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1일 우리 학교의 자랑스러운 선배인 3회 고 정경화 소령 추모식에 다녀왔습니다. 문응상 선생님과 학생 대표 20명 그리고 동창회 임원 여러분이 참석하였습니다. 7사단까지 3시간이 넘는 가깝지 않은 길이었지만 낯선 우리의 산하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어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7사단 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왔습니다. 화천 댐이 만들어 놓은 파로호는 세계 어느 곳에 내 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을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 호수의 이름이 파로호입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 1개 연대가 화천 댐을 지키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중공군 3개 연대를 격파하고 우리 산하를 지킨 곳이어서 당시 대통령이 파로호(破虜湖-적을 격파하고 사로잡은 호수)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 슬픔니다. 이 아름다운 산하에 수많은 생명들이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희생 당했다고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고 정경화 선배님의 희생도 바로 이 아픈 역사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희생이라고 생각됩니다.
2010년인가(?) 텔레비젼에서 한국전쟁 60주년 특집방송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엔군 참전 용사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기자는 영국 리버풀의 조선소가 있는 뒷골목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리버플은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과 축구선수 제라드가 있는 곳이고 비틀즈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조선공업이 발달한 곳인데 카메라는 기자가 걷는 눅눅하고 우울한 리버플의 뒷골목을 한참이나 따라갔습니다. 그리고는 골목안 어느 집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소리는 들리는데 안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안에 계신 분은 인터뷰를 거절하는가 봅니다. 이 리버플에 사는 이 분은 한국전쟁 참전용사입니다. 그는 전쟁당시 전투에서 자기 동료들을 거의 잃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선소에 다녔지만 전쟁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동료와 사귀지도 못하고 가족과도 이별하고 혼자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이야기는 듣는 것조차 싫어 했습니다. 이젠 늙어 눈도 거의 보이지 않는데 혼자서 겨우 연명만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의 수 차례 방문과 간절한 요청으로 겨우 한국 방문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는 한국 가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불안해하고 있었으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서울로 들어갈 때까지도 그는 밖을 내다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들어서자 기자가 말했습니다. 여기가 서울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습니다. 그는 기자에게 물었습니다. "여기가 정말 서울인가요?" 기자가 대답합니다. "예, 여기가 대한 민국 서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기적같이 그의 눈이 점점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혼자 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한 나라를 살렸구나!"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정말 어떻게 해야될지 몰랐습니다. 그 노인 분은 비로서 조금씩 힐링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이 평범한 사람의 삶을 이토록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했을까? 누가 이 사람의 삶을 이렇게 만들 권리가 있단 말인가?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떤 행위를 해도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정치는 감히 한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사지로 보내고, 평생 고통을 안고 살게 해도 되는가? 저는 개인적으로 외삼춘도 참전용사입니다. 그는 포로교환 때 고국으로 돌아온 분입니다. 외삼춘은 평생 술과 함께 살았습니다. 외삼춘의 그 깊은 허무와 고통은 아마 술이 아니면 잊는 방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생의 아픔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보신 어머니는 말없이 강산만 볼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야 어머니의 그 눈빛을 조금 가슴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사단 어느 부대에서 점심을 먹고 정경화 동산에 도착하여 추모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당시 정경화 소령에 의해 목숨을 건진 백암산 패밀리, 육사 27기 동기생들, 정경화 소령 유가족, 우리 강릉고 동창회와 학생들들, 7사단 5연대 3중대 대원들 등이 추모식에 참여하였습니다. 동기들과 백암산 패밀리들이 읽는 추모사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헌화하는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눈을 들어 백암산을 봅니다.
이 백암산은 한국전쟁 때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곳 중의 한 곳입니다. 아마 백마고지 전투가 이곳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수많은 생명을 제물로 바치며 지켜낸 이 땅을 밟으니 너무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추모식이 끝나고 7사단의 배려로 칠성 전망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 땅의 허리를 가른 철책과 우리 군국과 북한군의 초소를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북녘 땅에는 산에 나무 한 그루 없습니다. 너무 가슴이 허하고 현기증이 납니다. 눈을 감지만 기도도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철책이 너무 튼튼한 것이 오히려 더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학생들도 많은 것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이 모두 우리 선배들의 피로 지켜졌다니 ----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입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애국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 생각합니다. 이 땅이 하루 속히 평화롭게 사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그것이 이 땅을 지킨 순국 선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일 것입니다.
육사 27기 동기생 대표가 읽은 추모글을 함께 올려 놓습니다.
정경화 소령은 우리 학교와 후배들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선배님의 고귀한 뜻이 우리 학생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자랑인 정경화 소령!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안장식을 한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구려. 그때 수녀복을 입은 누님과 정 소령의 영정을 앞세우고 뒤따르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보이는 것 같네. 오늘도 변함없이 정 소령이 그토록 아끼고 보사피던 중대원인 백암 패밀리 전우들과 강릉고등학교 동문들, 당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모교의 후배들과 육사동기생들, 7사단 구홍모 장군을 비롯한 장병들, 이 지역 기관장, 보훈단체장등, 그리고 두 누님을 비롯한 유족 분들이 그대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 경화공원에 모였다네.
정 소령!
그대는 1977년 6월 21일. 그날 보병 7사단 5연대 3중대장으로서 중대원 22명과 함께 비무장지대 수색정찰 및 지뢰제거 작업 임무를 수행하던 중 6·25당시 M16대인지뢰를 발견하고 손수 안전핀을 제거하다가 안전핀이 녹슬어 부러지자 주변의 병사들을 향해 “모두 피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던져 지뢰 폭발을 온 몸으로 막아내며 부하들을 구하고 “나는 걸을 수 있다. 나는 아직 정정하다. 나는 군인이다.”라고 세 마디를 외치며 들것을 뿌리치고 일어서려다가 쓰러져 후송 도중 숨을 거두었지. 그대는 정녕 자신을 희생하며 부하를 구해낸 <제2의 강재구 소령>으로서 오늘날 우리 군의 귀감이 될 뿐 아니라 투철한 애국심과 숭고한 살신성인의 표상이 되고 있다네.
경화! 그대는 정말 참 군인이었네.
그대 있음에 우리 육사 27기 동기생들은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자랑스럽게 군 생활과 국가와 사회 각 분야에서 헌신하며, 그대의 희생정신과 솔선수범 자세를 본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네. 우리 모두는 경화 그대가 비록 몸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영원히 우리 마음 속에 경화의 늠름하고 당당하던 모습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다네. 부디 하늘나라에서 영면하시게.
2013년 6월 21일 육군사관학교 27기 동기회
출처: 교장선생님 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