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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12권을 차례로 요약 정리하여 올립니다. 고병권님의 글이 워낙 깔끔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 시리즈를 요약한다는게 오히려 작가의 글을 더 어지럽게 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서 후 정리라는 저의 작업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우려를 무릅쓰고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8권 『자본의 꿈 기계의 꿈』
저자의 말-기계는 무슨 꿈을 꾸는가
발터 베냐민(W. Benjamin)은 어떤 것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여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함. 덕분에 깨어난 사물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쫓아오도록 시인을 유혹하는데, 자신이 그리는 세계로 시인을 끌어들이는 것
역사유물론자는 사물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믿지 않음, 사물의 배치를 읽을 때 역사유물론자는 그것의 운명을 읽으면서 동시에 그것에 잠재된 다른 운명을 읽음
자본가의 시선과 기계의 시선은 다름. 마르크스는 깨어 있는 기계의 시선을, 거기서 혁명가를 느낌. 그래서 기계를 블랑키(Louis A. Blanqui)보다도 위험한 혁명가라고 함
1. 기계괴물의 출현
○ 기계가 ‘자본주의’와 만나면
“지금까지 이루어진 기계의발명이 과연 인간의 일상적 노고를 덜어준 것인지 의문”이라는 존스튜어트밀(J.S.Mill)의말에 마르크스는 밀이 인간을 더 한정했어야 했다고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자기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한테는 더 빨리, 더 오래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음
밀의 의문에 마르크스는 “그런 것은 결코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기계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함. 자본주의에서 기계는 자본가를위한 것이지 노동자를위한 것이 아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기계”라는 표현은,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을 문제 삼으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 사용’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비록 기계가 생산수단으로서 자본가의 사적 소유물이며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을 빨아들이는 착취 장치로 기능하고 있지만 이것이 기계의 본성이나 운명은 아니라는 것
사물의 본래적 의미 같은 건 없음.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 즉 배치가 중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할 때 혹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곳에서 기계는 혁명의 동지이자 생산의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봄
○ 기계와 도구의 구별이 중요한 이유
기계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도구’와 ‘기계’를 구분함으로써 답함. 매뉴팩처는 작업방식의 변화, 즉 노동력을 어떻게 조직하는가가 중요한 생산형태이지만, 기계제 대공업은 노동수단에서 일어난 혁신의 결과 노동수단이 도구에서 기계로 바뀐 것
도구와 기계를 동일시하는 견해와, 동력원에 따라 둘을 구분하는 견해가 있음
마르크스는 전자의 견해가 역학적으로는 몰라도 “역사적 요소가 빠져있기 때문”에 경제학적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비판. 사물이놓인 사회적배치, 역사적으로 나타난 특정한 생산양식, 특정한 사회형태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없음
동력원에 따라 도구와 기계를 구분(인간을 동력원으로 하면 도구, 동물이나 물·바람 등 자연력을 동력원으로 하면 기계)하는 견해도 역사성과 관련해서는 비슷한 문제
이런 식의 구분을 통해서는 19세기 대공업에 등장한 기계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음. 19세기 대공장의 기계(Maschinerie)는 매뉴팩처의 도구가 발전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
마르크스는 매뉴팩처에서도‘기계’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매뉴팩처에서 본 ‘기계’는 노동자들, 정확히 말하자면 ‘전체노동자’. 노동자들 전체가 결합된 노동력으로서 하나의 메커니즘을 이룰 때 그것을 19세기 대공장 기계의 선구적 형태로 본 것
마르크스의 ‘기계’ 개념과 관련해 중요한 물음은 전체가 하나의 메커니즘을 이루느냐 하는 것. 기계는 인간의 반대말도 아니고 인간의 대체물도 아님
기계제로의 전환에서 마르크스가 중요하다고 본것은 인간의 부품화 즉 부분기계화. 즉 인간이 다른 인간이나 다른 사물과 하나의 메커니즘, 하나의 기계를 이루는 것
마르크스는 기계제(기계시스템)에서 개별 노동자들을 ‘부분기계’(Teilmaschine)라고 표현. 전체노동자와 부분노동자의 관계가 기계시스템과 부분기계의 관계로 바뀐 것
기계제에서는 원리상 노동자의 인격이 완전히 사라짐. 노동자가 인간이 아니라 기계시스템의 한 부품, 즉 부분기계가 되는 것. 기계제는 기계가 인간을 재현하는 시스템도 기계와 인간이 대립하는 시스템도 아닌, 인간이 기계의 한부분이되는시스템
○ ‘도구’가 발전해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 기계는 무용수를 재현하지 않지만 무용수를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음(무용수를 구성하는 어떤 부분,‘부분무용수’가 비인간적형태로 들어가 있음). 이것이 중요
인간이 하나의 부품이 되어 다른 부품, 다른 사물들과 하나의 기계를 이루어 다른 부품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인간은 “기계를 이룬다”(fait machine)고 할 수 있음
전체가기계라면 부분들은 부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매뉴팩처에서는 다만 그부품들이 살아 있는 인간이었을 뿐. 이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고대 그리스의 밀집부대나 유목민들의 전투부대(‘인간-말-활’로 이루어진 집합체)를 기계의 계보에 넣음
아울러 ‘관료제’도 관료화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 인간은 자율성을 잃고, 하나의 부품으로서 기계시스템의 내적 논리에 따라 굴러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됨
이들은 기계를 도구에서 진화했다고 보는 고전적 도식(생물학적·진화론적 도식)을 비판하며 “처음부터 도구와 기계 사이에 본성의 차이를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도구는 ‘접촉의 대행자’(agent)이고, 인간의 힘과 운동을 대상에 ‘투사하는’(projectif) 수단. 그런데 기계는 일방적으로 대상에 인간의 힘과 운동을 전달하는 것이 아님. 이들에 따르면 기계에서는 소통(communication)이 중요. 힘과 운동을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게 아니고 되돌아오는(récurrent) 것이 있음. 인간 몸의 각 장기들이 신진대사를 이루듯 사물들이 하나의 메커니즘을 이루며 서로 소통한다면 그것들은 하나의 기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음. 그러므로 도구와 기계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한 사물은 도구가 될 수도, 기계가 될 수도 있음
○ 산업혁명은 ‘동력기계’가 일으킨 혁명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대공장의 기계시스템을 세 부분, ‘동력기계’(Bewegungsmaschine), ‘전동기계’(Transmissionsmechanismus), ‘작업기계’(Werkzeugmaschine)로 나눔. 동력을 만들어내는 기계와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로 이루어졌다는 뜻
그에게 ‘산업혁명’은 마지막 부분,즉‘작업기계’에서 일어난 혁명, 즉 19세기 공장에서 기계제가 매뉴팩처를 대체했다는 것은 ‘기계’가 ‘작업하는 인간’을 대체했다는 뜻
그것들이 기계인 이유는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한 메커니즘의 도구 혹은 기계적 도구로서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 그것들이 ‘인간의 도구’였을때는 인간의 뜻대로 인간의 신체 리듬에 맞추어 움직였으나‘기계의도구’가 되는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됨. 움직이는 방식과 속도가 완전히 달라짐. 도구에서 기계(부분기계)로 변신하는 것
기계의 일부가 되는 순간 과거의 도구들은 금세 인간적 한계를 벗어나버림. 매뉴팩처 시대에는 아무리 도구를 개량해도[그것들 중 일부는 기계(Maschine)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음], 인간의 도구인 한 어떤 한계가 있었음
반면 대공업 시대 초기의 작업기계인 제니 방적기는 처음부터 12~18개의 방추를 썼고, 양말 편직기는 한꺼번에 수천 개의 바늘을 썼음. 인간의 머리가 하나인지 둘인지, 손발이 두 개인지 네 개인지는 고려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때 인간은 더 이상 고려 사항이 아님. 이것이 방추나 바늘이 인간의 도구일 때와 기계의 도구일 때, 즉 기계(부분기계)일 때의 차이. 드디어 작업기계가 작업인간을 대체한 것
기계는 노동에 있어 인간을 닮을 필요가 없음. 기계제 공장에서 기계가 인간을 대체했다고 할 때는 재현이 아니라 축출을 의미. 생산력 증대로 노동자를 줄이게 된 것. 기계시스템의 부품으로서 필요성이 없는 노동자는 공장에서 쫓겨남
○ 마침내, 기계괴물이 등장
기계들의 단순협업과 본격적인 기계제(기계시스템, Maschinensystem)를 구분해야
기계협업은 인간들의 단순협업과 비슷, 여러대의 작업기계를 한곳에 모아놓는것뿐
그러나 이것은 본격적인 기계제가 아님. 마치 ‘단순협업’이 ‘분업화된 협업’으로 바뀌었을 때 매뉴팩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듯 ‘기계협업’이 ‘기계시스템’으로 바뀌었을 때 공장의 기계제 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됨
매뉴팩처에서는 작업의 분할과 연결이 인간학에 입각해 있었지만, 기계제에서는 인간학이 아닌 기계학에 입각. 생산공정을 분할하고 연결할때 노동자를 고려하지 않음. 물리학과 화학 등의 법칙을 이용하지만 이 기술적 법칙은 인간과는 관련이 없음. 생산력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 동력을 계산하고 마찰을 계산하고 속도를 계산하지만 이때 고려되는 것은 기계적 한계이지 인간적 한계는 아님
점차 기계제 생산이 발전하면서 기계가 전체 공정을 떠맡는 식으로 변화.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기계를 통한 기계의 제작’. ‘기계를 통한 기계의 제작’은 기계제 대공업이 마침내 “자신의 발로 서게” 되었음을 의미
이런 식으로 한 산업영역에서 생산방식의 변혁이 나타나면 다른 산업영역에서도 연쇄적으로 변혁이 일어나고, 생산 전반에서 변혁이 일어나면 생산물 운송과 관련된 교통 및 통신 수단의 변혁 또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
2. 기계가 도입되고 나서 벌어진 일들
○ 기계의 가치와 생산물의 가치
기계의 사용 자체는 상품의 가치를 올리는 요인. 하지만 생산물의 양이 크게 증대하기 때문에 개개의 상품가치는 낮아짐
○ 기계 도입의 문턱
개개생산물의 가치는 생산수단의가치, 노동력의가치, 잉여가치로 구성(W=c+v+m). 기계를 사용하면 ‘c’가 늘어나고 ‘v’가 줄어듬. 기계 사용으로 생산물의 가치가 하락하려면 ‘c’의 증가 폭보다 ‘v’의 감소 폭이 커야 함. 기계의 가치는 기계 제조에 필요한 노동량과 같지만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생산과정에 투여하는 노동량의 일부일 뿐이므로. 노동자는 임금에 해당하는 필요노동 말고도 잉여노동을 투여
기계의 가치와 그 기계가 대체하는 노동력의 가치가 같다면, 생산과정에서 기계의 경우보다 노동자들의 경우가 생산물에 더 많은 노동, 더 많은 가치를 집어넣는 셈
기계의 가치가 잉여노동에 해당하는만큼 더비싸더라도 생산물의가치는 같다는 것. 기계값이 그 정도에 그친다면 자본가가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다는 말
하지만 시장에서 실제로 경쟁 중인 자본가들의 행동 기준은 ‘가격’. 실제 노동력의 가치가 어떻게 되든 가격을 줄일 수 있다면 생산비용(비용가격)을 줄이는 셈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이윤. 기계를 도입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이윤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노동을 크게 절약해주는 획기적인 기계라도 도입하지 않고, 차라리 인간노동을 탕진하는 쪽을 선택. 기계 도입의 가장 중요한 문턱, 가장 근본적인 문턱이 바로 이것, 이윤! 자본가가 원하는 것은 ‘자동화된 공장’이 아니라 ‘수익 높은 공장’
○노동자는 ‘인간재료’?
노동이란 노동자가 노동수단을이용해서 목적과필요에맞게 노동대상을 변형하는 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되면 여기에 미묘한 변화-한편으론 노동자가 노동과정의 주체인 것이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산물에 대한 전적인 소유권을 가짐
이때 노동자는 가치생산의 주체라기보다 가치착취의 대상,가치착취의재료처럼보임
마르크스는 기계 도입으로 인한 노동인구의 확장을 아예 ‘인간이라는 착취재료의 확대’, 특히 기계가 진공청소기처럼 노동자들의 능력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고 표현
기계제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심화됨, 노동자는 부분적 주체성마저 잃어버리고, 기계라는 객관적 유기체(객체)의 한 부분이 되어, 객체로서, 대상으로서, 재료로서 존재
○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① 노동인구의 확대
“기계가 근육의 힘을 불필요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이 새로운 노동인구로 유입, 이들 노동력의 가치가 성인 남성보다 낮았기에 자본가에게는 더 매력적
노동인구가 가족구성원 전체로 확대된 것인데, 이렇게되면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지는 반면 요리나 양육 등 가사노동의 결손을 돈으로 메워야 하니 생활비는 더 늘어남
그뿐 아니라 노동력의 공급이 늘면 노동력의 가격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지는 괴리되는 현상이 나타남. 소위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다’가 작동
자본가로서는 기계 도입에 따른 생산력 증대만으로도 특별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는데, 이렇게 이중으로 떨어진 노동력의 가치보다도 더 노동력의 가격이 떨어지는 환경이 조성되어 자본가는 이중 삼중 혜택을 누림. 게다가 예전에는 1명이 제공하던 잉여노동을 이제는 4명이 제공하게 됨
“기계는 처음부터 자본의 채굴지역(착취대상, Ausbeutungsfeld)인 인간이라는 착취재료(Exploitationsmaterial)를 늘려갈 뿐 아니라 착취도도 증대시킨다.”
◯ 노예상인이 된 노동자
여성과 아이들이 노동력 판매에 나서면서 자본이 가족을 위한 가사의 영역, 아이들의 놀이 영역을 침탈하기 시작. 기계제 생산이 여성과 아동을 노동가능인구로 만들고 남성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를 하락시키자, 가장인 노동자 자신이 아내와 아이의 노동력 판매에 나서게 됨. 자본주의와 빈곤, 가부장제가 맞물리는 곳에서 가족 노예상인이 출현한 것. “이전에 노동자는 형식상으로는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아내와 자식을 판매한다. 그는 노예상인이 된 것이다.”
특히 아동노동에 대해서는, 노동은 아이가 하지만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한 것은 부모. 매매의 성격만 놓고 보면 노동자보다는 노예
◯ 자본주의, 말라리아보다 치명적인
모두가 공장에 일하러 나가면 유아들이 문제가 됨. 젖먹이를 데리고 갈 수 없을 때 엄마들은 ‘곳프리(Godfrey) 강장제’, 실상은 일종의 마취제를 먹였다고 함
당시 정부의 「공중위생 보고서」에 따르면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이 많은 곳에서 유아사망률이 높게 나타남. 여기에는 아이가 죽었는데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고, 심지어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엄마들의 이해할 수 없는 정서적 반응과 행동이 소개되었는데, 엄마 자신이 정서적으로 끔찍하게 파괴된 상태
마르크스는 노동자 가정의 유아들을 죽인 것은 결국 그들 부모가 아니라 말라리아보다 더 치명적인 자본주의라는 것. 아내와 아이를 판 노동자는 출세한 사람이 아니라 전락한 사람. 자신의 노동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 아내와 아이를 팔았지만,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이 공장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성인 남성 노동자의 힘은 크게 약화됨
② 노동일의 연장
기계가 도입되면 노동생산력이 크게 증대해 노동일이 줄어들 것 같은데 자본주의에서는 오히려“모든 자연적 한계를 초월해 노동일을 연장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 됨
기계제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기계의 부속물에 가까운 조수라고 할 수 있음. 생산과정에서 지위가 부차화되기 때문에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고 효과도 크지 않음
여성과 아동 노동력이 대거 유입된 것도 자본가가 노동일을 쉽게 연장할 수 있는 요인. 기계제 덕분에 자본가는 여성과 아동을 공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고 이들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할 수 있게 된 것
노동일 연장을 자극하는 요인에는 기계 자체의 성격도 포함됨. 기계의 가치는 생산물로 이전되는데, 한 기계를 오래 쓸수록 한 상품의 가치에 담기는 기계의 가치 부분이 작아지다 보니 자본가로서는 기계를 하루 중 최대한 오래 가능하다면 기계를 멈추지 않고 싶어짐. 이는 이 기계의 조수인 노동자의 노동시간도 길어진다는 뜻
자본가가 기계를 멈추고 싶어하지 않는 더 중요한 이유는, 기계의 수명은 대체로 시간에 따라 그리고 사용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것 말고도 기계를 마모시키는 요인, 마르크스가 ‘도덕적 마모’라고 부른 것이 있음. 기계 생산에서 혁신이 일어나 똑같은 성능의 기계가 더 싼값에 공급되거나 더 성능 좋은 기계가 같은 값으로 발명되면, 기존 기계의 가치는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상실됨. 기계제가 발전하면 전체 자본 중 기계에 투자한 비중이 커지는데, 도덕적마모가일어나면 자본의 상당부분이 곧바로 사라짐. 그런 초조함이 자본가들이 기계를 최대한 돌리게 만듦. “1760년대 대공업이 등장한 이후부터 눈사태처럼 무제한적인 노동일 연장의 태풍이 몰아쳤다”
③ 노동강도의 강화
노동일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가 시기적으로 명확히 나뉘는 것은 아님. 사실 자본가로서는 둘을 나눌 이유가 없고, 둘 모두를 원함
1833년 이후 표준노동일 제정으로 노동일 연장이 불가능해지자 자본가들로서는 노동강도 강화에 목을 매게 됨. ‘상대적 잉여가치’, 즉 노동생산력 증대를 통해 상품의 가치, 특히 노동자들의 생활수단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생겨나는 가치가 중요해짐
노동의 ‘강화’ 내지 ‘농축’은 노동자가 더 많은 양의 노동을 지출 즉, 노동력의 추가 지출이 분명한데 가치량의 척도로 사용해온 노동시간으로는 이것을 나타낼 수 없음. 마르크스는 복잡노동이나 고급노동, 고강도 노동에 대해 단순노동의 ‘X배’, 즉 전자의 1시간은 후자의 1시간의 ‘1.2배’에 해당한다는 식으로 써야 한다고 본 이유
○ 다이달로스의 몽상과 우울
기계가 인간의 노고를 줄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목적이 아님. 자본가는 이윤을 늘리기 위해 기계를 들여온 것이며, 이런 목적에서 사용하면 기계는 인간노동을 더 많이 뽑아내는 수단이 됨
기계제는 노동인구를 확장하면서 고용인구는 줄임. 그럼 사회에는 실업자들의 거대한 저수지, 일종의 ‘산업예비군’이 생겨남.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너 말고 일할 사람 많아’의 효과를 냄. 노동력 공급이 늘어나기 때문에 노동력의 가격이 가치 이하로 떨어지기 쉽고 자본가의 부당한 명령에도 저항할 수 없게 됨으로써 임금도, 노동일도, 노동강도도 모두 불리한 여건에 처하게 됨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에 대한 착취, 노동일의 연장, 노동강도의 강화, 고용의 감소. 이 모든 것이 서로 맞물려 불리한 상황을 배가함. 인간의 지적 발명품이 왜 이렇게 인간을 괴롭히게 되었을까. 이것은 비단 19세기만의 문제가 아님. 요즘 가장 뜨거운 주제인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됨. 실제로 노동자들은 이 놀라운 기술혁신의 소식을 듣자마자 일자리 걱정부터 하게 됨
3. 기계노동자와 절망 공장
○기계노동자, 의식을 가진 ‘부분기계’
기계제 공장 안을 들여다보면 생산과정의 주체가 누구인지 헷갈림, 앤드루 유어(A. Ure)는 공장을 “넓은 홀에서는 증기라는 자애로운 군주가 수많은 신하들을 불러 모은 뒤 각자에게, 고된 근육노동 대신 조정된 일감을 할당하고, 거대한 팔로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다만 자신이 기량을 발휘할 때 우연히 생겨나는 작은 일탈들을 바로잡기 위한 주의력과 솜씨만을 촉구한다.”고 그림.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규정 “중앙의 동력장치에 의해 작동하는 생산적 기계시스템을 숙련과 민첩성을 가지고 감독하는 상이한 계층의 노동자들(성인과 미성년 노동자들) 간의 협업.” “하나의 동일한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서로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중단 없이 작동하는, 그리하여 모든 기관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하나의 동력에 종속되는, 그런 셀 수 없이 많은 기계적 기관들과 자기의식적 기관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동장치.”
마르크스는 공장에 대한 유어의 두 가지 규정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지적, 무엇보다 생산의 ‘주체’가 다른데, 전자의 경우에는 노동자들의 결합체가 주체인데 비해, 후자의 경우 기계적 자동장치가 주체. 노동자는 이 기계적 자동장치 안에 들어가 있음. 마르크스는 이 노동자를‘기계노동자’로 표현했는데, 단순히‘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라는뜻이아니라, 기계를 다룰때조차‘기계의 부분으로(부분기계로) 존재하는 노동자’
매뉴팩처에서는 노동자가 도구의 ‘지배자’인 반면, 공장에서는 기계시스템의 ‘하인’
공장체제에서 기본적으로 작업을 수행하는 건 기계인데, 기계의 작업방식은 ‘인간적 한계’에 구애되지 않음. 매뉴팩처의기술적토대는 노동자의숙련이지만, 기계제에서는 오히려 숙련노동자의 기술적 토대를 파괴함. 그래서 “전문화된 노동자들의 위계구조를 대신하여…기계의 조수들이 행하는 노동의‘균등화’내지‘수평화’경향이 나타”남. 기계제는 오랜 시간 쌓은 인간 노동자의 숙련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숙련 여부보다는 연령이나 성별로 일할 곳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자본가들은 인건비를 절약하고 성인 남성 노동자 집단의 권력을 약화하기 위해 아동이나 여성들을 끌어들임
○ 껍데기 노동과 값싼 죽음
기계시스템에서는 노동자조차 기계의 수단이 됨. 장인이 자기 손을 노동수단으로 사용하듯, 기계시스템은 노동자를 ‘의식적 관절’로 사용
매뉴팩처에서도 노동자는 하나의 관절, 전체 “살아 있는 메커니즘”의 관절 중 하나였지만, 공장에서는 “살아 있는 메커니즘”(전체노동자)의 관절이 아니라 “죽은 메커니즘”(기계시스템)의 관절, “죽은 메커니즘”의 “살아 있는 부속물”
유어는 “노동의 분업, 즉 인간들의 상이한 재능에 노동을 맞추는 것은 공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할 때는 별 고려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특별한 솜씨와 끈기가 필요한 부분들에는 온갖 불규칙적 행동을 하는 교활한 노동자들을 가능한 한 멀리하고, 스스로 조절이 되는 특수한 기계장치, 아이도 감독할 수 있는 기계장치를 쓴다.”고 함
“공장시스템의원칙은 사람의기술(handskill)을 기계과학(mechanicalscience)으로 대체하는것이고, 장인들 사이의 노동분할이나 등급을 프로세스의 분할로 대체하는 것” 전체 공정을 노동자의 인간적 능력에 따라 구분하는 게 아니라 기계의 프로세스에 따라 노동자들을 배분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기계의 운동에 자신을 맞추는 훈련
“공장의 전체 운동이 노동자가 아니라 기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기계의 작동에 노동자를 맞춤. 이렇게 되면 시간과 장소를 바꿔 노동자들을 잇달아 교체할 수 있어 교환근무 제도 내지 릴레이 제도가 가능해지는 것
“기계는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내용에서 해방”시킨다. 기계노동은 ‘내용이 없는 노동’이라는 것. 말하자면 ‘껍데기 노동’이라는 것
발터 베냐민은 기계노동자의 노동을 도박에 비유. 도박은 반복되지만 이전 판에 구애되지 않고, 과거의 경험을 무위로 만듦. 바로 이 점이 기계노동과 통함. 베냐민에 따르면, 기계노동자들에게는, “헛됨(die Vergeblichkeit), 공허함(die Leere), 완성할 수 없음(das Nicht-vollenden-dürfen) 등의 특징이 내재”함. 내용이 없는 공허한 반복
기계노동자에게 과거의 오랜 숙련은 의미가 없고, 현재 매순간의 반응이 중요. 근육을 쓰지 않고 기계 앞에서 특정 자세로 오래 머문다면 그것 자체가 “근육의 다양한 움직임을 억압”하고, “신경 계통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드는” 고문
기계노동은 과로를 줄여주지 않고, 오히려 각각의 기계노동에 고유한 질병과 과로사가 생김. 더욱이 이 고통스러운 노동에는 오래 종사했다고 해서 숙련노동자가 되고 장인이 되는 게 아니니 의미도 없음. 마르크스는 이를 시시포스의 노동에 비유
전체 공정 중 어떤 부분을 자동화하고 어떤 부분을 노동자에게 맡기는지, 어떤 부분을 보조 작업자에게 맡기는지에서 자본가의 관심은 항상 어느 쪽이 비용이 덜 들 것인가에 있음. 노동자를 값싸게 쓸 수 있으면 굳이 기계에 돈을 들일 필요가 없음
○ 절망 공장의 노동자
마르크스는 기계 앞에 서 있는 기계노동자의 모습을 “과학과 거대한 자연력, 사회적 집단노동 앞에 서 있는 하찮은 존재(winzig Nebending)”로 묘사. 기계시스템에 대한 기계노동자의 예속은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예속. 마르크스는 기계노동자의 처지를 “공장 그리고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절망적 종속이 완성된다”라고 표현
유어가 내지른 외침 “아크라이트가 질서를 만들어냈다!”
마르크스는 이 외침이 들어 있는 단락을 길게 인용. “[공장의] 주된 어려움은 …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종잡을 수 없는 노동 습관을 버리게 하고 그들을 복잡한 자동장치의 변함없는 규칙성에 일치시키도록 만드는 데 있다. 공장에서 근면하게 일하게 하는 데 필요한 성공적인 규율 법전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것은 헤라클레스적 과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크라이트의 고귀한 업적이다!”
마르크스는 ‘공장체제’라는 용어를 씀. 공장을 일종의 통치체제로 바라본 것. 그가 묘사하는 공장체제는 병영을 닮았음.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기계의 균질적 운동에 맞춰져야 하고, 남성, 여성, 아동으로 구성된 노동의 각 단위가 부대처럼 움직여야 함. 그러려면 ‘병영적’규율이 필요하고, 이들을 담당하는 노무관리자(하사관)가 필요
자본가는 강력한 규율을 원하지만 노예주처럼 채찍을 휘두르지는 않음. 대신 그는 징벌 장부를 갖고 인사고과를 매겨 임금과 승진에 반영. 징벌은 항상 규범을 지킨 경우보다 어겼을 경우에 규범 제정자에게 이익이 가게끔 설계되었음. 즉 노동자들이 규범을 어기는 것이 공장주에게 더 큰 이익을 선사하는 경우가 많았음
공장에 기계가 도입된 것이 노동자들의 노동을 절약하거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이 아니듯 공장의 환경은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조성된 게 아님. 생산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기계. 당연히 생산환경은 기계에 최적화됨
한국의 전자산업 종사자들 가운데 직업병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증언을 담은 〈클린룸 이야기〉Stories from the Clean Room(2017)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클린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병을 얻고 목숨을 잃은 이유는. 사람을 위한 클린룸이 아니라 기계를 위한 클린룸, 상품을 위한 클린룸. 엄밀히 말하면 이윤을 위한 클린룸이었기 때문
자본가는 노동환경 개선에 투입되는 모든 것을 비용으로 계산. 시간, 공간, 햇빛, 공기 등 모든 것이 그러함. 마르크스는 공장시스템이야말로 생산수단 절약의 “온상 같다”라고 함. 생산수단을 절약하는 일이 “자본가의 손”에 넘어가면 “노동자의 생명조건인 공간과 공기, 햇빛, 생명에 대한 체계적 약탈, 그리고 생명이나 건강을 위협하는 생산환경에서 노동자를 지킬 수 있는 보호수단에 대한…체계적 약탈로 나타난다”라고 봄. 생산수단을 아끼는 것,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절약은 곧잘 약탈로 변함
○ 두 사람의 관찰자-유어의 눈과 엥겔스의 눈
유어의 『제조업의 철학』과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의 차이
유어는 왜 공장의 노동자들이 갑자기 차티스트가 되고 사회주의자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함. 아마도 노동자들이 너무 무지해 자기들한테 좋은 것도 몰라본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욕심이 많아 지금의 좋은 상황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야말로 이익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또 보지 않으려 했음
공장주들의 행태에 대해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엥겔스가 길게 달아둔 주석. 공장노동자들의 상태를 좀 알고 싶다고 하면 공장주들은 시골에 있는 공장으로 데려가는데, 그곳에는 웅장하면서도 질서정연하고 환풍기까지 갖춘 깨끗한 건물이 있고, 거기 노동자들은 활기차 보임. 방문객에게 멋진 식사를 대접한 뒤 노동자들의 주거지로 안내. 대체로 노동을 감독하는 관리자들의 집. 거기서 방문객들은 “완전히 공장 덕분에 먹고사는 가족들”을 봄. 그리고 공장주가 노동자들의 주거지에 학교와 교회, 도서관을 지어주었다는 말까지 듣고 나면 공장의 노동환경에 비판적 견해를 가졌었던 방문객은 생각을 바꿔 기계제 공장의 찬미자로 돌변. 엥겔스는 이런 방문객이 어떤 사람인지도 밝혀두었는데, 바로 기계제 공장의 찬미자 앤드루 유어 같은 사람
유어가 본 것과 엥겔스가 본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유어처럼 조야한 눈, 어쩌면 영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는 도시의 공장들을 보지 않고 그럴 의지도 없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전혀 모름. 그는 학교와 도서관이 세워졌다는 것에 감탄하지만,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도서관에 비치된 자료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지 않음. “이 신사들은 피고용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거니와, 알게 될 경우 마음이 불편해질 사실들, 나아가 자기네 이해관계와 정반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히 알려고 하지 않는다.”
○ 증기왕을 처단하라
유어가 묘사한 기계제 공장은, 넓은 홀 한가운데에 증기라는 자애로운 군주가 있어, 신하들에게 일감을 하나씩 주고 소명을 부여하며, 모든 신하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증기왕이 다스리는 참으로 조화로운 체제이고 나라. 엥겔스는 이 조화가 폭력의 산물이라고봄. “거대하고 복잡한 공장에서 제각각인 작업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공장에서도 군대만큼이나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는폭정이없으면 유지되지못하는 사회질서가 어떤 사회질서이겠는가?”
엥겔스가 공장제에 대한 당시 노동자들의감정을 아주 정확히 표현했다며 인용한 시
왕이 있다네, 무자비한 왕; 시인이 꿈꾸는 그런 왕이 아니야
잔인한 폭군, 백인 노예들은 익히 알고 있지, 증기가 그 무자비한 왕의 이름이야
그는 팔을 가졌지, 강철로 된 팔, 비록 하나뿐이기는 하지만,
그 강력한 팔에는 마력이 있어, 수백만 명을 파멸로 몰아넣는.
벤힌놈 골짜기에 서 있는, 음산한 고대의 신 몰록처럼,
그의 불타는 그릇에는 먹잇감인 아이들이 들어 있네.
그의 굶주린 사제들은 피를 갈구하는, 오만하고 뻔뻔한 무리들;
그의 거대한 팔을 이끌어 피를 황금으로 바꾼다네.
탐욕의 노예 사슬에 묶인 그들은 더러운 이익을 위해 모든 자연권을 속박한다네;
그들은 사랑스러운 여인의 고통을 조롱하고, 사내의 눈물을 외면하지.
노동자의 아이들이 내뱉는 한숨과 신음소리가 그들 귀에는 음악이고,
젊은 남녀의 뼈만 남은 망령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이 증기왕의 지옥에서 말이야.
증기왕이 태어난 이래 지상에는 그런 지옥들이 널려 있어.
절망이 사방으로 흩뿌려지지; 천국을 본뜬 인간의 마음이,
몸과 함께 거기서 살해되었으니 말이야.
그러니 왕을 타도하라, 몰록왕을 타도하라, 그대 수백만 노동자여;
왕의 손에 사슬을 채우지 않으면, 우리의 고국은 그에 의해 몰락할 터이니.
왕의 혐오스러운 태수들, 그 오만한 공장 귀족들, 지금 황금과 피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그들 모두를,
국민의 성난 얼굴이 처단해야 한다, 그들 괴물 신과 더불어.
—에드워드 P. 미드(Edward P. Mead) <증기왕(The Steam King)>
4. 노동자와 기계의 전쟁
○ 대규모 기계파괴 운동
영국에서는 19세기 초에 운동의 지도자 ‘네드 러드 장군’(General Ned Ludd)의 이름을 딴 ‘러다이트’(Luddite)라고 불리는 대규모 기계파괴 운동이 일어남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특별한 것은 아니며, 마르크스의 말처럼 두 계급의 투쟁은 “자본관계 그 자체의 발생과 함께 시작”
기계파괴 운동의 특별함은 투쟁의 ‘대상’이 노동수단이라는 점.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물적 토대인 생산수단의 특정한 형태에 대해 봉기를 일으킨 것”
기계제 생산에서는 생산성의 증대가 ‘고용 노동자 수의 감소’를 통해 나타남. 마치 일자리를 놓고 기계와 노동자가 경쟁하는 꼴. 기계 한 대가 노동자 수백 명을 쫓아내고, 게다가 추방된 노동자들의 저수지가 노동력의 가격을 하락시킴
마르크스는 “노동수단이 노동자를 때려죽인다.”고 표현.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15세기말~16세기초 자본주의의 ‘시초축적기’에 ‘양이…사람을 잡아먹는 괴상한 나라’라고 표현한 바로 그 ‘괴상한 나라’에서 이번에는 기계가 사람을 때려죽이는 상황이 벌어진 것. 이는 노동자 축출이 매뉴팩처를 기계제로 바꿀 때의 일시적 현상이 아니며, 기계제로의 전환 이후에도 기계의 발전과 더불어 노동자의 축출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고통이 급성처럼 지독하면서도 만성처럼 항상적인 것이 된다는 뜻
○ 기계는 자본가의 무기
기계는 자본가의 생산수단일 뿐 아니라 전쟁의 무기이기도 함. 기계제 공장에 대한 유어는 이 기계가 자본가의 ‘정당한 지배’ 즉 “하위 조직원들에 대한 우두머리의 지배”를 회복시켜준다고 말함. 또 기계를 ‘질서 회복의 사명’을 받고 창조된 자본가의 ‘아이언맨’즉‘철인’이라고도 부르고, ‘히드라’를 물리친 ‘헤라클레스’에 비유하기도함
“분업의 낡은 전선 뒤에 난공불락의 참호를 판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불평분자 무리는 새로운 기계 전술에 의해 측면공격을 당하고는 자신들의 방어가 무력화된 것을 깨닫고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논리를 동원해서라도(설령 이것들이 서로 모순될지라도) 자본가의 이윤을 늘리고 공장의 규율도 잡겠다는 유어의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 것
○ 쫓겨난 노동자에 대한 보상 이론
공장에 기계를 도입하면 노동자가 축출되는 건 맞지만 기계가 만들어낸 생산물로 자본가는 새로운 고용을 창출한다는 정치경제학자들의 논리. “기계가 노동자를 축출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자본으로 하여금 새로운 고용을 창출할 여력을 제공한다.”
기계가 한편으로는 노동시장에 새로운 노동력을 풀어놓았고(노동력의 해방),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에게 필요한 생활수단을 자본가 손에 쥐어준 것(생산물의 해방). 자본가는 이 생산물을 가지고 새로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
기계가 노동자를해방하고 노동자와 결합해 있던 생산물을 해방했다는 황당한 표현! ‘기계 도입으로 노동자들이 해고되었고, 그래서 이들은 아무런 생활수단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비극적인 상황을 현학적인 말로 별일 없는 듯 주장하는 엉터리 주장
○ 기계제는 ‘하인’ 노동자를 늘린다
이들은 자본가가 기계 덕분에 손에 쥔 자본(새로운 생산물)으로 쫓겨난 또 다른 노동력을 고용해 새로운 사업을 펼칠 것처럼 말했지만 정말로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
노동시장에는 공장에서 해고된 노동력이 들어와 있지만, 새로운 사업에 고용될 노동력은 그 사람들일 가능성이 거의 없음. 이는 기계제로의 전환기에 특히 심각, 매뉴팩처의 숙련노동자는 그 숙련을 인정받는 일자리를 구할 가망이 거의 없었음
“분업 때문에 불구화된 이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의 옛 분야를 벗어나서는 별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몇몇 저급한, 그래서 지원자는 넘쳐나고 임금은 형편없는 일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음
기계제 생산은 해당 부문에서는 노동자들을 곧바로 축출. 그 대신 그 부문과 연관된 부문, 이를테면 거기에 납품을 하거나 납품을 받는 부문의 고용을 늘리게 되면서, 그곳이 기계화가 덜 된 부문일수록 고용은 크게 늘어나지만, 그런 부문에서도 기계화가 일어나면 신규 고용 여력은 급속히 줄어들어 오히려 노동자 축출이 나타남
사회 전체로 확대해서 봐야 보이는 것. 기계제 생산은 자본가들의 잉여가치(상대적 잉여가치, 특별 잉여가치)를 크게 늘려주는데, 잉여가치가 늘어난다는 것은 이 잉여가치에 상응하는 부유한 계층이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함
또 거대 규모로 축적된 자본은 당장에 수익이 나지는 않지만 미래 수익을 위해 필요한 소위 인프라 산업에 투자를 가능케 함. 이런 분야에는 고급기술을 가진 인력도 필요하지만, 압도적 수를 차지한 것은 단순 육체노동자. 한철 쓰고 마는 일자리들
기계제 생산의 확대 및 고용과 연관해 마르크스가 주목하는 경향은 서비스직 확대. “노동자계급 가운데 비생산적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비중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
여기서 ‘비생산적’(unproduktiv)이라는 말의 의미는, ‘잉여가치의 생산’에 관여하는 노동자들이 줄어들고,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의 소비’에 관여하는, 그 소비과정을 도우며 거기서 임금을 받는 서비스직 노동자들이 늘어난다는 것
○ 과연 기계는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할까?
기계제 발전과 더불어 산업이 성장하면, 특히 자본 투자 규모가 커지면 공장의 규모가 커지거나 공장의 수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고용 노동자 수가 늘어날 수 있음
그러나 이것은 기계 도입 때문에 늘어났다기보다 기계 도입에도 ‘불구하고’ 늘어났다고 말하는 편이 옳음. 투자액 대비 일자리는 더 줄어든 거니까
기계제가 발전하면 기계설비에 들어가는 비용이 훨씬 커짐[이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증대]. 즉 불변자본의 비중이 가변자본에 비할 바 없이 커지면, 자본의 소위 ‘고용 유발 효과’가 떨어진다는 이야기. 동일한 양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큰 규모의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것. 여기에 자동화까지 진척되면 투자 규모가 크게 늘어도 고용이 늘어날 여지는 별로 없음
○ 식민지를 찾아서
기계시스템을 갖추려면 일정규모의 축적된 자본이 필요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기계시스템 덕분에 자본의 축적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짐. 수공업이나 매뉴팩처 단계에 있는 동종 업자들은 그의 상대가되지 않으니, 그에게는 생산성이 아주 높은 경우 생겨나는 특별 잉여가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동종업자들의 몰락으로 얻은 이익이 큼. 사실상 시장을 독차지. 기계제 초기에는 이처럼 ‘예외적으로 큰 이윤’이 생겨남
게다가 “새로운 투자처를 구하는 사회적 추가자본 대부분이 이 유리한 생산의 영역으로” 몰려옴. 초기엔 기계제로 전환되는 산업부문마다 이런 일이 일어남. 일종의 변혁이 일어나는 이 시기를 마르크스는 “최초의 질풍노도 시기”라고. 하지만 기계제 공장이 산업부문 전반에 자리를 잡으면 이런 효과들은 사라짐
기계제 생산이 ‘일정한 성숙단계’에 이르면 다른 요인들, 즉 생산에 필요한 원료를 어떻게 구하고 방대한 생산물을 어디에 어떻게 팔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됨
생산물을 늘리는 능력은 충분하지만, 문제는 원료와 판매시장
마르크스는 기계가 노동가능인구를 확대하는 동시에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 수는 감소시킨다는 것을 보여줌. 사람이 많아 ‘보이는’ 것은 기계가 낳은 인구 때문
마르크스는 기계제 대공장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형태 안에 식민주의에 대한 요구가 들어 있음을 보여줌. 식민주의는 자본이 자연과 노동자에대해 맺는관계가 다른지역, 다른 민족을 대상으로 나타난 것. 기계제 생산이 일반화되면 자본은 원료를 값싸게 대량으로 얻을 곳, 즉 식민지화할 나라를 찾아나섬. 기계제의 발전과정에서 함께 발달한 통신과 교통 그리고 기계무기 등이 식민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
식민지는 원료 공급처로서만 중요한게 아닌 기계제 대공업의 생산물을 파는 새로운 시장으로서도 중요. 이를 위해 식민지에 통신과 교통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식민지의 전통적 생산기반은 붕괴됨. 기계제 생산은 이런 식으로 지구적 차원의 변동을 야기
마르크스는 기계제 생산과 더불어 “국제분업”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지적. “기계제 생산의 본거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분업이 생겨나고, 이 국제분업은 지구의 한 부분을, 공업 생산 위주 지역을 위한 농업 생산 위주 지역으로 바꾸어버린다.”
오늘날 이런 국제분업 구조는 훨씬 복잡. 노동집약업종(경공업)은 노동력이 저렴한 개발도상국 차지,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잉여가치가 큰 업종(중공업, 첨단산업)을 차지
영국의 식민지 인도는 영국 자본의 원료 공급지가 되었고 상품판매시장이 되었음. 동인도 총독의 말처럼 인도 면직공들의 뼈가 인도의 들판을 하얗게 뒤덮었고, 세상에 별다른 해를 끼쳐본 적 없는 근면한 사람들이 “고통의 바다”에 던져졌음
기계제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영국은 “인간종족의 파괴”를 통해 중국까지 침략. “제국의 생혈인 은화”를 빼내려고 “아편이라는 최면제를 중국에 강요한 영국의 대포”
이게 자본주의의 민낯. 자본의 정체가 죽은 노동이고,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바꾸면서 자신을 증식시킨다는점에서 자본의증식에 대한 비판은 죽음의증식에 대한 비판. 사람을 환각 속에 살면서 병들게 하고 끝내 죽게 만드는 ‘아편’은 매우 상징적
○ 번영은 드물고 공황은 빈번하다
기계제 생산이 이루어지고 원료공급과 상품판매가 세계적차원에서 이루어지면 생산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짐. 기계 덕분에 사실상 생산능력에 한계가 없어진 데다 시장 규모까지 세계 차원으로 확대되었으니, 말 그대로 생산의 족쇄가 모두 풀린 셈
그런데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시장의 사회성. 상품유통의 사슬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세상에 동업자가 얼마나 많은지, 현재의 생산량은 소비될 수 있는 수준인지 알 수가 없음.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각자도생하는 체제이지만 운명은 함께 맞게 되어 있음. 시장이 세계적 수준으로 확대되면 이런 불확실성이 한층 커짐
이를 마르크스는 “시장을 과잉으로(상품이넘쳐나게)만들었다가 다음에는시장의 수축과 더불어 마비상태에 빠져들”게 한다고, “열병 같다”고 했음. 세분하면 ‘활황-호황-과잉생산-공황-침체’가 연속됨. 처음에는 경기가 좋아서 생산도 늘고 이윤도 늘어남. 그럼 투자가 늘고 생산 규모가 확대되다가 어느 시점부터 과잉생산으로 접어듬. 그러고 나면 공황이 찾아오고, 다시 경기가 얼어붙음
이런 산업의 순환을 따라 노동자들의 처지도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내쳐지길 반복. 잘나갈 땐 잘나가서 힘들고 못나갈땐 못나가서 힘든게 자본주의 노동자의삶
중요한 사실, 호황과 불황이 단순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는 점. 호황은 점차 드물어지고 시기도 짧아지는 반면 불황과 침체는 더욱 빈번하며 기간 또한 길어짐
짧게 보면 산업의 반복적 순환이 생명의 순환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 반복 행위 속에서 파국(대공황이든 대전쟁이든)이 다가오고 있는 것
5. ‘보이지 않는 실’―기계제 시대의 착취
○ 몰락하거나 거듭나거나
기계제 대공업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형태로 자리 잡으면, 기계제로 전환하지 않은 수공업, 매뉴팩처, 가내공업 등의 작업장들도 영향, 하나의 요구에 직면하게 됨. 변화된 생산유기체에서 불필요한 기관으로 몰락하거나 새로운 기관으로 거듭나거나
업종이 동일하다면 매뉴팩처 작업장은 생산력에서 기계제 공장을 당해낼 수 없음
그러나 기계제 대공업이 지배적 생산형태가 되었다고 해서 매뉴팩처와 가내공업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님. 그런데 겉보기에는 매뉴팩처 작업장과 비슷해 보인다해도 기계제가 지배적 생산형태인 사회에서는 그 작업장의 기능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짐
마르크스는 매뉴팩처의 부분 공정에 기계가 일부 들어오면서 단단한 결정과도 같았던 매뉴팩처의 편제(Gliederung)가 점차 해체된다고. 기계제 이후 작업장에 들어오는 기계들은 부분적으로 도입된 경우에도 노동자의 작업 원리가 아닌 기계공학이나 화학적 원리에 근거해서, 해당 공정에서는 노동자가 기계에 작업을 맞추어야 함. 또한 기계제 이후 이런 영세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과 아동, 미숙련노동자
겉보기로는 매뉴팩처 시대의 작업장과 비슷한데, 근대의 가내공업은 “공장이나 매뉴팩처 또는 선대(先貸) 상인의 외부 부서”. 공장이나 매뉴팩처, 선대 상인 등의 존재를 전제함. 즉 이들의 주문을 받고 납품을 한다는 의미
대공업 시대의 매뉴팩처나 가내공업 업체는 시장에 상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품을 조립·생산하거나 특정 부분의 가공만을 담당하고 공장에 생산물을 ‘납품’.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모두 ‘보이지 않는 실’(unsichtbare Fäden)로 연결되어 있고, 이‘실’을 볼수있어야 기계제시대 매뉴팩처나 가내공업의 노동형태를 이해할수있음
○ 값싼 착취재료―헛되이 고통받고 단축되는 생명들
기계제 시대가 되면, 매뉴팩처나 가내공업의 노동자들이 당하는 착취가 대공장 노동자들보다 더 크고 그 형태도 ‘파렴치’. 기계제 시대의 매뉴팩처 작업장에는 주로 여성과 아동 노동자(그리고 값싼 이주노동자)가 많고, 작업환경도 더 나쁘고 위험함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건 중간에 끼어드는“약탈적 기생충들”(räuberischerParasiten)인, 노동자들에게는 고용주이지만 대공장 자본가에게는 외부 부서장쯤 되는 사람들. 그들이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돈의 상당 부분을 중간에서 떼어내다 보니 하청기업의 경우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보다 실제로 훨씬 적게 지급됨
영세한 가내공업은 충분한 기계설비 없이 경쟁력을 갖추어야 하기에 그만큼 노동력을 쥐어짜 노동일도 길고 노동강도도 아주 높음. 노동자들의 건강에 꼭 필요한 시설도 비용을 아낀다는 이유로 구비해놓지 않고, 작업 공간도 비좁음. 자본가의 비용 절약은 노동자의 생명 낭비. “적대적이고 살인적인 측면이 최고도에 달하는 곳”
낡은 생산형태가 새로운 생산유기체 속에서 매우 혹독한 형태로 새로 태어난 셈
「공중위생 보고서」나 「아동노동조사위원회 보고서」 자료들의 내용을 요약하면,여기 노동자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이런 곳에서 일자리를 구했기 때문
「공중위생보고서」편찬 의사의 말,“무수히 많은 남녀 노동자들의 생명이 현재 헛되이 고통받고 단축되고 있는데, 이는단지 그들이 고용되었다는 사실때문에 받게되는 무한한 육체적 고통에서 비롯된 것” 살기 위해 잡은 일자리가 삶을 단축시키는 셈
가내공업은 그야말로 공장법의 사각지대. 공장주나 상인에게 일감을 받은 가난한 어른이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서, 그리고 자기 자식들까지 동원해 일을 하는 것. 아이들의 작업 공간은 한 조사위원의 표현을 쓰자면 “어린아이 하나를 상자 속에 넣는다고 가정할 때 차지하는 공간의 절반보다도 작”음. “가난하고 피폐해진 부모들은 자식들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뽑아내려는 생각뿐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영국 사회를 조롱하듯 “이렇게 모범적인 가정들의 조국은… 유럽의 기독교 모범국이다!”
○ 시다의 꿈
영국에서 매뉴팩처와 가내공업의 대공업 이행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의류 산업’.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장에서 축출되었거나 농촌에서 올라온 마땅히 갈 데가 없는 ‘값싼’ 인력들. 이들 업종에서 매뉴팩처 형태가 꽤 오랫동안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들을 극도의 저임금으로 장시간 부릴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분업과 값싼 인간재료만으로는 더 버티기 힘든 시점이 옴. 마르크스는 의류 산업의 세부 업종 전체를 바꾸는 획기적인 기계인 ‘재봉틀’이 바로 이때 등장했다고. 재봉틀이 등장하면서 의류공장에서 전면적으로 부각된 노동인구는 젊은 여성들과 소녀들. 재봉틀은 무게와 크기, 기타 특성이 젊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맞춰져 있음. 특정 기계가, 특정 연령대의 특정한 성의 노동자와 결합하는 작업형태가 만들어진 것
○ 공장법의 규제가 필요한 이유
재봉틀이 매뉴팩처 작업장을 곧바로 기계제 공장으로 바꾼 것은 아님. 굳이 말하자면, 재봉틀은 숙련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도구. 계속해서 기계에 대한 혁신이 이루어지고 규모가 대형화되면서 이런 영세업체들은 점차 몰락.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장법의 시행은 “매뉴팩처와 가내공업 사이의 여러 중간형태들”을 몰락시켰음. “값싼 노동력의 무제한적 착취야말로 이들 형태가 지닌 경쟁력의 유일한 토대였기 때문”
영세업체들은 몰락하고 생산수단과 노동자들이 대자본을 중심으로 편제
공장법 규제가 시작될 당시 많은 업체들이 업종의 성격상 법을 지키기 어렵다며 저항하기도. 그러나 대부분은 “무제한의 노동일, 야간노동, 인간생명의 무제한적 낭비의 습관”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
공장법의 규제는 공장제로의 전환을 촉진하면서 공장제로 전환하기 위한 자본이 부족한 영세한 자본을 몰락시킴. 이로써 자본의 집적(집중, Konzentration)이 가속화
공장법은 대공업의산물이면서 대공업으로의이행을 촉진한 요인임.그러나 공장법의 규제없이 자본 스스로 ‘인간생명에 대한 무제한적 낭비’를 멈추지는 않았을 것. 자본안에는 가치증식의 내적충동을 제어할 아무런 장치가 없음. 그래서 외적규제가 꼭 필요. 자본의 충동은 오직 “일반적인 의회 법령의 압력 아래에서만” 제어될 수 있음
○ 부르주아 심문관과 ‘자본의 정신’
공장법에는 청결과 환기, 안전에 필요한 소소한 보건 조항들이 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당연한 “노동자들의 팔다리를 보호하기 위한” 일할 때 적절한 크기의 공간이 필요하고 환기가 되어야 하고 위험한 장치에 다가갈 때는 보호장구를 갖추어야 한다는 극히 사소한 조치들에도 자본가들은 비용이 조금이라도 들어간다면 “아주 미친 듯이” 반대함. 자본가에게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음
이런 자본가들이 공장에서 지켜야할 기초적 보건상식을 모를리없는데도 모르는척하는 것은, 자본의 정신이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자본이고 자본주의
공장법을 확대 적용하는 과정에서 공장주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본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대목. 1867년 8월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수십 년 동안 문제를 지적하고 싸워온 결과 ‘공장법 확대법’(Factory Acts Extension Act)이 통과됨
노동자들의 투쟁이 ‘공장법 확대법’을 제정하였지만 자본가들의 반발로 “많은 예외 규정들과 적지 않은 타협”이 담겼고 이로 인해 본래의 공장법보다도 내용이 후퇴함
여론에 밀려 공장법 확대법을 만들기는 했지만 의회로서는 내키는 일이 아니었음. 마르크스는 당시 의회가 “철저하지도 못했고 좋아하지도 않았고 성의도 없었다”고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광산특별위원회’의 청문회. 형식적으로는 위원회의 심문관인데 실제로는 자본가의 변호사들. 영국 재판정에서 변호사가 증인을 상대로 엉뚱하고 파렴치한 질문을 마구 던져 증인들을 얼어붙게 한 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게 하는 수법을 쓰는데, 여기서 의원들이 그러함. 바로 여기가 자본의 정신을 드러내는 순간. 이들의 억지가 자본의 의지. 마치 주머니를 뚫고 나온 송곳처럼 드러나는 순간
○ ‘보이지 않는 손’과 ‘강철로 된 손’
스미스는 사회의 공익이 사적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생겨난다는 식으로 주장. 개인들로 하여금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내버려두면 각 개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결과물이 사회의 이익을 증진한다는 것
과연 그럴까? 자본가들은 빵을 저렴하고 신선하게 많이 만들어내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고, 생산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함. 그 비용절감이 노동자들의 생명 낭비여도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 빵이 꼭 신선하고 품질이 좋지 않아도 그렇게 ‘보일’ 수만 있다면, 나쁘다는 것이 들통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밀가루에 돌가루를 섞는 것도 주저하지 않음. 이들의 목적은 더 많은 돈 즉 이윤. 이들은 빵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윤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이타심을 가지라고 호소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 돈을 벌기 위해 자연과 사회를 파괴하는 행동,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생명을 낭비하는 행동을 하면 큰 손해라는 것을 일깨워줘야, 이기심이 작동하는 환경을 바꿔주어야, 사회가 ‘강철로 된 손’을 움직여야 함. 그랬을 때만 이들의 이익 추구가 공익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과 사회, 자연을 덜 파괴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임
○ 자연에 대한 닦달―기계제 생산과 생산력주의의 지배
기계가 농업에 미치는 효과는 공업의 경우와 비슷. 기계 사용으로 경작 면적은 확대되지만 경작 노동자 수는 감소해서, 공장으로부터 노동자들이 축출되듯 토지로부터 농민들이 대거 축출됨. 특히 소규모 자영농민들(peasant)이 몰락해 임금노동자가 됨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뿐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는 방식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수확을 높이는 모든 진보 또한 토지생산력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방식을 발전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한다고 썼는데, 여기서 말하는 ‘부’는 ‘가치’(교환가치)가 아님. 자연의 작용 자체는 가치생산에 이용될 뿐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으로 평가받지 않음. 한마디로 자연은 ‘가치’ 바깥에 있음
마르크스가 토지와 노동자를 ‘부의 원천’으로서 함께 불렀을 때, 여기서 말하는 ‘부’는 가치(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와 관련된 것. 여기서 그가 말하는 파괴와 약탈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인간과 자연의 능력에 대한 것. 기계제 생산이 인간과 자연을 더는 무언가를 품고 산출할 수 없는 존재로 황폐화했다고 보는 것
자본가들이 기계를 도입하는 이유는 생산성 증대를 통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인데, 기계는 노동생산력과 토지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 생산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투입량 대비 산출량을 최대로 한다는 뜻. 간접적으로는 잉여가치의 생산에 기여하지만 직접적으로는 사용가치 즉 물건의 양을 최대로 늘린다는 뜻
여기에는 물건을 최대로많이 만들어내는 것을 지향하는 일종의 생산력주의가 있음. 기계제 생산은 생산력주의의 지배를 극명하게 보여줌. 우리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인간과 자연을 닦달하고 쥐어짜는 시대에 살고 있음. 이것은 가치를 생산하고 축적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풍요에 대한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음. 지금처럼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회, 그런 걸 풍요라고 생각하는 사회에 대한 반성이 필요
우리가 지향하는 풍요가 어떤 것인지, 그 속에서 우리는 비인간 동물, 더 나아가 자연의 다양한 사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아야 함
6. 미래에서 온 공병-기계의 미래와 노동자의 미래
○ 공장법의 일반화와 마르크스의 방법
마르크스는 공장법에 대해 “사회가 생산과정의 자연발생적 형태에 대해 가한 최초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반작용”이라고 봄. 자연발생적 형태에 처음으로 규제를 가했다는 건 그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는 뜻. 기계제 생산으로부터 노동자와 사회를 보호해야 할 필요를 절감한 것. 그러나 공장법은 확대 과정에서 자본가들과 타협함으로써 많이 변질되어 ‘공장법 확대법’이 본래의 ‘공장법’보다 후퇴했다고 평가
마르크스의 방법을 ‘역설의 변증법’이라고. 특정한 배치 속에서 사물은 특정한 의미와 용법을 갖지만, 마르크스는 해당 배치 속에서 그것이 작동되는 방식을 보고 그 사물이 그것과는 다른 의미와 용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읽어냄
마르크스는 배치 자체에 대해서도 그것이 품고 있는 해체 가능성을 읽어냄. 특정 사회형태의 원리에서 그것의 잠재적 해체 원리를 읽어내는 것은, 매듭이 묶이는 방식과 풀리는 방식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현재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미래로 가는 출구를 찾기 위해, 즉 현재 속에 들어온 미래의 흔적을 읽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 이것이 투사로서 비평가가 해야 할 일
○ 공장노동과 교육의 미래
공장법은 공장주들에게 14세 미만의 아동 노동자에 대한 초등교육의 의무를 부과
마르크스는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더 열의를보이며 열심히 한다는 공장감독관의 증언과, 유능한 노동자를 길러내려면 노동과 교육을 결합시키는 게 좋으며, 이는 자신의 자녀를 위해서도 그런 것 같다는 한 공장주의 말을 인용. 이런 증언들에 주목하는 것은 공장법의 어린 노동자의 교육, 즉 노동과 교육의 결합을 의무화한 교육 조항, 공장노동과 학교교육의 접점에서 “미래 교육의 싹”을 보았기 때문. 마르크스는 이 조항이 “학업과 체육을 육체노동과 결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라고 평가
그는 아동 노동자들에 대한 의무교육 조항을 놓고 오히려 부르주아 아이들을 겨냥, 그저 책만 읽고 공부만 하는 아이들은 행복한가. 그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인가를 물음. 일하는 사람에게 공부가 필요한 것처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일이 필요
마르크스는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교육실험에 주목. 오언은 『사회에 관한 새 견해』에서 공장 시설 복판에 만든 ‘새로운 학교’(New Institution)를 간략 소개. 공동체의 노동자 아이들은 2세부터 5세까지 보육교사와 함께 놀다가 부모의 퇴근시간에 집으로 돌아감. 주된 가르침은“온 힘을 다해 자기 친구를 행복하게 하라.”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을 일치시키도록 훈련. 5세가 넘으면 읽기와 쓰기, 산수를 배우고, 일반 교과 외에 학교 바깥에 있는 공동체의 조리 시설이나 식당에서 재봉과 요리와 청소 등을 배움. 남학생들은 교련도 받음. 교육은 모두 무료
마르크스는 노동과 학업, 체육, 요리, 교련 등이 결합된 이런 식의 교육은 한 가지 일을 평생 하도록 만드는 매뉴팩처 시대에는 나올 수 없다고 봄. 기계제 대공업이 매뉴팩처적 분업을 기술적으로 타파하면서 이런 식의 교육을 떠올릴 수 있게 된 것. 물론 오언의 실험은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공장 공동체에서 이루어진 ‘실험’으로, 당시 일반 공장에서 일하던 보통의 어린 노동자들은 받을 수 없던 교육
매뉴팩처나 수공업 시대의 분업은 인간능력의 다면적 발전을 가로막음. 작업장의 숙련노동자가 자기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노동하는 것처럼, 각각의 직업에서도 그 직업 종사자만이 아는 기술이나 비법을 전수
19세기 대공업은 이런 신비의장막을 찢어버림. 생산과정을 기본 운동들로 분해하고 이 운동들을 기계적으로 재구성. 이렇게 탄생한 근대 학문이 “기술학”(Technologie). 그리고 기술학과 외연이 상당히 겹치는 ‘공학’(engineering) 역시 이때 탄생
근대적 대공업에서는 생산과정의 현존 형태를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항상 더나은 생산방식을 모색하며 끊임없이 변화. 그에 맞춰 노동자들에게도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수 있고, 기능을 유연화할 수 있으며 더 큰 이동성을 가진 존재가 될 것이 요구됨. 아이들도 그렇게 교육되길 바람. “대공업의 본성은 노동의 전환성(Wechsel)·기능의 유동성(Fluß)·노동자의 전면적 이동성(Beweglichkeit)을 조건으로 삼는다.”
자본주의에서 이런 요구는 “노동자들의 생활 상태에서 모든 평온과 안정, 확실성을 빼앗는”역할. 노동자들은 생산과정의 변화에 대처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 단지 일면적 기능만 가진 노동자들은 불필요한 존재로 공장에서 축출됨. 기술적필요와 사회적 특수성의 결합이 “노동자계급의 끊임없는 희생, 노동력의 무제한적 낭비, 사회적 무정부 상태가 만들어내는 파괴 작용”으로 나타남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전의 모든 생산양식의 기술적 기초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지만 근대적공업의 기술적토대는 혁명적이다”라며, 부르주아 시대는 이전의 모든 시대와 달리 “생산의 지속적 변혁, 모든 사회 상태의 끊임없는 동요, 항구적 불안과 선동”을 특징으로 한다고, 한마디로 “모든 단단한 것들이 녹아 없어지는” 시대라는 것
그는 근대 대공업과 부르주아지의 관계를 “주문을 외워 불러낸 저승의 힘을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에 비유. 저승에서 불러낸 힘, 즉 근대 대공업이 마법사인 부르주아지의 생각대로 움직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표현. 기계제 대공업의 기술적 요구가 꼭 자본주의적 사회형태와 맞물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분명 부르주아지가 불러낸 기계제 대공업은 혁명적. 관건은 이 혁명을 혁명할 수 있느냐, 이 힘을 서툰 마법사인 부르주아지와 다르게 다룰 수 있는가에 있음
마르크스는 노동의 미래, 교육의 미래가 여기에 달렸다고 봄. 노동의 전환성, 유동성, 이동성이 노동자에게 더는 비참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가. 노동자가 다양한 종류의 일을 하고 다양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더 많이 착취되는 일이 아니라 더 풍요로운 사회적 존재가 되는 일일 수 있는가. 기계제 자체는 이것을 가로막지 않음, 아니, 오히려 그것을 요청함. 문제는 자본주의
마르크스는“공업학교,농업학교,‘직업학교들’”을 보고 미래를 위한 변혁의 계기(“대공업의토대 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달한 변혁과정의한계기”)가이미나타났다고봄
노동자계급의 미래인“노동자의 자녀들”이 기계의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미래와 기계의 미래가 겹쳐지는 첫걸음이기때문. 노동자의 자녀들이 기계를 다룰줄 안다는것, 기계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
마르크스는 기계와 노동자의 결합(연대)을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기를, 그리고 기계가 노동자를 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생산형태가 만들어지기를 희망
이 점에서 기술 교육은 특별한 의미. “자본으로부터 쟁취해낸 최초의 빈약한 양보인 공장법은 단지 초등교육만을 공장노동과 결합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앞으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경우-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인데-이론적이면서 실천적인 기술 교육이 노동자학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 학교는 노동자와 기계의 새로운 관계를 숙성시킬 ‘변혁의 효소들’. 마르크스는 현재의 형태에서 자라난 것, 현재의 형태에서 강화되고 있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형태를 해체하고 현재와는 다른 미래를 도래케 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고 봄
공장법의 교육 조항에서 그 조짐을 읽었고, 대공업 시대에 생겨난 기술학교들에서 그 조짐을 읽었음. 기계제 대공업은 최소한 낡은 분업에 대해 콧방귀를 뀌게 해줌
○ 가부장제 해체와 가족의 미래
공장법이 대공장의노동일을 규제하는것은 노동자에대한 자본의착취를 제한하는것
가내공장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만큼이나 부모가 자식을 착취하는 곳. 자본주의적 착취 방식이 변하면서 가부장의 경제적 지위가 크게 흔들렸고 이 때문에 어린아이들의 노동력을 팔아치우는 친권의 남용이 나타난 것. 아동노동의 착취와 관련된 친권의 남용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
그런데 공장법의 일반화로 가내공장에 대한 규제가 시작됨. 공장법은 어린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규제했고 지하 탄광 같은 곳에서는 아예 일할 수 없도록 함.
마르크스는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을 단순히 착취재료의 확대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의 사회활동의 증대라는 점에서 접근. 즉,대공업은“가족과 남녀관계의 더 고차적 형태를 위한 새로운 경제적 기초를 만들어”낸다는 것
기계제 공장의 작업방식과 관련해서도 마르크스는 성별이나 연령 등의 권력관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작업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으려 함. 그는 생산과정에 여성과 아이가 들어오는 것, 즉 생산에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리는 것은 “자연발생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적 형태에서는 황폐화와 노예화를 낳는 페스트균 가득한 원천이 되지만, 적절한 관계들 아래서는 반대로 인간 발전의 원천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함
자본주의에서 여성과 아동의 참여가 야만의 원천이 된 것은 “생산과정이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 하지만 이런 게 아니라면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리는 것은 인간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됨(생산만이 아니라 교육도 그러함). 지성과 감성, 경험이 다른 존재들이 함께 어울리는 거니까
마르크스는 현재 자본주의를 고발하면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게 아니라, 현재 속에서 ‘현재를 넘어서는 것’이 자라고 있음을 봄. 현재 속에서 커지는 것, 현재의 사회형태와 생산양식이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것에서 현재를 넘어설 요소를 찾는 것
마르크스는 공장법의 일반화는 자본축적을 촉진하면서 동시에 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를 해체할 모순과 적대를 키우고 새로운 사회를 형성할 요소들 또한 성숙시킨다는 점을 부각. “협동조합 공장과 협동조합 상점의 아버지인 로버트 오언은 이 고립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변혁의 요소들이 가진 영향력에 대해 그의 추종자들이 품었던 환상을 결코 갖지 않았으며, 실제로 실천적으로 공장제를 출발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공장제를 사회혁명의 출발점이라고 선언하였다.”
○ 자본의 꿈이 기계의 꿈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형태에서는 기계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자본가들이 기계에서 고정자본의 이상적 형태를 발견한다고 해서,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기계를 사용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것은 아님. 자본가가 기계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발견한다고 해서 기계의 이상이 자본주의인 것은 아님.
기계는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을 크게 감축. 자본주의에서는 이것이 고통의 원인.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이 줄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 그러니 오히려 ‘노동해방의 조건’. 물론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즉 이 사회가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으로 가치를 증식해가는 사회인 한 여기에는 한계
그런데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이 전체적으로 줄어들었는데 굳이 오래 일할 필요가 없음. 오히려 기계제 생산이 창출해준 ‘자유로운 시간’과 ‘풍부한 수단’을 이용해 과학적 지식이나 예술적 소양을 기르는 쪽으로 나아감
오늘날 자본주의의 선진 업종의 노동자들에게는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 능력을 개발할 것을 요청. 자유시간을 자본가를 위해 능력을 개발하는 시간, 일종의 ‘준노동시간’(상품개발 시간)으로 만드는 것. 이처럼 사회형태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똑같은 것이 정반대로 기능할 수 있음. 결국 문제는 전도이고 반전. 자본주의에서는 필요노동시간의 감소를 잉여노동시간(잉여가치)의 상대적 비중을 늘리는 데 이용
그런데 노동자들 자신이 이 잉여노동시간을 차지하는 사회라면 “더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가처분시간이 부의 척도”가 될 것임. 한 사회가 얼마나 풍족한지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일하느냐로 재지 않고 얼마나 적게 일하느냐, 다시 말해 사람들의 자유시간이 얼마인가로 잰다는 것. 개인들은 늘어난 자유시간 동안 더 많은 것을 체험하고 더 많은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음. 개인들의 능력 자체가 커지는 것. 자유시간이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시간이 되는 것. 자유시간을 통해 더 큰 생산력을 갖게 된 개인은 생산과정에서 그 능력을 발휘할 것임.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때의 노동이 “유희”(Spiel)가되진 않을 것이라고봄. 직접적생산과정은 새로운 주체가 되어가는 인간, 즉 “생성 중인 인간”(werdenden Menschen)에게는 일종의“단련”(Disziplin)과정일 것이고, 이미 사회의 축적된 지식을 가진“생성된 인간”(gewordnen Menschen)에게는 “실행”이자 “실험과학”이고 “물질을 창조하고 표현하는 과학”일 것이라고. 개인들은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연습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키고 실험하고 실행하고 표현한다는 것, 이런식으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그러나 미래가 논리적 전개에 따라 그렇게 자동으로 도래하는 것은 아님. 우리는 현재 속에서 자라나는 미래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하고, 그 요소들의 작동방식을 정반대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함. 현재의 생산양식이 키우고 강화하는 것을 현재의 생산양식을 해체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법을 알아내야 함
○ 잘 파냈다, 노련한 두더지여!
마르크스는 1856년 4월 『인민신문』The People’s Paper 창간4주년 행사에서 행한 연설에서 기계를 “바르베, 라스파이유, 블랑키보다도 더 위험한 혁명가들”이라고 부름
그는 먼저 기계제 대공업이 만들어낸 노동자들의 암울한 현실을 그렸지만, 예리한 눈은 기계에서 어떤 “기민한 정신”(shrewd spirit)이 남긴 “흔적”에서 표식을 봄. 그 눈은 미래의 공병, 혁명의 공병이 다녀갔다는 것을 알아봄. 이 경우에는 ‘흔적’보다 ‘조짐’(signs)이라는 말이 더 적절. 미래가 현재에 남긴 흔적, 현재 속에서 미래를 알아보게 하는 ‘조짐’. “우리는 중간계급, 귀족, 불행한 퇴보의 예언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조짐들 속에서 우리의 용감한 친구 로빈 굿펠로, 아주 재빨리 땅속을 파헤칠 수 있는 노련한 두더지, 훌륭한 공병을 알아봅니다. 혁명 말입니다.”
혁명은 두더지처럼 땅을파며 나아가다가 어느 때에 땅 위로 고개를 쳐들고 올라옴. 그때 “유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할 것이다: 잘 파냈다, 노련한 두더지여!”
아직 때는 오지 않았고, 언제 온다는 보장도 없음. 다만 예리한 눈은 미래의 공병이 땅을 파낸 그흔적을,조짐을 볼 수 있을 뿐! 자본의 노예인 기계는 언제든 자본을 배반하고 혁명의 동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음. 우리가 그 신호를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부록노트
I―마르크스와 다윈
마르크스는 자연의 영역에서 다윈이 발견한 많은 사실들이 자신이 사회와 역사에서 발견한 사실들과 통한다고 생각한 듯. 엥겔스도 “다윈이 생물의 발전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의 발전법칙을 발견했습니다.”라고 함
마르크스가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자연의 역사에 견준 부분;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사회형태나 생산양식을 ‘생산유기체’라고도 불렀음
또 마르크스는 노동수단을 통해 과거의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이해하는 것을 생물학자가 멸종된 동물의 유골구조를 살펴보는 일에 비유. 생물학자가 동물의 유골구조를 보고는 그 동물의 신체조직을 추론해내는 것처럼 마르크스는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력의 발전수준은 물론이고 그 시대의 사회적 관계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다고 함
그뿐 아니라 사회구성체(사회적 편제)가 바뀌면 동일한 요소가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고 강조. 이 역시 유기체의 전체 구조에 변화가 오면 각 기관이 수행하는 기능이 달라진다는 생물학자들의 생각과 통함. 이를테면 똑같은 앞다리라도 새의 날개와 사람의 손, 고래의 지느러미는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 마찬가지로 사회구성체가 달라지면 동일한 사물도 전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고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
마르크스가 다윈의 방법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혼동하면 안 된다는 점 또한 분명히 했음. 자연은 환율이나 은행가를 낳지 않은 것처럼 자본가와 노동자도 낳지 않았음.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라고 함.
자연이나 본성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 노동생산물이 상품이 되는 것, 화폐가 자본이 되는 것, 노동력이 상품으로 나타난 것 등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이를테면 노동대중의 신분 해방과 생산수단의 박탈 등)을 필요로 함. 이런 역사적 조건들을 알지 못한 채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기대어 펼치는 주장은, 아무리 과학적 외관을 하고 있어도 신비한 형이상학이나 황당한 이데올로기가 될 뿐
마르크스가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구분해야 한다고 본 이유
첫째,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역사와 혼동하면 현재의 생산방식이나 사회적 관계, 정신적 표상 등을 본성에서 기인하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음. 게다가 진화론을 사회발전론에 결합시키면 현재의 사회형태를 역사상 가장 발전한 형태로 간주할 우려도 있음. 더욱이 현재의 사회적 문제들 역시 자연 내지 본성에서 파생한 불가피한 문제들처럼 보이게 함
둘째,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점에 주목. 이 점에서 ‘인간’과 ‘역사’의 관계는 다윈이 바라본 ‘개체’와 ‘환경’의 관계와 다름. 다윈이 자연에서 주목한 것은 ‘적응’이지만 마르크스가 역사에서 주목한 것은 ‘생산’. 인간 역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역사적 환경에 내던져져 있는 것은 사실. 그러나 이 ‘주어진 전제’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역사적으로’ 산출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
“개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 즉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뿐 아니라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마르크스는 눈앞에 있는 사물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 어떤 감각을 갖기 전에 그 사물이 특정한 역사적 사회형태에서 주어진 것이며 이 사물에 대한 감각 역시 인간이 실천적으로(능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형성해온 것이라는 점을 이해시키려 함. 사물의 의미와 기능을 역사적으로 산출된 사회적 편제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
각 시대의 기술, 이를테면 어떤 노동수단을 어떻게 생산했는지를 통해 역사유물론자는 그시대 인간들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 자신들의 삶을 생산하는 과정, 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그들의 인식이나 믿음을 읽어냄.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이런 편제, 이런 배치를 이해할 때만 우리는 그 편제를 이루는 각각의 요소들, 각각의 기관들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음
이런 역사적 편제에 대한 세심한 이해 없이 인간본성이 어떻다는 둥 종교의 본성이 어떻다는 둥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그건 한낱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음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자들이 사회와 역사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 자연과학적 연구 성과에서 몇 가지 단편적 사실들을 들어서 사회와 역사를 함부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추상적·자연과학적 유물론의 결함은 그 대변인들이 자신들의 전문영역을 벗어나자마자 보여주는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견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함
III―역사적 복수의 규칙
마르크스가 산업자본가의 역사적 탄생을 다루면서 인용한 토머스 J. 더닝(Thomas J. Dunning)의 언급; “상당한 이윤만 있다면 자본은 과감해진다. 10퍼센트의 이윤이 보장되면 자본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투자된다. 20퍼센트라면 자본은 활기를 띠며, 50퍼센트라면 대담무쌍해지고, 100퍼센트라면 인간의 법을 모두 유린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300퍼센트라면 단두대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범하지 않을 범죄가 없다.”
“영국에 대한 인도와 중국의 복수”라는 표현은 죽음의상품인 아편이 영국 사회에도 퍼져가는 것을 가리킴. 마르크스의 글에 종종 등장하는 역사적 복수의 두 가지 규칙
첫 번째 규칙은 가해자가 자신에게 복수할 존재들을 스스로 키우고 그들이 쓸 무기까지 만들어준다는 것. 「인도의 봉기」The Indian Revolt라는 기사에서 그는 “인류 역사에는 응보(retribution)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응보의 무기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주조한다는 것이 역사적 응보의 규칙이다.”
역사는 가해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존재로 하여금 복수하게 함. 가해자가 자신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존재의 배반을 통해 단죄가 이루어지는 것
역사적 복수의 두 번째 규칙은 반작용 혹은 되먹임. 가해자의 악행은 그 전에는 자신과 무관했던 존재를, 양극과 음극처럼 자신과 긴밀히 연관되면서도 상반된 것으로 만드는데, 일단 이 구조가 만들어지면 이번에는 반대편 극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의 운명을 규정할 수 있음. 극단에 있는 존재들의 운명이 긴밀하게 얽히는 구조
가해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주의 사슬에 들어가, 그의 운명이 자신이 짓밟았던 자의 운명에 의존하는 일이 생김. 지배의 강화가 의존을 심화하는 역설적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중국 혁명이 유럽 혁명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음. “영국이 중국의 혁명을 불러일으켜놓은 지금, 문제는 이 혁명이 조만간 영국에, 그리고 영국을 거쳐 유럽에 어떤 반작용을 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의 단죄는 누구에 의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기계제 대공업은 두 가지 단초를 보여줌. 하나는 자본주의가 자본증식을 위해 더욱 발전시키는 기계와 기계노동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의 생산과 판매의 지구적 확장으로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지배계급의 악행에 복수할’ 거대한 배반과 되먹임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그러고 보면 『자본』은 복수와 단죄에 대한 예언서. 심판의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언제나 가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