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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bel Lee
Edgar Allan Poe
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That a maiden there lived whom you may know
By the name of ANNABEL LEE;
And this maiden she lived with no other thought
Than to love and be loved by me.
I was a child and she was a child,
In this kingdom by the sea;
But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I and my Annabel Lee;
With a love that the winged seraphs of heaven
Coveted her and me.
And this was the reason that, long ago,
In this kingdom by the sea,
A wind blew out of a cloud, chilling
My beautiful Annabel Lee;
So that her highborn kinsman came
And bore her away from me,
To shut her up in a sepulchre
In this kingdom by the sea.
옛날, 옛날 바닷가 왕국에
아마도 당신도 알지도 모르는 소녀가 살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 이었지요.
이 소녀는 다른 것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오직 나를 사랑하고 그리고 내게 사랑받는 것 외에는
나도 어린아이였고 그녀도 어린아이였지요.
이 바닷가 왕국의
하지만 우리는 사랑 그 이상으로 사랑했지요.
나와 애너벨 리는
하늘의 날개달린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질투할 정도로 사랑을 했지요
그리고 그게 이유였어요. 아주 오래전에
이 바닷가 왕국에서
바람이 구름으로부터 불어와 내 사랑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했지요
그래서 그녀의 가족들이 와서
그녀를 내게서 데려갔지요.
그녀를 무덤에 묻으려고,
바닷가 이 왕국에서
The angels, not half so happy in heaven,
Went envying her and me-
Yes!- that was the reason (as all men know,
In this kingdom by the sea)
That the wind came out of the cloud by night,
Chilling and killing my Annabel Lee.
But our love it was stronger by far than the love
Of those who were older than we-
Of many far wiser than we-
And neither the angels in heaven above,
Nor the demons down under the sea,
Can ever dissever my soul from the soul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feel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nd my bride,
In the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ounding sea.
천국에서 우리의 절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질투했지요.
그래요, 그게 바로 이유였어요.
이 바닷가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그래서 밤에 바람이 구름으로부터 나와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죽게 했어요.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강했어요.
우리보다 나이 들은 사람들보다도
우리보다 더 훨씬 지혜로운 사람들보다도
저위의 천국의 천사들도
저 바다 밑의 악마들도
갈라 놓을 수는 없었어요.
내 혼과 사랑스런 애너벨 리의 혼을
왜냐하면 나는 달빛이 빛날 때마다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요
별이 빛날 때마다 나는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밝은 눈빛을 느끼지요
그리하여 파도치는 밤 내내 나는 눕지요.
내 사랑, 내 사랑, 내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바닷가 무덤 곁에
파도치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에
Edgar Allan Poe
Jim Reeves - Annabel Lee
애드거 앨런 포우(Edgar Allan Poe) / 1809 - 1849
출신지 : 미 국
데뷰 : 1827년
대표작 : 검은 고양이, 모르가의 미스터리등 다수
애너벨 리
에드거 A. 포(Edgar Allan Poe 1809-1849)/ 이상섭 옮김
퍽이나 오래된 이야깁니다.
바닷가의 한 왕국에 혹여나 여러분도 아실지 모를
애너벨 리라는 한 아가씨가 살았답니다.
날 사랑하고 내 사랑받는 것밖에는 다른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아가씨.
바닷가의 이 왕국에 그 애도 어린 아이 나도 어린애
하지만
우리는 사랑보다 더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했지요,
나와 애너벨 리는 하늘의 날개 돋친 천사님들도
우리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바로 바로 그 때문, 그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서 오밤중 구름에서 바람이 불어 닥쳐
나의 애너벨 리를 냉기로 휩싼 것은
그래서 그녀의 대갓집 친척들이 그녀를 내게서 앗아가 버렸지요.
그리곤 바닷가 이 왕국의 무덤 속에 그 애를 가뒀답니다.
천국에서 절반도 행복하지 못한 천사들이, 그 애와 나를 시기하게 된 거지요.
맛아요! 바로 그 때문에(바닷가 왕국에선 누구나 다 알아요.)
구름에서 바람이 불어 닥쳐 내 애너벨 리를 차디차게 죽였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나이 먹은 어른들,
똑똑한 어른들의 사랑보다도 훨씬 강했어요.
저 하늘 위 천사들도 바다밑 물귀신도
어여쁜 애너벨 리의 영혼과 내 영혼은 떼 놓을 수 없답니다.
달만 뜨면 언제나 찾아드는 어여쁜 애너벨 리의 꿈
별만 뜨면 언제나 눈에 선한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
그래서 밤새도록 나의 애인, 나의 사랑
나의 목숨, 나의 색시 옆에 누워 있어요.
바닷가의 그 애 무덤 속에서 바닷가의 그 애 잠자리에서. (이상섭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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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오래 전에
바닷가 한 왕국에 애너벨 리라 불리는 한 소녀가 살았다.
이 소녀는 날 사랑하고 내게 사랑받는 것 이외는
딴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나는 어렸었고, 그녀도 어렸었다.
바닷가 이 왕국에, 그러나 우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했었다.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
천국의 날개 돋친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질투할 만한 사랑으로,
이것이 이유였다.
오래 전, 바닷가 이 왕국에
바람이 구름으로부터 불어 와 나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히 한,
그리하여 그녀의 귀한 친척들이 와서 나로부터 그녀를 데려가
바닷가 이 왕국에 있는 무덤에 가둬 버렸다.
천국에서 우리의 반만치도 행복하지 못한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시기한 것이었다.
그렇다! - 그것이 이유였다(바닷가 이 왕국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바람이 밤에 구름으로부터 불어 와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히 죽인.
그러나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더 강했었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 -
우리보다 현명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 -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도 바다 밑의 악마들도
나의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기에 달빛이 비칠 때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이 내게 찾아들고,
별들이 떠오르기만 하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를 나는 느낀다.
그래서 밤새도록 나는 내 애인, 내 사랑,
내 생명, 내 신부의 곁에 눕는다.
그 곳 바닷가 무덤에서 철썩이는 바닷가 무덤에서 (이재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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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정리
작자 : 에드거 A. 포(Edgar Allan Poe 1809-1849)/ 이상섭 옮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낭만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비극적. 낭만적. 환상적
어조 : 사랑하는 죽은 여인을 그리는 애절한 목소리
구성 : 시간에 따른 추보식. 점층적 전개
1연 바닷가 어느 왕국에서의 애너벨 리와 나의 사랑
2연 천사도 부러워할 지고지순한 사랑 [1-2연. 기]
3연 애너벨 리의 죽음
4연 애너벨 리의 죽음에 대한 비탄 [3-4연. 승]
5연 아무도 갈라 놓을 수 없는 영혼의 사랑[전]
6연 죽음마저 초월한 영원한 사랑[결]
제재 : 애너벨 리와의 사랑과 그녀의 죽음
주제 :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
표현 : 이국적이고 신비적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창출. 비유와 반복을 통해 진실한 사랑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함, 부드럽고 애절한 율조를 통하여 영원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잔잔한 감동으로 표현함. 출전 : <갈가마귀와 그 외의 시들>(1849)
내용 연구
혹여나 : 혹시나. 어쩌면
바닷가의 - 나도 어린애 : 순진 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사랑을 말한 것이다.
사랑보다 더한 사랑 :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의미의 사랑을 뛰어넘는 지순(至純)한 사랑
냉기로 휩싼 것은 :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바로 그 때문, 그 옛날에 - 무덤 속에 그 애를 가뒀답니다. : 애너벨 리의 죽음은 참으로 지순한 사랑에 대한 신들의 질투 때문이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신들의 질투로 애너벨 리가 죽었다고 표현함으로써 애너벨 리의 죽음과 '나'와의 사랑을 승화시키고 있다.
천국에서 절반도 행복하지 못한 천사들이, - 시기하게 된 거지요. : 애너벨 리와 자신의 사랑은 천국에서의 생활보다도 더욱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 훨씬 강했어요. : 자신과 애너벨 리 사이를 갈라 놓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른들과는 달리 이들의 사랑은 보다 순수한 영혼의 사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저 하늘 위 천사들도 - 내 영혼을 떼 놓을 수 없답니다. : 비록 죽음이 '나'와 '애너벨 리'를 갈라 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 영혼의 사랑만은 갈라 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달만 뜨면 언제나 찾아드는 - 바닷가의 그 애 잠자리에서. : 죽음마저도 초월한 '나'의 영원한 사랑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해와 감상
낭만주의 애정시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특히 '애너벨리'라는 시어는 부드러운 율조와 애조 띤 어감으로 해서 시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다.
양어머니 앨렌이 세상을 떠난 뒤로 모성애에 굶주렸던 포는 숙모인 클렘 부인에게 의지하게 되었는데, 그녀에게는 버지니아 클렘이라는 딸이 있었다. 포는 그 딸을 사랑하게 되어, 그녀가 14세 되던 해 그의 나이 27세로 결혼하게 된다. 이 둘의 사이를 두고 이성으로서 부부의 결합이었는가, 아니면 어디까지나 오누이 간의 플라토닉한 사랑이었는가에 대해서 평론가들 사이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아내는 오랫동안 앓았던 폐병이 악화되어 25세의 나이로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실의에 잠긴 포는 많은 여인들과 교제를 계속했으나 파혼 당하는 등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행려병자(行旅病者)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작자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아내에 대한 애정을 이 시와 연결시키면서 작품을 감상해 보자.
작자가 죽은 지 이틀 후에 세상에 알려져 더욱 유명해진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신비와 환상의 세계로 노래한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의 시다. 이 시는 죽음마저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애조 띤 율조와 이국적 분위기 속에서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노래하고 있다.
낭만주의적 경향을 갖는 포(Poe)는 문학의 목적을 교훈보다는 미(美)의 창조에서 찾는다. 이러한 미에 대한 절대적 추구는 가난함 속에서 비참하게 결핵으로 죽어간 아내를 '멀고 먼 바닷가 어느 왕국의 소녀'로 미화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그러한 미적 특질은 음악성의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바닷가 왕국'과 '애너벨 리'의 반복은 이 작품의 애조 띤 율조를 더욱 살려 주고 있어 작품의 정감을 더해 준다. (출처 : 김봉군 외 1인 저 지학문학교과서)
감상2
스물 다섯의 꽃다운 젊은 나이에 죽은 그의 아내 버지니아(Virginia)에 대한 그리움을 신비와 환상의 세계로 노래한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의 시다. 이 시는 죽음마저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애조 띤 율조와 이국적 분위기 속에서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노래하고 있다.
포는 문학의 목적이 도덕이나 교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의 창조에 있다고 보았다. '눈 앞에 있는 미의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천상(天上)의 미에 도달하려는 미친 듯한 노력'이 시라는 것이다. 빈궁 속에서 결핵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아내를 '멀고 먼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살았던 한 소녀'로 미화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시는 의미 못지않게 음악성도 중요하다. 다섯 차례 반복되는 '바닷가 왕국'과 일곱 차례 반복되는 '애너벨 리'의 애조 띤 율조는 이 작품의 정감을 살아 숨쉬게 한다. '시란 음악을 통해서 영원을 살펴보는 것'이라는 포 자신의 말이 이 시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출처 : 박경신 외 3인 저 금성문학교과서)
감상3
작자가 죽은 지 이틀 후에 세상에 알려져 더욱 유명해진 이 시는, 스물 다섯의 젊은 나이에 죽은 그의 아내 버지니아(Virginia)에 대한 그리움을 신비와 환상의 세계로 노래한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의 시다. 이 시는 죽음마저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애조 띤 율조와 이국적 분위기 속에서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노래하고 있다.
낭만주의적 경향을 갖는 포(Poe)는 문학의 목적을 교훈보다는 미의 창조에서 찾는다. 이러한 미에 대한 절대적 추구는 가난함 속에서 비참하게 결핵으로 죽어간 아내를 '멀고 먼 바닷가 어느 왕국의 한 소녀'로 미화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그러한 미적 특질은 음악성의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바닷가 왕국'과 '애너벨 리'의 반복은 이 작품의 애조 띤 율조를 더욱 살려 주고 있어 작품의 정감을 더해 준다.
심화 자료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 1. 19 보스턴~1849. 10. 7 볼티모어. 미국의 시인·평론가·단편소설작가로 〈모르그가(街)의 살인사건 The Murders in the Rue Morgue〉 (1841)·〈갈가마귀 The Raven〉(1845) 같은 소설에서 신비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생애
영국 태생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아널드 포와 볼티모어 출신의 배우 데이비드 포 2세의 아들이었다. 1811년 어머니가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죽은 뒤 자식이 없는 리치먼드의 상인인 존 앨런(아마 포의 대부였을 것으로 생각됨) 부부의 집으로 보내졌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고전 교육을 받았다(1815~20). 1826년 11개월 동안 버지니아대학교에 다니면서 그리스어·라틴어·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를 배웠지만, 그동안 도박에 빠져 후견인의 노여움을 사는 바람에 더이상 대학을 다니지 못하게 되자 리치먼드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애인(새어러) 엘머라 로이스터가 약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27년 보스턴으로 가서 활발한 바이런풍 시들을 모은 소책자 〈태머레인 외(外) Tamerlane, and Other Poems〉를 출간했는데, 그중 일부는 엘머라를 암시하고 있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드거 A. 페리라는 이름으로 미국 육군에 입대했지만, 양어머니가 죽자 존 앨런은 돈을 주고 포를 군대에서 빼내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시켰다.
포는 그곳으로 가기 전에 볼티모어에서 새로 〈알 아라프와 태머레인 외 몇 편의 시들 Al Aaraaf, Tamerlane, and Minor Poems〉(1829)을 출간했는데, 이 시들은 향토시인 E. C. 핑크니뿐만 아니라 밀턴과 토머스 무어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1주일 동안 모든 훈련과 수업을 빠짐으로써 육군사관학교에서 제명되었다. 그뒤 뉴욕에서 몇 편의 걸작을 모아 〈시집 Poems〉을 냈는데, 그중 일부는 키츠·셸리·콜리지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뒤 볼티모어로 돌아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833년 볼티모어의 한 주간지에 〈병 속에서 찾은 원고 MS. Found in a Bottle〉를 50달러에 팔았으며, 1835년경에는 리치먼드에서 〈서던 리터러리 메신저 Southern Literary Messenger〉지의 편집자로 일했다. 거기에서 평론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당시 겨우 13세였던 사촌동생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 포는 애정이 깊은 남편이자 사위였던 것 같다. 1849년 그는 〈나의 어머니에게 To My Mother〉라는 시를 써서 숙모이며 장모인 클렘 부인에게 바쳤다.
포는 술 때문에 리치먼드의 직장에서 해고되어 뉴욕으로 갔다. 술은 사실 그에게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그는 대화를 잘하기 위해 약간의 흥분제를 필요로 했지만 셰리주 한 잔만 마셔도 발동이 걸려 계속 술을 마셔댔다. 만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자주 발견되었다. 이것은 포가 마약중독자라는 억측을 불러일으켰으며, 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뇌장애가 있었다. 1838년 뉴욕에 있는 동안 그는 긴 이야기체 산문인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 The Narrative of Arthur Gordon Pym〉를 출간했는데, 이것은 그의 이야기들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아주 엉뚱한 공상과 많은 사실적인 소재들을 결합하고 있다.
그것은 멜빌이 〈백경 Moby Dick〉을 쓰는 데 영감을 준 작품으로 간주된다. 1839년 그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버튼스 젠틀맨스 매거진 Burton's Gentleman's Magazine〉의 공동 편집자가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월간 특집기사에 대한 계약을 맺어 초자연적인 공포에 관한 이야기인 〈윌리엄 윌슨 William Wilson〉과 〈어셔가(家)의 몰락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을 썼다. 〈어셔가의 몰락〉에는 포 자신이 아니라 포의 친지였던 것으로 알려진 신경증 환자에 관한 연구가 들어 있다.
1839년말에 〈그로테스크와 아라베스크에 관한 이야기들 Tales of the Grotesque and Arabesque〉이 출간되었다(1840년으로 연대가 기록되어 있음). 1840년 6월경에 〈버튼스 젠틀맨스 매거진〉을 그만두었지만, 1841년 다시 그 잡지를 이어받은 〈그레이엄스 레이디스 앤드 젠틀맨스 매거진 Graham's Lady's and Gentle-man's Magazine〉의 편집자가 되어 거기에 최초의 탐정소설인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을 발표했다. 1843년 〈황금벌레 The Gold Bug〉를 필라델피아의 〈달러 뉴스페이퍼 Dollar Newspaper〉지에 투고, 상금 100달러를 받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44년 뉴욕으로 돌아가 〈선 Sun〉지에 〈풍선 장난 Balloon Hoax〉을 기고했으며, 〈뉴욕 미러 New York Mirror〉지에서 N. P. 윌리스 밑에서 부주필이 되었는데, 그뒤 윌리스와는 평생 친구가 되었다.
〈아메리칸 리뷰 American Review〉지의 서평용 견본에 따르면, 〈뉴욕 미러〉 1845년 1월 29일자에 그의 가장 유명한 시 〈갈가마귀〉가 발표되었는데, 이 시로 그는 곧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뒤 단명한 주간지 〈브로드웨이 저널 Broadway Journal〉의 편집자가 되었으며, 1845년 이 잡지에 대부분의 단편소설을 재발표했다. 그해에 지금은 잊혀진 시인 프랜시스 사전트 로크 오스굿이 포를 귀찮게 따라다녔다. 버지니아는 불평하지 않았지만, 프랜시스는 문학하는 애인에 대한 무분별한 글들을 써서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켰다. 1845년 〈갈가마귀 외 The Raven and Other Poems〉라는 시집과 〈이야기 Tales〉 선집이 나왔다.
1846년 포는 포드햄(지금은 뉴욕 시의 일부)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1846년 5~10월에 〈고디스 레이디스 북 Godey's Lady's Book〉에 〈뉴욕의 지식인들 Literati of New York〉이라는 당대의 명사들에 관한 짧은 만필을 써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되었다.
아내 버지니아는 1847년 1월에 죽었다. 다음해에 포는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 가서 시인 사라 헬렌 휘트먼에게 구혼했다. 그곳에서 잠시 약혼기간을 보냈다. 포는 자신을 재정적으로 도와준 애니 리치먼드, 사라 안나 루이스와 깊은 정신적 사랑을 나누었고 그들 모두에게 시를 써서 바쳤다. 1848년에는 우주를 초자연적으로 '해설'한 강의집 〈유레카 Eureka〉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비평가에 따라 걸작으로 호평받기도 했지만 엉터리라는 악평을 받기도 했다. 1849년에는 남쪽으로 가서 필라델피아에서 미친듯이 술을 마시고 다녔지만, 무사히 리치먼드에 도착해 과부가 되어 있던 셸턴 부인 엘머라 로이스터와 마침내 약혼했다. 한 두 차례 병이 재발하기는 했지만 여름 한철을 행복하게 보냈다. 그는 어린시절의 친구들과 즐겁게 지냈으며 젊은 시인 수잔 아처 탤리와도 우정을 나누었다. 포는 9월말 리치먼드를 떠나 볼티모어로 갈 때 어느 정도 죽음을 예감했다. 거기서 그는 한 부인의 생일 파티에서 축배를 든 뒤 마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심장이 약한 그로서는 이러한 폭주가 치명적이었다. 그는 볼티모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의 부속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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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는 내 눈물 닦아준 스승이자 애인"
도종환 [한국일보 2002-11-07 15:01]
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오늘 내 삶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인가.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팔소리인가. 다시 또 싸움터로 달려나가게 하는 깃발인가.
“내 시 여기서 더 이상 필요없어, 나 또한 필요없게 되었다”며 목숨을끊은 시인처럼 시가 곧 내 목숨인가, 나의 전부인가. 아니면 내 이름을 조금 더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에 불과한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일 뿐인가.
내 문학은 가난과 외로움에서 출발했다. 평화롭던 날들은 열 몇 살 전후해서 끝났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고향을 뜨면서 우리 가족은 해체되었다.
나는 외가에 맡겨졌고 앞못보는 할아버지는 고모네 집에 고단한 육신을의탁해야 했으며 어머니 아버지는 강원도로 떠났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혼자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방학 때가 되면 편지봉투에 쓰여 있는 주소를 들고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 다녔다.
부모가 있는 곳을 찾아 고등학교 진학을 했지만 거기서도 정착을 할 수없었던 아버지가 또 경기도로 떠나면서 나 혼자 객지에 남겨지게 되었다. 자주 양식이 떨어졌고 낯선 도시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가난하기 때문에 포기했던 대학을 돈 제일 안 들어가는 대학, 돈 제일안 드는 학과를 선택하여 시험이나 한 번 쳐 보라는 친척들의 권유로 사범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나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월세 이천 원짜리 단칸방에서 우리는 살았고 사 년 내내 구들장 위에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냉방에서 잠을 자며 대학을 다녔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도시락 대신 소주병을 싸들고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 고모네 목욕탕에서 막일을 하는 어머니, 정신지체 장애아인 여동생, 음성 나환자인 삼촌, 둘러보아도 사방팔방 절망 아닌 것이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치스럽게 무슨 대학을 다닌단 말인가. 남들과 잘 어울리기 싫었고 자폐증, 대인기피증 비슷한 걸 앓았다. 나는 내 깊은 절망속으로만 침잠했다. 그리고 거기서 문학을 만났다.
문학을 이야기하고 철학을 거론하는 자리에서만 눈빛이 반짝였다. 사르트르와 까뮈와 키에르케고르와 고흐와 이중섭과 장용학과 손창섭과 고은과최인훈을,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이야기할 때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실존주의의 치열한 여름과 퇴폐적 낭만주의의 황폐한 가을, 그리고 지독히도가난한 겨울이 몇 번을 찾아왔다가 나를 쓰러뜨려 놓고 지나갔다.
질척한 페시미즘과 우울한 낭만주의 문학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전혀 엉뚱한 데서 나를 찾아왔다. 80년 광주였다. 그때 나는 군복을 입고있었다.
광주에서 여수 쪽으로 내려오는 무장한 시민군 차량들을 저지하기 위해십칠 번 국도의 한 고갯마루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언덕 양쪽에 호를 팠다. 그렇게 대치한 채 뜬눈으로 새우던 그 오월의 밤에 나는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M16 소총의 탄창을 몰래 빼서 맨 위의 실탄을 거꾸로 장전해 놓았다.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게 해 놓으면서 나는 두려웠으나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향해서 총을 쏠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군복 윗주머니에 들어 있는 군용수첩에다 시를 썼다. 그때까지 썼던 100여 편 가까운 시들을 다 버리게 하는 시였다.
“십칠 번 국도 위에서 역사를 우롱하던 바람은/ 한 찰나도 빼놓지 않고피묻은/ 뻐꾹새 울음을 귓가에 실어오고/ 부대끼는 밤구름을 능선 위에 옮겨왔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 이제 나의 개인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역사여 우리를시험에 들게 하는 역사여…”
‘사격명령’이란 시였다. 개인적인 절망에서 역사와 사회와 현실 쪽으로 유턴을 하게 한 시였다. 그러나 광주의 체험은 나 하나의 알량한 양심을지킨 것으로 끝나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이었고,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나 갚아야 할 부채였다.
그렇게 역사를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시대의 고통과 함께 괴로워하면서 나의 문학은 현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로부터 꼭 이십 년이 지난 어느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중에 나오는 광주 장면을 보다가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눈물은 극장을 나와 길을 걸어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제대 후 문단에 나올 무렵, 우리에게는 발표 지면이 없었다. 창비와 문지는 폐간되고 신문과 방송도 마구잡이로 통폐합될 때였다.
우리가 발표할 지면을 스스로 만들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배창환 김용락 김창규 시인등과 함께 ‘분단시대’라는 동인지를 만들었다. ‘오월시’‘삶의 문학’ ‘시와 경제’ ‘자유시’등의 동인지와 ‘실천문학’같은 무크지가 문단의 돌파구를 만들어 나가던 무렵이었다. 창비에서 첫시집 ‘고두미 마을에서’를 낸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결혼 이년 여 만에 아내와 사별한 것도 비슷한 팔십년대 중반이었다. 절망은 내가 저를 떠났다고 저도 나를 떠난 건 아니었다. 많이 힘들었고 많이 아팠다. 그 어려운 시기에 실의와 좌절의 늪에서 나를 건져준 것은 시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빈 하늘을 향해 소리칠 때 시가 대답을해 주었다.
내 외로움, 내 그리움, 내 슬픔도 시가 어루만져 주었다. 암병동 날바닥에 앉아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암 환자들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죽음과 맞서 싸우는데,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암병동’이란 시를 썼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이 시는 내 삶의나머지 날들을 사는 동안 내 좌우명이 되었다.
전교조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가 어미 없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 감옥에서 아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감옥의 벽에 십자가를 그어놓고 울면서 기도할 때 시가 있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해직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막막해 할 때도 시가 길이 되어 주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담쟁이’란 시처럼 내게 길이 되어 준 시가 많았다.
십 년 해직교사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나는 ‘부드러운 직선’이라는 시어와 만났다. 원칙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유연한 삶의 자세, 그것을 우리나라 고건축의 추녀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부채살처럼 퍼지는 추녀의 아름다움과 곡선의 미학은 휘어진 나무가 아니라 곧게 다듬은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거리에서 머리띠를 묶으며, 싸움의 한복판에서 짐승처럼 끌려다니기도 하면서, 함성과 구호를 외치면서 살아오는 동안 거칠어질 수 있는 심성을 다시 온유하게 감싸준 것은 시였다. 시는 내 가장 가까운 길벗이었고 스승이었으며 애인이었다.
나를 이끌어주고 위로해주고 눈물을 닦아준 것도 시였다. 무엇보다 내 삶의 고비고비마다 길이 되어준 것이 시였다. 문학이었다. 길을 찾게 해 주었고 길을 놓치지 않고 갈 수 있게 불 밝혀 주었다.
이 땅에 가진 것 없이 외롭고 가난하게 태어나 문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절망과 시련에서빠져 나올 수 있게 해 준 것이 문학이라서 문학을 하며 살게 된 것을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아직도 우리가 던진 교육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책임져야 할 몫이 남아 있어서 복직한 시골학교에 묻혀서 산다. 모순의 한가운데서 나를 다시검증하고 거기서 다시 출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일는지 모르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마을로돌아가/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 맑고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 거기서 정말 마음껏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
연보
▦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 1977년 충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시 ‘고두미 마을에서’ 등 5편 발표 등단
▦ 1997년 충복 옥천 청산고교 교사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1998년 복직 현재 충북
진천군 덕산중학교 교사
▦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동화 ‘바다유리’ 등.
신동엽창작기금(1990) 민족예술상(1997)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