걸려서 다시 후허하오터로 돌아왔다.
후허하오터시내의 라마교 풍의 최대사원 대소사(大召寺) 입구 측면은 여러 개의 백탑(白塔)이 줄지어 있다. 광장에는 건물높이의 갑절이나 높이 알록달록 헝겊 옷을 입은 법주(法柱)가 양쪽으로 세워져 있다. 티베트 라싸 조캉사원 광장에서 본 법주는 여러 가지 색깔의 긴 천으로 휘감긴 법주였는데 이곳에는 마치 색색의 예쁜 초롱꽃을 거꾸로 이은 것처럼 여섯 가지 색으로 만든 조그만 치마를 기둥에 이어 입힌 모양이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강희제 만물(康熙帝 漫物』이라는 그림이었다. 강희제가 어느 날 미복 차림으로 잠행하다가 홀로 당시 이름난 요릿집 “월명루”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다 먹고 돈을 내야 하는데 갖고 나온 돈이 없었다. 그래서 주인장에게 음식값을 보내주겠노라고 하였지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면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파렴치한 취급을 하였다. 이때 이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어린 총각 하나가 나서서 그 손님을 보내드리라고 주인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이 손님의 음식값은 제가 일을 해서 갚겠으니 돌려 보내주십시오.”
그 요리 값은 그 총각이 오랫동안 일을 해야 갚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강희제는 자칫 큰 봉변을 당할 뻔했는데 뜻밖의 구세주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후 강희제는 궁으로 돌아와서 음식값 해결은 물론이고 그 은인을 궁궐로 불러 좋은 옷과 벼슬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식하였으므로 궁궐 생활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서 강희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편히 살게 해달라고 청원을 하여 허락을 받았다. 강희제는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많은 땅과 재화를 주어 그의 은인이 고향인 내몽골로 돌아와 편히 살게 했다고 한다.
대소사 문밖은 바로 골동품 거리로 이어져 우리 일행은 삼십 분 동안 자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오래된 단층 건물로 이어진 거리 대부분이 골동품가게이지만 별로 살만한 물건이 없다. 우리 몇몇 사람은 물소 뿔 빗을 싼값에 선물용으로 몇 개씩 샀는데, 나는 지압용으로 천연적인 것 그대로인 물소 뿔 하나와 납작하게 가공된 것 하나를 샀다.
『오탑사 (五塔寺)』의 금강좌사리보탑(金剛座舍利寶塔)
금강좌사리보탑(金剛座舍利寶塔)이라는 이름의 오탑은 1727년 지어진 건축물로 다섯 개의 탑이다. 여러 가지 문양의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코끼리 상은 존귀함, 사자는 용맹, 물고기는 풍요를 나타낸다. 본래 이름은 자 등 사(慈燈寺)인데 문화혁명 때 소실 파괴되어 건물이 모두 사라지고 이 오 탑(五塔)만 남아 있었다. 현재는 일부가 복원되어 자 등사(慈燈寺)란 현판이 다시 걸리고 복원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높이 16.5m인 이 탑의 특징은 탑에 새겨진 부조불상이 1,560 존위나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불 탑(千佛塔)이라고도 하는데 그 부조불상의 모습이 그 어느 것도 같은 것이 없다. 가까이 가 보면 새겨진 보살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답고 생동감 넘친다.
오탑의 북쪽으로 돌아보면 벽에는「몽문천문도(蒙文天文圖)」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몽골어로 새겨진 석각이 있다. 이것은 북극과, 남극, 별 좌, 행성 등 우주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역사적 가치가 대단히 높으리라 추측된다. 귀한 몽골문화유물로 생각되어 사진을 찍었는데 유리에 얼비친 우리 모습까지 나타났다.
시내거리는 자전거 물결이다. 미루나무 가로수 그늘로 달리는 아버지 자전거에 뒤로 타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소녀,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담배를 피우는 중학생도 보이는 등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 막남제일부(漠南第一府) 장군서(將軍署)』
막남제일부(漠南第一府) 란 사막 남쪽에 있는 제1사령부란 뜻인가 보다. 청나라 때 청나라 장군이 파견되어 근무하던 곳으로 지금은 내몽고 자치구 장군박물원(將軍博物院)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 당시의 장군이 사용하던 큰 책상과 사무용품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우리는 푸른 말 그림이 배경인 장군 석(將軍席)에 앉아서 잠시 잠깐 장군이 되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 커다란 그림이 하나 걸려 있는데 그것은 서태후와 여러 명의 후궁 모습이다. 서태후는 평상시 질투심이 강하여 후궁을 들일 때 절대로 자신보다 아름다운 미인은 뽑지 않고 밉상들만 후궁으로 입궁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이 서태후가 가장 아름답고 다른 여인들은 모두 못생긴 여인들이다.
『미대소(美岱召)』
『미대소(美岱召)』는 후허하오터로 가는 길목의 라마교사원으로 앞은 평원, 뒤는 험준한 산을 끼고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사원이 있는 위치는 내몽고에 처음으로 라마교가 전파된 지역으로 1516년 칭기즈칸의 17대 후손인 알라탄 칸(시하륵단한是何勒担汗)이 북경 고궁을 모방하여 만든 성이다. 이곳은 알라탄 칸의 지원하에 내몽고지역에 라마교가 전파되는데 그 중심지 역할을 했다
미대소는 높이 6m의 성벽이 둘러싼 성곽으로 독특한 양식의 사원일 뿐만이 아니라 건축양식도 티베트, 중국, 몽골의 양식이 혼합된 모습이다. 당시는 경제문화 중심이었고 영각사(靈覺寺)라고 불렸으나 뒤에 수령사(壽靈寺)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사원 앞에는 440년이나 된 두 그루의 큰 소나무가 있는데 왼쪽은 암 소나무 오른쪽은 수 소나무인데 그 푸른 기상이 대단하다.
알라탄 칸의 세 번째 부인 삼량자는 사십세 연하인 열한 살에 시집와서 몽골초원 대건립에 큰 공을 세워 존경을 받다가 1550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삼량사라는 사원을 지어 공적을 기렸는데 후에 후허하오터 도시로 옮겨 대소사라 하였다.
유리전(琉璃殿)은 1566년 본전을 처음 건축한 알라탄 칸 왕국(Alatan Kingdom )의 의사청(議事廳)이었고 金中金 夫人 기념당에는 삼량자의 머리카락, 골, 빗 등이 유리 상자에 전시되어 있다.
『황하(黃河)』
얼도스를 향해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합소해(哈素海)에서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황하의 긴 다리가 보이는 곳에서 내려 모두 잠시 주변 경관을 감상하였다. 뻑뻑하고 누런 황토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가에 주인 없이 묶여 있는 작은 배들과 어지럽게 널려 있는 그물만 보일 뿐이다.
황하는 중국에서 장강 다음 두 번째로 큰 강으로 전체 길이 5,464㎞나 된다. 서부 발원지역은 평균 해발 4,000m 이상의 고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년설과 빙하로 뒤덮여 있다. 황하는 청해성 바얀하르산(파안객나산巴顔喀喇山) 북쪽 기슭의 카르취(카일곡卡日曲)에서 발원하여 청해 사천 감숙 영하 내몽고 산서 섬서 하남 산동 등의 9개 성과 자치구를 거쳐 마지막에 발해만으로 유입된다. 황하유역은 땅이 광활하고 지형의 차이가 극심하다. 서에서 동으로 청장고원 내몽고고원 황토고원 황준해평원(黃準海平原)이 가로놓여 있다.
황하유역은 중국 지형의 현저한 특징인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영향으로 중부지역인 내몽고지역은 해발 1,000m~2,000m 사이에 있으며 황토지형이다.
황하유역의 토지는 예로부터 비옥하고 목장이 많으며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으나 역사적으로 중국은 황하하류에 홍수가 자주 발생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황하 유역의 수리 공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여 피해가 많이 줄어들었다.
중국의 오랜 역사와 함께한 중국문명의 젖줄이 도도히 흐르는 광경을 렌즈에 담고 버스에 올라 황하 대교를 건너서 달렸다.
『얼도스』
여섯 시 30분에 얼도스에 도착하였다. 후허하오터에서 250Km의 거리에 있는 얼도스는 삼대 노천 탄광이 있는 광산도시이다. 제2의 대만이라고 할 정도로 경제가 발전한 돈이 많은 도시이나 얼도스는 인구가 채 일백만 명이 안 되고 인구는 80%가 한족이라고 한다. 도심에 들어서 큰 교차로 앞 건물에「110접경중심(110接警中心)」이란 간판을 보았는데 교통지휘소라는 것이다.
「금수원빈관(金水源賓錧)」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전자식 불판에 익혀 먹는 샤브샤브 요리이다. 라싸에서 먹어 본 샤브샤브요리처럼 매운 양념과 맵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가운데 칸막이가 된 냄비에 양고기와 쇠고기와 버섯, 고구마 새알심과 각종 야채류를 익혀 먹다가 입맛대로 국수류를 넣고 들깨 소스를 찍어 먹는 요리였다. 티베트 라싸의 「옥림천천향」의 꽂이 샤브샤브요리를 먹던 날이 그립게 회상되었다.
샤브샤브의 요리는 칭기즈칸의 군대들이 양고기를 구워 먹을 때 전투할 때는 투구로, 식사 때는 가마로 사용, 음식을 끓여서 요리해 먹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몽골인은 절대로 생으로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홀리데이 인 호텔』
어둠이 내릴 때 버스를 타고 있던 우리는 하루 묶을 호텔을 향해서 달렸다. 아름다운 숲이 나타나고『홀리데이 인 호텔』이 보인다. 나의 시신경이 놀랐다.
‘아, 파라다이스!’
궁전이란 느낌이 올 만큼 아름답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길게 늘어선 건물 전면 위쪽에는「내몽고자치주 60주년 기념 축제」라는 현수막과 색색의 깃발들이 나부꼈다.
드넓은 호텔부지에 나무들로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과 군데군데 현대적 예술 감각으로 세워진 조명기둥이 전체분위기를 환상적으로 느끼게 했다. 4,204호 객실을 찾아가는 데도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비스듬히 완만한 경사로 이어진 긴 복도로 연결된 통로를 이용하였다. 객실 또한 경험했던 많은 호텔 중 최고급 시설로 안락했다. 호텔규모도 상당히 크고 고급스러워 톱클래스의 세계적인 호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마포대로에 있는『홀리데이 인 호텔』이나 오늘 후허하호터 어느 대로변에서 보았던『홀리데이 인 호텔』의 규모와 분위기와는 같은 체인 호텔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 딴판으로 고급스럽다.
『칭기즈칸 릉(成吉思汗陵)』
넷째 날, 쾌적한 하룻밤을 보내고 7시30분에 한 시간 거리의 칭기즈칸 릉을 향하여 버스는 출발했다. 거리에 경찰차의 검문이 많은 것은 『홀리데이 인 호텔』에 중국중앙선전부 부장이 묵고 있기 때문이란다.
원래의 몽골인은 ‘하늘이 제일 크고 육지의 모든 것에는 영혼이 있다.’는 샤만교를 믿었다. 칭기즈칸(1162~1221)이 서역정벌(西域征伐)을 할 때 얼도스를 지나가는데 초원이 매우 좋아 부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여기 묻히면 좋겠다.”
그런데 칭기즈칸이 감숙성에서 병사하자 시체를 싣고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얼도스에 도착하자 마차가 수렁에 빠져 꺼내려 했지만 영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밀장(密葬)을 하고 한 부족이 유물을 지키게 했다. 몽골족의 여덟 개의 흰 천막에 유물들을 둔 팔백 실(八白室)을 그의 상징적인 무덤으로 삼고 대대로 그것을 지키면서 성대하게 제사 지냈다. 그 후 해마다 5월 13일 칭기즈칸능제에 각처에서 몽골족들이 와서 곡물 등 재화를 바쳐 이것으로 영릉(靈陵)을 지키는 경비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사망할 때 이르기를 자기의 릉을 1000년을 지키고 릉을 지키는 자는 군대, 세금을 면제해주라고 하였다. 이때 지정된 30가정의 장손만 대대로 지키고 여성은 대를 못 잇게 했다.
당시 칭기즈칸릉을 지키던 500명의 후손이 780년간 39대를 공물을 받아서 지켜왔다. 1985년부터는 5,000명이 공무원급 대우를 받으며 국가로부터 봉급을 지급받으며 지킨다고 한다. 일설에는 칭기즈칸이 죽은 후에 ‘죽음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에 부치라.’는 유언에 따라 비밀리에 고향으로 운구하여 밀장(密葬)을 하였다고 한다. 아직 칭기즈칸의 능은 소문만 무성할 뿐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칭기즈칸릉 입구에 큰 주차장에서 내려 오늘도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고 긴 거리의 보도를 걸었다. 우선 화장실 시설이 미비했다. 대규모 칭기즈칸릉 테마파크 조성에는 어울리지 않게 재래식 화장실 한군데와 이동식 화장실 다섯 개로 관광객을 맞는다는 것은 불합리했다. 차차 현대식 화장실을 준비하겠지만 지금 현재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우선 흰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넓은 보도 가운데 6.6m의 칭기즈칸 기마상(騎馬像) 모습이 관광객을 맞아들인다. 겔 모양의 거대한 칭기즈칸의 유물 전시관은 세로로 몽골어와 한문글자로 금박으로 쓴 『성길사한릉(成吉思汗陵)』의 현판이 선명하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드문드문 몽골 전통의상 차림의 젊은이가 지키고 있다. 실내의 사진을 찍는 것을 엄중히 금하고 있기 때문에 문밖에서 곧바로 보이는 칭기즈칸 흰 대리석 좌상만을 겨우 찍었다.
『성길사한릉(成吉思汗陵)』이란 칭기즈칸릉 표시의 현판이 뚜렷하지만 실제로는 칭기즈칸의 의관총(衣冠塚)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칭기즈칸의 말안장과 활과 화살, 초상화, 칭기즈칸의 생전의 비밀 기록이 그림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곳은 1954년에 처음 건물이 들어섰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증 개축을 한 것인지 새로 건축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이 느껴졌다.
칭기즈칸은 1,162년 몽골의 한 부족의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테무친이라 했다. 테무친이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이웃 마을에 데리고 가 정혼시키고 돌아올 때 다른 부족에게 아버지 예수게이가 독살되었다. 테무친이 열여섯 살에 결혼하고 열일곱 살에 값진 모피를 가지고 아버지 친구를 찾아가 병력을 빌려 달라하여 아버지 원수를 갚았다. 스물두 살에 한 마을의 수령이 되어 칸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칭기즈칸과 보르테 부인, 후란 부인, 예수 부인, 수간 부인, 칭기즈칸의 아우 베리구타이와 하사르, 칭기즈칸의 4남 톨로이, 가족사의 설명이 화폭과 함께 설명되고 있다. 벽면에 유라시아대륙지도를 펼쳐 놓고 칭기즈칸과 그의 아들들의 서역정벌경로와 대원제국(大元帝國) 건설 등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토 확장의 업적설명이 붙어 있었다.
칭기즈칸 금 동상 앞의 큰 촛불은 700년간 꺼뜨리지 않고 지켜왔다는데 좌우에는 지금도 칭기즈칸릉(陵)지기의 후예가 매서운 눈초리로 지키고 있다.
칭기즈칸 릉의 대단지에 아직 화단이 없어 꽃 한 송이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 나오다가 보니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길 우측 수풀이 무성한 둔덕 가운에 이제껏 보지 못한 여리고 아리아리한 노란 꽃가지를 발견하고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소리쳤다.
“ 여기 칭기즈칸 꽃이 있어요.”
이십여 명의 우리 일행이 모두 우르르 달려와 호기심으로 바라본다. 내가 명명한 그 여린 칭기즈칸 꽃은 해마다 이맘때 우리 일행들의 가슴속에 피어나 얼도스의 테마파크 칭기즈칸릉을 회상시킬 것이다.
『구부치사막(고포기(庫布其沙漠)』
얼도스에서 한 시간 반을 달려 구부치 사막 (고포기(庫布其沙漠) 지역에 닿았다. 황량한 모래 언덕과 접한 오아시스지역에 대단히 크고 화려한 『탑랍음호특(塔拉音浩特) 초원궁(草原宮)』이 있어 신기루 같이만 느껴졌다.
이 지역 관광개발목적으로 이루어진 대형 몽골 전통 건축물 안에 다시 여러 개의 파오 건축물이 들어 앉아있고 개개 실(室)마다 연회실이 마련된 특이한 건축물이다. 우리 일행은 나무와 무성한 풀과 물이 휘돌아 흐르는 연못을 갖춘 아름다운 정원에 감탄하고 초원 궁(草原 宮)안의 대연회장에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각 파오 마다도 사람들이 차있는지 시끌벅적하였다.
그리고 몽골 전통복장을 한 남녀 4인조 가무단이 우리에게 와서 흰 하다를 목에 걸어주고 남자들은 전통악기로 음률을 타고 여성들은 술을 한 잔 한 잔 권하며 환영했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하면서 몽골인의 전통혼례식을 관람하였다. 전통혼례식에서 남성의 모습은 활쏘기, 말달리기 춤과 씨름으로 이기는 자가 여자에게 장가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웅혼한 기상을 보여주었다.
전통악기의 연주에 따라 활과 불, 비단, 음식을 상징하는 소품등장과 함께 아름다운 족두리를 쓰고 화관무를 추는 여성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전통혼례식 때 쓰는 족두리도 원나라 지배시절에 들어온 관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부는 얼굴을 붉은 천으로 가리고 친정어머니와 얼싸안고 떨어지기 싫어서 시집을 가야만 하지만 어머니 손을 차마 놓을 수 없어 엄숙하면서도 애타 하는 표현이 극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신랑이 키 큰 흰 낙타에 신부를 태워 데려가면서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너무 재미있었다. 이 화려한 결혼식 모습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떠날 것 같지가 않다.
밖으로 나와 초원 궁 뒤편에서 발에 헝겊 장화를 발 보호용으로 신발 위에 덧신고 아랫부분이 배 모양으로 생긴 모래사막을 달리는 트럭에 타고 언덕을 넘었다. 여전히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 먼지도 일지 않고 사막의 열기는 견딜 만 했다. 20여 명이 탈 수 있는 트럭은 파도타기처럼 모래 언덕을 올라가니 스릴만점이었다. 십오 분쯤 달려가 보니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다.
모래 언덕 위에 간이막사가 있고 60여 마리의 낙타가 줄지어 앉아서 대기하고 있다.
우리 일행 21명 중 14명만이 낙타를 탔다. 나는 수년 전 실크로드 돈황 명사산(鳴沙山)에서 한번 경험이 있기에 대범하게 그 중 제일 잘 생긴 연갈색 낙타를 골라 탔다. 낙타의 고삐는 앞에 서 있는 낙타의 낙타 봉 둘 중 뒷봉에 걸고 다섯 마리가 줄지어 선 것을 맨 앞에 탄 한 사람이 지휘하였다. 산봉우리처럼 솟아오른 두 개의 낙타 봉 사이에 걸터앉아 앞봉을 꼭 잡고 허리를 펴고 아라비안 대상들처럼 낙타를 타고 모래 언덕과 구릉을 오르고 내리며 약 2Km를 삼십 분 정도 사막을 달려보는 묘미를 즐겼다.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가슴이 뿌듯하였다.
낙타에서 내린 다음 높이 150m, 경사가 45˚ 되는 모래 언덕 위로 자리를 옮겨서 플라스틱 바구니나 대나무 바구니에 걸터앉아 아래로 미끄럼 썰매를 탔다. 내 앞에서 내려가던 장귀비의 모자가 휙 날려서 나는 그 모자를 주워 주는 여유를 갖는 등 남보다 더 많이 모래 썰매 타는 재미를 보았다. 모래 썰매, 그 스릴 만점의 즐거움을 더 많이 맛보려면 아래서 모래 언덕을 힘들게 숨을 헐떡이며 기어 올라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모래 트럭을 타고 되돌아가는 길에 보니 2008년 북경 올림픽을 겨냥해서인지 여러 채의 파오 건물 등 공사가 한창이다. 사막용 마차, 사막용 오토바이, 사막용 트럭은 낙타와 함께 이곳을 찾아오는 많은 여행객에게 좋은 관광 상품으로 각광받을 것이다.
우리 버스는 구부치 사막에서 아침에 오던 길로 후허하오터로 되돌아왔다. 쇼핑센터에 들렸으나 별로 살 것이 없어 목걸이 두 개만 샀다.
내몽골에 와서 처음으로 조선족이 한다는 「한국 궁(韓國 宮)」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된장이 반가웠으나 우리 된장 맛이 아니다. 음식 중에 인절미 튀긴 것이 일미였다.
첫날 기분 좋았던 귀족도(貴足都)에 가서 다시 발마사지를 받고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 또 다시『빈열대주점(賓悅大酒店)』1009호에 투숙하였다. 첫날보다도 더 좋은 객실로 이 호텔에서 제일 좋은 방 같았다. 안내인 말로는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묵는 층에 우리를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여행 마지막 날 호텔 상점에서 캐시미어 목도리 하나를 사고 재래시장에 가서 표고버섯과 석이버섯, 해바라기 씨를 조금 샀다. 빅토리아 백화점은 서울 못지않게 화려했다. 외국에 나오면 특산물을 사는 것도 하나의 재미인데 여기서도 별로 살 것이 없어서 이미 산 목걸이와 똑같은 것이 반값이기에 또 샀다.
『만부화엄경탑(萬部華嚴經塔)
공항으로 가는 길에 요나라 중 말기에 건립되었다는 높이가 55.6m나 되는 돌과 나무 제재로 8각으로 된 7층 백탑(白塔)을 관람했다. 요나라 수도의 서북쪽에 있는 만부화엄경탑(萬部華嚴經塔)이라고 불리는 이 탑은 800년 전 요나라 때 쿵주성 유적이다.
이 탑은 연화단(蓮花壇)을 기단으로 하여 위에 작은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으로 2층과 3층은 여러 모양의 라마 부처 모습의 조각이 붙어 있고 벽체는 흰색이다. 모두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보기만 하고 올라가 볼 엄두를 못 내는데 열정이 많은 네 사람만이 더듬더듬 어둠을 헤치면서 작은 창문의 빛을 쫓아가며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았다. 좁은 공간을 뱅글뱅글 돌아가게 된 그곳 꼭대기 층은 허술한 탁자 하나에 도교풍의 인형 같은 작은형 상이 있고 술잔과 타다 남은 촛농과 조화로 만든 꽃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래서 바라본 그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역사적인 전탑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구에 수위도 있었는데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던 것이다. 이 탑은 사막과 초원 사이에 우뚝 서 있는데 주변에는 건설현장과 쓰레기 집하장이 있다. 후허하오터 공항은 이곳과의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백탑공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여행일정 내내 흐린 날이라 초원에서 그토록 보고 싶던 별구경을 못했는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려니 맑게 햇빛이 비친다. 그러나 연평균 40mm밖에 안 되는 강우량지역에 단비를 몰고 다니면서 귀한 손님접대를 받으며 한여름 시원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아무 탈 없이 무사히 귀향하게 된 실버들의 즐거운 여행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십여 년 전부터 일 년에 한두 차례 중국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처음에는 우리나라보다 생활문화수준이 많이 뒤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역전될 위기에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북경을 방문했을 때 거리의 남자들이 우리의 5, 60년대처럼 메리야스 차림이 많았고 아예 웃통을 벗은 알몸 모습도 보통이었었다. 화장실 대부분이 지저분했고 웬만한 곳은 모두 화장실 사용료를 내야 했었다. 그리고 큰 대로변에서 한 골목 뒤만 해도 얼마나 쓰레기가 많이 나뒹굴었던가.
버스여행에서 가끔 주유소에서 정차하고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혐오스럽던 화장실에 혁명이 일어난 것을 보았다. 화장실 그 긴 것을 칸만 막아 일어서면 건너다보이고 오물이 흘러가다 걸려 있는 돼지우리 같은 화장실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 자리에 호텔 같은 화장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곳은 한쪽에 침대 방이 있는 것을 보니 화장실 관리인이 상주(常住)하다시피 하면서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이번 여행은 중국의 오지라고 다른 지역보다 더 후진적이리라 생각했는데 상상외로 우리가 여행한 내몽골지역도 여타 다른 지역의 도시들과 차별 없이 생활문화수준이 발전하고 있음을 보았다. 획일주의 공산주의 국가로 개인주의 민주사회보다 도시 기간 건설이 쉬운지 가는 곳마다 대도시는 사통팔달, 도로가 특별히 넓다. 상가가 번창하고 빌딩들이 높이 올라가고 사람들의 차림새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서울보다도 더 화려하고 발전한 상하이거리에서도 거지들이 구걸을 많이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한 사람의 장애인도 보지 못했고 한 사람의 구걸 행각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거리는 활기차고 부족한 것 없이 만족한 삶을 누리는 듯 모두 밝은 모습이다. 안내인에게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올해가 “내몽골 자치구 성립 60주년 기념의 해”라 정부에서 모두 데리고 가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산 사회주의 국가의 인권 탄압은 21세기 현대사회에서도 가능한 통치방법인 모양이다. 거죽만 내몽골 자치구이지 실제로 몽골인구는 한족중심(漢族中心)의 거대한 중국 속에서 동화 내지 멸족화(滅族化)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여행은 몽골민속춤과 기예, 풍습의 극히 일부분만이 관광 상품으로 전락, 보존 보호되는 현장을 경험한 여행이었다.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은 러시아 혁명과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이후 외몽골과 내몽골로 나뉘어 100년 세월이 흐르자 이질화되었다. 지금은 몽골인민공화국과 중국의 네이멍구 자치구가 되어 몽골인의 그 위상과 생활문화가 많이 달라져 가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버스를 비롯해 우리나라 자동차가 많이 달리는 중국의 거리를 보고 흐뭇해했는데 그들이 만든 자동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내년 북경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우리보다 저만치서 앞서 달려 나갈 것만 같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제 많은 부문에서 우리를 앞질러 가는 거대한 중국의 힘이 ‘공룡 발이 되어 우리를 덮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 중국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강국으로 부상했다. 그 넓고 다양한 영토와 다언어 다민족을 한족중심(漢族中心)으로 응집, 통치를 잘하는 리더십 강한 중국의 수뇌부 정치인들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
(원고지 123매, A4 16쪽)
첫댓글 장편의 기행문을 또 쓰셨군요. 이젠 장편 소설에 도전해도 잘 해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쓰시기 바랍니다.
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와~ 세상에나! 대단하세요? 민선생님! 주눅이 들어요... 미국은 지는해가 될것이고 머지않아 중국이 세계제1국이 될거예요. 중국의 동북공정도 대한민국의 통일을 대비해서 미리미리 발판을 굳히려는 속샘이라 사려됩니다. 고구려사가 중요해서가 아니고... 지도력 하나만큼은 울나라 정치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게 많은게 사실입니다.선생님! 덕분에 숨 안쉬고 여행한번 잘했네요.감사합니다.문운하시어요.
학술자료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단하신 글입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택경님, 안녕! 과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