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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www.cfe.org/20150603_139464 ![]() [독일현지세미나] 한국의 경제발전과 파독광부 - 자유경제원
1. 한국의 경제발전 한국은 건국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 속했다. 그러나 60여년이 지난 지금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으로 비약적으로 성...
www.cfe.org ![]() 1. 한국의 경제발전
한국은 건국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 속했다. 그러나 60여년이 지난 지금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의 경상GDP는 1953년 13억 달러에서 2014년 1조4,100달러로 무려 1,084배나 증가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서 18,00달러로 417배, 수출액은 2천 달러에서 5,731억 달러로 28,655배, 외환보유고는 380만 달러에서 3,600억 달러 95,000배 이상, 발전량은 4억8천 kwh에서 5000억 kwh로 1000배 이상, 자동차 대수는 15,000대에서 1억9천만대로 1,3000배 정도 늘었다.
<표1> 건국 당시와 현재의 한국경제 자료: 통계청, 한국은행 DB
지난 60년간 한국경제가 이룬 성과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괄목할 만하다. <표2>를 보면 2014년 세계 1인당 소득은 10,485달러로 1965년 570달러에 비해 평균 18배 증가한 반면, 한국은 1965년 105달러에서 2014년 2,9000 달러로 266배 증가했다. 이것은 미국의 15배, 프랑스 22배, 일본 42배보다 월등히 높은 성장이었다.
<표2> 세계경제의 변천(1965-2014) 자료: IMF
이런 한국경제에 대해 전 세계 학자들은 놀라움을 표시한다. 201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토마스 사전트는 “한국의 역사와 경제는 기적 그 자체”라고 표현했고, 기 소르망 파리정치대 교수는 “한국의 경제 발전사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했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역사에 기록된 것 가운데 한국전쟁 후 40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경제성장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고 극찬했다.
2. 왜 기적이라 불리는가?
100여 년 전 구한말은 그야말로 못살았다. 영국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19세기 말 망해 가는 조선을 여행하고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처음에 조선이 가난한 이유는 조선인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근방의 조선인촌을 방문하고는 그 생각을 바꾸었다. 조선인들의 마을이 깨끗하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선이 가난한 이유가 조선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양반들의 착취 때문임을 지적했다. “조선인들은 가난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돈을 벌면 다 뜯겨 버리니 일부러 부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조선 사람들은 착취 시스템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남겼다.
가난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그나마 1950년 6.25전란으로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남아 있었던 것은 폐허 속의 가난이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 더글러스 맥아더는 “서울이 회복되려면 적어도 100 년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6.25 전란의 피해상황을 보면 기업생산시설의 피해액이 675억 환, 정부시설이 423억 환, 사회간접자본이 326억 환, 주택 1,600억 환 이상, 가축 68억 환으로 총 피해액이 4,000억 환이 넘었다(<표3> 참조). 참담한 상황이었다.
<표3> 6.25 전쟁의 피해상황 (단위: 억 환, %) 자료: 내무부, 『대한민국 통계연감』, 1953; 최상오, 「외국원조와 수입대체 공업화」,
참담한 상황에 처한 한국은 전쟁 중과 전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들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의 전후 복구에 크게 이바지 했다. 전쟁 중에 ECA, CRIK와 UNKRA을 통해 비료, 의약품, 피복, 농업용품, 소비재 등은 물론 제조업·전력·수송시설·광업·주택·교육시설 복구 시설재 등이 도입되었다. 그 금액이 총 6억8,890 달러에 달했다(<표4> 참조). 전후에는 FOA, ICA, PL480 등을 통해 식료품, 농업용품, 원자재, 시설재, 소맥, 원면, 옥수수, 우지 등이 도입되었다. 그 금액이 31억3,900만 달러에 이르렀다(<표5> 참조)
<표4> 전쟁 중 미국과 UN의 한국에 대한 원조 자료: 한국개발연구원, 『한국경제 반세기 정책 자료집』, 1995, p. 45.
<표5> 전후 복구 안정화기 원조수입
자료: 한국개발연구원, 『한국경제 반세기 정책 자료집』, 1995, p. 45.
이러했던 한국이 2009년 11월 25일 24번째로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의 DAC(개발협력위원회)에 가입해 '원조를 받던 나라’ 에서 다른 나라에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 세계에서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국으로 전환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또한 2012년 6월 한국은 '20-50클럽’에 가입했다. '20-50클럽’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이상이면서 동시에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국가들에게 부여하는 영예다. 1987년 일본이 처음 가입한 이래 1988년 미국, 1990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1991년 독일, 1996년 영국에 이어 한국이 세계 7번째로 그 국가가 되었다.
1955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5달러로 아프리카 57개국의 평균 1인당 소득보다 낮은 수준이었던 그야말로 '변방의 작은 나라’가 60여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는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2014년 기준 GDP가 11,635억 달러로 세계 15위, 무역규모 10,675억 달러로 세계 8위, 외환보유고 3,450억 달러로 세계 7위권으로서 '작지만 강한 국가’로 성장했다. 또 LCD 패널, TV, 조선, 휴대폰은 세계 1위, 반도체는 2위, 자동차는 5위의 생산국이 되었다.
3. 한국경제 성공 요인
이러한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3가지다. 첫 번째 요인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사유재산 확보, 기회균등 제공, 사기업체제 등을 마련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시장경제 시스템으로 비로소 한국은 비숍 여사의 예언대로 착취 시스템에서 벗어났다. 이승만 정부가 마련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의 기반 위에 박정희 정부가 사유재산권을 더욱 보장하고 경쟁을 도입하며 시장경제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후 한국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과 북한의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민족적, 문화적, 지리적 동질성과 동질적인 경제여건 하에서 출발하였지만 60년이 지난 지금 북한은 최빈국에 머물러 있으며 한국은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두 번째 요인은 국민들의 노력이었다. 국민들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다는 자기 책임의 자세로 열심히 일하고 저축했다. 그 저축으로 자본축척이 이뤄졌으며 그것이 한국경제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저축은 더 생산적으로 만들 장비를 발명하거나 구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위해서는 현재의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야 한다. 국민들은 소비를 줄여가며 저축했고, 그것이 자본축적과 투자로 이어지면서 경제가 성장했다.
4. 파독 광부의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
한국 광부가 공식적으로 서독으로 파견된 시점은 1963년이었고 간호사의 경우는 1966년부터였다.
파독 광부의 동기는 기본적으로 당시 국내의 열악한 경제 상황에 있다. 당시 기업체가 발달하지 못해 일자리가 없어 대부분의 국민들이 고용 상태에 있지 않았다. 당시 공식 실업률은 20%가 넘었다. 실업률이 20%였지만 당시 대부분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고용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농촌인구가 60% 이상 차지했고, 농업생산 비중이 37%로 식량부족으로 보릿고개를 겪었던 시기였다. 일자리가 없어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다. <표6>에서 보는 것처럼 1965년 절대 빈곤율이 도시 54.9%, 농촌 35.8%, 전국 40.9%에 달했다. 따라서 어떤 일자리만 있어도 자신과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에 정부가 주도해 해외의 일자리를 제공한 정책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다.
<표6> 1990년 이전의 절대빈곤 추이
주: 1) 대도시, 2) 중소도시
1970년 한국의 1인당 GNP가 251달러였던 반면, 서독은 한국의 11배인 2,748달러로 파독근로자들이 받은 임금은 한국 임금 수준의 10배 이상이었다. 그리하여 실업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젊은이들은 기꺼이 서독으로 갔다. 당시 광부 모집에 나타난 경쟁률은 이 사실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 1963년 최초의 190여명 모집에 총 2,895명이 지원해 무려 15:1의 경쟁률을 보였고, 1964년 11월 공모에는 총 3,158명이 응모해 791명이 최종 선발되어 4:1의 경쟁률을 보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파독광부에 고학력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졸 이상 고학력자가 전체 광부의 70%를 넘었고, 초대졸 이상만도 20%를 넘었다. 1963-77년까지 파독 광부와 간화사가 각각 8,395명, 간호사 10,371명에 이르렀다.
<표7> 파독 근로자의 외화송금액 자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2절 파독 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II)」, 2010, 136쪽.
파독근로자들의 송금액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4년 0.003%에서 1975년 0.13%까지 증가했다(<표8> 참조). 파독근로자의 송금액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것은 아니지만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본에 기여한 바는 컸다. 정부는 1960년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 자금은 외환보유와 외자도입 등을 통해 조달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외환보유는 2,000만~3,000만 달러에 불과했고 외자도입은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 문제로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매년 수백만~수천만 달러, 10년 간 총 1억 달러 이상의 파독근로자의 송금액은 커다란 도움이 됐다. 이들의 송금액은 부족한 외환보유고를 늘렸을 뿐만 아니라 가계의 소비와 저축을 늘렸다. 소비 증가는 소비재 산업의 생산 증대를 유발했고, 저축 증가는 투자재원을 늘려 새로운 투자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생산력을 증대시키는데 기여했다.
파독근로자의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는 숫자로 보여 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파독 근로자의 더 큰 의미는 국제 분업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분업을 통한 자발적 교환은 쌍방에게 모두 이익이다. 파독 근로자를 받아들인 독일이나 독일에 근로자를 보낸 한국이나 모두 이익을 본 것이다. 당시에 우리 한국은 노동력 공급에 비교우위가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광부와 간호사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교우위는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교우위는 시간에 따라 변한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참여는 새로운 세계와의 접촉이다. 새로운 세계를 접촉하면서 은연중에 외국의 기술과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그러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은 새로운 산업에 비교우위를 갖게 한다. 한국이 지금 자동차, IT 산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은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국제 분업에 동참한 효과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파독 근로자는 개인의 소득 증대, 국내의 실업문제 완화, 외환보유고 증가, 투자 활성화와 내수 진작, 투자활성화 등의 긍정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국제 분업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여 국내 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표8> 파독근로자 송금액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2절 파독 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II)」, 2010, 136-137쪽.
6. 결론
어느 국가든 경제발전은 제도적 환경, 자본스톡, 기업가 정신이 함께 어우러져야 가능하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이러한 것이 잘 어우러져서 일어난 것이다. 정부는 시장경제의 제도 확립과 자본형성에 노력했고, 국민들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자본 형성에 기여했다. 그리고 기업가는 제도적 환경과 정부와 국민들의 노력에 의해 형성된 자본을 과감하게 투자하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자신과 가족의 삶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기 책임의 정신’에 따라 열심히 노력했고, 그것이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형성을 가능케 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국제 분업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그것이 암묵적으로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권혁철, “파독의 국가 경제적 의미 – 대한민국 성공 신화의 시작”, 「파독근로자: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자유경제원, 20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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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양하게 외국에서도 새로운 가치정립에 많은분들이 수고하고 있으매 뭔가 비젼이 감도는 즈음 우리 연합회도 신속히 정상운영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하*경이란 그런사람이 어찌 그렇게 천겁만겁 못된짓을 하고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봅니다. 좋은 소식 올려준 카페주인장님 수고하셨습니다.글릭아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