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떤 일을 하고 나면 뒷풀이가 늘 따른다.
영화나 연극을 보고나서, 아니면 행사가 끝나고나서 우리는 어김없이 뒷풀이를 즐긴다.
나는 사람을 길가에서 우연히 만나도 그냥 헤어지질 못한다. 그래서, 처음엔 빈소리처럼
차 한잔하자고 말을 건넨다. 그래서, 뭔가 얘기를 나누고 가야지만 마음이 편하다.
왜 그럴까?
어떤 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멋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어느날 돌아보니
마음이 공허하여 즉, 사는 것이 재미가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이런 재미마저 없다면 정말 삶이 공허하다고 강하게 지금도 믿고 있다.
2.
일정연수가 끝나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연수결과에 대한 설문을 받고, 평가에 대한 이의 제기에
하나하나 답변을 하느라 정신없이 몇 주를 보내고, 이젠 가을과 더불어 비교적 여유를 즐길만큼
이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여 여지없이 나는 카페를 들어가 선생님들이 남겨놓은 글을 쫓아간다.
그리고, 댓글을 써야하나 말아야하나를 망설인다. 왜냐하면 나는 이 모임의 객체이지 주체가
아니라는 생각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분임모임이 있다는 공지가 왔다. 일국선생님에게서....
많은 연수생가운데 일국선생님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은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인 듯 하다.
전화가 오기 전에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며 이미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반가워하며 별다른 일이
없으면 참석하겠노라고 말했다. 경험하여 알듯이 학교에서 또래모임에 괜히 윗사람이
끼면 대화의 공통분모를 찾기 힘들거니와 대화의 중심이 그에게 쏠리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얼굴보이고 술값내고 재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음 속엔 그들과
같이 어울려 같이 즐기고 싶으면서도 말이다.
시간은 흘러 놀토 전야 금요일이 되었다. 아침나절 출근길에 평소와 같이 건조대에 널려진
와이셔츠 중 하나를 골라 다림질을 한다. 그것까지는 그렇다치고 넥타이 진열대를 보며
어떤 것을 맬지 서너번을 망서렸다는 것은 이날 모임을 기다렸다는 증표일 것이다.
3.
차를 몰아 영종대교를 건너려다말고 운서역 주차장에 세워두고 전철을 탔다. 공항전철에서
바라보는 뻘 풍경이 보고 싶어서였다. 공항이 주는 이미지,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의 통로가 아니던가? 그 공항에서 출발한 전철을 타고 영종대교를 건너노라니,
지푸린 날씨에 늘 보던 풍경이 눈앞에 다가왔다. 전철안 형광등 불빛, 비어있는 좌석,
피곤에 지친 어느 중년남자는 눈을 감고 있다. 그의 얼굴에 비친 이미지.
도시는 어둠이 밀려오면 어느새 하나둘 불빛들이 켜지면서 생동하기 시작하지만 섬은 그렇지 않다.
사방이 어둠에 매몰되고 산등성이 공제선만 보인다. 특히 서녘에 지는 노을이 사람의 마음을
더욱 을씨년 스럽게 만든다.
잔상효과라고 하던가?
이날 오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지난 시절 즐겼던 팝송을 열심히 검색하여
들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눈앞에 드러나는 현상을 자기만의 코드로 해석하는
습성이 있다. 내가 퇴근녘 글루미 선데이, 멜라니 샤프카의 더 세디스트 팅, 해뜨는 집, 크레이지 러브
등등을 반복하여 들었으니.. 전철 안 중년남자의 얼굴 빛을 무엇을 읽었을까?
4.
부평시장역에서 하차하여 택시를 타고 80년 중반 초임발령시 자주 드나들었던 그 예의
해물탕거리를 찾았다. 당시 해주식당이 제일 유명했는데.. 강원도 시골에서 도회지를 발령받는다하여
무척 도시에 대한 동경을 안고 왔는데, 처음 맞딱드린 도시,
부평, 매케한 매연과 열악한 도시빈민이 살고 있던 부평, 부평동중에 발령받았다.
남들은 다섯시 땡하면 철제 책상키를 부지런히 잠그고 각자의 둥지를 향해 달려갔지만
나는 다세대주택 텅빈 문간방으로 향해야 하므로 갈길을 몰라 어쩔줄 몰라했다.
저녁은 해결해야하는데, 같이 저녁먹으로 소주한잔할 사람들이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물탕거리를 다시 밟으며, 도시에 처음으로 보냈던 총각시절이 많이 생각낫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도 그 시절 그 나이의 사람들이니 그 정서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지금 부평동중 매케한 연기를 내뿜던 무허가 공단을 사라지고 상동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지고,
부개여고 등등 예전 흔적을 찾기 어려울 만큼 주변을 변하여 버렸다.
하긴 그 당시 가르친 아이들이 지금 40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늙어버린 것이 몹시도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5.
남해해물탕 옆에 동해해물탕
그 집 이층으로 올라서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은현, 성조, 경미, 지현, 선영,은지 선생님,
얼마후 미선,은수,송화 그리고 다른 분임의 용회선생님이 뒤이어 합류했다.
다른 남자들도 전화를 넣었지만 각기 사정이 있어 마음과 몸이 함께 움직이질
못하는 상황들이었다.
특히 분임장인 일국선생님이 가정 사정으로 불참한다하여 못내 서운한 마음이 많이 들었는데..
해물탕, 부침개, 해물무침, 소주, 맥주, 음료수... 그런데, 술을 같이 먹는 사람이 없어
소주 두병을 시켜놓았지만 옆에 있던 은수샘과 각기 반병만 먹었다. 다른 분들은 역도선수마냥
들었다 놨다만 반복했는데.. 그나마 지현샘이 맥주와 소주를 약간씩 먹었고 은현샘은 오늘 정량이
소주 두잔이라며 아주 어렵게 어렵게 끊어먹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어느새 한달이 가버렸음을 말한다. 그 만큼 영종도의 일들은 벌써 망각속으로 사라져가고 있고
현실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음을 말한다. 한결같이 차라리 연수받던 때가 좋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오니 온갖 바쁜 일들에 매여 정신없이 힘들다고 한다. 왜 그럴까? 연수할 때는 차라리
학교가 낫지 하루죙일 매마른 강의듣느라 힘들다고 아우성칠 때는 언제이고, 지금에 와서는
그게 낫다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 지나간 시절은 모두가 그리운 인생사의 이치인 모양이다. 아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는 영종도의 일정강습에서 나누었던 사람들과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강좌의 내용과
강사들, 불만어린 것들 모두가 이미 과거로 사라져 버리고 사연만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라는 정서적 공유 그것이 지금 우리를 이 모임으로 끌어오게 하는 것이다. 힘들게 힘들게
처음에 도저히 될 것 같지도 않았던 분임활동. 그것을 마치고 났을 때의 쾌감. 그리고 그 동영상을
되씹어 보면서 느끼는 내 마음의 정서 그것이 지난 여름에 대한 행복이다.
6.
1차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오늘 비가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는데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냥 헤어지긴 그렇다. 금요일 저녁이라 거리엔 온통 사람들 투성이다. 그래서 조용한 곳을 찾아
헤매다 지하의 바를 찾았다. 밀러 다섯병, 버드와이저 다섯병을 시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흡연을 하는 남자들과 비흡연자인 여자들과 반반 나뉘어져 얘기는 이어진다. 그 중간에 지현과
미선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분들은 남자쪽 얘기에 어울렸다 여자쪽 얘기에 참가했다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면서 잘 경청해주었다.
건너 편 외국인 남자 둘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꽤나 오랫동안 자기네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남자들의 작은 이홉들이 맥주는 이어 비어졌는데 다른 분들은 아직도 반이나 넘게 남아있다.
왜 남의 술병에 술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신경을 쓰는 것일까? 평소와 같지 않기 때문일까?
소주잔을 마시고 건네고 마시고 건네고 다들 취기가 올라 시끌벅적할 시간이 되었을
평소와 다르기 때문일까?
시간을 흘러 가정이 있는 사람 아줌마(?) 선생님들은 집에가야하는데,
가정이 있는 아저씨선생님은 집에 갈 생각을 안한다. 이게 남녀차별이다.
이즈맨 이즈, 고맨 고, 이렇게 외치며 2차를 마치고 계산대에 서니 오만원을 달란다고 한다.
오만원이면 여러 안주에 진한 소주한잔을 먹을 수 있는데 고작 맥주 한병 달랑먹는데
들이는 비용치곤 비싸다 생각하니 나도 영락없는 구세대 인물인 갑다.
지난 인천대 앞 뒷풀이 2차 땐 기억도 나지 않은 엄청난 안주와 술이 있었는데 십몇만원밖에
들지 않았는데..(괜히 술값낸 것 자랑하네..ㅋ)
거리로 나섰다.
참 사람이 많다. 부평고와 부평여고 제자들 만나느라 이 거리를 찾았던 기억이 있고
아니 더 이전 총각생활할 때 동료들과 이 거리를 밟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인현통닭과 치치 커피숍. 그 치치는 기다리는 언덕이란 뜻인데.. 내부는 너무도 많이
바뀌었고 예전의 분위기는 찾을 수 없다. 그 거리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거리로 나서니 지현샘이 한기를 느끼는 모양이다. 비가 올법도 한데.. 가을 저녁 바람이
차다. 그래서 나는 양복저고리를 그녀에게 걸쳐주었다. (점심먹고 와서 쓰겠음&&)
오래 전 겨울로 들어갈 초입에 거리를 걷던 어느 여인에게 바바리를 걸쳐주며
나는 잔뜩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7.
우리끼리의 대화가 순조롭게 들리는 공간을 찾아나섰다.
1차에 이어 2차를 거쳤으니 뱃속은 엄청나게 찼을 법 한데
왜 우리는 또 먹으러가야하는 것일까?
도로를 건너면 또다른 세계가 있다.
시끄러운 젊은이의 거리를 벗어나 지하도롤 통과하여 롯데백화점 앞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서니 롯데로 가는 길목에 꽃집이 있었다. 나는 술을 먹게되는 경우엔
여지없이 꽃을 사서 주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꽃을 사려다 단골집이 가고자 하는 집의
근처에 있어 그 집꽃을 사기 위해 그냥 지나쳤고.. 그렇게 걸어서 옛고을 민속주점을 갔다.
비내리는 금요일 저녁이니 여러명이 앉을만한 공간이 있을리 만무이다.
그런데, 좌석의 손님은 우리를 위해 다른 좌석으로 옮겨갔다.
김치전에 막걸리.
이제 우리식이 대화를 풀어갈 참이다. 이제 시간에 얽매이는 사람은 없다.
나는 대화의 중심에 서서는 안된다여겨 구석쟁이에 자리하고 한순배씩 막걸리를
청하였다. 그런데, 역시 대화의 중심은 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말을 좋아하여
먼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내니까 그렇다. 나이 많은 사람이 말하니 자연히 아랫사람은 따라올 수
밖에.. 비극이다. 아니다 나에겐 행복이다.^
나는 왜 술만먹으면 말이 많아질까? 요즘 더 그런 것 같다. 아마도 학교에서 수업을 해오던 습관ㅇ
이십수년넘었은데 요즘 그것을 못해서 그런가 아니다 외로운 중년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술자리에 간다하면 신비주의로 가라고 늘 당부한다. 난 아내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알기도 잘안면서 왜 실천이 안되는 것일까? 이건 병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지난 일정연수를 말하게 되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강좌와 강사는 누구인지? 어떤 점이 의미있었고 힘들었는지?
누구나 다들 김주혁과 유성호를 얘기했다.
나는 질문했다. 그것도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청하였다. 왜 김주혁의 강의가 인상깊었는지?
말의 내용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한가지 같은 것은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강의를 떠올리면서 그 때의 상황에 몰입되면서
한결같이 눈시울이 적셔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강렬한 정서의 공유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늘 남아있다. 마치 화석처럼.
그 이유를 누구는 진정성이라 하였다.
또 한 사람은 오전강의와 오후강의의 묘한 대비에서 오는 효과라고 했다.
강의가 시작하면서 5분 안에 청중을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만들지 못하면 강의는 실패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아이들과 만남에서 이런 정서적 공유, 감동케 하는 것이 있을까?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아이들을 만낫을 때 그 때 선생님의 그런 모습은 정말 지울 수 없는
추억이되어 있노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듣고 싶다면 어떻게해야하는 것인가?
비내리는 가을날 저녁인데...
바로 이 자리에 김주혁과 유성호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가까운 지근거리에 있었다면 분명 불려나왔을 것이다. 나는 술먹다가 이런 일하기를
밥먹듯이 좋아한다. 술이 잔뜩 취해 집에가는 늦은 새벽에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전화를 한다. " 야! 밤늦었는데 왠 전화냐?" " 어. 형 목소리가 듣고 싶어 그냥 했지.. 잘 자.."
이거 벽창두드리는 소리인데 다들 이해하곤 한다. 가을이 오는 소리를 그들은 나의 늦은 밤
전화를 통해 깨닫는다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 휴대폰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술이 깬 아침에 기억에도 없는 무수히 많은 통화기록과,
퇴근녘에 이리저리 누구를 불러내 술한잔할까하는 쪽팔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어쩌다 오랜 기억속의 여자의 전화로 나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질지 모르는
두렴이 있어서이다.(이건 거짓말^)
소설가의 만남을 얘기하면서 김용성 교수님을 말하였다.
나는 원래 내마음의 옥탑방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박상우를 부르고 싶었다.
아니면 정소영샘이 추천한 강화 산마을고를 방문하여 함민복을 불러보고 싶었다.
아니면 1박2일 연수로 전북고창 서정주문학관관과 신재효기념관을 둘러
우석대의 안도현을 불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군가가 얘기했다. 은수를 보고..
그 지루한 소나기마을의 강의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은수선생님은 모든게 긍정이다. 좌중에서 박상우를 유일하게 알고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바로 앞서 그 말로 인하여 나는 오랫동안의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내 딴에는 조회와 종례를 최대한 짧게하고 나중엔 종례도 하지 않았건만 연수생의 의견을 들어보면
조종례가 무척 길어서 짜증낫다고 한다. 왜 그러지? 난 정말 신경써서 짧게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은수때문이었다.
은수가 맨 앞줄에 앉아 항상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또 있다. 선영샘도 항상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여자들은 이해할 수 있다. 여자들은 여자특유의 모성애로 아무리 지루한
얘기라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캐치하여 호응을 해주는 배려가 있으니 말이다.
특히 아줌마 선생님들은 더 그렇다. 아이를 기르면서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는 아이를 놓고
어우 그랬어? 누가 그랬어? 정말.. 어이구 착하다. 장하다.. 호응하는 법이 몸에 체득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자인 은수는 왜 고개를 매번 끄덕이는 걸까?
나는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여러분을 뵈면서 내 얘기가 의미있게 전달된다고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런 현상이 없을까?
여학교에서 조심해야한다. 남자선생님들. 아이들이 앞에서 호응하고 뒷담화까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가을 음악얘기를 꺼내었다.
소설가 박상우를 무명시절 만났던 얘기, 굴루미 선데이 음악, 조병화 시 얘기,
멜라니 샤프카의 음악 등등 그리고 그렇게 막걸리 몇통이 비워지고, 밖엔 세찬 비가
엄청내리고 시간은 자정으로 흘러갔다.
그곳을 나와 꽃집을 찾았으나 그 집은 문닫았다.
돌아가는 길에 가정이 있는 사람에겐 아내에게 없는 사람에겐 자기방에
꽂아둘 꽃을 샀어야하는데,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도 줘야하는데..
늦은 시간 꽃을 사가면 아내는 또 이 남자 가을병이 도지는구먼하며 비아냥거리면서도
거부하진 않는다. (아침이 되어보니 꽃가게 문닫은 것이 무척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가졌다.)
각 자 돌아가는 길에 남자들은 여자샘들 집근처까지 배웅해드린다고 하였다.
한 사람이 남았다. 그 분은 집이 그 근처이기 때문이다. 비가오니 그냥 이 앞에서
택시를 타고 가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밤길이 그래도 위험하니 그냥 가시죠 하면서
집 앞까지 모셔다 드렸다. 사실은 그 밤거리를 걸어보고 싶어서였다.
과거의 오래된 추억의 한 장면에 내가 있는 것이다.
내 옆에 누가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의 추억 속에 내가 있고 느끼는 것이므로
행복했다.
그렇다.
무미건조한 이 삶속에서 우리는 추억이 삶을 풍요롭게해줌을 안다.
2009년 여름 영종도에서의 추억이 여러 모든 분들에게 훈훈하고 그리운 그런 추억으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ps. 선생님이란 존칭을 쓰지 않은 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긴 국어과 카페이므로..
첫댓글 금요일의 반가운 기억이 생생해지는 글이예요
저도 모임 일주일전부터 마구마구 설렜답니다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들과 연구사님 정말 보고싶었어요 
남들은 술마시면 열 난다고 하던데 전 이상하게 술만 마시면 춥더라고요..그날 가을비도 내렸고..; 연구사님 옷 벗어주신거 정말 감사해요
집에 와서 동생들한테 자랑했답니다 
담임선생님,,,이렇게 세세한것까지 다 기억을 하시네요,,그냥 지나쳐버려도 모를것 같았던 것들을,,,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일정연수의 가장 큰 의미,,,사람들,,그것도 너무나 좋은 나의 사람들,,이제 조금 담임선생님과 소주한잔 하시죠라는 말이 나올법도 한데,,전화가 없으셔서 미리 약속을 잡아야만 하네요,,그냥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 소주한잔할까라는 말을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