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납(寶納)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보물이란 것이 무엇일까.
명필 한석봉(한호)이 가평군수로 재직(1599~1560)할 당시 이 산을 즐겨 찾았고
그의 글씨를 감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어려서부터 많이 듣던 얘기인데, 애석하게도 보납산에서는 아직까지
한호의 글이 새겨진 바위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보납산엔 보광사(寶光寺)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절 칠성각 위에 있는 석굴에 산신과 함께
한석봉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보납산은 바위산이다.
가평천 방향으로는 기암괴석이 있어 일부는 흡사 금강산의 한 줄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규석을 채광하던 흔적이 일부 흉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한석봉이 군수로 재직하던 시절 이 바위산을 자주 찾았고
자신의 호마저 석봉으로 바꾸었다는 전설은 그래서 꽤나 설득력이 있다.
보납산은 또 풍수지리 형국론상 고사독서형(高士讀書形)으로 볼 수 있다.
균형있게 볼록하고 봉우리가 솟았고
그 앞에 책상에 해당하는 평평한 봉우리가 이어지는 선비형의 산이다.
혹자는 문필봉이라고도 하는데 문필봉이 될 만큼 봉우리 끝이 뾰족하지는 않다.
최근 가평고등학교가 보납서원을 세우면서 신흥명문으로 대두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석봉이라는 호는 개성인근의 그의 고향 금천에 있는 봉우리를 뜻하는 것이었지만
이런 전설이 있을 만큼 가평은 석봉에게 매우 각별한 곳이었음은 분명하다.
한석봉은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아니었다.
진사시 합격이후 그 필체의 탁월함으로 승문원 사자관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임진왜란이라는 난세는 그와 같은 명필에게는 큰 기회였다.
수많은 중요한 공문서가 한석봉의 손을 거쳤으며
왜란이 끝나고 그 공을 인정받은 결과가 바로 종4품 가평군수라는 자리였다.
가난한 농촌 출신이었던 그로써는 그야말로 피와 눈물로 일군 결과였다.
요즘도 행정고시 출신이 아닌 자가 서기관(4급)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당시로서는 기적과 같은 결과였다.
한석봉은 이미 조선의 명필로 범할 수 없는 명예를 얻었지만
그의 가장 높은 벼슬은 '가평군수'였다.
보납산은 가평군청에서 직선방향으로 바로 내다보인다.
가평읍의 '안산(案山)', 보납산을 그는 사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석봉은 아침마다 이 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보납산은 소읍의 안산치고는 매우 높아서 이 곳에 오르면 가평읍을 한 눈에 관망할 수 있다.
직접 백성과 대면하는 직에 처음이었던 석봉,
이 곳에 올라 전란으로 피폐해진 이 작은 현을 어찌 재건해야 할 지 고민도 했을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