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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새로운 현실로서의 초월적 세계
-최기종 시집 『에말이요』
-윤병주 시집 『풋사과를 먹는 저녁』
박진희(문학평론가)
1. ‘목포’를 가로지르는 공동체적 감수성 – 최기종, 『목포, 에말이요』(푸른 사상, 2021.)
최기종 시인이 『목포, 에말이요』(푸른 사상, 2021.)라는 독특한 제목의 시집을 상재했다. “에말이요”란 “내 말 좀 들어보라”(「에말이요~」)는 뜻의 목포 방언이다. 제목대로라면 ‘목포, 내 말 좀 들어보라’, 곧 ‘목포’에 말을 거는 형식이 되는 셈이다. 제목에서도 드러나거니와 시집을 읽어보면 왜 최기종을 ‘목포의 시인’이라 부르는지 알게 된다. 시집 속에는 목포의 항구, 골목, 동네, 샘, 섬, 산 등과 같은 온갖 장소가 펼쳐진다. 시인은 이 장소성 자체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지만 그곳에서 흐르는 시간, 이루어진 절실한 생들, 나아가 그것들이 구축해온 목포의 역사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넘기는 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말>에서부터 거의 모든 시가 방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에 따르면 그가 이토록 목포에 애착을 보이는 까닭은 ‘목포에서 살아온 세월’ 때문이다. ‘세월’에는 36년이라는 시간과 ‘6월 항쟁’, ‘전교조 해직과 복직’, 다양한 교육운동, 시민운동 등 탈일상적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다. 이것이 시인에게 있어 목포가 물리적 ‘공간’이 아닌, 주체의 경험과 기억이 포지되어 있는 ‘장소’로 인식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시인은 아직도 “목포는 생소하기만 하다”고, 그 까닭은 “목포에서 태어나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를 단순히 목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 아쉬움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를 꼼꼼히 읽어보면 시인에게는 근원적 합일에 대한 강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근원’이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의 유대와 합일의 시공간이다. 이 시공간에서 존재는 전일적이고 고유한 주체로서 타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인간은 모체와의 합일이 가능했던 시공간에 대한 선험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의 탄생이란 모체로부터의 독립이자 동시에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의 성장은 낙원으로부터의 거리화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이며 인간의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은 바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이 충만함의 시공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터이다. 인류 사회의 발전 내지 진보 또한 진행될수록 근원의 세계와 멀어진다는 점에서 인간 성장의 패러다임과 등가의 관계에 놓인다. 근대 이후 인간은 전일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끊임없이 파편화, 도구화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최기종의 시에서 ‘목포’는 이 근원적 세계의 메타포이자 이를 회복하고 지키기 위한 투쟁의 장으로 의미화된다.
유달산 둘레길에 / 어민동산 지나서 / 코끼리바위를 끼고 돌면 거기 / 버려진 우물이 하나 있어 // 옛날에는 / 봉후 사람들 북적북적 / 물도 긷고 빨래도 허고 푸새도 씻었지 / 아짐들 모여서 얘기꽃도 피웠는디 /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 걷는 사람들 쉼터야 // 그 우물 속 들여다보면 / 구름이 비치고 별이 뜨고 새가 날고 / 거기 내 그림자도 어리는디 / ‘아’ 하고 소리치면 저도 따라서 허고 / 두레박 내려 물 퍼 올리면 / 봉후 사람들 찰방찰방 깨어나는디 // 낙조대 오르면서 생각혔어 / 우물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 영원을 사는 거라고 / 아무리 퍼내도 솟아나는 징험이라고 / 봉후 사람들 예나 지금이나 / 목 축여주고 땀 씻어주고 / 오가는 사람들 발소리로 항상 하는 거였어
- 「봉후샘」 전문
이 시의 시적 대상은 ‘우물’이다. ‘우물’은 ‘봉후 사람들’의 공동체성이 담보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근원의 세계로 의미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우물’은 ‘버려진 우물’이다. “마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북적북적’하던 ‘봉후 사람들’도, ‘얘기꽃을 피우던 아짐들’도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이 사라진 까닭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공동체가 와해되었다는 점에서 근원적 세계의 상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적 주체는 ‘버려진 우물’ 안에서 대상과의 동화를 경험한다. ‘구름’과 ‘별’, ‘새’와 어우러지는 ‘내 그림자’가 그러하며 소리의 반향 또한 그러하다.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에서는 “봉후 사람들 찰방찰방 깨어”난다. 시적 주체는 이를 통해 “우물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 영원을 사는 거라고 / 아무리 퍼내도 솟아나는 징험”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우물’로 표상되는 근원의 세계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상기하고 복원하는 것은 인간 주체의 몫일 터다.
최기종의 『목포, 에말이요』가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근원의 세계를 찾고 그것에 이르는 길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여정을 잘 드러내보여주고 있는 시가 「화도(花島)」 이다.
화도 가는 길을 물으니 / 앞서가는 벌 나비 따라가라고 했다 / 그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며 / 그렇게 훌훌 가다 보면 거기가 화도라고 했다 / 그런데 그렇게 꽃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다 / 꼬리에 꼬리를 물던 벌 나비는 보이지 않고 / 방축에 바닷물만 차오르고 있었다 // 화도 가는 길을 물으니 / 밀물이 나고 썰물이 들어야 한다고 했다 / 객선이나 어선은 번잡하다고 / 물때가 바뀔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 바다가 갈라지고 쭉 뻗은 노두가 나온다고 했다 / 그런데 꽃길에서 해찰하다가 물때를 놓쳤다 / 개미기 잔치에 떠들고 환호하다 보니 /어느새 노두길 사라진 것이다 / 화도 가는 길을 물으니 / 여기가 거기라고 내 살던 곳이 화도라고 했다 / 물어물어 찾지도 말고 걷고 걸어 닫지도 말라고 / 꾸린 짐 훌훌 내려놓으면 / 신기루처럼 길이 열리고 / 꽃 피고 새 우는 화도에 닫는다고 했다 // 그에게 가는 길은 치열하지도 않았다 / 그에게 가는 길은 성급하지도 않았다 / 느리게 천천히 쉬엄쉬엄 걷다 보면 / 벌 나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고 / 불모의 바위섬에도 해당화 피어난다고 했다
- 「화도(花島)」 전문
「봉후샘」이 지금은 사라진 세계를 환기하는 것이었다면 위 시는 현실에서 이상향의 세계를 찾아가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화도’가 그것이다. “꽃 피고 새 우는 화도”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근원의 세계를 표상한다. 시적 주체는 “화도 가는 길”을 끊임없이 묻고 있다. 누군가는 “앞서가는 벌 나비 따라가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물때가 바뀔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라고도 했다. 이런 구체적인 방법을 들었음에도 시적 주체는 번번이 길을 잃거나 물때를 놓치고 만다. 그런데 “물어물어” 화도를 찾아다니고 있는 시적 주체는 “여기가 거기라고 내 살던 곳이 화도”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뿐인가. “그에게 가는 길은 치열하지도 않”고, 또 ‘성급할’ 필요도 없다. 그저 “꾸린 짐 훌훌 내려놓”고 “느리게 천천히 쉬엄쉬엄” 걸으면 된다.
트리나 플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는 하늘 높이 솟은 커다란 기둥이 등장한다. 그것은 애벌레 무더기이다. 애벌레들은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열심히 위만 바라보며 다른 애벌레의 머리를 밟고 기어오른다. 모두가 욕망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오른 자만이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어도 오른 자는 내려갈 생각이 없다. 그 까닭 역시 모두가 욕망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애벌레도 삶의 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애벌레 기둥을 기어오르지만 결국 내려와 고치를 만들고 나비가 된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늘 꼭대기에 이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애벌레의 머리를 밟고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날아서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다지 않은가. 결국 가치는 꼭대기라는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변이에 있었던 것이다.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변이, 기는 존재에서 나는 존재로의 변이 말이다. 나비에게는 꼭대기가 큰 의미가 없다. 그가 날고 앉는 어느 곳이든 좋은 곳, 이 시의 ‘화도’와 같은 곳일 터다. 그가 지닌 날개, 자유롭게 날고 있는 삶 자체가 궁극적 가치이자 의미였던 셈이다. 위 시의 시적 주체 또한 물어물어 이상의 세계를 찾고 있지만 결국 ‘화도’는 주체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주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에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봉후샘」 이나 「화도(花島)」를 통해 시인의 근원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간취해볼 수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는 부재하는 시공간이나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여기저기 치열하게 찾아다닌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 생각하는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시공간, 물리적이거나 초월적인 시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주체의 삶에 대한 태도, 아니 삶 그 자체다. 애벌레의 삶과 나비의 삶이 극명한 차이를 보이듯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지금 여기를 근원에 근접한 세계로 만들 수도 있고, 또 그것을 상실한 파편화된 세계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를 단선적으로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분명한 것은 공동체적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화도’라는 세계는 나비 하나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꽃이 만발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나비가 필요하다. 최기종 시인이 이 시집에서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공동체적 감수성이다.
어젯밤, 아픈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태풍으로 땅이 열려서 상사화가 죽순처럼 돋아났다고 고사리처럼 피어났다고 그런데 곧 진다고 내일 만나자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화했더니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딴소리다. 뜬금없이 시가 뭐냐고 물어온다. 나야, 말문이 막혀서 그게 뭐냐고 되물었더니 ‘인정머리’라고 했다. 그것 없으면 시도 뭣도 아니라고 했다. ‘아, 시가 사람을 감싸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뒤가 켕겼다. 이제까지 그가 귀찮아서 거리만 두었다. 오늘은 시가 되어서 자리 깔아놓고 들어주기로 했다. 길게 들어주는 게 시였다.
-「이런 시」 전문
잘 알려져 있듯 이성의 영역에서 벗어난 사람, 넓은 의미에서의 광인이 처음부터 ‘아픈 사람’, 즉 환자는 아니었다. 푸코에 따르면 광인은 오랜 시간에 걸쳐 권력 계급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그 정체성이 달라졌다. 초기에는 광인이 초월적 세계의 언어를 운위하는 영험한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이성 중심의 사회로 나아가면서 부랑자, 이교도 등과 함께 비이성적, 비정상적 존재로 격리되어야 했다. 경제적 활동이 중요한 시대에 이르러서 광인은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의 ‘아픈 사람’ 또한 이성의 영역에서 이탈한 사람으로서의 환자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고 다음 날에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아픈 사람’은 타자화된 광인과는 차질적이다. 시적 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하고 자신을 성찰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는, 이성과 비이성, 중심과 주변이 분리되기 이전의 세계, 근원의 세계를 환기하게 한다. 이 세계는 어떠한 이유로든 어느 한쪽이 중심이 되어 다른 한쪽을 타자화시키는 세계가 아니며 통합과 유대의 공동체적 시공간이다. “부지깽이가 춤추고 / 시앙쥐가 들락날락 콧노래 부르”는 세계( 「고향집에서」), “팔푼이도 칠푼이도 못난 것이 아”닌 세계( 「가을에」)이다. 중요한 것은 시인에게 ‘시’란 ‘인정머리’ 즉 공동체적 감수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시’는 “사람을 감싸는” 행위이자 그러한 존재 자체로 의미화되고 있다.
『목포, 에말이요』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1부에는 목포의 공간, 사람, 말 등 목포에 관한 시가, 2부에는 고향과 가족에 관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3부에는 자연과 환경에 관한 시가, 4부에는 목포의 음식, 역사, 민중의식 등을 그린 시가 모여 있다. 서정성이 강한 시에서 사회 참여적인 시에 이르기까지, 압축과 긴장미가 돋보이는 시에서 구호에 가까운 시에 이르기까지 최기종의 시세계는 그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그러나 서정적 동일성을 구현하는 시이든, 부당한 억압에 항거하는 투쟁을 그린 시이든 근원적 세계, 내지 공동체성에 관한 지향을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다.
특히 참여적인 시의 경우, 마치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듯 사건을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귀항」에서 침몰한 세월호가 항구로 돌아온 날을 ‘2017년 3월 31일, 금요일’로 명시한다든가, 목포 시민의 항쟁의 역사를 육하원칙에 따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 등이 바로 그러하다. 이는 시의 의미에 대한 시인이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에게 시는, 그리고 시를 쓴다는 것은 ‘사람들을 감싸는 것’이자 그러한 공동체적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참여적 행위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시가 「일등바위」이다.
유달산에 올라서 / 다도해 섬들을 보면 / 내가 하늘 아래 우뚝허네 / 속세에서 벗어나서 자유이고자 허네 // 흐린 날에는 숨어들고 / 맑은 날에는 제 빛깔을 드러내는 / 날씨에 민감한 섬들을 보면 / 내가 두렷한 위안이고자 허네 // 바닷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 우러러 환호하는 섬들을 보면 / 내가 오케스트라 지휘자이고자 허네 / 내가 천군을 이끌고 북방으로 나르샤 허네 // 오늘도 유달산에 올라서 / 크거나 작거나 높거나 낮거나 / 저마다 알맞은 섬들을 보면 / 내가 깃발이고자 허네 / 내가 외로움이고자 허네
- 「일등바위」 전문
제목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위 시의 화자는 ‘일등바위’이다. ‘일등바위’는 유달산 꼭대기에 있는 것으로, 이를 의인화함으로써 시인의 진취적인 기상과 능동적인 태도, 강한 의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내가 하늘 아래 우뚝허네”, “오케스트라 지휘자이고자 허네”, “천군을 이끌고 북방으로 나르샤 허네” 등과 같은 시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에서도 시인의 공동체적 감수성이 감각된다. “크거나 작거나 높거나 낮거나 / 저마다 알맞은 섬”이 그러한데 이는 공동체적 사회를 환기하게 한다. 개별적 존재가 저마다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고 서로에게 ‘두렷한 위안’이 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공동체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최기종의 시에서 과거는 영원히 사라진 시간이 아니며 역사는 과거의 죽은 자료가 아니다. 시적 주체의 인식과 행위를 통해 근원의 세계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구현되고 역사적 진실은 그것의 든든한 디딤돌로 작용한다. 시인이 그의 시에서 부당한 억압에 항거하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암태도 소작쟁의」)는 민중들의 의식을 부단히 되새기는 것은 “밀려난 사람들이 새로이 돌아오고 / 밀려난 거리들이 새로이 생겨나고 / 밀려난 파도들이 새로이 밀려오고 / 밀려난 역사들이 새로이 피어”(「목포 옛길」 )난다는 것을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이 시인의 의지를 추동하는 강한 힘으로 작용할 것임은 자명하다. 시인은 오늘도 스스로가 “자유이고자”, “깃발이고자”, “외로움이고자” 부지런히 ‘목포 옛길’을 거닐며 사람을 읽고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2. 실존적 삶에 스미는 근원의 세계 - 윤병주, 『풋사과를 먹는 저녁』, 현대시학사, 2020.
윤병주 시인이 첫 시집 『바람의 상처를 당기다』(시와정신사, 2016.) 이후 두 번째 시집 『풋사과를 먹는 저녁』(현대시학사, 2020.)을 상재했다. 『바람의 상처를 당기다』는 생의 구경적 의미를 찾기 위한 시적 주체의 치열한 고투와 그것을 드러내는 시적 의장으로서의 비동일적 서정, ‘잔인한 서정’이 오래 기억에 남았던 시집이다. 4년여 만에 내놓은 『풋사과를 먹는 저녁』 또한 그 연장선에 놓여있는 듯하다. 시인은 부단히 실존의 고통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고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시집에서 시적 주체의 시선이 자아의 상처와 심연에 주로 머물고 있었다면 이 시집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 자아와 타자, 그들이 이루는 세계로 시선이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차질적이다.
플라톤은 세계를 실재와 현상으로 이분화한다.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은 가변적인 현상일 뿐이지 실재가 아니다. 영원불변하는 보편의 세계가 실재이며 플라톤은 이를 이데아라 부른다. 윤병주 시의 세계 또한 현실과 초월적 세계로 이분화되어 있다. 플라톤의 인식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본질, 근원, 진리 등을 포지한 세계, 현실과는 분리되어 있는 초월적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가령 그의 시에서 ‘바다’가 표상하는 바가 그러하다.
바다의 수심을 기억할 수 없는 생선들은 / 짜디짠 태양을 지나온 소금에 몸이 채워진다 / 몸속에 해를 밀어 넣기 전엔 / 모든 생선은 물이거나 빛나는 순간을 가진 바다였다 // 햇살과 바람이 사라지기 전 청력을 잃은 생선들과 / 어판장 노인들은 거대한 해풍의 수온에 / 가파른 몸을 얻고 응축된 계절에 오른다 // 생선들은 오랫동안 햇살을 모아들인다 / 햇살을 찍어 누르면 조금씩 피어나는 소금의 흔적 / 노인의 시간은 그럴 때마다 라디오 소리처럼 / 소금물과 냉랭한 시선을 뿌려 주었고 / 바다를 기억하지 못하게 생선들의 귀에 / 소금을 덮어 주었다 // 항구에서 팔리는 것에 실패한 생선들은 / 다시 구름을 지나 소금의 간기 쪽에서 / 살을 저미고 있다 // 이제 남은 것은 살 속에 고여 있는 태양의 / 희미한 소금이 되는 발자국뿐 / 간기를 먹고 화석처럼 되어가고 있는 일 / 저 갑판 위 생선들은 바다를 떠나온 풍경들 / 이제 더 먼 세상을 떠돌고 돌아와야 한다
-「소금길에 대하여」 전문
“모든 생선은 물이거나 빛나는 순간을 가진 바다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생선’은 바다와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다의 수심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고 ‘청력’마저 잃었다. ‘물’, ‘바다’가 근원, 초월적 세계의 표상이라면 ‘갑판’, ‘항구’, ‘어판장’ 등은 현실 세계의 표상이다. ‘어판장 노인들’은 ‘생선’으로 하여금 “바다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생선’은 “간기를 먹고 화석처럼 되어가고” 있다.
‘생선’이라는 명명에는 음식이라는 정체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대상 자체의 고유한 가치가 아님은 물론이다. 실용적 본질이 인위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물이거나 빛나는 순간을 가진 바다”였던 존재가 팔리고 먹히기 위해 소금에 절여지고 전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존재로 하여금 스스로 빛나는 바다였음을 상기하지 못하도록 구동되고 있다. 이는 인간의 현실 세계와 다르지 않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며 실존을 통해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 가는 존재다. 그러나 영원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인간 또한 도구화되어 왔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시인은 “참 예의 없는 현실의 노동들”이라며 “서로의 그림자를 밟고 살다가 짐을 얹을 힘이 없으면 / 빈 병처럼 버려지는”(「생의 그림자」) 현실을 애통해한 바 있다. “항구에서 팔리는 것에 실패한 생선”들이 “소금의 간기 쪽에서 살을 저미”게 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위 시는 바다와 항구, 생선의 관계를 통해 근원 내지 영원을 상실한 존재와 그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플라톤은 현실을 부정하며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했고 이데아를 현실에서는 구현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에 의하면 현실 세계는 이데아의 조악한 모사에 불과하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데아를 망각했고 삶의 의미란 이성을 통해 그것을 상기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따름이다. 위 시에서 ‘바다’로 표상되는 세계 또한 인간이 상실한 원초의 세계, 근원의 세계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윤병주는 현실을 부정하지도 또 초월적 세계를 관념 속에 가두어두지도 않는다.
가령 「젊은 날의 유산 – 아우에게」에서 보면 시인은 ‘아우’가 정해놓은 ‘높은 산’을 가지 않기로 했다고, “먼저 높은 산의 그림자를 밟고 사는 것을 이제 나는 믿지 않기로 했다”고 선언한다. “나는 오대산에서 자식도 얻었고 / 글 쓰는 것을 잘 이해하는 아내와 잘 살고 있”다고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높은 산’이란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고 정신의 고도를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분명한 것은 평범한 일상과는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이분화되어 있는 세계에서 일상의 삶 곧 현실을 택한 셈이다.
그렇다고 시인이 초월적 세계를 등한시하며 온전히 현실적 삶에 몰두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시인으로 하여금 ‘바다’를 잊은 채 “간기를 먹고 화석처럼 되어가고 있는” ‘생선’을 환기하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봄 농사일이 한창인데 / 나는 몸이 아프고 밥맛이 씁쓸하다”(「산목련」)는 고백은 초월적 세계와 현실적 삶의 간극에서 길항하는 시인의 내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산길을 돌고 돌아 돌제단 기도터를 지나는 저녁 / 산골짜기에서 사그러진 북극성이 / 산에 든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면 / 사람들은 산속 연화장 세계로 온 것이라고 믿었다 // 까닭 없이 몸이 아프거나 얼굴에 핀 검은 반점과 / 폐를 다친 사람들은 이곳으로 찾아와 기도하고 / 희귀한 약초로 밥을 지어 먹으면 몸이 낫는다고 믿었다 /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지만 / 한번 그곳에 가면 시끄럽고 번잡한 세월 잊고 / 산 아랫마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 산에 들어 기도하는 힘이 부족하여 / 문수보살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는데 / 눈개승마 핀 언덕에서 소 타는 꿈을 꾸면 / 심마니가 산삼을 점지받기도 한다는데 // 그래도 슬픈 나무들이 중생의 그림자를 지나서 / 한쪽으로 기울어진 북극성이 뜨지 않겠지만 / 하늘은 늘 인연에 기대고 사는 곳 / 지금은 심마니 약초꾼 석청꾼들이 한 계절을 살고 간다
-「오대산 조갯골」 전문
시인이 초월적 세계와 현실적 삶의 간극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매개적 공간의 설정이다. 위 시의 ‘오대산 조갯골’과 같은 공간이 그것이다. ‘오대산 조갯골’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면서 또 동시에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속세’ 혹은 ‘산 아랫마을’과 거리화되어 있는 곳이면서도 “북대산에서 한나절 가야 겨우 갈 수 있는” 곳, 즉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연화장 세계’에 비유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오대산 조갯골’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이며 희귀한 약초와 산삼을 캐고 문수보살을 만나기도 하는 곳이다.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지만 / 한번 그곳에 가면 시끄럽고 번잡한 세월 잊고 / 산 아랫마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다람쥐 눈물 바위’(「오대산 - 다람쥐 눈물 바위」) 또한 동일한 의미망에 자리하는 공간이다. 그곳은 “사람들이 사람들 속에서 몸에 병을 얻으면” 기도하는 곳이고 “가슴에 주먹만 한 울음을 토해내며 / 미워했던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하는 곳이다. “몸속 어디선가 버리지 못한 말과 / 꿈속에서 병이 된 몸을 물속에 두고 / 바라보며 머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대산 조갯골’이나 ‘다람쥐 눈물 바위’는 치유와 정화의 신령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간들이 하늘과 인간, 초월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소통이 가능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하늘은 늘 인연에 기대고 사는 곳”이라는 시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라면 인간이 하늘에 기대어 산다는 것이 보편적 인식일 터이지만 이 시에서는 이를 전복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윤병주의 시에는 이 외에도 ‘홍천, 내면’(「홍천, 내면에서 하룻밤」), ‘안반데기’(「안반데기」) ‘산삼 자리’(「산삼 자리」) 등등 시원(始原 )이나 정신의 고양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공간들이 다수 등장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높은 산’, 즉 시인이 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 ‘높은 산’과 현실적 삶을 매개하는 기능을 한다. 시인의 초월적 세계에 대한 지향은 이처럼 맹목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윤병주 시의 독특한 분위기와 긴장감은 바로 이 초월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길항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상의 날짜들을 잘못 짚고 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서둘러 잎을 떨군 나무들의 일정 때문일 것이다 / 기온을 잘못 읽은 어떤 충동들이 / 제 몸 안의 자각 없는 고행을 바라겠는가 / 고행의 날을 단맛으로 숙성시키고 싶지 않았을까 // 지금은 풋내 나는 불온한 계절을 건너가고 있는 저녁 / 태양의 궤도를 착각한 사과를 먹고 있다 / 나는 가끔 단맛을 채우지 못하고 빛을 투과해 / 명중할 수 없는 빛의 자각을 채우지 못한 것들이 / 궁금해지는 저녁이 있다 // 나무와 햇살과 바람이 단맛을 채우며 뒤척이던 밤을 / 시큼한 맛이 고이는 궤도의 시간으로 걸어가 보고 싶기도 했다 // 양분을 놓칠 수 없는 안간힘을 다했던 꼭지를 / 더 붙잡았던 힘을, 열매는 수차례 들어가 보기도 했을 터 / 허나, 떨어진 것들의 궁핍한 맛들은 / 어느 계절의 바람에 단맛이 말소되었던 경계지점일까 // 사과 껍질을 벗기면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은 빛이, / 빗나간 각도의 맛이 시큼한 저녁 / 지불이 끝난 맛을 별빛 속에 끌어들인다
-「풋사과를 먹는 저녁」 전문
이 시의 소재는 ‘풋사과’다. 풋사과는 ‘단맛을 채우지 못한’ 덜 익은 것으로 불완전한 존재를 표상한다. 바다를 망각한 ‘생선’과 같이 인간은 영원을 상실하고 결핍을 내재한 불온한 존재다. 시적 주체가 “지금은 풋내 나는 불온한 계절을 건너가고 있는 저녁”이라고 현실을 언표한 까닭이다. 현실 세계가 ‘풋내 나는 불온한 계절’인 셈이다.
“나무와 햇살과 바람이 단맛을 채우며 뒤척이던 밤”이나 “시큼한 맛이 고이는 궤도의 시간”이란 타자와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삶의 과정, 완결성이 유보된 생의 어느 지점을 의미화 한 것이다. ‘나무’, ‘햇살’, ‘바람’은 ‘열매’ 자신과 함께 단맛을 만들어갈 주요 요소로, ‘타자’의 표상이다. 시인 자신이기도 한 시적 주체는 이 불완전한 존재와 불온한 현실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존재,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다. 이미 ‘지불’이 끝났고 “떨어진 것들의 궁핍한 맛”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지만 “양분을 놓칠 수 없는 안간힘”, “더 붙잡았던 힘”, “단맛이 말소되었던 경계지점” 등 시인은 떨어지기 전 세계에 관심이 많다.
위 시는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표제작은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 법이다. 시집을 관류하는 시의식이랄까 혹은 그것과의 관계성을 짚어보게 되기 때문이다. 표제작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풋사과를 먹는 저녁」은 초월적 세계와 현세계의 길항 관계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시인의 정신사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시로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가장 낮은 바닥까지 가서 / 사랑이 지나간 줄도 모르고 웃음으로 / 서로를 보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 욕망을 품고 가는 것이 죄다 / 수천 가지 환상과 물거품이 꺼질 때까지 // 거짓 사랑을 덮어 줄 진실이 서로 필요했는지 / 바닥에 엎질러진 물처럼 혹은 착한 사람처럼 / 사랑을 증명할 숭고한 결말은 없고 / 불안한 과정만 남은 그런 관계 / 여전히 거품으로 가득한 욕망과 / 불행했던 시간을 소중한 날이라고 믿어본다 // 일그러진 별들이 어둠에 잠기고 / 수많은 비극이 우리 사이에 놓였는데도 / 단순한 세상 법으로는 인연이라고 한다 / 불길한 빛을 내며 일어나는 거품 같은 현상을 / 허허로운 환영에서 그대의 배후가 되어 / 결박을 풀지 못한 채 세월은 가고 있는데 / 구름처럼 높아진 그대 곁에 가기 위해서는 / 몇 상자의 슬픈 예감이 필요하다 / 밤하늘의 구름을 터트릴 압정들이 /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나처럼 일어서는데 / 부디 꿈이 건너간 거품 같은 낮이 아니기를 / 그대의 아픈 상처도 더는 덧나지 않기를
-「구름의 실루엣 2」 전문
위 시의 시적 소재는 사랑 혹은 이별이다. 그러나 흔히 사랑이나 이별, 하면 떠올릴 법한 상황이나 정서를 이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랑은 사랑이되 ‘거짓 사랑’이고 사랑이 이미 지나갔지만 사랑의 대상은 그것을 모르고 “웃음으로 서로를 보내”주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시적 주체가 파악하고 있는 이 사랑의 실체는 ‘욕망’이고 ‘수천 가지 환상과 물거품’일 뿐이다. ‘불행했던 시간’, ‘일그러진 별’, ‘수많은 비극’ 등 사랑의 관계를 수식하는 언표는 부정적이기만 하다. 이들의 관계는 ‘밤’의 ‘어둠’에 잠겨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나 사랑의 관계가 있는 그대로 수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짓 사랑을 덮어 줄 진실”을 찾아 사랑을 증명하려 하고 “불행했던 시간을 소중한 날이라고 믿”고자 한다. “불안한 과정만 남은 그런 관계”는 ‘인연’이라는 말로 단순화시킨다. 이러한 사랑의 주체들은 ‘거짓 사랑’의 “결박을 풀지 못한 채 세월”만 보내고 있다. 시적 주체는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일어선다. 사랑이 깨지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남긴다. 시적 주체는 상대의 ‘아픈 상처가 덧나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렇다면 사랑을 깨고 난 뒤의 상황은 진실에 가까울까. 확신할 수 없지만 시적 주체는 그러하기를 바란다. “부디 꿈이 건너간 거품 같은 낮이 아니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이 시에서 ‘구름’은, 부풀기만 했지 알맹이는 없는 ‘거품’과 등가의 관계에 놓인다. 사랑의 형상은 바로 이 ‘구름의 실루엣’이 되는 셈이다. 시적 감동을 고려한다면 사랑을 배음으로 깔고 그 위에 이별의 슬픔이나 그리움의 정서를 발현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구도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 그 자체를 회의한다. “가장 낮은 바닥”까지 내려가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가리어진 욕망, 환상, 거짓 감정 등등 불편한 사실들을 시인은 언표화하고야 만다.
윤병주의 시에서는 이처럼 대상에 대한 객관적 시선, 아니 냉정하고 비정하리만치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직관성 또한 윤병주의 시적 특징 중 하나이다. 그의 시에서는 선취하고 있는 이미지에 가까워지기 위해 다듬어지거나 매만져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갓 떼어낸 원석 혹은 화장하지 않은 민낯을 보는 듯하달까. 이는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직관적 인식, 이미지 등을 오염시키지 않겠다는, 대상의 원초적인 모습에 육박해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압도된다. 진실에 대한 희구, 진실에 근접하려는 의지와 동일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순정한 이성을 통해 상기하는 것이라면 윤병주의 초월적 세계에 근접하는 방법은 진실과의 대면이다. 바다를 망각한 ‘생선’으로 표상되는 자아와 타자, 이들이 이루는 관계의 진실에 시인이 천착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원, 근원, 진리 등등 본래 초월적 세계는 관념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윤병주의 그것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윤병주는 그것을 실존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시원을 환기하게 하고 정화와 정신적 고양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적 공간이 그러하고 불완전한 존재의 ‘궁핍한 맛’에 대한 부단한 탐구가 그러하다. 결코 조응할 수 없는 세계가 윤병주의 시에서는 마주치고 비껴가고…,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의 기투가 초월적 세계로의 지향이 되는 구도, 윤병주의 시 쓰기가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성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풋사과를 먹는 저녁』에는 유난히 ‘푸른’이라는 수식어가 많다. 서정적 자아가 ‘때늦은 저녁’을 먹는 일도 잦다. 시집을 덮으면 청청한 고독이 느껴지는 까닭이 혹시 이 때문일까. 시인은 오늘도 ‘푸른’ 상처를 더듬으며 ‘때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지 궁금하다.
박진희
문학평론가, 대전대 국문과 강사
저서 『유치환 문학과 아나키즘』, 『문학과 존재의 지평』, 『서정적 리얼리즘의 시학』, 『박재삼 문학 연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