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遇明(1593-1664) | -取善(1614-1695) | -1子 㒆(1636~1662) |
-[系子]翊承(1684~1751) |
-廷最(1725-1794) | -景煥 |
-廷晉(1732-?) | -景尹 | ||||
-景奭 | |||||
-3子 偉(1651~1714) | -翊采(1674~1723) | -廷輔(1696~1756) | -景綽 | ||
-翊承(1684~1751)[出系] | |||||
-後善(1624-1689) | -4子 佾(1680-1752) | -翊道 | |||
-翊德(1714-1765) | -廷烈 | ||||
-廷邦(1745-1816) | -景履 |
景履(1777-1841) | -必重(1803-1862) | -孝極(1825-1877) | -時遠(1849-1913) | -鍾玹(1879-1942) | -昌洙(1907-1971) |
-孝宅 | -昌遠 | -鍾學 | |||
-基重 | -孝祿 | -思遠 | -鍾喆 |
절첩보에 나온 계보 기록에 대해 소장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위 글과 절첩보 소장자가 전에 한 말을 종합하면 앞부분은 맨 처음부터 취선(取善, 1614-1695)공의 손자 익채(翊采, 1674~1723)공까지 한 사람의 필체로 나와 있는데, 취선공부터 익채공까지는 한지를 덧붙여 가려져 있고,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필체로 후선(後善, 1624-1689)공부터 그 8대손까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전모를 공개하지 않으니 어떤 분들이 나와 있는지 다 알 수는 없으나 일부 공개한 페이지에는 후선(後善, 1624-1689)공부터 현손 경리(景履, 1777-1841)공까지 나와 있는 것은 확인이 되고, 나머지는 경리공 현손(후선공 8대손) 종현(鍾玹, 1879-1942)공까지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후선공 후손 부분은 경리공의 현손 종(鍾)자 항렬이나 그 아래 수(洙)자 항렬의 누군가가 작성했을 것이다. 종현(鍾玹, 1879-1942)공이나 그 아들 창수(昌洙, 1907-1971)공이 작성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이미지를 보아도 앞부분과 후선공 후손 부분이 필체가 다른 것은 맞다.
이 절첩보에서 종(鍾)자 항렬까지 나오는 후선(後善)공 후손 부분은 1900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 분명하다. 필체가 다른 앞부분은 취선(取善)공 ~ 익채(翊采)공 계보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기록의 원출처는 취선공 손자 익채공 후손 가계일 것이다. 그러나 익채공 후손가에서 작성한 보첩의 원본이 후선공 후손가에 전해왔을 리는 없으므로, 절첩보 앞부분은 후선공 후손이 익채공 후손가에서 필사해온 필사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원본 보첩에 익채공 후손이 더 있었더라도 후선공 후손이 자신들 직계가 아닌 사람들까지 굳이 다 필사해 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필사해온 절첩보 앞부분에 익채공까지 나와 있다고 해서 익채공 후손가 원본 보첩 기록의 작성연대를 익채(翊采, 1674 ~ 1723)공이 졸한 직후로 단정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후선공 후손중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다른 필체로 후선공 후손 계보를 작성하고 익채공 후손가에서 베껴온 절첩보 앞부분에 이어 붙이면서 자신들 직계가 아닌 취선공 후손 부분 [取善 - 偉 - 翊采] 계보는 가리고 그 위에 덧붙여 최종적으로 "우명(遇明) - 후선(後善) - 일(佾) - 익덕(翊德) - ......" 순으로 계보가 연결되도록 절첩보를 만들었을 것이다. 앞부분을 베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후선공 후손이 있는 뒷부분 작성시기 1900년대 초와 많은 차이는 나지 않을 것이다.
익채공 후손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보첩에는 익채공 후손도 더 나와 있었을 것이나, 후선공 후손가에서는 자신들 직계로 필요한 부분만큼만 베껴왔을 것이니 죽산안씨들 주장처럼 익채(翊采, 1674~1723)공의 졸년 근처를 앞부분의 작성연대라고 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절첩보와 유사한 광주안씨 남포 문중의 보첩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되는 순흥안씨 판관공 파보(1924년)의 전의록(傳疑錄)과, 절첩보 계보의 앞부분과 동일한 광주안씨 상대 계보를 수록한 일제시대 문헌 대동충현보(大東忠賢譜)를 살펴보면 익채공 후손가의 원본 보첩도 1900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필사된 절첩보의 내용으로 보아 그 원본 보첩의 연대도 1900 년 이전이 되기는 어렵고,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1800년대 말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은 없다.
순흥안씨 판관공 파보 전의록(1924)은 남포(藍浦) 안정진(安廷晉) 보첩[또는 남포지보(藍浦支譜)]을 참고했다고 했는데, 위 계보표에 나오는 광주안씨 남포문중의 안정진(安廷晉, 1732-?)공과는 지명과 이름의 한자까지 같으니 동일인으로 추정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판관공 파보는 광주 안정진공의 시대보다 150여년 이상 후인 1924년에 경북 안동에서 간행되었으니 과연 광주안씨 남포문중 안정진 공의 보첩을 참고할 수 있었을 지 의문이다. 광주안씨 대동보(1983)에 보니 안정진(安廷晉, 1732-?)공 후손은 아들 둘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그 후 아무 기록도 나오지 않으므로 그 후손이 있었는지, 또 전해온 보첩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어쨌던 판관공 파보 전의록의 안씨시조 동래설 내용은 광주안씨 남포문중 절첩보와 유사한 점도 있고, 광주안씨 결세계보에 호(虎)가 들어있는 것도 같으므로 광주안씨 남포문중 기록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언급된 안정진 보첩의 실체는 모호하다. 어쨌던 남포문중 절첩보와 유사한 문건을 참고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 표에서 1행은 1719년 충주의 순흥보에서 베껴온 광주안씨 결세(缺世) 계보이며, 기미보(1739) 이래 역대 광주안씨 족보 별록에 수록되어 왔다. 2행은 순흥안씨 판관공 파보(1924년)의 전의록(傳疑錄)에 나온 계보이며, 3행은 아래 이미지에 나오는 남포(藍浦) 문중 절첩보(折帖譜)의 계보이고, 4행은 일제시대 문헌으로 추정되는 대동충현보(大東忠賢譜)의 광주안씨 계보이다.
1 | 邦傑 | -國臣 | -礪仲 | -輔平 | -憲思 | -武成 | -慶立 | -石昌 | -弼夢 | -弘美 | -益相 | -學成 | -忠季 | -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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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邦傑 | -國臣 | -虎 | -礪仲 | -輔平 | -憲思 | -武成 | -慶立 | -石昌 | -弼夢 | -弘美 | ||||||
3 | 邦傑 | -國臣 | -虎 | -礪仲 | -輔平 | -憲思 | -武城 | -慶立 | -石昌 | -夢弼 | -弘美 | -益相 | -學成 | -忠孝 | -生 | -吉祥 | -綏 |
4 | 邦傑 | -國臣 | -虎 | -礪仲 | -輔平 | -憲思 | -武城 | -慶立 | -石昌 | -弼夢 | -弘美 | -益相 | -學成 | -孝忠 | -生 | -吉祥 | -綏 |
붉은 글씨는 광주안씨 족보와 다른 글자로 오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푸른 글씨의 인물은 역대 광주안씨 족보의 계보에는 없는 사람들을 임의로 끼워넣은 경우이다.
광주안씨 결세계보는 안처대(安處大)공이 1719년 충주의 순흥보에서 베껴와서 광주안씨 기미보(1739) 별록과 순흥안씨 을유보(1765) 범례에 실려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므로, 이와 유사한 계보를 담은 절첩보가 기미보(1739)보다 앞서 익채(翊采, 1674 ~ 1723)공이 졸한 직후 작성되었다는 죽산측 주장은 근거없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을 하려면 연대가 명백히 기미보(1739)보다 앞서는 해당 결세계보가 적힌 문건이 제시되어야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공인된 광주안씨 족보에는 없는 호(虎)는 다른 안씨 문중 기록에 가끔 등장하는데, 처음 보이는 문헌은 1848년 죽산안씨 복야공파 족보의 "동국안씨 사실(東國安氏事實)"이다. 1848년 이전 어느 문헌에도 호(虎)는 보이지 않으며, 그러한 인물이 나온 근거도 알 수 없다. 절첩보에 호(虎)라는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그 연대가 1848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생(生)과 아들 길상(吉祥)은 광주안씨 인물이 맞기는 하나 위 계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는 다른 문중 사람이다. 길상(吉祥, ?-1380)의 아들 수(綏)는 전중시어사(綏)공보다 후대의 동명이인인데, 전중시어사공과 동일인으로 잘못 알고 위 계보에 그 부친 길상(吉祥)과 조부 생(生)을 집어 넣은 것이다.
계보외의 광주안씨 안길상(安吉祥, ? ~1380) 관련 자료 : 부친 생(生), 아들 수(綏)
전중시어사공(殿中侍御史公) 묘소 변어 및 관련 자료
절첩보와 대동충현보는 다른 어느 문헌에서도 볼수 없는 거의 동일한 잘못된 광주안씨 상대 계보를 싣고 있으므로 두 문헌은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문헌을 참고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충현보는 광주안씨 남포문중 계보도 아래와 같이 비교적 자세히 싣고 있다.
취선(取善) - 3子 위(偉) - 익채(翊采) - 정보(廷輔) - 경작(景綽) - 창중(昌重) - 효술(孝述) - 태원(泰遠) - 석우(錫瑀) - 종수(宗洙, 1849~1896), 영수(寧洙, 1866~1903)
후선(後善) - 2子 억(億) - 익하(翊夏) - 정섭(廷燮) - 경천(景天)
따라서 대동충현보는 절첩보나 유사한 남포문중 보첩, 특히 익채공 후손가 보첩을 참고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후선공 후손가에서 절첩보를 만들 때 필사해온 익채공 후손가 원본 보첩에는 계보가 영수(寧洙, 1866~1903)공까지 나와 있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대동충현보가 일제시대 문헌이므로 절첩보의 앞부분 계보와 익채공 후손 계보를 자세히 실은 익채공 후손가 원본 보첩도 비슷한 시기에 작성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광주안씨 남포문중 절첩보, 순흥안씨 판관공 파보 전의록(1924), 대동충현보는 모두 1900년대초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문헌이다. 필사본 절첩보를 만든 사람이 참고한 안익채 후손가의 원본 보첩의 연대도 내용상으로 보아 1900년 부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또 판관공 파보(안정진 보첩)에서는 "邦俊封竹山 邦傑封廣州 邦俠封竹城 "라고 하여 방준이 죽산안씨 시조처럼 말했으나, 절첩보에서는 "因改名 邦俊 邦傑 邦俠 一封順興 二封廣陵 三封竹城"라고 하여 방준을 순흥안씨 시조로 보고 있으므로, 안정진 보첩과 절첩보는 그 내용이 일치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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