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새총
글/리 태 근
어느날 재래시장을 돌다가 장식품으로 만든 고무새총을 발견하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심통하게 만들었을가? 쇠줄로 탄탄하게 만든 새총손잡이도 단단했지만 탄탄한 고무즐이 맘에 들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나처럼 농촌에서 새잡이를 하느라고 무지한 경험을 쌓은 사람이 만든게 틀림없다. 손잡이도 나사로 단단히 틀어놓은 게 바위돌을 재워서 쏘아도 불어질 념려가 없을것 같다.
산골에는 흔한게 새들인데 정작 잡으려면 한마리도 잡히지않는게 참새란다. 여북했으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간다고 했겠는가 참새를 잡기위하여 기발한 착상들을 다 모았다. 새잡는 도구도 여러가지다. 그물을 느리고 덧을 놓고 나중에 화약총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게 새총인가봐 몇백년의 지나도 새총은 재래식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새총은 고무줄이 관건이다. 그때는 왜서 떡고무줄만 있었는지? 잘 늘어나지 않는것도 문제지만 툭하면 끊어져서 몇군데를 이었는지 모른다. 뚝고무도 흔치않았다. 근본 파는곳이 없어서 넙떡고무신을 가위로 오려서 만들었다. 어쩌다 운이좋아서 사르마대 (팬티를 사르마대라고 했음) 고무줄을 만나면 기뻐서 야단이다.
새총에 메운 돌맹이가 (총알) 먼곳으로 정확하게 날아가게 하려면 고무줄이 좋아야한다. 질기고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참고무줄은 거의다 어머니와 누나들의 사르마대( 팬티) 고무줄이 였다. 그렇다고 새총을 만들자고 막무내기로 녀자들의 사르마대를 도독질 할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혹간 빨래줄에 걸어놓은 사르마대나 몸삐(고무줄을 넣은 긴바지)를 만나면 그게 남자것이던 녀자빤쯔던 가릴새 없이 고무줄을 뽑아냈다. 동네에서는 변태가 생겨서 전문 녀자빤쯔를 도적질 한다고 소문이 짜했다. 아낙네들은 나를 <녀자빤쯔 두목>으로 의심했다. 하긴 뉘집에 닭알이 잃어져도 내 탓이요 말리운 물고기가 잃어져도 내탓이요 남새밭에 오이 도마도 참외 지어 감자 호박이 잃어져도 내 탓이란다. 지금도 나를 <사르마대> <고슴도치> 라고 골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참새는 새총으로만 부족하다. 가을이면 탈곡장에 채발을 엎어놓고 나무가지로 받쳐놓아서 덧을 만든다. 받침대에 맨 삼노끈을 짚으로 덮어놓고 탈곡장 보초막에 숨어서 한나절이나 기다린다. 채발밑에는 노란좁쌀이며 벼이삭을 널어놓으면 며칠씩 굶었던 새들이 우루루 모여든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확 잡아당기면 대여섯마리씩 잡힌다. 낚시군들이 고기잡는 짜릿한 손맛이나 새를잡는 짜릿한 손맛이나 비슷하다. 새들이 채발밑으로 모여드는 순간 손끝에서 찡찡 저려오는 야릇한 손맛이 어쩌면 그렇게 좋았던지 손맛을 느낄줄아는 사람이 새보다 더 약은 사람이다. 흉년세월이라 새들도 결싸적으로 탈곡장에 모여들었던 같았다.
밤이면 새잡이 <유격전>을 줄기차게 벌리였다. 한밤중에 새들이 한참 곤하게 잘때를 기다렸다가 전지를 여섯개씩 넎을수있는 왕덴빵(자체로 만든 덴빵)을 켜들고 무거운 사다리까지 메고 다니면서 생산대 우사칸이요 창고 처마밑을 들추기 시작한다. 운수좋은 날에는 하루 저녘에 백마리씩 쇠줄에 고기처럼 꿰들고 다닌다. 중이 고기맛을 알면 바퀴기도 놓히지 않는다고 하더니 나그내들도 고소한 참새고기 맛에 밤가는줄 몰랐다. 그런데 워쩐걸 장마철에 집집마다 비가 새기 시작하자 우리들을 죽일놈들 이라고 쫒아냈다. 집집마다 사다리를 몽땅 감춰놓고 참새만 보면 우리들을 죽일게라고 욕한다. 그래서 고무새총이 더욱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때마침 상급에서는 <사해를 소멸하라>는 긴급지시가 내렸다. 약한다리에 침질이라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굶어죽는다고 아우성인데 렴치없는 참새들은 곡식이 여물기도 전에 조이밭에 달려들어 이삭을 절딴냈다. 논밭에 접어들어 벼이삭을 삽시간에 쭉쩡이로 만든다. 허수아비를 말리기는 역부족이였다. 대낮에 조이밭에 양철통을 달아매고 괭과리를 두두리며 눈먼 퉁포까지 놓지만 굶어서 미쳐난 참새떼를 막을자는 나오란다. 숨막히는 정치투쟁 때문에 해마다 밭이 묵어자빠졌다. 흉년 세월일수록 새들도 굶는가? 기승부리고 달려드는 참새떼를 말려내는 재간이 없었다.
참새만 배고픈가 했는데 뱀들도 배고프기는 마찬가지란다. 퍼런대낮에 어느새 기여올랐는지 처마밑 새둥지에 도사리고 있던 뱀을 만지다가 억울하게 물려죽은 사람도 있었다. 배고픈 세월을 만나서 쥐고기까지 몽땅 잡아먹는 세월이라 논판에서 더는 먹을것이 없었던지 뱀들이 마을로 기여들어 새둥지로 기여 올랐던것이다. 참새를 잡아 먹으려고 꿈틀거리며 처마밑으로 기여올라가는 끔찍한 광경을 구경했다면 누구도 새둥지를 들추지 않았을 것이다. 시에미 역증에 개옆구리를 찬다고 농사가 안되니 죄없는 참새에게 행패를 부렸다... ...
그런데 지금은 옛날고 달리 먹을게 흔한데 왜서 흔해빠졌던 참새들이 보이지 않을가? 새들이 없는 농촌에는 처녀들도 없어졌다. 얼굴이 반반한 녀자들이 새혼을 탔는가? 한국으로 날아갔단다. 조국을 배반해도 별로 말리는 사람이 없단다. 연변미인들이 몽땅 한국으로 시집가고 농촌에는 수염이 석자 되는 홀애비들만 남았다. 홀애비들이 땅을치며 통곡해도 알아봐 주는사람이 없단다. 농촌집에 가보면 두가지 재산이 있었다. 하나는 해마다 만드는 메주와 아버지와 담배를 물고 맞불질 홀애비 아들이다. 그옛날 뒤동산에서 참새새처럼 재잘거리며 나물캐던 순이와 옥자도 참새혼을 타고 날아갔는가? 옛날에는 논밭에 눈먼 멧새도 많았는데 지금은 눈먼 멧새도 없단다. 과부들마저 <가짜시집>바람에 몽땅 날아가 버렸다. 이럴줄 알았으면 아시당초 참새를 잡지말아야 했는데...
겨여름이면 앉는곳마다 쫒아다니며 새총을 놓아서 마을에 얼씬거리지못하게하였다. 겨울이면 눈덮힌 벌판에서 벌벌떨다가 초가집밑에 기여드는 참새를 손전지를 들고다니며 종자를 들어냈다. 그렇게 쫏으며 못살게 굴어도 한사코 고향을 떠날줄 모르던 참새였다. 좋으나 궂으나 재잴거리며 마을을 감돌던 참새들이 한없이 그립습니다. 참새와 더불어 짹짹거리며 고향을 건설하던 처녀들이 오늘따라 더더욱 그립습니다 … …
2008년 1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