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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지역을 비옥한 대지로 만든 스페인 정신에 탄복
매트리스까지 동원해도 겨우 20여명 수용할 수 있는 지자체 운영의 작은 알베르게
지만 관리인 하비에르 고에스(Javier Gohez)는 과묵하나 속정이 있는 사람이다.
기부금으로 운영하는데도 벽에 Donation Box만 설치해 놓고 일체 말이 없는 그다.
49세인 그는 내가 77세라는 것을 알고는 편하게 해주려고 나름의 애를 쓰는 듯 했다.
특히 새벽 6시에 출발하려는 나를 붙들어 앉히고 아침(breakfast)을 먹고 가게 했다.
그러니까 나보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한 것이다.
그것이 자기의 임무는 아니지만 순례자를 위한 자발적 봉사라고 생각하는 그다.
고마웠던 데다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려면 e-멜주소도 알아야겠기에 40일쯤 후인
두번째 프랑스길에서 다시 들렀으나 관리인이 바뀌었다.
험악한 인상의 새 관리인에게 고에스의 근황을 물었으나 응답이 없어서 재차 물었을
때는 신경질적으로 노 꼬노스코(no conozco/그런 사람 모른다).
그들 간에 불쾌한 일이라도?
그 때에는 Box에 10유로를 넣었는데 이번에는 돈넣을 것 부터 강조하는데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처럼 선한 관리인이 왜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됐는지 자못 궁금했다.
운영자는 관리인 역할의 중요성을 알기나 하는지, 다른 순례길의 알베르게와 비교해
볼 때 유감스럽게도 프랑스길이 특히 사무적이고 다분히 영업적이라는 느낌이다.
어느 새 한국 늙은이도 포옹에 익숙해졌는가.
고에스와 악수 이상의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새 하루를 또 시작했다.
정에 주려본 적이 없는 늙은이가 작은 정에도 좌지우지될 만큼 왜 정에 유약할까.
고에스가 만들어준 상쾌한 활력이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Rabe de las Calzadas)
마을을 단숨에 통과시켰다.
떠오르는 태양의 눈부신 아침햇살을 받고 있는 칼사다스 중앙의 샘에는'노 뽀따브레'
(no potable/마실 수 없음) 또는'탈나도 책임지지 않음' 등의 표지가 없다.
대부분의 식수대에서 실망한 때문인지 당연한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산타 마리냐 교회(Iglesia de Santa Mariña),알베르게 리베라노스 도미네(Liberan-
os Domine), 에르미타 데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모나스테리오(Ermita de Nuestra
Señora de Monasterio) 등, 마을을 벗어나면 광대한 메세타(meseta)가 기다린다.
스페인어로 '분지(盆地),즉 산이나 높은 대지(帶地)로 둘러싸인 평평한 땅'이라는 뜻
이므로 지질학적으로는 메사(mesa) 지역이라 하겠다.
곳곳에 집적돼 있는 암석더미들은 이 고원을 대지(大地)로 만들기 위해 흘린 스페인
인들의 피땀에 다름 아니라 생각하면 감동하고 엄숙해져야 할 것이다.
메사지역을 옥토로 만든 스페인 정신에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고백컨대, 아무리 신바람 길이라 해도 막판에는 해발 800~900m대의 끝없는
밀보리밭 지평선이 지겨워졌다.
그늘막 하나 없는 길, 20km에 육박하는 길인데 아니라면 거짓말 하는 것이리라.
프라오토레 샘(Fuente de Praotorre)쉼터,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Hornillos del Ca
mino) 마을, 산 볼(San Bol) 알베르게 등이 중간에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들 가운데에 들어선 그림같은 집,아주 작고 외딴 산 볼 알베르게는 일체를 잊고 하루
푹 쉬고 싶은 마음이 일 만큼 인력(引力)이 대단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통과했다.
포플러 숲 아래로 흐르는 개울(arroyo San Bol)에 발을 담그면 발병이 낫는다는데.
(두번째 길에서도 일정 조정에 실패해 그냥 지나쳤다)
성 안토니의 화염(St. Anthony's fire)과 타우 십자가
메세타가 끝나는 내리막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온타나스(Hontanas)
가 지붕부터 서서히 드러남으로서 지루함도 끝나갔다.
타르다호스에서 20km 이상을 걷는 동안 도로는 가로지르는 2개의 부도로가 있을 뿐
이므로 단지 지루하다는 이유 외에는 투정을 부릴수 없는 길이다.
워낙 넓고 긴 거리라 고원지대를 걷고 있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으니까.
메세타 계곡마을 온타나스에는 3개의 알베르게가 있다.
60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에 마을 인구보다 훨씬 많은 순례자가 숙박할 수 있어
명실 공히 순례자마을일 뿐 외래인의 관심지역이 아니다.
그래도 메세타 계곡 물은 알아주는 약수란다.
마을 이름 'Hontanas'가 '샘' 을 뜻하는 옛 단어 'fontanas' 에서 유래되었으며 마을
중앙에 우뚝한 교회의 물이 이름있는 약수라니까.
산 안톤 한하고 계속되는 농로가 완만한 내리막 길이다.
자전거 순례자중에는 온타나스에서 산 안톤까지 잘 포장된 자전거 카미노를 두고도
굳이 불편한 농로를 택하는 이들이 있다.
농로보다 아주 좁고 험한 산길을 고집하는 마니아도 적지 않다.
산 안톤(San Anton)은 산 볼 처럼 마을이 아니다.
고대 수녀원이었던 건물의 음산한 잔해(Ruinas) 사이에 알베르게가 있을 뿐이며 그
나마도 5월~10월에 문을 열어 겨우 12명을 수용하는 미니 숙박소다.
산 안톤은 카미노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중 하나이며 아치 길( Arco de San Anton)
역시 역사적인 카미노 루트란다.
그러나 '산 안토니의 화염'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산 안토니의 화염은 사람과 가축의 피부질환인 맥각병(ergotism)의 병명이다.
손, 발에 괴저를 일으켜 불구로 만들고 죽게도 하는 맥각병은 가난한 사람들이 값싼
호밀 빵을 먹고 생긴 식중독 현상이란다.
이 병이 스페인 북부에 만연하였을 때 퇴치에 적극 후원한 성 안토니의 이름을 따서
성 안토니의 화염이라 명명했다는 것.
그러니까, 당시에 이 지역민의 생활은 극히 빈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에는 마을이 있었는데 맥각병 때문에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것인가.
중세에 맥각병에 걸린 많은 순례자들이 이 곳에서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다니까.
그렇다.
이 곳에 현존하는 병원 겸 수도원 안토니네 오스피탈레르스(Antonine Hospitallers)
의 잔해가 그 증거다.
한데, 아씨씨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십자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타우'(Tau)는 왜 산
안톤의 십자가가 되었을까?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자(22번)인 타우(T)는 표지(標識)를 의미한다.
그리스어 알파벳의 19번째 글자인 타우는 악과 질병으로부터 보호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것이라는 뜻의 타우, 악과 질병 제압의 상징인 타우가 성 안토니
기사단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순례자의 십자가(Cruz del Peregrino)로 불리는 것도.
카스트로헤리스의 '오이 세라도'와 후레자식
산 안톤 아치를 지나 해발 810m 카스트로헤리스까지 이어지는 한가로운 직선 포장
도로에서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을 뒷산의 카스티요(Castillo/城) 유적이다.
아마도, 9 ~10c에 있었던 기독교도와 무어족 간의 전쟁 때 중요 요새였을 것이다.
카미노에서 가장 길게 분포된 마을 중 하나(2km)인 카스토로헤리스(Castrojeriz)는
인구 1천여명의 꽤 큰 마을이다.
이 날, 나는 아직 상당히 이르기는 해도 이 마을에서 묵으려 했다.
왜냐하면 다음 알베르게 까지 가려면 높은 모스텔라레스 고개(Alto de Mostelares)
를 넘어야 함은 물론 11km 이상을 더 걸어야 하기 때문에.
마을 어귀에 <알베르게 카미노 데 산티아고. 전방 600m. 순례자 전용>(CAMINO DE
SANTIAGO. a 600Mts SE ADMITEN PEREGRINOS) 안내판이 서있다.
안내서도 초입의 사과의 성모 마리아 교회(Iglesia de Santa Maria del Manzana)
를 비롯해 4개의 알베르게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묵는데 무난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난감하게 되었다.
마을 초입부터 지도와 안내판을 따라 찾아간 알베르게 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문이
잠겨 있거나 오이 세라도'(Hoy Cerrado/today closed).
4개의 알베르게중 유일하게 문을 연 곳은 마을 거의 끝에 있는 중앙광장 윗길 2층의
산 에스테반(San Esteban)이었으나 만원사례.
나를 앞선 순례자는 없었는데 만원이라면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또는 온타나스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일 것이다.
그렇다고 24~48유로를 지불하고 호텔에 묵겠는가.
같은 처지인 한 미국청년과 함께 민박집을 수소문하고 다니는데 남미인치고는 키큰
한 중년남이 젊은 여인과 합류했다.
스페인어가 절실한데 잘 되었다 싶었는데 처음에는 꽈뜨로(cuatro/4명)라고 하더니
뜨레스(tres/3명)로 줄여 말하는 남미인.
내가 스페인어에 완전 먹통으로 보였는지 주저 없이 '우나 세뇨리따 이 도스 세뇨르'
(una senorita y dos senor/처녀1+남자2)라 잖은가.
4명이 묵을 방은 없다니까 동양 늙은이는 제치고 자기네 끼리 가겠다는 수작이렸다.
이 자는 왜 순례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남미와 스페인은 극동에 비해서는 가까운 거리지만 이따위 수작하러 대서양을 건너
왔단 말인가.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가톨릭 신자인데 그는 예외인가.
늙은이라는 이유는 제쳐두고 같은 길을 걷는 동지적 정서가 전혀 없는 자인가.
스페인어를 모르는 영감으로 보였다면 더더욱 배려해야 하련만 이 사람에게 순례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모스텔라레스를 포함한 42km)
참으로 후레자식 이로고.
절로 튀어나온 개탄과 동시에 어떤 오기가 발동했는가.
오후 4시가 다 돼가는 시각에 미련 없이 카스트로헤리스를 떠났으니.
천금의 시간 30여분을 낭비한 것이 후회되었다.
오드리야 강(rio Odrilla)의 목교를 건널 때는 앞에서 압도하는 아쩔한 모스텔라레스
고개(Alto de Mostelares)를 넘을 일이 심란해 왔다.
밤과 달리 한여름에 다름 아닌 햇볕을 막아줄 아무 것도 없는 오름에서 경사가 심한
곳은 지그재그로 올라야 했다.
한 젊은 스페인녀를 만났으나 구간종주식인 그녀는 싱싱한 힘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가볍게 오르고 있다.
힘겹게 오른 정상부는 규모가 좀 작을 뿐 메사 지형이다.
잠시 쉬는 것도 고려할 수 없도록 쫓기는 시간에 불한(不汗)체질인 것이 그나마 다행.
더욱 심한 경사의 내리막 길이 다시 긴 농로로 이어진다.
그늘막과 벤치가 있는 피오호 샘(Fuente de Piojo)에서 스페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도 얼마쯤 지쳐가는지 걸음이 느려져 동행이 되었다.
타르다호스에서 오는 길임을 알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하는 그녀.
하긴 실거리 42km(환산거리44km)를 걷는 나를 내가 모르는데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한 걸음이 아까운데 산 니콜라스(San Nicolas)는 아직 휴면중이고(5/6월~9월 개문)
이테로 델 카스티요(Itero de Catillo)는 카미노를 1.5km나 벗어나 있다.
결국, 1.9km되는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를 택했다.
1.5km에 400m만 더하면 되니까.
아무리 기력이 고갈됐다 해도 당장에 400m를 아끼려다가 내일 아침에 3.4km를 걷는
우를 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산(山) 생활에서 터득한 생활의 진리다.
피수에르가 강(rio Pisuerga)이 부르고스와 팔렌시아의 주계(州界)다.
이테로 다리( Puente de Itero)를 건너서면 팔렌시아 주(Palencia)다.
스페인 북부,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의 한 주이며 넓고 비옥한 곡창지다.
우기라는 봄인데 연일 맑아서 순례자에게는 더 없이 좋지만 농민들은 더 바쁘겠다.
잘 되어있는 수리시설로 광대한 들판에 물을 살포하는 광경은 장관이며 스페인 농촌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당장, 베가로 가는 길에서 파란 들에 펼쳐지는 분무(噴霧) 쇼 감상으로 잠시 피로가
줄어드는 했으나 우리 농촌의 낙후성을 확인하게 되어 마음은 되레 무거워졌다.
2011년 4월 16일, 프랑스 길 13일째 되는 날의 오후 6시 20분쯤, 드디어 해발 773m,
인구 200명 미만의 자그마한 마을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에 도착했다.
실로 12시간의 강행이며 3일만에 벨로라도의 기록을 갈아치웠을 뿐만 아니라 카미노
프랑세스를 27일+1.5시간으로 단축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초 예상의 1/5, 즉 1주일 단축의 포상이 환상적인 아라곤 길일 줄이야)
전화위복이다. <계 속>
2011년 4월 16일 (토) 새벽, 타르다호스를 떠나면서 알베르게 관리인 하비에르 고에스와 함께(위)
카미노는 너른 포장도로가 되어(아래1)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 마을(아래2)에 들어선다.
마침, 일출 장면을 보게 되었고(아래3)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은 마을의 샘과 알베르게, 교회 등
건물들(4~7)이 눈부시게 빛났다.
프라오토레 샘 쉼터(위1)를 지나 넓은 들로 이어지는 카미노(위2)는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마을
(위3~5)을 거쳐 광대한 메세타(고원)로 오른다(아래)
(산 볼 알베르게/위)
스페인인은 해발 800m~900m대의 끝이 보이지 않는 메사지역을 옥토로 만들었다.(위)
곳곳의 암석더미는 그들이 흘린 와 땀에 다름 아니리라.
메세타 계곡에 자리잡은 온타나스 마을(아래)
온타나스 ~ 산 안톤 간의 카미노는 긴 농로와 차로로 되어 있다(위)
'성 안토니의 화염'으로 불리는 산 안톤 유적(아래)
성 프란체스코의 십자가인 타우(T) 십자가는 안토니 기사단의 십자가, 산 안톤의 십자가,
순례자의 십자가로도 통한다.
(사과의 성모교회/위)
산 안톤을 벗어나면 곧 카스트로헤리스 마을 뒷산 정상의 성 유적과 알베르게 안내판이
나타나지만(위1) 2km에 걸쳐 곡선을 그리며 분포된 마을(위2)의 초입 교회(위3)에 있는
알베르게 부터 문이 잠겨 있거나 오이 세라도(Hoy Cerrado/Today Closed)(위4)
4개의 알베르게 중 문을 연 산 에스테반(아래)은 만원사례
카스토헤리스 ~ 이테로 데 라 베가 까지는 11km.
오드리야 강을 건너서면 모스텔라레스 봉이 기다리고(위1.2) 해발 910m대의 정상은
또 하나의 메사지역이다(위3~6)
오른 만큼 내려가는 카미노는 다시 긴 농로가 되어(아래1.2) 산 니콜라스(아래3)에서
피수에르가 강(아래4)을 건넌다.
피수에르가 강은 부르고스 주와 팔렌시아 주계다
팔렌시아 주.(위1~3)로 넘어와서 1.9km의 비포장 차로를 걸으면 이테로 데 라 베가(위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