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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시작된 미군 B-17들의 끈질긴 주간 폭격
- 상어 지느러미 수직미익의 날으는 요새들 B-17 E형, F형, G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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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운용되던 B-17들이 실패한 요인을 분석해, B-17에 대한 대대적인 재설계가 단행되었고, 드디어 1942년 7월부터는 새로운 B-17E형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E형은 고공에서 또 폭탄투하시 기체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수직미익의 크기를 대폭 늘여, 우리가 흔히 B-17하면 떠오르는 멋진 후방 동체와 수직미익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자체 무장도 기관총 총 13정으로 강화했다. 이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무장의 변화는 후미 기관총이었다. 태평양전선과 영국의 경험에서 이 후미 기관총좌의 시야가 좋지 않아 후방 방어가 취약하다는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그래서 E형부터는 아예 테일 터렛(후미 기관포탑)을 설치해 버렸고 덕분에 후미쪽으로 동체의 길이가 약 1.6 m 가량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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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드디어, 수직 미익이 우리 눈에 익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미국에 의한 유럽 폭격을 시작한 B-17E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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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512대 생산 주문이 떨어졌고, 유럽 전선의 미 제 8 공군에 처음 보급되었다. 그리고 1942년 8월에는 영국의 스피트화이어기들의 엄호를 받으며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철도 시설에 대한 실전 주간 폭격을 수행했다. 이때 18기의 B-17E 기들이 출진했고, 이들 중 "바보 양키"(Yankee Doodle)호에는 미국의 아이라 이커 (Ira Eaker) 장군이 탑승했었다고 전해진다. 이날의 폭격은 독일 공군 전투기가 출현하지 않아 별다른 피해없이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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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멤피스 벨호의 모습.... 이것도 역시 B-17F형이었다... 기수의 노즈아트가 멋들어진다. 그리고 킬 마크 처럼, 성공한 임무횟수를 그린 폭탄 그림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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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형의 후속모델인 B-17F 형은 1942년 5월 첫 시험 비행에 들어갔고, 이후 씨에틀에 있는 보잉 항공사에서 2300대가 생산되었으며, 더글라스와 록히드사에서도 라이센스를 받고 1100 여대를 생산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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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형은 자체 중량과 적재량의 증가로 이를 받쳐내기 위한 랜딩기어를 강화하고 이중 브레이크 시스템을 갖추는 등등, 몇가지를 제외하면, 외형상 일견 E형과 큰 변화가 없는 듯하지만, 내부적으로 많은 개선이 이루어진 버전이었다. 대표적으로 주익의 바깥쪽에 새로운 연료탱크를 장착해 항속거리가 6800 km(4220 마일)에 달해, 일명 "도쿄 탱크(Tokyo tanks)"라고 불렸으며, 폭탄 적재량도 4.35 톤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후에는 9.4 톤까지 투하용 폭탄을 실어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럴 경우 기동이 현격이 둔화되어, 특별한 임무를 제외하고는 이렇게까지 많이 적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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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으는 요새의 주인공 - B-17의 승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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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B-17G형의 기수 부분을 보여주는 일러스트. 앞에 있는 폭격 조준수와 기수 기관포탑이 보이며, 마치 간이 2층처럼 뒤쪽에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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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17C형 이후 버전들은 총 승무원수가 10명이었다... 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 폭격수, 탑 터렛(Top Turret 상방 기관포탑, 정비병 역할을 같이 수행했다)사수, 무전병, 볼 터렛(Ball Turret 기체 아랫쪽에 둥근 기관포탑)사수, 동체 좌측, 우측 사수, 마지막으로 후미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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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격 조준기가 앞쪽에 있기 때문에 폭격수는 기수쪽에 앉아 있다. G형에서는 기수 아랫 부분의 터렛(기관포탑)이 추가 장착되어 있어, 폭격수가 이 기관총의 사수를 겸하게 된다.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나란히 옆에 앉는데, 주조종사가 왼쪽에 자리한다. 그들 바로 뒤로 상방 기관포탑 사수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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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생각에는 이들 승무원 중, 기체 바닥에 위치하는 볼 터렛 사수가 가장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느낄것이다. 왜냐면 이 사수는 몸의 대부분이 동체 밖으로 튀어나온 기관포탑에 들어가 있어, 마치 창공에 매달려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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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볼터렛 사수의 사격시 자세. 마치 엄마 뱃속의 아기의 웅크린 모습으로 터렛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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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즉 적기의 사격이나 대공포 파편이 터지는 위치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튼튼한 장갑판을 둘렀다 해도, 적의 파편이나 기관포가 작열할 경우 휴지조작이나 마찬가지라, 승무원 누구나 똑 같은 위험 지역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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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것은 이 하방 볼 터렛이 때에 따라 떼어 낼수 있게꿈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즉 비상시 동체 착륙을 감행해야만 하는 경우, 그전에 동체에서 볼 터렛이 분리되어 떨어져 나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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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볼 터렛의 모습.... 이 그림을 보면, 비상시 볼터렛이 분리되게끔 설계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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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B-17D형까지는 기체 아랫쪽 기관포탑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볼형태가 아니었고, 대신 사수는 잠망경을 이용해 조준하는 비실용적인 형태였는데, B-17E형부터, 볼터렛으로 바뀌었고, 사수가 아예 좁고 둥근 터렛속에 들어가 허리를 둥글게 굽힌 상태로 앉아 사격을 했다. 두발로 페달을 밟아 터렛을 움직이며..... 그래서 불터렛 사수는 승무원 중 체구가 가장 작은이가 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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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볼 터렛은 두개의 출입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외부로, 하나는 동체로 열리게 되어있었다. 보통 이륙시 불터렛과 지면과의 거리가 40 여 cm 밖에 되지 않아, 대부분의 볼 터렛 사수들은 이륙후정상적인 순항이 시작되어서야 이곳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즉 터렛에서 외부로 통하는 문은 탑승시보다는 비상탈출시 주로 이용되는 비상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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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 벨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승무원 중 가장 외로운 위치가 바로 후미 사수 자리다. (참고로 멤피스벨 영화에선 이 후미사수가 혼자 떨어져 자신의 자리에서 나무 비행기를 깎는 모습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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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후미 터렛의 사수의 사격자세... 마치 기도를 하듯, 무릅을 꿇고 사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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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냐면,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기수 부분이나 동체 중앙에 즉 서로의 시야안에 모여 있는데, 유독 후미 사수만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공을 비행할 경우, 후미 사수가 저산소증에 빠질 경우, 의식을 잃어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있다고 하며, 후미 사수에대한 산소공급 또한 중요한 설계의 요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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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고공에서 특히 겨울에 기관총좌 때문에 외부와 개방된 곳에 자리잡아야하는 사수들은 매서운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그래서 B-17 승무원들은 전기 히터 장치가 된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있었고, 사수들이 위치하는 곳마다, 기내 이곳 저곳에 전기 플러그가 만들어져 있었다. 또 탑승위치 중 가장 추운곳은 역시 후미 사수 자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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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격과 요격의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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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초..... 미육군 항공단 폭격전술 중 주목할만한 변화가 하나있었다. 즉 종전에는 폭격기 편대가 목표물에 접근하면, 각 폭격기 마다, 자체적으로 조준을 하고, 준비된 폭격기부터 임의로 폭탄투하를 시작했었는데, 이제는 폭격기 중 선두를 맡는 편대장기를 지정해, 이곳에 가장 유능한 폭격조준병을 배치하고, 편대장기가 투하를 시작하면, 밀집한 다른 폭격기들이 무조건 동시에 폭탄을 투하하는 방법..... 이것은 완전히 "모 아니면 도"의 폭격전술이었지만, 전반적으로 폭격의 정확성을 높여 꽤 성과를 거둔 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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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이 당시 독일은 연합군 폭격기들을 제대로 요리하는데 익숙치 못했다고 해야 할것 같다. 즉 대규모 폭격편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각 비행대마다 긴밀한 공조가 필요하고, 시간차 공격으로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폭격기의 항로를 따라 가장 가까운 비행기지에서 순차적으로 요격기들을 이륙시켜야 했는데, 1943년초만 해도 독일 공군은 이런 씨스템과 조화로운 공격에 서툴렀다. 즉 각 전투기 조종사들의 개인 기량에 의존해, 폭격기를 치려했지, 비행대간의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공군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간의 협력체계가 자리를 잡아갔고, 최초 10 여차례 임무에서 성공적이었던 B-17은 최대의 고비를 맞게 된다. 그때가 1943년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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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w 190들이 B-17의 대편대를 공격해 들어가는 모습.... 서부전선의 상공은 폭격기들과 요격기들간의 싸움이었다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물론 나중엔 호위 전투기가 가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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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비행대간 슬슬 손발이 맞기 시작하면서 벼르고 있던 독일 공군의 첫 카운터 펀치가 1943년 4월 작열한다.... 그러니까 4월 17일, 독일 브렌멘의 Fw 190 생산 공장을 폭격하기 위해 무려 115대에 달하는 B-17 폭격기들이 출격했고, 이에 독일 요격기들이 강력한 방어에 나선 것이다. 이날 단 하루의 임무로 16기의 B-17이 격추되고 말았다. 보통 폭격 임무에서 5% 손실률이 성패를 가름하는 수치가 된다. 즉 출격기의 5%이하의 손실을 가지고 폭격을 완수하면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라는.... 단 5%씩 손실을 계속 본다고 생각해 보면, 약 20회의 임무를 수행하고 나면, 완전히 비행단 전체를 갈아치워야하는 수준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날은 5%는 고사하고 10%가 넘는 손실을 보았으니, 실패했다고 봐야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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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독일 요격기들은 일명 " twelve o'clock high " (12시 정면 상방) 전법을 사용했다. 즉 미군 폭격기대 편대의 정면 상방으로 이동해, 헤드온으로 날아 꽂히는 공격전법..... 이 공격법은 일설에 의하면 독일의 에이스 에곤 마이어 (Egon Mayer)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서부전선 독일 공군 에이스들은 대부분 B-17이 전방이 가장 취약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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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17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G형의 모습.... 가장 많은 생산댓수를 기록했으며, 호위 전투기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독일의 산업기반을 폐허화한 폭격기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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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B-17들의 다수가 독일 요격기들의 헤드온 공격에 나가떨어졌다는 사실은, 전방 방어 화력의 강화가 후속버전의 업그레이드에서 무엇보다 선행되어야할 보완 사항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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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17G형은 전방 무장 강화에 촛점을 맞춰, 기수 아랫 쪽에 두정의 12.7 mm (50 캘리버) 기관총을 추가 장착한 기관포탑을 추가해, 총 15정의 기관총으로 화력이 강화되었다. (G형 중 후기형에서는 엔진도 개선된 터보차저를 장착한 R-1820-97 엔진을 달아, 고공 운항 능력을 강화했다. G형은 가장 많은 생산양을 기록한 버전으로 총 8680대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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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G형의 가장 큰 특징인 턱밑 수염 같은 기수 기관포탑의 모습.... 폭격수가 운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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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8월과 9월사이 기수 아래에 턱수염과도 같이 추가 기관포탑을 장착한 B-17 G형들이 영국에 주둔한 미군에 보급되었다. 이젠 절대 독일 요격기의 헤드온 공격에 허무하게 나가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보여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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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멤피스 벨"의 귀환 (MEMPHIS B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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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이 참전한 첫 3개월간 폭격기 80%가 격추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폭격기 승무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주어진 25회의 임무 비행을 마치고 귀향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듯했다. 멤피스 벨은 모든 폭격기 비행단 대원들에게 희망의 존재였다. 그리고 멤피스 벨 대원들은 미8군 처음으로 25회 임무를 완수한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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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25회 임무를 완수한 B-17 승무원들.... 이들은 멤피스벨에 운명을 싣고, 끝내 유럽 상공의 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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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9월, 멤피스 벨의 승무원들은 처음 만났고, 영국으로 가기전 멤피스를 거쳤는데, 조종사의 애인을 상징하며, 그들 애기 B-17 F형의 애칭을 멤피스 벨(멤피스의 미녀)로 정하게 된다. 그리곤 1942년 11월부터 1943년 5월 7일까지 목숨을 건 148 시간의 임무 비행을 완수했다. 그들은 총 60 톤의 폭탄을 독일에 투하했고, 8기의 독일 요격기를 공인 격추했으며, 5기의 비공인 격추와 20기의 요격기에 데미지를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고 전해지며 이들이 멤피스벨에 탑승해 비행한 거리는 총 2만 마일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후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아직도 "대니 보이"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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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유럽 상공의 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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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번의 주간폭격 실패의 쓴맛을 본 미국이었지만, 미국의 장기 중 하나가 끈질김과 그것을 받쳐주는 막대한 물량공급이다.. 미국은 B-17 E형과 F형의 수차례 보강 작업을 거쳤고, 정확도가 높은 주간폭격을 끈질기게 고집했다. 그리고 수차례 보강작업으로 B-17의 방어력이 향상되었다는 위안과 같은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다시한번 미공군의 폭격기 단독 전략폭격과 이에 맞서는 독일 요격기들의 대대적인 사투가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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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익 하나가 날아가 버리는 날으는 요새.... 비행 시뮬레이션의 명작, EAW의 한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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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7월, 미국은 독일 슈바인푸르트의 볼베어링 공장과 레겐스부르크의 Bf 109 공장에 대한 폭격을 감행했는데, 제 3제국 심장부를 관통해야하는 극히 위험한 임무였다. 그리고 7월 17일, 이날 단 하루만에 376 대의 B-17 중 60기가 격추 파괴되고 말았다. 그 손실률은 거의 20%에 육박하는 것으로 B-17 임무는 정말 죽는냐 사느냐하는 것이, 돌아가는 리볼바 권총의 탄창에 의해 결정되는 러시안 롤렛 게임과도 비교되는 몸서리쳐지는 임무로 각인되었다. 즉 출격한 항공기 열에 한 둘은 결국 돌아오지 못하니, 언제 어느때 자신이 그 불운한 그룹에 속하게 될지... 그렇다고 특별히 어떤 기술적인 숙련이 이루어지면, 그 10%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격추되느냐 마는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의 운에 달린 것이었으니..... 마치 횟집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처럼 오늘은 다른 물고기가 채에 건져졌다해도, 자신이 언제 도마위에 올라갈 신세가 될지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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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17의 내구성을 보여주는 그림....... 우측 프로펠러 하나가 완전히 파손된 상태에서 돌아온 B-17의 모습...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승무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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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 승무원들은 매일같이 피할 수 없는 임무에 대한 공포로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니, 지상에 돌아와 망나니 같이 구는 그들의 행동에 지휘부가 관대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분출구 마저도 허락치 않으면, 아마 그들은 모두 미쳐버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전투기 조종사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출격이 있는 날 아침 식사시간에는 취사병들에게 계란 요리를 자기가 원하는대로 해달라고 직접 지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날의 아침식사가 그들 생애 마지막 식사가 되어 버릴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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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역시 B-17의 생존력을 보여주는 사진... 러더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살아돌아왔다. 비시를 해보면 알겠지만, 러더 없이 착륙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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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9월 6일, 총 400 대의 폭격기들이 독일 슈투트가르트 볼베어링 공장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지만 기상이 좋지 않아 폭탄은 도심에 투하되었고, 이날 총 45기의 폭격기들이 격추되었다. 그 한달 후인 1943년 10월 14일에는 슈바인푸르트 볼베어링 공장에대한 재폭격이 감행되었는데, 출격한 총 291기의 B-17 중 60기가 격추 파괴되는 엄청난 피해를 또 다시 감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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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전선의 B-17과 미국의 영웅 켈리(Colin P. Ke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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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태평양 전선에서의 B-17의 미래를 예견하듯, B-17은 첫 일본과의 대면은 이렇게 완패로 끝난다... 사진은 진주만에서 떠보지도 못하고 깨지는 B-17D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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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차대전 중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을 이야기 할때면, 항공기들이 빠질 수 없고, 또 항공기마다 제각기 멋진 활약상을 간직하고 있다. P-38의 경우, 유럽 전선에도 활약했었지만, 태평양전선의 눈부신 분투로, 태평양에 더 어울리는 기종으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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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대로 B-17 폭격기는 전체 임무횟수의 98%가 유럽전선에서 출격한 것이라 그런지 태평양에서의 임무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또 실제로 적함대 공격에 사용되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폭격기보다는 단발 급강하 폭격기나 뇌격기가 더 효과적이었다. 태평양 전선의 B-17의 밝지 않은 앞날을 예고하듯, B-17이 첫 적을 만난 것도 진주만 기습이었고, 활주로에 주기중이던 B-17들이 떠보지도 못하고 완파 또는 부분파손을 입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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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태평양 상공에서의 날으는 요새의 이야기는 한명의 영웅을 이야기하며 접을까한다. 우리홈에서도 전에 소개한바 있는 콜린 캘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41년 12월 10일, 콜린 캘린 대위는 B-17C 폭격기를 몰고, 일본의 전함에 대한 고고도 폭격을 감행했다. 폭탄중 몇발이 정확히 적함에 명중했으나, 곧 제로센들의 집중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이 요격기 편대에는 일본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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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의 B-17은 무수한 명중탄을 얻어 맞았지만, 비행이 가능했고 끝까지 기지를 향해 날아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화염에 휩싸인 애기를 포기해야할 순간이 다가왔고 캘리는 전 승무원에게 낙하산 탈출을 명했다. 자신은 동료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조종간을 끝까지 잡고 모두 뛰어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마지막 대원의 탈출을 확인한 직후, B-17기는 공중폭발을 일으켰고, 캘리는 자신의 애기와 산화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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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한 승무원들은 일본 전함을 격침시켰음을 보고했고, 지휘부는 비록 전사했지만 캘리에게 무공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고 하며, 캘리는 태평양 전쟁 초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날 캘리가 명중시킨 것은 일본의 전함은 아니었고, 순양함 사쉬가리호였으며, 이역시 격침된 것이 아니라, 경미한 파손을 입은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결과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희생정신과 동료애는 높이 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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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위 전투기들을 기다리는 빅프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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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상방 기관포탑 주위가 독일의 로켓을 맞고, 심하게 파손된 모습.. 바로 앞이 조종실인데, 이 B-17도 귀환에 성공했다.. 역시 놀라운 생존력의 요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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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말이되면서, B-17들의 손실이 엄청나게 축적되었고, 주간폭격의 효용성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났다. 미육군 항공단내에서 뿐 아니라, 영국의 수상 처칠까지도 미국에게 무리한 주간 폭격 보다는 그나마 안전한 야간폭격으로 선회할 것을 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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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미육군 항공단은 지금까지 피해는 컸어도 지속적인 폭격으로 독일의 항공 산업을 위시한 생산력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고 판단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 요격기의 수가 줄지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기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 역시 주간폭격 효용 논란을 일으키는데 한몫을 했다. 실제로 독일 생산력의 회복속도는 매우 빠른 편이었으며, 연합군의 폭격이 거세지면서, 산업시설의 철저한 분산 정책으로 생산력을 보존하고자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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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여담을 한가지 이야기하자면, 사실 1943년 연합공군은 독일의 항공기 산업시설과 또 모든 군수품의 기간이 되는 볼베어링 공장을 주로 목표로 삼아 공격했다. 그러나 결과는 독일의 항공기 생산량은 증가했다.... 물론 독일이 산업시설을 적절히 분산했고, 젖먹던 힘까지 써서 파괴된 공장을 복구한 노력도 주효한 것이지만, 연합공군이 1944년 말까지도 모르던 사실이 있었다. 즉 독일은 부족한 볼베어링 수요의 충족을 위해 스위스등지에서 많은 양을 수입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1944년이후에야 이것을 알아차린 미,영에 의해 스위스는 수출을 중단한다... 정말 스위스라는 나라....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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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위 전투기 없이 폭격기 단독으로 독일 심장부를 공격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천만한 일인지 명백해진 것이다. 미국은 항속거리가 충분한 호위 전투기가 영국에 도착하길 기다려야만 했고, 당분간 전략폭격은 호위 전투기 기동 반경 안의 목표로 좁히는 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얼마후 P-47기들이 장거리용 보조 연료탱크를 달면서, 다시 B-17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1944년 봄에는 미국의 야생마 노쓰 아메리칸 P-51D 무스탕들이 도착하면서, 이젠 베를린까지도 호위 전투기들을 대동하고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무스탕은 한마디로 B-17기들의 수호신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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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17의 영원한 친구이자 수호천사 무스탕.... B-17들이 비행운을 끌며 고공을 날고, 포케볼프들이 그위를 덮치고, 다시 그위에선 무스탕이 급기동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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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무스탕을 기다리며 보내던 1943년의 겨울 동안에도, B-17들은 지속적으로 폭격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유럽의 전통적인 겨울 기상에 의해 임무가 무산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즉 지상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먹구름층이 목표물을 가려, 폭격의 성공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때 영국산 레디더(H2S)를 시범적으로 편대 선도 B-17에 장착해, 다른 편대기들이 이 선도기의 인도를 받는 방법이 시도되었다. 후에는 미국산 레이더(H2X)로 교체 장착하여, 실전투입되기도 했다. 이레이더는 기수부분 아래에 장착했고, 레이더의 스크린에 지상의 구조물을 파악해 폭격을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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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주간 - 유럽 상공의 전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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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2월 20일.... 이날 부터 약 1주일간의 기간을 흔히 "대주간(The Big Week)" 이라고들 부른다. 무수히 날아드는 B-17과 또 이를 요격하기 위한 독일 전투기 간의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계속되 던 팽팽한 대결이 이때를 기점으로 확연히 연합공군의 우세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대주간 동안 연합공군은 244기의 중폭격기와 33기의 전투기를 잃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의 피해도 엄청났고, 짧은 시기에 많은 요격기와 우수한 파일롯들을 잃어 버린 독일은 이제 더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루프트바페의 대들보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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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연합군 폭격기 승무원들과 전투 조종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대주간 동안만 600기의 독일기를 격추했다고 하며, 생산라인위에 올라있던 Bf 109 700대가 완성직전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물론 한대의 요격기를 여러명의 사수가 동시에 조준할 경우가 많아 격추전과가 과장된 감이 있지만 수치로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주간을 비롯해 1944년 첫 3-4 개월간 독일공군은 1000 명에 달하는 베테랑 장교 조종사를 잃고 만다. 이들은 모두 신참들에게 공중전의 진수를 전수할 수 있는 인재들이었지만, 연합 폭격대의 대공세를 막기 위해 출격해 하나 둘 격추되어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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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이후, 독일 공군은 연합공군의 폭격에 적절히 요격기들 집중이 어려워졌고, 유럽상공의 제공권은 연합군측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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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B-17 편대속으로 뛰어드는 Bf 110의 모습..... 과연 살아올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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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볼베어링 공장과 전투기 공장등에 집중되었던 1943년과는 달리 1944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폭격 목표는 독일 연료로 전환되면서, 많은 정유 시설이 파괴되어 1944년 중반이후, 독일의 연료 생산량은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지기에 이른다. 이젠 독일은 비록 많은 전투기를 생산해 낼수는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창공에 띄울 연료와 조종사난에 허덕이게 된 것이다. 이제 유럽의 전황은 최고의 정점을 넘어 제3 제국은 내리막길에 들어선 것이다. 지금까지 느리기는 했지만 독일을 한발 한발 뒷걸음 치게 만들고 드디어는 벼랑 끝에 서게 만든 연합군의 선두에는 엄청난 희생을 이겨낸 B-17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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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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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17 폭격기들은 유럽전선에서만 640,036 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이것은 B-24가 45만톤, 다른 모든 연합군 항공기의 투하량의 합계가 단지 46만톤이었던 것에 비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수치뿐 아니라, B-17이 투하한 목표는 대부분 독일의 기간 산업 시설들이었으니, 그 파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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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유럽전선에서 연합군의 승리의 결정적인 견인차는 누가 뭐래도 B-17이 아닌가 싶다. 놀랍고 믿기 힘든 내구성을 지닌 B-17기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냈다는 것은 그들이 수행한 임무의 난이도를 짐작할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B-17은 총 12600 여대가 생산되었고, 그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4750대가 임무도중 격추 혹은 파괴되었다.) 그리고 세계최강 독일 공군에 맞서 용전분투한 B-17과 그 승무원들의 투혼이 이차대전의 승리와 종결을 앞당긴 것이니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전투기는 영화를 만들고 폭격기는 역사를 만든다고 했던가? B-17은 진정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며, 그들의 무용담은 창공이 푸르른한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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