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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문학의 본질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계급 없는 사회에서 뿐이다. 오직 그런 사회에서만 작가는 그의 <주제>와 <독자> 사이에 어떠한 종류의 어긋남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의 주제는 항상 이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독자가 구체적 보편자와 일치하게 된다면 작가는 진실로 인간 전체에 대해서 써야 할 것이다. 결코 시대를 넘어서는 추상적 인간에 대해서나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시대의 모든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동시대인同時代人을 위해서 써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정적抒情的 주관성과 객관적 증언 사이의 문학적 이율배반은 당장에 초극超克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독자와 동일한 모험에 참여하고, 또 독자와 마찬가지로 균열 없는 사회 속에 위치해 있으므로, 독자에 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독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귀족적인 오만에 끌려서, 자신의 상황 속에 처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따위의 일이 없게 된 작가는 시대의 상공을 날고 영원永遠을 내세우면서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상황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희망과 분노를 표현하고, 그럼으로써 또한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자기 자신이란 중세中世의 성직자의 경우처럼 형이상적形而上的인 피조물로서의 인간도 아니고, 우리의 고전작가들의 경우처럼 심리적인 동물로서의 인간도 아니며, 또한 심지어 사회적 실체로서의 인간도 아니다. 그것은 세계로부터 출현하여 무無 속에 자리잡는 전체--- 그 모든 요소들을 인간 조건이라는 불가분리不可分離한 통일성 속으로 녹아들게 하는 그런 전체로서의 인간일 것이다. 이때에는 문학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진실로 <인류학적>인 것이 되리라.
작가는 그의 일이 정신적인 것의 찬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화精神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정신화란 <되찾기>이다. 그리고 정신화해야 할 것, 되찾아야 할 것은 다름아니라 다채롭고 구체적인 세계이다. 무겁고 불투명하고 여러 영역의 일반성과 수많은 일화들을 지닌 이 세계, 아무리 해도 쳐부술 수 없는 악-- 그것은 세계를 갉아먹기는 하나 결코 멸망시키지는 못한다-- 이 깃들여 있는 이 세계이다. 작가는 전혀 다듬어지지 않고 땀내가 나고 구린내가 풍기는 이 일상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되찾아, 자유의 기반에 서서 자유로운 모든 사람에게 제시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급없는 사회에서의 문학은, 자유로운 행위에 의지하고 만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내맡겨지는 세계의 자기 표현일 것이며 또한 계급 없는 사회 그 자체의 반성적인 자기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의 성원들은 시시각각 책을 통해서 제 위치를 알고 자기 자신을 보고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모든 책은 어떤 호소를 내포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기 표현은 이미 자기 초월이다. 세계가 부정되는 것은 단순한 소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희망과 고통을 통해서이다.
구체적인 문학은 여건으로부터 벗어나는 힘으로서의 부정성과 미래적 질서의 소묘로서의 기도를 종합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축제, 즉 거기에 비치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꽃의 거울이 될 것이며, 또한 고매성高邁性, 즉 자유로운 창조와 증여贈與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자유의 이런 상호보완적인 두 양상을 결합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작가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가의 글을 읽게 될 독자 역시 모든 것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 없어질 뿐 아니라, 모든 독재가 철폐되고 사회 기구가 늘 새로워져야 하며, 질서가 굳어지기 시작하면 부단히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문학은 그 본질상 영구 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문학은 말과 행동의 이율배반을 지양止揚할 것이다. 하기야 문학이 행동과 똑같은 것이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작가가 그의 독자에게 대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작가는 다만 그들의 자유에 호소할 따름이며, 그의 작품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독자가 무조건적無條件的인 결심에 의해서 그의 작품을 자기의 것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각을 하고 자기를 비판하고 변신해 가는 사회에서는, 글로 쓰인 작품은 행동의 한 본질적 조건, 즉 반성적 의식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계급도 독재도 고정성固定性도 없는 사회에서는, 문학은 완전히 그 자체를 의식화하게 될 것이다. 형식과 내용, 독자와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 발언의 형식적 자유와 행위의 실질적 자유가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이어서 한쪽을 주장하기 위해서 다른 쪽의 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 문학이 개인의 주관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집단적 요청을 가장 깊이 있게 표출할 때이며 그 반대도 역시 사실이라는 것, 문학의 기능은 구체적 보편자普遍者에게 구체적 보편자를 제시하는 데 있으며, 그 목적은 만인의 자유에 호소하여 모든 사람이 인간의 자유의 자유의 왕국을 실현하고 유지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유토피아적인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회를 상상해 봄으로써, 문학이라는 개념이 어떤 조건하에서 완전하고도 순수하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 장폴 사르트르
"저마다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술은 도피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정복의 수단이다. 그러나 도피한다면야 은둔 생활로, 광기로, 죽음으로 도피할 수도 있고, 또 정복은 무기로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꼭 글을 쓰겠다는 것이며, 글을 통해서 도피와 정복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작가들의 여러 가지 목표의 배후에는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어떤 더욱 깊고 더욱 직접적인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 창조의 주된 동기의 하나는 분명히 세계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존재가 본질적이라고 느끼려는 욕망이다. 내가 드러낸 들이나 바다의 이 모습을, 이 얼굴의 표정을, 나는 화폭에 옮기면서 또는 글로 옮기면서 고정시킨다. 나는 그 모습들을 긴밀히 관련시키고 질서가 없던 곳에 질서를 만들고 사물의 다양성에 정신의 통일성을 박아넣는다. 그러면 나는 그 모습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나는 나의 창조물에 대해서 스스로 본질적이라고 느낀다."
"어느 풋내기 화공이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다. 「언제 제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야 할까요?」그러자 스승은 대답했다. 「네가 네 그림을 바라보고 스스로 놀라서 <내가 이것을 만들었다니!> 하고 말할 때다」"
"문학이라는 사물은 야릇한 팽이 같은 것이어서, 오직 움직임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읽기라고 부르는 구체적 행위가 필요하고, 그것은 읽기의 행위가 계속되는 동안에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 이외의 경우에는 종이 위에 박힌 검은 흔적이 있을 뿐이다."
"작가의 경우, 시선(視線)의 기능은 읽혀지기를 기다리면서 잠들고 있는 말들을 건드리면서 깨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설계도를 조정하는 데 있다."
"독자의 미래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말들이 가득 차 있는 200페이지인 반면에, 작가의 미래는 백지일 따름이다. 작가가 도처에서 만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앎, <자신의> 의지, <자신의> 기도이며, 요컨대 자기 자신이다. 그는 다만 자신의 주관성과 접촉할 뿐이다."
"문학이라는 대상은 비록 언어를 <거쳐서> 실현되기는 하지만 언어 <속에서>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원래가 침묵이며 말에 대한 거역이다. 따라서 책에 늘어 놓인 수천 개의 낱말들을 하나하나 모두 읽는다 해도 작품의 의의가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다. 의의는 낱말들의 총화가 아니라 그것의 유기적 전체이다."
"작가는 <충격을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런 짓을 하면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작가가 무엇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해도 그는 다만 독자가 수행해야 할 과업을 제시하는 데 그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제시>라는 성질이 예술 작품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읽기란 고매한 마음의 실천이다. 그리고 작가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추상적인 자유의 적용이 아니라, 정념, 반감, 동감, 성적 기질, 가치 체계를 포함한 그의 인격 전체의 증여이다. 다만 이 인격의 증여는 고매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가 그 인격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그의 감성의 가장 후미진 응어리조차 변형시키게 된다. 그리고 대상을 더욱 잘 창조하기 위해서 독자의 능동성이 수동성으로 스스로 전환한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로 수동성이 행위가 된다. 그리하여 책을 읽는 사람은 자신을 최고의 경지까지 드높인다."
"내가 어떤 풍경에 매혹될 때, 나는 그 풍경을 창조하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또한 만일 내가 없다면, 나무와 잎과 땅과 풀들이 내 눈앞에서 맺는 관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읽기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맺어진 고매성의 협약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에게 기대하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요구한다. 그러한 신뢰로 그 자체가 고매한 마음이다."
"예술의 종국적 목적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그 근원이 인간의 자유에 있는 듯이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재획득하는 데 있다."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작가 역시 독자에게 어떤 느낌을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반적으로는 미적 쾌감이라고 부르는데, 나로서는 미적 희열이라고 부르고 싶다."
"미적 희열은 본래는 나 아닌 것을 내가 거머잡고 내면화하려는 의식의 차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세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독자의 고매한 마음이 수행해야 할 과업으로서 세계를 제시하는 행위이다."
"어떤 이야기 속에서 한 사물이 그 존재의 밀도를 획득하는 것은 그 사물에 관한 묘사의 빈도나 길이 때문이 아니라, 여러 작중인물들과 맺는 관련의 복합성 때문이다."
"작가의 모든 기교는, 그가 <드러내 보이는 것>을 내가 <창조>하고 따라서 나 자신이 연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작품은 그것을 그리는 인간이 아무리 나쁘고 절망적일망정 고매성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고 물론 교훈적인 이야기나 덕스러운 인물로서 고매성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의도된 것이어서도 안 된다. 착한 감정만으로는 훌륭한 책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매성은 책의 바탕 그 자체라야 하고 인물과 사물들이 만들어지는 원단이라야 한다. 주제가 어떤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질적인 경묘(輕妙)함이 도처에 나타나서, 작품이란 결코 자연적 소여(所與)가 아니라 <요청>이며 <증여>라는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고매한 사랑은 끝끝내 지키겠다는 맹세이며, 고매한 분노는 변혁하겠다는 맹세이며, 찬탄은 본받겠다는 맹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굳이 글을 쓴다는 그 사실 자체로 말미암아 독자의 자유를 인정하고, 또한 글을 읽는 사람은 책을 펼친다는 그 단 한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작가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인 이상, 예술 작품은 어떤 면에서 보든 간에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뢰의 행위다."
"작품이란 인간의 자유의 요청이라는 안목하에서 세계를 상상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어두운 문학>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을 따름이다. 나쁜 소설이란 독자에게 아첨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는 소설이며, 좋은 소설이란 독자에 대한 요청이며 신뢰이다."
"무릇 글쓰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자유인이며, 오직 자유라는 한 가지 주제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산문이라는 예술은 산문이 의미를 지닐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제도, 즉 민주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한쪽이 위협을 겪으면 다른 한쪽도 역시 위협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다만 글쓰기로써 양자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불가불 붓을 꺾지 않을 수 없게 될 날이 오면 작가 역시 무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당신이 어떤 곡절로 작가가 되었든 간에, 당신이 어떤 견해를 표명했든 간에, 문학은 당신을 싸움터로 끌어들인다. 글쓰기는 자유를 희구하는 한 방식이다. 따라서 일단 글쓰기를 시작한 이상에야, 당신은 좋건 싫건 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 장폴 사르트르 밑줄 쫙! / 공부합시다
"작가는 오막살이 한 채를 묘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거기에서 사회적 부정의 상징을 보게 하고 독자의 분노를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가는 말이 없다. 화가는 다만 <하나의> 오막살이를 보여줄 따름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자유이다."
"작가가 다루는 것은 의미이다. 그러나 구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호의 왕국은 산문이며, 시는 회화 조각 음악과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시는 말을 섬긴다고 하고 싶다. 시인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시인은 말을 기호로서가 아니라 사물로서 본다는 시적 태도를 단호하게 선택한 사람이다. 말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우리는 마치 유리를 투시하듯 우리의 마음대로 말을 가로질러 의미있는 사물을 쫓아갈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시선을 말의 <실체>로 돌려서 그것을 대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말의 저쪽에, 대상 가까이에 있고, 시인은 말의 이쪽에 있다. 전자에게는 말은 길들여진 것이고, 후자에게는 그것은 야생 그대로다. 전자에게는 말은 유용한 관례이며 차츰 소모되는 도구, 쓸모없게 될 때는 내던져 버리는 그런 도구이다. 이에 반해서 후자로서는 그것은 풀이나 나무처럼 이 땅 위에서 자생하는 자연물이다."
"말에 언어적 통일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의미밖에 없다. 의미가 없어지면 말들은 소리와 펜의 흔적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시인은 먼저 이름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대신에, 우선 사물들과 무언의 접촉을 하고, 그 다음으로 말이라는 또 하나의 사물 쪽으로 돌아서서는 그 말들을 건드리고 더듬고 만져보는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고유의 작은 광채를 찾아내고, 또 땅과 하늘과 물과 창조된 모든 것과의 독특한 유사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산문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한 가지 태도이다. 발레리(Valery)식으로 말하자면, 햇빛이 유리를 거쳐 통과하듯이 말이 우리의 시선을 스쳐서 지나갈 때에 산문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이름이 붙여지자마자 이미 그 이전의 것과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 아니며, 그 순결성을 상실하게 된다."
"작가란 세계와 특히 인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기를 선택한 사람인데, 그 목적은 이렇게 드러낸 대상 앞에서 그들이 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일단 언어의 세계에 끼어든 이상, 작가는 말할 줄 모르는 척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의미의 세계 속으로 들어서면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법이다. 설사 말들이 자유롭게 결합되게 내버려둔다 하더라도 그 말들은 역시 문장을 만들 것이며, 문장 하나하나는 언어 활동 전체를 내포하고 세계 전체로 지향할 것이다. 침묵조차도 말과의 관련하에서 그 뜻이 규정된다. 마치 음악의 경우에 휴지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일군의 음부로부터 그 뜻을 얻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이 침묵은 언어 활동의 한 계기이다."
"산문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부드럽고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의 힘일 따름이다. 화폭에서는 우선 아름다움이 눈에 튀어 오른다. 그러나 책에서는 그것은 숨고, 목소리나 얼굴의 매력처럼 어떤 은연한 힘을 통해서 작용한다. 그것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이에 끌리게 한다. 그래서 독자는 보이지 않는 매력에 유혹된 것이 사실인데도, 마치 글의 내용에 의해서 설복당한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미사의 의식 자체는 신앙이 아니라 신앙으로의 도입이다. 마찬가지로 말의 조화와 그 아름다움과 문장의 균형은 독자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정념을 가다듬고, 미사나 음악이나 춤처럼 그것을 정서화하는 것이다. 만일 독자가 글의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서 대하려 한다면 의미가 상실되고 말 것이며, 남는 것은 다만 지루한 율동뿐이리라."
"작가는 저마다 자신의 형식을 창출하며, 우리는 그후에야 무슨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기야 주제에 따라 어울리는 문체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가 반드시 어떤 문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기법을 넘어서서 선험적인 것으로 간주될 만한 문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평가는 일상적 괴로움의 진실성과 그 괴로움의 존재 이유를 밝혀주는 듯한 예지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플라톤의 경우에 감각적 세계가 원형의 세계를 모방하듯,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마구 쏟아놓는 흐느낌은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기분을 헤친다. 마찬가지로 스탕달이 간파했듯이 훌륭한 논리 역시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러니까 흐느낌을 살짝 가려주는 논리야말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논리는 눈물의 추잡한 꼴을 제거해 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눈물은 논리의 근원이 정념에 있다는 것을 밝혀줌으로써, 논리의 예봉을 완화시켜준다."
"메시지란 결국 대상화된 영혼이다."
"글쓰기란 하나의 기도이다. 작가는 죽기에 앞서 살아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우리의 정당성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