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대학 경영학부 4학년 김주형
교생실습 도중 삼막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온 사진은 월요일날 학교 출근시 스캔해서 첨부하겠습니다.(다른 학우님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1. 글을 시작하며
4월의 시작을 나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라는 곳에서 시작을 하게 되었다. 4주간의 교생실습... 아직 1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학교와는 다르게 눈치 볼 사람들이 너무 많고 무엇보다 5시반에 일어나서 학교 출근준비를 해야한다는 것도 상당히 힘들다.
작년에 잠시 정부부처에 근무를 하였지만은 아직은 일찍 일어난다는 것이 벅찬 교생실습, 하루하루 근근히 버티고 있던 중 목요일 아침 교육연구부장 선생님께서 내일(4월6일) 계발활동(예전의 C·A) 시간에 나랑 다른 여교생 선생님에게 ‘산악부’ 활동을 학생들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 이게 웬 날벼락인가〔나는 수영부인 줄 알고(서류상에는 우리 둘다 수영부였다) 내심 그 여선생님과 같이 수영복을 입기를 약간은 바랬건만...〕
아무튼 울며 겨자먹기로 금요일 수영복이 아닌 등산화를 챙겨서 학교에 갔다. 오늘의 등산코스는 학교 뒤쪽의 관악산 삼막사를 가는 것이었다. 예전에도 관악산은 자주 가곤했었지만 삼막사에는 가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인솔하는 산악부 담당 교사 선생님(우리과 82학번 선배)이 나에게 남근석과 여근석을 아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사학과를 복수전공한다고 하니 물어본듯 했지만 솔직히 삼막사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는데 그런 바위는 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2. 감상을 하면서
삼막사는 경기도 안양시 석수 1동의 관악산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677년 원효, 의상, 윤필 세 거사가 관악산에 들어와 막을 치고 수도에 들었던 자리에 삼막사를 건립하였다. 망해루와 명왕전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0호이고, 살례탑이라 불리는 고려시대 삼청석탑이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112호이다.
삼막사에 도착해서 보니 화강암으로 사찰을 온통 치장해 놓았다. 남·여근석이 위치하고 있는 칠보전까지의 계단도 온통 화강암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걸어 오르기는 편한데, 너무 돈으로 치장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산사하면 생각나는 옛 흙길을 걷듯이 산길에 고즈녁한 분위기가 아닌 뭔가 어색한 느낌까지 나기도 하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절을 찾아오면서 생긴 변화인 듯하다. 아니면 돈 많은 사람이 보시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삼막사는 기자신앙의 대상물로서 산신각이나 칠성각에 해당되는 칠보전과 남·여근석이 한곳에 모여 있는 사례로 유일하다고 한다.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인지 몰라도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기도처로서 전남 돌산의 향일암과 함께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이 남·여근석은 1983년에 경기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일찍부터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여인들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염원은 먼저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94호로 지정되어 있는 칠성각의 미륵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불상은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佛)로, 자연암벽에 감실을 만들고 부조한 것이어서 석굴사원 양식으로 전해오는 중요한 부조로, 전체적으로 활달한 부조감이 넘쳐 조선후기의 걸작으로 꼽힌다. 불상 아랫면에 건륭 28년(영조 39년, 1763년)이라는 명문이 있어 정확한 연대가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시기는 그다지 오래 된 편에 속하지 않는데, 세 석불의 코가 모두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다. 이 역시 여인들이 아들을 낳기 위하여 석불의 코를 갈아 마신 것으로 보여진다.
왜 코를 그렇게 갉아냈을까. 이것은 장승과 같이 나무도 아닌 화강암이기 때문에 코를 갉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를 갉아낸 것은 자식을 얻고자 하는 여인네의 심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코를 갉아낸 돌가루를 물에 삶아 먹으면 바위가 지닌 뛰어난 생산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요새 사람들이 코를 세우는 수술을 받는 것과 달리 미륵불은 코가 완전 납작해져 있다고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이 사찰의 칠보전에 모셔진 마애삼존불의 앞에 세워져 있는 남근석과 여근석을 학생들을 미리 보내고 다른 선생님들과 조용히 살펴보았다. 칠성각의 입구에서 여근석을 볼 수 있으며 여근석에서 2~3미터 떨어진 낭떠러지 옆에 불쑥 솟아있는 바위가 남근석이다. 이 남녀근석은 부부석(夫婦石)으로 불리기도 하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기 민속자료 제 3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바위 모두 천연 그대로의 암석이며 속전에 의하면 이 남·여근석은 이미 원효대사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세워져 있었다고 하며, 남근석은 150cm정도이고, 여근석은 110cm가량 된다. 특히 이 여근석에는 적당한 빗물이 고여 있는데 항상 고여있는데 절대 마르는 법이 없어, 그 영험함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원효대사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이 부부석은 민간신앙의 숭배 대상이었고, 이런 오랜 역사로 사월초파일과 칠월칠석날에는 기자 ․ 기복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곤 한다. 또한 남근석의 돌기 부분 여기저기에 비빈 자국이 뚜렷하고 여근석의 위쪽이나 옆에도 자국이 여실이 드러난다. 이렇듯 둥글게 패인 곳을 ‘알터’라고도 한다.
삼막사의 남·여근석 과 관련해서 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금실이 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자식이 없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시어머니는 씨받이라도 들이라 난리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꿈에 웬 할머니가 나타났다. 그 할머니는 삼막사의 남·여근석 을 문지르면서 소원을 빌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하였다. 부부는 그 바위를 찾아 근처에 움막을 짓고 치성을 드렸다. 하늘이 감응했는지 과연 아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자손이 번창하고 잘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에 자식을 낳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렸으며, 지금도 사월 초파일과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남근석보다 여근석을 보면서 좀더 관심을 끌었던 것은 물이 조금 고인 여근석 안에 누군가 백원짜리 동전을 넣어 놓았다는 것이다. 동전이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의 소행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 치성을 드리고는 그 안에 백원을 넣은 것임이 분명하다. 삼막사의 여근석에는 백원짜리와 같은 동전을 문지르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아들을 낳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 안에 돈을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 글을 마치며
우리나라에서는 강한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하여 아들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 신앙의 형태로 까지 발전하여 이렇듯 다양하고 약간은 민망한 문화유산들을 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산에 오를 마음은 없었지만 엉겹결에 이러한 문화재들을 보며 남아선호사상이 예전부터 생각보다 깊게 퍼져있었다는 것을 느끼며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들을 낳기를 기원하며 마음을 졸이던 당시의 많은 여인네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이들 대부분의 문화재들은 깨끗하게 보존된 상태는 아니었다.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마음에 코를 떼어가서 시멘트로 코만 하얗고 메워져있기도 하고 남근석 여기저기에 사람들의 손때가 가득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행동들은 과거에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아들을 낳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물론 문화재를 훼손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며 너무 과한 행동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눈살이 찌푸려지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흔적들을 통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하늘에라도 의지하려 하는 세인(世人)들의 간절한 마음과 함께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는 문화재의 친근한 단면을 볼 수 있었기에 나름의 가치를 느꼈다(산행을 마친 후 두부김치와 막걸리 한잔도 답사의 흥취를 더욱더 돋우게 하였다).
*참고
삼막사(三幕寺)는 신라시대 유명한 승려인 원효와 의상, 윤필 등이 창건한 절이다. 세 사람이 이 곳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기 때문에 삼막사라고 하는 유래담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또 다른 전설에는 원래 이곳 주위에 일막사, 이막사, 삼막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막사와 이막사는 폐사가 되어 터만 남고, 삼막사만이 명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기자신앙 [祈子信仰]
자식이 없는 집안에서 자식, 특히 아들낳기를 기원하여 행하는 신앙.
*참고문헌
김대성, 윤열수, 『한국의 성석』, 푸른숲, 1997
장장식, 『한국의 민속과 성』, 지식산업사, 1997
주강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한겨례 신문사, 1996
*참고논문
홍순례 「기자신앙연구-금기와 전승을 중심으로」, 2001
첫댓글 좋은 경험을 한 것 같음. 역사속의 뿌리깊은 민중신앙의 하나가 기자신앙임. 인간의 종족번식이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를 표현하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