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표고버섯과 쇠고기로 소를 만든 규아상, 우족(牛足)을 6시간 동안 고아 석이버섯과 실고추·잣 등을 얹어 굳힌 족편,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도미 살을 떠서 만든 도미면, 달걀지단과 쇠고기 등을 삶은 미나리로 묶은 미나리 강회…. 간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한 색색의 더덕생채도 먹음직스럽다.
노래와 춤보다 더 즐길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해서 ‘승기악탕’(勝妓樂湯)이라고 부른 도미면과 미나리강회, 더덕생채 등은 조선 영조시대 봄철에 원로대신들을 위해 연 잔치인 ‘기로회’ 때 차린 주안상의 메뉴. 이른 아침부터 이 음식들을 좀더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게 재현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손길이 예쁘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왕족이 먹던 궁중음식을 연구하는 모임, ‘지미재(知味齋)’의 회원들이 아침부터 부산을 떠는 이유는 하나. 바로 이번 주말 덕수궁에서 열리는 전시회 때문이다. 지미재는 중요무형문화재 38호로 지정된 ‘궁중음식’ 전수자인 황혜성 여사가 세운 ‘궁중음식연구원’에서 궁중음식을 배운 이들의 모임이다.
1970년 처음 문을 연 궁중음식연구원은 궁궐에서 먹던 궁중음식을 일반인들에게 전수하고 조리서를 연구, 맥이 끊긴 음식을 복원하는 데 힘써 왔다. 그간 배출한 졸업생만 4,500여명. 졸업생 중에는 퓨전요리 연구가로 유명한 김하진씨, 서울 강남 일대에서 꽤 알려진 이바지 음식점을 하는 김매순씨를 비롯해 한정식집과 떡집 등 요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꽤 된다. 그렇지만 200여명의 지미재 회원 대부분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일반인들이다.
“연구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땐 외교관 부인이나 대학교수 부인, 재벌가의 며느리 등 여유있는 집 여자들이 많이 배우러 왔죠. 그러나 요즘은 전통음식의 맥을 잇는다는 차원에서 제대로 음식을 배워보려는 이들이 많이 찾아요”
15년 전 처음 이곳에서 궁중음식을 접한 김성애씨(71)의 말이다. 요즘에는 81년생 대학생까지 배우러 올 정도로 연령층이 다양해졌다. 또 단순히 요리를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창업으로 연결하려는 이들도 늘었다. 부산·광주·김해 등 지방에서도 1주일에 두번씩 올라와 요리를 배우고 간 이들이 많다.
“궁중음식이라고 하면 값비싼 재료로 만든 음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보통 민가에서 먹던 것들이에요. 또 전국 각지의 진수품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원성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진수품의 작황을 보고 지방의 정황을 파악하는 수단이었지요”(이혜숙·53)
음식을 통해 궁궐의 문화와 역사를 새로이 보게 됐다는 지미재 사람들은 매달 한번씩 모여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조리서를 따라 새로운 요리를 연구한다. 봄·가을이면 전국에서 열리는 음식축제를 찾아 제철 음식을 맛보고 재료를 사다 직접 만들어본다. 어느 계절에 어떤 재료가 가장 싱싱한지를 꿰뚫고 있는 이들은 1년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매해 전시회를 열었다.
물론 총지휘는 궁중음식연구원의 대모인 황혜성 여사와 한복려 원장이 맡지만, 실제로 요리를 만들고 이를 보기좋게 꾸미는 일은 지미재 회원들의 몫이다. 97년에는 ‘궁중음식, 혼례음식, 옛음식 전시회’를 열었고 99년에는 황혜성 여사의 팔순을 기념해 ‘진찬의궤’에 따라 조선왕실의 마지막 팔순잔치였던 조대비 팔순상을 그대로 재현했다. 2001년에는 ‘옛 음식책이 있는 풍경전’을 열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리서인 ‘신가요록’과 안동장씨 정부인이 펴낸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 ‘원행을묘정리의궤’ ‘시의전서’ ‘규합총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등을 보고 옛음식을 복원했다.
“고서를 읽다보면 음식 이름이나 재료를 이두를 써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자를 잘 안다고 요리법이나 재료를 척척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누가 ‘乫飛(갈비)’를 보고 갈비를 생각하고, ‘朴古之(박고지)’를 박고지라고 생각하겠어요?”(이현숙·55)
“의외로 궁중의 잔치 등을 기록한 의궤가 상세해요. 정조가 수원 사도세자의 능에서 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초조반부터 저녁 수라까지 어떤 음식을 어떤 그릇에 담아 먹었는지, 떡은 얼마나 높이 쌓아 장식했는지 아주 자세하게 기록돼 있어요. 심지어 인부들에게는 어떤 그릇에 음식을 담아 식사를 줬는지도 남아있지요”(김재영·47)
인스턴트 음식과 패스트푸드가 우리의 식탁을 점령하고 있을 때, 지미재 사람들은 몇시간씩 정성을 들여 뼈를 고아 육수를 만들고 색감을 내기 위해 담쟁이덩굴을 따다가 함께 식탁을 장식하는 센스를 발휘한다.
“요즘 퓨전을 떠들어대지만 근본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서양음식, 퓨전음식을 배우다보니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어요. 요즘 세계적으로 발효식품의 우수성이 인정받고 있고 슬로푸드운동이 일어나는 걸 보면, 궁중음식이야말로 이런 트렌드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전현숙·44)
궁중음식을 배울수록 점점 미궁에 빠져드는 느낌이라면서도 입가에 흐뭇함을 잃지 않는 지미재 사람들. 손끝으로 정성스레 만든 궁중음식을 통해, 우리 음식의 맛과 향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며 가슴 설레는 이들의 모습이 새파란 가을하늘 빛깔만큼이나 곱다.
-27·28일 덕수궁서 궁중음식전, 390여가지 전통음식 선보여-
27일과 28일 덕수궁에서 열리는 ‘만남·식연(식연)-궁중음식전’은 조금 특별한 전시회다. 조선왕실에서 먹던 음식들이 궁궐에서 전시되기는 처음. 덕수궁 내 중화전과 석조전, 준명당, 즉조당, 석어당, 정관헌 등 7개 전각에 궁중의 수라상과 잔칫상, 다과상이 차려진다. 지미재 회원들 외에 병과 과정을 수강한 동현재, 김치 및 밑반찬 강좌를 수강한 강녕재, 부산 회원들의 모임인 자경재 등 회원 100여명이 390여가지 음식을 정성들여 만들었다.
임금이 이른 아침 미음으로 속을 보하는 초조반, 오전 10시쯤 먹는 아침수라, 점심때 국수나 만두 등을 올리는 낮것상, 오후 5시에 먹는 저녁수라, 밤중에 내는 야참으로 구성된 임금의 하루 식사를 모두 볼 수 있다. 특히 고종과 고명딸 덕혜옹주가 먹던 아침식사, 한해의 마지막날인 그믐에 궁중에서 먹던 별식, 세조때 천렵을 가서 먹던 궁중쌈, 순종 세자빈이 혼례때 큰상 앞에 놓고 입맛을 다시는 임매상, 고종과 순종의 주안상, 봄철 기로회 잔치음식, 사냥터에서 먹던 점심수라 등 12가지 테마에 따라 차린 특별한 상차림이 포함돼 있다. 신선로, 구절판, 족편 등 비교적 잘 알려진 궁중음식을 비롯해 골동면, 도미면 등 일반인이 잘 모르는 음식까지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02)3673-1122 www.foo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