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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강:익사한 희생양과 흐르는 피
-영국에 의한 테러에 대한 기억과 역사에 대하여
나는 나의 글이 테러와 기억에 대한 진부한 낙서가 되지 않길 바란다. (나는 내 글의 형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그냥 이글을 수다노트라 부르기로 한다.)나는 그것이 단순한 억압을 위한 일시적인 수단이나 기계 또는 방법에 불과했을지라도 미국에 의한 무력이 초래한 테러에 직면했던 우리의 기억저편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나는 그들의 일시적인 무력인 우리의 마음, 정신, 기억 그리고 몸마저 파괴시킬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영문에 능숙한 작가가 아니다. 말레이어는 우리의 모국어임과 동시에 작문에 있어서는 외국어다. 그렇다. 나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고 선생님들도 그리 열심이지 않았다. 나는 1998년 후반에 말레이시아를 반환한 식민통치자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당시는 모든 갖가지 배경, 진보적인 성향,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을 지닌 자들이 함께하던 시대였다. 그것은 또한 지배정부와 최장기간 동안 집권하는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타르 모하마드 (Mahathir Mohamad)에 대한 항쟁이 잦았던 시기였다. 그의 독재는 2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의 본격적인 영어수업ㅇ은 말레이시아 부총리였던 Anwar lbrahim의 억류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1998년 9월 20일 이후 ISA(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하에 억류되어졌다. 100,000명이상의 말레이시아인들은 마하타르(Dr. Mahathir)의 퇴위를 요구하는 평화시위를 위해 쿠알라 룸프 거리에 모였다. 얼마 후 “REFORMASI!"라는 절규가 들려왔다. 체포,급습,그리고 Anwar lbrahim에 대한 탄압은 전통적으로 무심한 말레이시아인들에게 개혁운동의 도화선을 제공했다. ‘Reformasi' 광범위한 개혁에 대한 요구는 점점 거세졌고,말레이지아 사회는 다수민족인 말레이 공동체를 분리시켰다.
나는 그 혼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나는 지식, 정치적 이론, 철학, 문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갈증에 휩싸이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대부분의 양서는 영어로 쓰여졌다.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양서를 읽기위해 영화감상, 노래청취, 그리고 시, 독서,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진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영어에 능숙한 사람에게서 수업을 받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정도로 내가 어떻게 영어로 쓰고 읽고 말하기를 배웠는지에 대한 설명을 마치기로 한다.
당시 발생했던 정치적 혼란은 말레이시아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정부의 변화를 요구하고 불의에 항거하기 위한 반체제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갑자기 도취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배경 인종, 정치적 이념 , 성별, 나이, 계층, 직업에 상관없이 그들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의사소통, 상호작용, 우정 그리고 그룹 활동을 통해 민주정치달성이라는 그들의 관심을 공유했다.
말레이시아인 모두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는 말레이시아에서 사회계층의 장벽을 이룬다. 영어는 말레이시아인들의 사회, 정치, 문화, 경제를 지배하는 소수엘리트들의 전유물이다. 때문에 영어는 지식과 힘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여 진다. 그래서 영어를 구사하거나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지위와 특권을 부여받는다. 정부는 말레이어나 다른 많은 모국어들을 발전시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심지어 영어는 학교에서 수학과 과학교과서를 설명하는 데까지 사용되고 있다. 말레이인으로서 나는 말레이어는 더 이상 말레이시아인들에게 지식을 습득시키는 언어로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사실상 지금까지 말레이시아 대학교에는 철학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도 교육 과정도,학교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해보라. 철학에 관심 없는 나라! 논쟁을 혐오하는 나라! 소위 ‘입헌 민주주의 국가’가 자신들의 공간과 몸과 기억을 사심에 찌든 자들의 일방적인 선전포고만을 듣고, 그들의 삶 전체를 정부가 간섭하고, 착취하고, 그들에게 테러를 일삼는 것을 방관하는 것을! 이러한 국민들의 태도는 정부가 말레이시아인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그들을 질식시키도록 했다.
1998년 나는 말레이시아의 다양한 사회 경제적인 계층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만의 세계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융합하고, 많은 이들과 상호작용, 의사소통 그리고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을 제공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 혼란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사한 경험을 가졌으리라고 본다. 나는 정치적 혼란과 위기의 세대로서 다가오는 도전에 맞서 싸우고자 최선을 다했다. 다른 이를 추종하고, 악의와 투쟁하고 사회운동을 하던 나의 삶은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에 대한 갈구를 위한 고단한 여정이었다.
테러와 마주하게 된 말레이시아 문학
나는 여기서 말레이시아 문학이 그 본질적인 면에서 다소 복잡해지고 다양한 문화적인 요소와 영국통치의 유산과 혼재 그리고 전제정부로부터 분리된 이후의 말레이시아 문학의 계보를 포괄적이고 철저하게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으로 중요한 기억의 서류들을 단순화시키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말레이시아문학을 아름답게 미화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식인 연구가도 지식인 학자도 아니다. 나는 단지 내 감정을 지극히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시인이며 예술가다.
사실상 나는 정규적인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노동자가 아니었다. 나는 잔인한 공장장의 보조 직원이었다. 작금의 말레이시아와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 존재하는 대규모의 산업화된 생산라인과 마케팅 기술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약한 화학약품냄새와 목재들이 만들어내는 먼지, 기름, 그리고 일산화탄소로 가득 찬 가구공장에서 일했다. 오전에 우리는 공장의 사이렌소리와 함께 작업을 시작한다. 귀를 찢는 듯한 요란한 톱 소리는 눈물을 자아냈다. 불행히도 톱은 나무 뿐 아니라 사람들의 손과 손가락을 잘랐다. 그렇게 만들어진 의자와 식탁 그리고 책꽂이는 부국으로 수출되었다.
다시 나는 말레이시아 문학에 있어서 작가들이 그들의 문학작품인 소설과 시를 통해 그들이 직면했던 테러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전달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나는 신보수주의 제국 기업의 총제인 조지 부시가 주장하고 있고, 현재 세계 언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방식과는 다르게 테러를 정의내리고자 한다. 나는 부시와 부시 추종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테러가 반복적이고 양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시는 이슬람전체에 대한 테러를 암시하면서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지명한다.
1973년 9월 11일 새벽 피노체트 장군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나 많은 책들과 역사를 통해 이 쿠데타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Salvadore Allende가 이끄는 사회주의 정부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승리했음에도 제국주의의 힘이 군사쿠데타를 동원해 이들 정부를 얼마나 잔인하게 테러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로 남고 말았다. 20세기 칠레에서 발발한 9.11의 참극은 차마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었고 동일한 9.11의 역사는 맨하탄 중심에 위치한 쌍둥이 빌딩에서 반복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보수주의 선동자들은 전 세계에서 발생한 이러한 테러들 대부분이 그들 자신의 테러리즘에 의한 것임을 의도적으로 망각시키고 있다. (모든 종류의 테러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한다,)
9.11 이후 제3세계의 갈등과 논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부시정부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모든 진실을 독점했고, 이러한 종류의 모든 테러가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에서부터 시작된 것인 양 포장하고 있다. 자, 대량살상무기에 대해서 잊었다. 자신들의 테러를 은폐하고, 그들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의 폭파하고 파괴시켰다. 그리고 동일한 방법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그들은 사담 후세인을 들먹이며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리고 이 잔인한 테러는 유대주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전폭적으로 전이되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을 테러했다. 그들에게 논리적인 명분 따윈 필요치 않다. Mike Whitney는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 자유운동가이다. 그는 9.11을 ‘테러에 대한 전쟁을 선동하는 날조된 사회통념’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들의 계획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한 몇 가지 역사적인 테러를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그것이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말레이시아로 알려진 우리나라는 말레이반도로 알려졌었다. 그리고 수백 년 전에는 말레이 반도로 인식되었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살상하는 악몽의 땅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살상의 고문은 다른 이름과 다른 얼굴 그리고 다른 양상으로만 변화한 것일까?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포르투갈의 잔인한 통치는 수백 년 간 계속되었고 이는 말레이반도 전체에 충격을 초래했다. 이외에도, 2차 세계 대전과 함께 시작된 일본의 통치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도 너무도 잔인하고 슬픈 역사적 상처로 기억되고 있다.
첫째, 일제통치에 의한 테러가 그것이다. 압둘 사마드 새드(Abdul Samad Said)는 말레이시아 국립문학수상자로서 1967년 그의 소설 ‘Sungai Mengalir Lesu"에서 일제치하의 잔혹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Harry Aveling에 의해 “게으른 강(Lazy River)"이라는 표제로 번역되었다. 번역가는 이 작품을 말레이시아에서의 일제의 잔악함을 유일한 작품으로 설명했다.
압둘 사마드 새드(Abdul Samad Said)는 말레이시아 현대문학을 대변하는 중요인물로서 그의 작품 게으른 강은 일제치하의 싱가폴의 실상을 폭로한다. 소설의 전반적인 이야기는 캄퐁(kampong)과 연결되는 다리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그 다리는 참혹한 전쟁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많은 이들이 자살을 일삼는 곳이며 일본인들의 식량창고에 음식을 훔치러갔다가 일제의 써치라이트에 발각되어 폭탄세례를 받은 남녀노소의 피로 물들어진 곳이다. 일제는 사람들을 투옥하거나 바로 차는 것도 부족해 손가락을 자르고 심지어 머리를 잘라 다리위에 걸어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했다. 작가는 이를 ‘만행’이라 단언한다.
른 투쟁을 예고했다. 사마드 새드(Samad Said)는 외국의 권력자가 오래된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어떤 승자도 존재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만이 존재하는 전쟁을
둘째, 인종에 대한 편견이 가져온 테러가 있다. 말레이시아는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가 공존하는 국가이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지 42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영국통치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영국은 1948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민주투사와 그 추종자를 체포하고 재판의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은 채 감금했다. 투옥된 민주투사들은 끔직한 노동에 시달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비상사태는 힘든 기간이었다. 영국은 사람들을 새로운 집으로 이주시키는 뉴 빌리지 정책( New Village Policy)을 실행했다. 이것은 인종분리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편 영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잘 지켜줄 수 있는 자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자 하는 말레이반도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말레이시아 주도계층은 현재까지도 영국식민통치의 꼭두각시인 셈이다.
다시, 기존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말레이시아를 분리시켰다. 갑작스럽게 인종구분에 의한 지리학적 구역이 형성된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초반 중국인은 영국의 탄광촌에서 일하던 대부분의 노동자였기에 말레이시아 도시의 다수인종이 되었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농업위주의 자급자족경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영국은 도시화를 진행하면서 인종위주의 경제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경제정책은 그들의 인종에 따라 그들의 경제활동, 직업 그리고 종교마저 결정되어지는 전형적인 관념을 지금까지도 인식시키고 있다.
그리고 1969년 5월 13일 검은 구름이 말레이시아인들을 뒤덮었다. 말레이시아 역사는 이를 인종폭동으로 명명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공식적인 말레이시아 역사는 이 인종폭동이 불균형적인 부의 분배가 초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공포가 끝난 이후에 이것을 주제로 한 그 어떤 연구도 학문적인 분석도 허락하지 않았다.
1969년 오월에 관련된 문학작품은 많지 않다. 식민체제하에 사로잡힌 마음과 공포문화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용기와 용맹은 자유라는 크나큰 대가를 치룰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와 관련된 작품은 우스만 아왕(Usman Awang)의 “Kambing Hitam" -영문 제목”The Scapegoat"-가 유일하게 대중에게 알려진 시다.
오늘날 세계의 테러
나는 고통과 억압이 역사의 쓰레기통속으로 던져져버리길 희망한다. 불의로 가득한 현실이 우리의 일상을 옥죄어 오고 있음에도 잔혹함은 결국 용해되어버리고 다른 형태로 전이되고 만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역사에 기록된 진실의 가치만이 존경받게 된다. 현재까지도 두 명의 말레이시아인은 관타나모아반도(Guntanamoa Bay)에서 재판의 기회조차 허용 받지 못하고 미국의 구금 하에 옥고를 치루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억압받고 있는 무슬림,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인간자유운동을 펼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그들의 몸과 정신, 피와 마음은 우리의 독립의 강에 신성하게 희생되고 있다. 배고픔과 기아. 불균형한 영양상태, 가난, 불평등,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식민통치자들의 욕망, 돈에 대한 환상이 불러온 잔인함을 기억한다. 이들을 위로하는 인도주의 적인 반전시인 우스만 아왕(Uaman Awang)의 시 “Bunga PoPi(Poppies)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