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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 비는 더욱 거세게 퍼붓기 시작했다. 천둥이 치고 번개불이 번쩍했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은 비를 맞으면서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지휘관이 연단 위에서 군도를 짚고 서서 열심히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연병장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위안부 막사 한 귀퉁이로 몇 명의 위안부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부끄러운 듯 벽에 몸을 반쯤 가리고 서서 군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을 보자 병사들이 동요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부동자세로 앞을 바라보았다. 출전을 앞둔 마당에 여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조선 여자들의 경우 그 감정은 유다른 데가 있었다. 비록 이곳에 끌려와서 짓밟힐 대로 짓밟히고 배설의 상대로서 공동변소 취급을 받아왔지만 몇 달 상대가 누구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증오의 감정은 메말라 버리고 그 위에 서글프게도 사랑이 꽃피고 있었던 것이다. 대치는 정면을 향해 꼿꼿이 서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위안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여옥이를 향해 쏠려 있었으므로 그는 다른 것을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여옥이는 다른 여자들과는 좀 떨어진 곳에 혼자 서 있었다. 비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조금이라도 대치를 가까이 보려고 앞으로 나와 전봇대 뒤에 몸을 가리고 서 있었다. 빗물이 온몸을 적셔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치는 빗물같기도 하고 눈물같기도 한 것이 자꾸만 눈앞을 가려 앞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눈을 자주 감았다 떴다 했다. 이윽고 군인들은 질서정연하게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포장된 트럭 속으로 군인들은 가득가득 들어가 앉았다. 대치는 맨 마지막에 차에 올랐다. 그리고 뒷자리에 앉아 다시 여옥을 바라보았다. 여옥은 몸을 가리고 있던 전봇대에서 벗어나 더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녀는 몸빼 대신 처음 이곳에 끌려왔을 때 입었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옷고름 하나를 입에 물고 하염없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자 대치는 당장 뛰어내려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차가 움직였다. 벌써 수십 대의 트럭이 빗속을 뚫고 달리고 있었다. 대치가 탄 트럭은 연병장을 천천히 가로질러 갔다. 대치는 군모를 벗어들었다. 이 쓰라린 이별의 순간에 그는 갑자기 여옥이에게 최대의 예의를 보이고 싶었다. 그녀의 희생이 문득 거룩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트럭이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 그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여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후에 그는 군모를 높이 쳐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흔들었다. 그때 갑자기 여옥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빗속을 그녀는 미친 듯이 뛰어왔다. 신발도 벗어버린 채 손을 내저으며 허둥지둥 뛰어왔다. 대치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오른쪽 발이 트럭의 난간을 짚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밑으로 뛰어내릴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오오에가 뒤에서 총대로 그의 등을 콱 찔렀다. "이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대치는 움찔했다. 여옥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차가 속력을 내자 그녀의 모습은 금방 작아져버렸다. 대치는 손을 흔드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두 눈에 가득 찬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여옥아...... 용서해라...... 용서해라...... 부디..... 어디를 가든...... 살아 있기 바란다...... 여옥아...... 살아야 한다...... 너를 결코 잊지 않겠다...... 사랑하는 여옥아...... 여옥아...... 여옥아...... 아, 여옥아...... 너를 죽도록 사랑하마...... 안녕...... 안녕...... 안녕...... 대치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느라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망할 년 같으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날뛰는 거야?" 여옥은 쓰러진 채로 멀리 사라져가는 차량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빗속에 묻혀 대치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치 이등병님...... 같이 가요...... 저 좀 데려가 줘요...... 혼자 가시면 싫어요...... 싫어요. 그녀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비에 젖은 머리칼을 타고 빗물이 온통 얼굴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분을 놓쳐서는 안된다...... 따라가야 한다...... 천리 만리 길이라도 따라가야 한다...... 나는 혼자 살 수 없어...... 혼자 두고 가면 죽어 버릴 거야......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어...... 아, 대치 이등병님...... 저를 데려가 주세요...... 데려가 줘요...... 혼자 가시면 미워요...... 이 아기는 어떻게 하라고 혼자 가시는 거예요...... 미워요...... 정말 미워요...... 그렇게 가시는 것이 저를 사랑하는 건가요...... 오, 하느님...... 저분 곁에 있게 해줘요...... 저분 곁에 있게 해주시면 어떠한 고난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면서 일어섰다. 대치가 떠나간 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은 정신이 모두 빠져 있는 듯 멍한 빛이었다. "이게 미쳤나?" 헌병이 다시 여옥의 뺨을 철썩 하고 후려갈겼다. 그제서야 그녀는 정신이 드는 듯 헌병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달려온 위안부들이 여옥을 잡아끌었다. "싫어요!" 여옥은 몸을 뿌리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격렬하고 비통한 울음 소리였기 때문에 위안부들은 섣불리 손을 못 대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여옥을 때린 헌병도 안 되었다 싶었든지 입맛을 쩍 다시면서 초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서 한참 동안 소리내어 울었다. 울어도 울음은 그칠 것 같지가 않았다. 비에 젖은 가냘픈 어깨가 울음을 삼킬 때마다 후들후들 떨리곤 했다. 한참 후 울음이 그치고 나서야 위안부들은 여옥을 부축하여 위안소 쪽으로 돌아갔다. 조선 출신 위안부들은 어려운 대로나마 서로 위로할 줄을 알고 도울 줄도 알았다. 그녀들은 비탄에 젖어 있는 여옥이를 막사로 데리고 가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자리에 눕게 했다. 그녀들이 돌아간 다음 여옥은 다시 한참 동안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소리없이 몇 번이고 최대치를 불렀다. 나중에는 그를 원망하고 하느님까지 저주했다. 전생에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육신은 이렇게 갈기갈기 찢기우고 이제는 사랑하는 이마저 떠나보내야합니까.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이 몸이 잉태하고 있는 씨가 죄악의 씨라면 함께 죽여주시옵소서. 그러나...... 하느님...... 제가 당하고 있는 이 시련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린 생각일지 모르옵니다만...... 저는 지금 하늘의 진리를 의심하고 싶습니다. 아니,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은 과연 누구 편이 옵니까. 이 불쌍한 것을 사랑하신다면 왜 현명한 길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십니까. 이 어리석고 보잘것 없는 소녀는 하느님의 품을 떠나...... 하느님의 은혜를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이 버림받은 죽은 몸을 다시 찾지는 마시옵소서. 그녀는 다시 쓰러져 울었다. 그녀는 대치를 부르다가 어머니를 불렀다. 한참 후 그녀는 발작적으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비오는 거리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트럭에 올라 일본 병사들 틈에 끼어 모자를 벗어 흔들던 그 학도병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여옥은 갑자기 가슴이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창틀을 꽉 움켜쥐면서 그가 떠나간 쪽을 쏘아보았다. 대치 이등병님...... 그녀는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불러도 불러도 부르고 싶은 그 이름이었다. 대치 이등병님...... 부디 몸조심하세오. 어디 가시든 당신만은 살아 계셔야 해요. 저 때문에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같은 것은 잊으셔도 돼요. 당신을 따라 가려고 하다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계집인가를 이제 알겠어요. 일개 위안부인 제가 당신 같은 분을 사랑하다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었어요. 당신이 이 비천한 계집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와 사랑은 영원히 제 가슴 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당신은 저에게 크나큰 구원의 빛이었어요. 그 빛이 있었기에 저는 이 생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 빛이 스러진 지금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바로 이 시간부터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생각지 않도록 노력하겠어요.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는 이 육신은 이제 땅위에 버려진 돌멩이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겠지요. 이것이 운명이라면 말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과연 저에게 이 운명을 받아들일 힘이나마 있는지 모르겠군요. 대치 이등병님. 부디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세요. 대치 이등병님, 이 비천한 소녀가 당신 같은 분을 사랑한 것이 죄가 될까요. 어리석은 짓인 줄 알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싶은 걸 어떡해요. 대치 이등병님...... 안녕...... 부디 안녕히...... 여옥은 창틀에 머리를 부딪치며 다시 흐느껴 울었다. 앞이 캄캄해지면서 절망감이 엄습했다. 그날부터 여옥은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방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체 입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허탈상태에 빠져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윈 그녀는 바짝 말라갔다. 마침 부대 이동으로 인한 공백기로 잠시 동안이나마 병사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이 그녀에게는 퍽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밤이면 악몽에 시달렸다. 대치 이등병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총살 당하는 꿈, 어머니가 목매어 자살하는 꿈, 꿈은 모두가 이렇게 끔찍한 것들이었다. 위안부로서 몇 달 동안 짓밟힌데다 대치와의 기막힌 이별이 가져다 준 고통으로 하여 그녀의 그 총명하고 아름답던 얼굴은 채 피기도 전에 시들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두 눈뿐이었다. 투명하고 맑던 두 눈은 그들을 드리운 채 자꾸만 커져가는 것 같았고 그것은 허공을 향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절망에 빠진 여자 같지 않게 몸을 유난히 깨끗이 하고 있었다.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것이 여자의 본능이겠지만,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씻고 몸단장을 깨끗이 했다. 그렇다고 화장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투명해지도록 닦고 닦기만 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을 앞둔 여자가 자신의 몸을 깨끗이 단장해 두는 것만 같아서 신비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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