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저 솔방울을 흉내 낼 수 있으랴
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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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솔방울을 건넨다.
솔방울은 내 손바닥 뒤에서 순간 확장을 일으킨다. 순간 확장을 일으킨 솔방울은 순간 은유가 된다. 갈피갈피마다 햇빛이 숨어, 또는 바람이 숨어, 또는 비가 숨어.........홑겹이 아니다. 겹겹이다. 논리적이 아니다. 설명하지 않는다. 엘리엇의 촉매작용처럼, 어느 날의 햇빛의 변태, 어느 날의 빗방울의 변태. 어느 날의 숨의 변태, 그렇다. 바로 시의 은유다. 은교여, 저 솔방울의 은유를 이해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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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메모하지 말라.
현대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결코 스켓치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호크니가 시인이었다면 메모장같은 것을 들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미지들을 잊어버려 버린다고 했다. 그 대신 오래 들여다본다고 했다. 그런 다음에도 오랜 시간이 지나 살아나는 것, 그 이미지를 하얀 캔버스에 앉혀준다고 했다. 나도 나에게 새삼 중얼거린다. 이미지를 기억하되, 잊어버려라, 라고. 그 위에 다른 이미지를 끝없이 덧씌우라고. 그런 다음에도 긴 시간이 지나 어느 날 문득 살아 나는 것____ 그것을 쓰라고. 그것의 형상을 무명· 속에서 꺼내주라고.
어느 날 데이비드 호크니는 인터뷰어에게 말했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확실히 본다,고. 그의 그림 제목이 재미있다.
월트게이트 숲, 3월 30일~4월 21일
월트게이트 숲 Ⅲ, 5월 20~21일
‘...그 장소들이 지닌 매력은 컨스터블이 그린 이스트 버골트의 장소들처럼 그곳을 오랫동안,____ 여기에 하나 덧붙이고 싶다, 그 순간을 오랫동안____ 열심히 관찰한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는 호크니의 삶과 예술에서 핵심적인 행위이고, 또 그의 가장 큰 두 가지 기쁨이었다.
시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시 몸에게도. 시 몸을 우리가 육화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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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렇다.
시의 시작은 우연이다. 그 단어가 거기 있었다. 그 단어를 시인은 선택했다. 순간 우연은 필연이 된다. 우연의 필연화. 절대적 우연의 경험적 필연화, 우연의 육체성화. 둘의 포옹
필연적 은유가 일어나는 심해.
릴케는 이렇게 말한다. “시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경험이다. 단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사물들을 보았어야 한다...........” .....추억은 필요하다. 그러나 추억은 잊혀 질 필요가 있다. 망각, 이 심오한 변신의 침묵 속에서 마침내 한 줄 시의 한 단어, 그 첫마디가 탄생하기 위해 추억은 잊혀 질 필요가 있다. 경험은 여기서 존재와의 접촉, 이 접촉에 의한 자기 자신의 개혁, 즉 하나의 시련, 그러나 아직 확정되지 않은 시련을 의미한다. ‘릴케에게서 그런 추억의 의미를 직시한 모리스 블랑쇼의 글은 오늘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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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피그말리온을 다시 생각한다.
한 조각가가 있었다. 피그말리온.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돌 하나를 주웠다. 그 돌에 자기 전이면 매일 입 맞춤을 했다. 입 맞춤을 하면서 기도했다. 그 돌이 아름다운 여인이 되기를. 그의 기도는 깊고도 깊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기도를 한 다음 어둠 속으로 한숨 쉬며 일어섰을 때 그 돌은 움짓움짓 그에게로 걸어왔다. 그는 놀라서 그 돌의 입술을 만져 보았다. 보드라운 입술이 나풀거리듯 그의 손에 안겨 왔다. 그는 놀라 그 돌의 허벅지를 손가락 끝으로 찔러보았다. 옴폭 들어갔다. 돌은 아름다운 여인이 된 것이다. 그의 간절한 꿈은 그가 조각한 여인의 상을 실제로 숨쉬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든 것이다. 우연의 필연화, 너의 시에서 그런 우연적 필연이, 또는 필연적 우연성이 절대적 우연의 경험적 필연성으로 살아나고 있는가. 너의 시는 그런 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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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한다.
너무 홑겹의 결론에, 몇 행 가지 않아, 확산이 일어나지 않은 채 종착점 같은 마지막 연에 이르는 시. 논리적인 분석적 해석이 가능한 시. 우연성이 없는 시, 우연성의 필연성화가 없는 시----- 논리적 분석적 해석은 학교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학교 또는 강단 비평들에게나 주어버려라.
하긴 니체는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지만, 시에서의 해석은 그러한 사실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직관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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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아무래도 일인칭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읽는 순간 이인칭이 되는 시, 또는 이인칭인 순간 다시 일인칭이 되는 시,
일인칭과 이인칭의 합방이 남모르게 일어나는 시
아마도 이인칭만으로 시작하는 시는 일종의 성명서가 될 것이다. 감정의 성명서든 정치의 성명서든........구호가 행마다 난무하는.
그러면 그동안 나는 이인칭의 성명서만을 써온 셈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나는 시에게 항변한다.
일인칭을 건너온 이인칭이야말로, 또는 일인칭 위에 덧쌓인 이인칭이야 말로 변태가 가능하리라. 읽는 이의 가슴 속에선 변태의 나비들이 밀키드 나무 위에서처럼 가득 날아오르리라. 하지만 아직 답은 없다. 더 들여다본 뒤에 답은 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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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버지는 아침마다 정확히 7시 45분에 집을 나와 ‘척수성 소아마비와 바이러스성 뇌염연구소’로 갔다. 연구소는 모스크바 외곽에 브누코보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집에 여섯 시에 돌아와서는 저녁을 먹고 잠시 눈을 붙인 다음 앉아서 글을 썼다. 산문도 쓰고 의학 연구논문도 썼다. 열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산책을 하기도 했다. 주말도 대개 글을 쓰면서 보냈다.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글을 썼지만 글쓰기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놓고 고심했으며 손으로 쓴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 일단 고치기가 끝나고 나면 반들반들 윤이 나는 구닥다리 독일제 에리카 타이프라이터로 쳤다. 그 타자기는 1949년에 삼촌이 구해준 2차대전 전리품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계속 글을 썼다.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는 일도 없었고, 국가보안위원회와 마찰을 일으켜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서 지하 출판으로 유통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출간될 희망도 기대도 없이 글을 쓴다는 것, 문학에 대한 신념이 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그럴 수 있었을까? 칩킨의 글을 읽어준 사람은 고작해야 아내와 아들, 모스크바 대학에 다니는 아들 친구 두엇뿐이었다. 모스크바 문단에는 칩킨의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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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얼거린다. 은교여
보이지 않게 보이기
들리지 않게 들리기
그림자 내리기
호크니의 숲의 그림을 기억하라. 봄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겨울을 들여다보아야 함을,
‘겨울을 지켜보고 난 후에야 봄의 풍요로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터널 이후에 그린 두 번째로 큰 그림은 월드게이트 숲을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 작품을 그렸을 때 네 점의 그림을 그릴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작품을 그리고 나서야 겨울이 되어야 그 공간을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겨울에는 나뭇잎이 적고 나무가 빛을 향해 곧게 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만두지 않고 연작을 그렸던 겁니다.
..봄이 무르익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까지 아마 2~3년은 걸릴 겁니다.’
아아, 2-3일 가지고 그 무엇을 어찌 이해할 것인가. 한 공간을, 한 시간을 .......어찌 절대적 우연의 언어로 그것을 가져와 경험적 필연을 이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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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크니와의 인터뷰집, 『다시 그림이다』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참조.
*** 수전 손탁, 『해석에 반대한다』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