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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의 『위험한 사람들』읽기 *
Reading Edward Yang's “Terrorizers”
1. 에드워드 양의 타이베이 초상화
2 타이베이의 ‘위험한 사람들’
3. 프레드릭 제임슨과 타이베이의 ‘인식적 매핑’
4. 도시 폭력의 우연성과 익명성
1. 에드워드 양의 타이베이 초상화
내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영화로 타이베이시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나는 최근 타이베이에 변화가 발생한 방식과 이들 변화가 타이베이 시민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탐구하려 한다.(楊德昌語. 朱衛國 2003, 29에서 재인)
2007년 6월 28일 타계한 에드워드 양(Edward Yang. 楊德昌)의 영화는 타이베이(臺北. Taipei)에 집중되어 있다. 1947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두 살 때 가족을 따라 타이완으로 건너왔고 유학기간을 포함 미국에서 11년간 머물다가 1981년 타이완으로 돌아와 이듬해 ‘타이완 뉴웨이브(新浪潮)’를 주도하면서 홍콩, 도쿄,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며 유목민처럼 살다가 미국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영화에서만큼은 타이베이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논자들도 뉴웨이브를 함께 주도했던 허우샤오셴(侯孝賢)이 농촌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가 많은 것에 반해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도시인의 삶을 비판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함께 뉴웨이브를 선도했으면서도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위험한 사람들(恐怖份子 Terrorizers)』을 집중 논의한 잉슝(應雄)은 허우샤오셴이 중국적이라면 에드워드 양은 서유럽적이고, 허우샤오셴이 전통과 농촌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면 에드워드 양은 현대화와 도시를 이성적으로 해부했으며, 카메라 기법에서 롱 테이크(long take) 미학을 추구하는 허우샤오셴의 휴머니즘에 비해 에드워드 양은 자각적 몽타주(montage) 사유를 추구하는 전위적 감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應雄 1990, 42). 국제적으로는 허우샤오셴의 지명도가 높지만 타이완 뉴웨이브를 추동한 선구자는 에드워드 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사람의 스타일은 서로 다르지만 ‘거리두기’라는 공통점은 존재한다.
대륙의 몇몇 논자들은 에드워드 양의 작품을 ‘유자(儒者)의 곤혹(困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喩群芳 2003; 楊曉林 2007). 비슷한 맥락에서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진지한 영화(誠意電影, sincerity movies)’로 간주하고 그 미학적 특징을 거대한 틀, 지성적인 카메라언어, 독립제작, 비판적 리얼리즘, 정교한 예술기교로 고찰한 쑨웨이촨(孫慰川 2004)은 에드워드 양의 핵심 모티프(Motif)를 다음의 세 가지로 본다. 첫째 현대 도시에 내장된 진정한 위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둘째, 현대 사회의 윤리 도덕 체계는 건전한가 아니면 취약하고 위태로운가? 셋째, 도시 속의 인간관계는 정상적인가 병태적인가? 이는 자본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 세계체계(world system) 내의 대도시가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 재현된 타이베이와 타이베이인의 문제다.
‘유자의 곤혹’이라는 문제설정은 『독립시대』의 영문제목(‘A Confucian Confusion’)을 징후적으로 독해한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이 영화를 시작하면서 『논어․자로(子路)』1장을 인용한다. “선생께서 위에 가시매 염유가 모셨다. 선생이 말씀하시길 풍족하도다! 염유가 말하길, 풍족한 연후에 또 무엇을 더하오리까? 선생께서 답하길, 그들을 부유하게 하라.(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논어』 원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문답이 이어진다. “염유가 말하길, 부유한 연후에 또 무엇을 더하오리까? 선생께서 말하길, 그들을 가르쳐라.(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그러나 에드워드 양은 이 구절을 생략한 채 “2천여 년 후 타이베이는 짧은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도시로 변했다(兩千多年後, 臺北在短短20年間, 變成世界上最有錢的都市)”라는 자막을 내보낸다. 이는 수사학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하나는 감독이나 관객이 모두 두 번째 구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고 이는 2천 년 전 공자의 가르침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다. 쑨웨이촨(2004)은 이런 전제 하에 에드워드 양 영화의 미학적 특징의 하나로 ‘유가적 교화’-비판적 리얼리즘을 꼽았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자의 “가르쳐라(敎之)”는 말에 대해 ‘지금도 유효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노코멘트(No comment)!’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중간적 입장도 이미 ‘공자님 말씀’에 적극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회의에 가깝다.
에드워드 양의 문제제기는 『독립시대』에서 나왔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 『독립시대』뿐 아니라 다른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말을 대신 토로하는 방식이 그 하나다. 『독립시대』의 청년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조차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마작』의 훙위(紅魚)는 “세계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 매 사람이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기를 기다리고 그 후에야 그는 그 말에 따라 행한다”고 하고, 『하나 그리고 둘』의 주인공 엔제이(NJ)는 혼수상태의 장모에게 “나 자신이 한 말이 진심인지를 잘 모르겠어요”라고 독백하며, 그 아들 양양(洋洋)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줄래요”라면서 다른 사람의 뒤통수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작가가 작중인물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고려한다면, 이들 작중인물의 언술은 그 표층과 심층, 담론과 실천의 층위를 총체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훙위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해온 아버지의 가르침, ‘사람은 사기꾼과 바보로 나뉜다’라는 말을 법보로 삼아 바보의 길이 아닌 사기꾼의 길로 나간다. 그에게는 룬룬(綸綸)이 마지막에 선택한 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엔제이는 회사와 가정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혼란에 빠진다. 엔제이가 대표로 있는 회사는 기술혁신의 기로에서 정품과 짝퉁의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모두들 정품 기술을 원하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이런저런 투자선도 물색해보지만 이사들은 결국 짝퉁 쪽으로 기운다. 엔제이는 이 과정에서 정품 회사와의 협상에 나서지만, 동료들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한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회사 경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묵인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한 부인과 첫사랑 애인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한다.
제3세계 대도시 타이베이를 대상으로 삼았기에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냉혹(于麗娜 2002)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도시를 해부’하고(馬軍驤 1990; 海天 1998) 비판(施立峻 2003)하고 반성(韋菁 1992; 楊曉林 2007)한다. 그 방식은 이성(蔣俊 2003)과 정관(靜觀)(孫慰川 2001) 그리고 논문식 서사(應雄 1990)다. 그리고 죽음(살인, 피살, 자살 등)을 빈번하게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본 영화 가운데 『하나 그리고 둘』을 제외하곤 모두 음울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마작』의 엔딩 씬에서 룬룬이 마트를 만나 포옹하는 장면의 배경도 블루 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영화가 된 『하나 그리고 둘』에 어린이의 시선을 도입한 것은 에드워드 양의 ‘새로운 희망 찾기’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노라면 이전 영화의 주조였던 냉혹함과는 달리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엔제이의 가족들이 혼수상태인 장모/어머니/외할머니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평소 소통의 부재를 확인시켜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장모/어머니/외할머니의 쾌유를 빌면서 나누는 대화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타자를 위한 행동이 자아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따뜻하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은 낙관주의자는 아닌 듯싶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양양의 뒤통수 사진 찍기는 교화와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 다음에는? 그것은 결국 자신의 뒤통수를 본 사람의 몫이다. 이 글은 에드워드 양의 여러 텍스트 가운데 교화와 계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위험한 사람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에드워드 양이 그린 타이베이의 초상화 가운데 ‘위험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 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포스트모더니즘 연구자인 동시에 제3세계문화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같은 영화를 대상으로 삼아 분석한 타이베이의 새로운 인식적 매핑의 윤곽을 파악하고자 한다.
2. 타이베이의 ‘위험한 사람들’
먼저 원제 『恐怖份子 Terrorizers』의 의미를 저작(詛嚼)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사전적 의미에서 ‘恐怖份子’는 테러리스트를 지칭하는데, 테러리스트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우리말로 옮기면 폭력주의자 또는 폭력 혁명주의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런 맥락의 테러리스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도 굳이 ‘Terrorizers’라는 영어 제목을 병기함으로써 ‘테러리스트’와 변별하고 있다. ‘to terrorize’는 ‘┅을 무서워하게 하다; 탄압[위협]하다, 위협[협박]해서 ┅시키다’ 등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terrorizers’는 영화 맥락과 연계시키면 ‘협박하는 사람들, 위협하는 사람들’이고 조금 의역하면 ‘위험한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앞당겨 말하면 타이베이(인)를 위협하는 것은 주거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원형의 가스저장탱크이고, 움직이는 폭탄이랄 수 있는 혼혈소녀다. 그리고 혼혈소녀의 장난 전화를 받고 그것을 빌미로 가출함으로써 의사 남편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살인/자살하게 만드는 작가이기도 하며, 아내의 가출과 직장에서의 승진 실패로 인해 살인/자살하는 의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의도적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에게 위협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영화에서 기록자의 역할을 하는 사진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fact)이 소설(fiction)로 나오자 “너무 무섭다!(太恐怖了!)”라고 말한다. 부잣집 아들로 군 입대를 앞두고 집을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으로 기록하는 그는 자신의 일이 ‘정당한 일(正經事兒)’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 주변의 사람들―여자 친구부터 사건 속의 인물까지―과 사건들을 ‘정확한 눈’으로 기록한다. 그가 직접 찍어 인화·확대한 혼혈소녀의 사진은 조금 겁먹은 듯한 그러나 무표정한 모습이다.
영화는 전지적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진사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간략하게 재구성해보자. 사진사는 여자 친구와 같이 있다가 우연하게 총격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그 사건과 도망치던 혼혈소녀를 필름에 담는다. 그로 인해 여자 친구의 집을 나와 사건 현장인 연립주택에 세 들어 산다. 어느 날 한 여성(작가)이 찾아왔고, 또 다른 어느 날 밤 혼혈소녀가 아픈 몸으로 들어온다. 작가가 장난전화 때문에 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혼혈소녀를 책망하지만, 그녀는 장난전화가 사진 찍는 일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한다. 혼혈소녀에 실망한 사진사는 입영영장을 받고 여자 친구와 화해한다. 어느 날 신문에서 작가의 사진을 알아보고 여자 친구로부터 작가의 작품 이야기를 듣는다. 사진사의 여자 친구에 의해 요약된「혼인실록」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부부가 생활에서 약간의 스트레스가 있어 부부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부인이 한 여성의 전화를 받고는 고통스러워하며 변화한다. 남편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역시 비참하게 변한다. 결국 남편은 참지 못하고 부인을 살해하고 자살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고통을 종결시킨다. 여자 친구는 심사위원의 평을 덧붙인다. ‘정상적인 생활은 아니지만, 리얼하고 소름끼치게 만든다.’ 이야기를 듣고 ‘너무 무섭다’고 느낀 사진사는 작가와 연락을 취하다가 남편인 의사와 연결되고 그에게 그동안의 사진과 사건을 보여주고 말해준다. 사진사는 여기까지 등장한다.
사진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의사는「혼인실록」을 읽은 후 혼혈소녀를 작가와 대질시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만회하려 한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며 남편인 의사의 권유를 거부한다. 같은 날 병원의 인사명령에서 승진이 제외된 의사는 처절한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경찰 팀장의 집에 나타난 의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승진했다고 말하며 축하주를 마신다. 그리고 감독은 우리에게 살인과 자살이라는 두 가지 ‘무서운’ 결말을 보여준다.
감독이 제시하는 첫 번째 결말은 이렇다. 새벽에 소파에서 일어난 의사의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전날 밤과는 대조적으로 처량하기도 하고 침울하기도 하고 어쩌면 처절해보이기도 한다. 분열증(schizophrenia)의 특징이다. 어쩌면 새벽의 표정이 정상이고 전날 밤의 웃음이 비정상처럼 보이지만, 둘 다 자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병원 주임이 출근하다 피격되고 쓰러진 후의 경련 장면이 보인다. 팀장이 깨어나 옷을 입다가 총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다시 의사는 작가 애인의 아파트 벨을 누르고 의사임을 확인한 애인이 문을 닫으려 하자 애인을 쏜다. 문에서 한 방, 마루에서 한 방. 이어 침실로 들어간 의사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작가 대신 거울을 쏘고는 거리로 나선다. 출근한 팀장은 두 사건을 보고 받는다. 저녁 무렵 의사는 번화가에서 혼혈소녀를 찾아 함께 호텔에 들어간다. 경찰 팀장이 부하들을 인솔해서 온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손을 씻는다. 팀장이 호텔 방문을 박찬다. 그리고 문을 박차는 소리는 총소리의 중첩되는데, 이는 의사가 혼혈소녀를 쏘는 총소리일 수도 있고 두 번째 결말인 의사의 자살 총소리이기도 하다.
두 번째 결말은 이렇다. 총소리에 이어 벽에 핏자국이 보이고 팀장이 총소리에 깨고 작가도 불길한 예감에 깬다. 의사가 자살한 장면을 팀장이 확인하고, 작가는 메스꺼움에 구토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결말을 연속적으로 보아 “전체 영화는 중산층 여성의 꿈에 불과하다”거나 “저우위펀과 관련된 그로테스크한 꿈”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잉슝은 두 장면의 연속성을 부인하면서 ‘진실과 환각의 갈마들기’를 역설하는데, 감독이 진실과 환각 사이를 오가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의사의 진실한 복수 총격은 환각이 되고 동시에 이런 환각은 진실을 은유한다. 그 결과 발생한 진실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환각일 뿐이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환각은 이미 발생한, 막 발생하고 있는, 장차 발생할 진실이 된다는 것이다(應雄 1990, 40). 작가의 구토는 이런 사실을 인식한 것에서 비롯된다. 『마작』에서 샹강(香港)이 여자 친구에게 권하던 일을 자신이 당하자 구토하면서 우는 것처럼.
이처럼 후기 자본주의 시대 제3세계의 대도시 타이베이는 ‘위험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굳이 인과관계를 추적하자면, 의사의 살인/자살은 부인인 작가의 가출과 승진 실패에서 비롯되었고, 작가의 가출은 혼혈소녀의 장난전화 때문이었으며, 혼혈소녀의 장난전화와 폭력은 엄마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있고, 엄마의 허망함의 근원은 떠나간 옛 애인인데 그는 바로 미국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타이베이의 ‘위험한 사람들’을 양산한 것은 결국 미국의 신식민주의이고 전지구적 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필연적 인과관계를 추적하기보다는 그 우연성과 개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대도시에 산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할 수 있고, 나 또한 의지와 관계없이 타인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3. 프레드릭 제임슨과 타이베이의 ‘인식적 매핑’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연구자인 제임슨(Jameson, Fredric. R.)은 제3세계 연구에도 힘을 기울여 그의 ‘국족 우언(national allegory)’론은 광범한 지지를 받아왔다. 다만 “다종 다기한 세계 문학을 ‘제3세계’라는 동일한 틀 안에 묶어버리려는 제임슨의 욕심이 지나치게 환원적이라는 사실”(아자즈 아마드. 로버츠 2007, 299쪽에서 재인)은 지적해두어야 한다. 사티야 모한티도 아마드의 비판에 동의하면서 제임슨의 이러한 태도가 ‘참으로 역설적’이라고 지적한다. “(제임슨이) 총체성이라고 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세계 문학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능력을 일정 부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그토록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 모든 다양성은 결국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의 알튀세적 대립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이는 ‘제3세계의 보편성이라는 숲을 보되 각 지역의 특수성이라는 나무를 보지 않으려 한다’ 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Remapping Taipei”를 보면 제임슨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사실 제임슨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영화 비평을 많이 썼다. 그는 영화를 매개로 자기 이론의 핵심 개념인 ‘정치적 무의식(political unconsciousness)’을 계속 탐험한다. 영화가 정치적 무의식을 특히 직접적으로 재생산해내는 방식을 깨닫는 것이, 제임슨 영화 비평의 핵심을 이룬다.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저자 애덤 로버츠는 제임슨 영화 비평의 전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많은 동시대의 영화 비평이 영화에 대한 감상이나, 독해, 시선의 권력, 이미지의 유기적 조직화 등 궁극적으로 프로이트에게서 파생된 모델들에 의존할 때, 제임슨은 적절한 관점을 얻고자 한다면 프로이트는 반드시 마르크스와 결합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공적 영역에 대한 코드(마르크스주의)와 사적 영역에 대한 코드(프로이트주의)’가 ‘함께 유기적으로 묶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시선이 사회의 지배적 형식으로 등장한 것’은 ‘정신분석학적 무의식 모델이 전형적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컨대, 프로이트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로써 더 넓은 영역인 사회적`이데올로기적 맥락에 위치할 때에야 비로소 영화 독해의 유용한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로버츠 2007, 277)
제임슨 영화비평의 핵심전략은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의 영화연구와 관련된 글은 주로 『보이는 것의 날인』과 『지정학적 미학』에 실려 있는데, 전자가 제1세계 영화를 대상으로 다루었다면 후자는 제3세계, 특히 동아시아 영화를 포괄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 편이 『위험한 사람들』을 분석한 “Remapping Taipei”다. “정치적 무의식이 제임슨의 이론에서 이론적 용어의 핵심이라면, 역사적 범주의 핵심은 포스트모더니즘일 것”(맥케이브 2007, 12)이라는 진단은 제임슨의 지적 편력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영화는 바로 두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다. 제임슨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편으로 그가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참여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무의식을 탐험하기에 영화만큼 적절한 텍스트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식적 매핑’은 정치적 무의식과 포스트모더니즘, 심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양자를 매개해주는 개념으로, 이는 “제임슨 자신의 과거 10년간의 문화 분석과 특히 이 책(『지정학적 미학』-인용자)을 정당화해준다.”(맥케이브, 2007, 16)
타이베이(original)의 초상화를 그리고자 하는 에드워드 양의 의도는 재현(representation)이다. 그런데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가지고 프레드릭 제임슨은 타이베이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고자 한다(remapping). 재현의 재현인 셈이다. 물론 이때 에드워드 양의 초상화도 외양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제임슨의 의도도 일상생활 속에서 ‘인식적 매핑(cognitive mapping)’이다. 이는 제임슨의 중요한 방법론이다. 그에 의하면, 도시 거주자는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 공간이 사실적으로 재현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즉, 실제 공간을 직접 재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것은 소외된 환경처럼 개인의 경험이 왜곡되고 생략된 양상을 반영한다. 제임슨은 이러한 개념이 특히 국가적이고 전지구적인 좀 더 확장된 공간의 표면을 이해할 때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식적 매핑은 개인이 이데올로기적이고 전지구적인 총체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을 알려준다. 제임슨이 가장 중요한 비평기준으로 삼고 있는 총체성은 지상에 있는 개인에게는 뉴욕 전체의 지리만큼이나 거대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식적 매핑은 ‘주체가 자신의 존재 조건인 실재와 맺는 상상적 관계’라고 하는 알튀세적(그리고 라캉적) 이데올로기 정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지정학적 미학』의 발문(추천사)을 쓴 콜린 멕케이브에 의하면, 인식적 매핑은 제임슨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정치적 무의식’의 가장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자, 역사적인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에 정치적 예리함을 더하는 것이고, 제임슨이 수행한 방법론의 정당성을 확증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면 제임슨의 텍스트 분석을 살펴보자. 제임슨(Jameson 1994)은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서 제3세계의 보편성보다는 전지구성을 읽어낸다. 에드워드 양 영화의 주요 주제인 도시 비판을 서화(westernization)가 아니라 도시화(urbanization)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제3세계의 근현대사는 ‘서양 학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양은 학습의 대상인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었기에, 서화와 본토주의(nativism) 사이의 진자 운동이 반복되었던 것이고, 근현대화(modernization)와 전통(tradition)은 그것들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이항대립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논리가 작동하게 마련이어서, 제3세계에서 근현대화를 추진하다가 그것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면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전통 회귀가 거론되곤 했다. 제임슨은 이 부분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에드워드 양의 영화가 서화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도시화를 비판했다고 서두를 뗀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흥기한 대륙의 ‘5세대’의 주요 흐름과 다른 점이고 타이완 뉴웨이브(新浪潮)의 일반 흐름과도 변별되는 에드워드 양만의 독특한 점이다. 에드워드 양은 ‘어떤 의미에서 후기 자본주의 도시화의 한 예로서의 타이완(타이베이)’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흔히들 『위험한 사람들』은 다른 본토주의 영화의 잠재적 감상주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시각상의 아름다움은 정체성을 추방한 매끄러운, 차가운 표면 같다고 끊임없이 묘사된다. 후기 자본주의 도시화의 하나인 타이베이라는 관점은 또 다른 포스트모던 도시 홍콩을 영화화한 웡카와이(王家衛)와 비교(于麗娜 2002)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임슨은 국족(nation)과 종족(ethnic) 정체성을 위협하는 무조건의 포스트모던적 관점도 경계하고 있다.
제임슨은 『위험한 사람들』의 독특함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예술과 생활, 소설과 현실, 모방과 아이러니 등으로 구성된 주제의 진부한 모더니티를 꼽는다. 영화는 네 개의 줄거리 가닥(four distinct plot strands)으로 이루어지는데, 혼혈소녀(淑安)―작가(周郁芬)―의사(李立中)―젊은 사진사가 그들이다. 그리고 네 가지 우연적 줄거리 가닥은 서로 교차되면서 마지막에 하나로 엮인다. 그 가운데 우선 주목할 인물은 작가다.
글쓰기의 사로(思路)가 막힌 작가는 묘령의 여성으로부터 익명 전화가 걸려와 남편과 해결할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을 창작 자료로 삼아「혼인실록」이라는 중편소설(fiction)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빌미로 남편과 헤어져 집을 나온다. 창작을 그만 두고 출판사에 취직하려던 그녀는 왕년의 애인을 만나고 둘은 자연스레 옛 관계를 회복한다.「혼인실록」은 영화 속의 액자인 동시에 이 영화의 주인공과 이야기를 규정하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제임슨은 이를 두고 ‘생활의 예술 모방 및 소설과 외부의 실재세계의 각종 우연적 현실의 대응’이라는 의미에서 ‘주제의 낡은 방식의 반영성(old-fashioned reflexivity of the theme)’이라 일컬었다. 영화 속의 작가는 ‘소설은 소설일 뿐(小說歸小說)’이라면서 자신의 소설이 익명 전화에서 플롯상의 영감을 받긴 했지만, 그것과 자신의 삶은 무관하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작가의 창작이 대부분 자신의 삶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작가의 창작 위기는 더 이상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말은 이제는 쓸 재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익명 전화는 그녀의 창작에 영감과 재료를 준 사건이었던 셈이다. 작가는 지금껏 생활 속에서 창작 재료를 취해왔는데 이제 더 이상 써먹을 것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창작을 중단하려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추구해온 작가의 삶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실연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의사와 결혼하고, 일상생활의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임신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창작을 시도하지만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결국 작가는 의사와 헤어짐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는데 그 이면에는 옛 애인과의 재회가 있다. 조금 단순화하면, 작가에게 실연의 아픔을 안겨주었던 옛 애인이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고 상호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작가는 현재의 답답한 생활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그 계기가 익명전화였고, 작가는 그것을 창작과 생활에서 활용한 것이다.
주요 인물들이 어떤 연계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시발점은 혼혈소녀다. 제임슨은 영화에서 유라시안 혼혈소녀와 그의 동업자가 폭력을 애용하는 위험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도시 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 이 두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꼭 악독한 것은 아니라고 진단한다(詹姆遜 2004, 307頁). 사실 후기 자본주의의 대도시에서 우리는 도처에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움직이는 폭탄이랄 수 있는 자동차의 홍수부터 재난영화에 나오는 온갖 위험들이 우리 주변에 포진되어 있다. 합리성으로 통제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대립면인 비이성, 광란, 사악함 등이 언제든지 ‘귀환’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영화 초입 부분에 등장하는 총격전은 이야기 줄거리와 무관하지만 도화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누가 쏘았는지 누가 쓰러졌는지는 밝혀지지 않는 익명의 총격사건은 등장인물들의 운명과 우연하게 연계된다. 즉 총격전이 계기가 되어, 사진사는 혼혈소녀를 보게 되고 병원에 데려다 주고 사진을 인화하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작가`혼혈소녀`의사를 만난다. 의사는 출근하면서 경찰차를 만나고 혼혈소녀를 지나친다(아마 혼혈소녀를 쫓아온 사진사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혼혈소녀는 다리에 깁스를 한 채 집에 감금되어 무료함을 쫓으려 장난전화를 하게 되고 그것이 작가의 가출과 창작에 영향을 준다. 이처럼 익명의 ‘폭력은 서사 범주와 연계되고 폐쇄되거나 가닥과 사건의 교호관계의 문제가 된다. “총격전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기타 줄거리 가닥의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더 중요한 것은 막 날이 밝을 때 총격전이 발생했는데, 새벽의 도시는 텅 비어 있다가 각종 사람과 사무 및 일상생활이 차츰 도시를 채운다. 폭력으로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는 쓰러진 시체가 누구인지 모르고 단지 젊은 사진사가 사진을 찍는 것만 알 뿐. 그리고 ‘백계(白鷄-혼혈소녀의 별명-인용자)’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리다 다리를 다친 것을 일별하는 계기가 된다.”(詹姆遜 2004, 309)
혼혈소녀의 폭력은 동기가 없다. 굳이 원인을 규명하자면,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부재하는 아버지와 노스탤지어에 잠겨있는 어머니를 통해 그녀가 혼혈로서 겪어야 했던 질시 등에 대한 원한이 특별히 격화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정신분석학에서 사회의 규범 등을 상징하는 초자아(superego)를 대표하는 것은 아버지이고 무의식(id)은 어머니와 연계되어 있다. 이는 또한 식민화(colonization)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녀는 내키는 대로 장난전화질을 하고 그 후과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틀리면 남자를 찌르고 동료와 짜고 협박한다. 길거리에서 작업할 때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부분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진사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너무 무섭다’고 느꼈을 때 그 두려움의 기저에는 혼혈소녀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혼혈소녀는 영화에서 두려움의 근원이다.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가스저장탱크가 주거지역에 버젓하게 자리 잡고 있듯이, 그녀는 타이베이 중심지에서 계속의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제임슨은 영화에서 몇 가지 반복되는 기표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가스저장탱크, 횡단보도, 사이렌 소리, 개 짖는 소리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의사의 손 씻는 행위는 의미심장하다. 마치 수술하기 전에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이 손을 씻는다. 이는 의사가 어떤 장소에 들어가든 반복된다. 제임슨은 그것에서 불안정성과 자기비하 콤플렉스를 읽어낸다. 나아가 의사의 손 씻기 동작은 직업과 혼인, 업무와 가정생활로 표현되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사이의 처리하기 어려운 평형을 대표한다. 즉 손을 씻음으로써 자신의 위기 또는 불안감을 불식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해성사’에 비견될 만하다.
‘고해성사’가 서양적 맥락의 해석이라면 제임슨이 놓치고 있는 것은 중국적 맥락의 의미다. 이 맥락에서 손을 씻다, 즉 ‘세수(洗手)’는 ‘손을 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협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금분세수(金盆洗手)’, 즉 ‘황금 대야에 손을 씻는 일’은 강호에서 퇴출(退出)하는 것을 상징한다.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서 의사의 손 씻는 동작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퇴출을 연상하게 된다. 가정에서의 퇴출, 직장에서의 퇴출, 나아가 인생에서의 퇴출.
4. 도시 폭력의 우연성과 익명성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는 폭력의 극단인 살인, 자살, 피살 등의 죽음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도 살인은 두드러진 모티프로 보인다. 『타이베이 스토리』에서 아룽(阿隆)의 죽음, 『구링제 소년 살인사건』에서 하니의 피살과 샤오쓰의 살인, 『마작』에서 훙위가 추(邱)사장을 죽이며 『하나 그리고 둘』에서도 리리의 남자 친구가 영어교사를 죽인다. 이 글의 분석 대상인 『위험한 사람들』에서 두 가지 결말의 하나로 제시되는 의사의 살인도 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이들 살인 사건에서 공통되는 것은 교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위험한 사람들의 폭력이다. 그 폭력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노지만, 그 분노의 근원은 불분명하다.
『위험한 사람들』초입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러나 서로 인지하지 못했던 혼혈소녀와 의사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폭력 관계로 바뀐다. 먼저 혼혈소녀가 의사를 파멸에 몰아넣었고 의사는 복수를 위해 혼혈소녀를 호텔로 데려간다. 이 지점에서 폭력은 양가성을 가지게 된다. 이글턴에 의하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이글턴 2007, 13)했다고 하는데,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파괴적인 것과 죽음을 불러오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가운데 창조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가 생성되기 마련이다. 전자가 ‘테러리즘’이라면 후자는 ‘이상적 도덕주의’라 할 수 있다. 후자는 전자에 저항하지만 그 방식을 배운다는 점에서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도덕적 이상주의는 그것이 반대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괴물스런 패러디이다.” 『위험한 사람들』에서 혼혈소녀가 전자를, 의사가 후자를 상징한다. 결국 의사는 자신을 파멸에 빠뜨린 혼혈소녀의 폭력을 응징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려) 한다.
아마도 감독은 후기 자본주의 시기의 대도시에서는 원인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죽음/폭력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영화 첫 장면의 총격과 쓰러진 남자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스저장탱크, 사이렌 소리, 개 짖는 소리 등 반복되는 몇 개의 기표는 우리에게 폭발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그 외에도 몇 차례 등장하는 호텔은 전지구화의 기표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의 어느 도시를 가도 표준화된 그러므로 익명의 호텔에 머물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곳은 폭력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에드워드 양은 영화에서 ‘중첩’을 많이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육교 장면’은 모르는 사람들이 마주치는 장면을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연계 촬영했다. 피사자들은 상호 아무런 연계가 없지만 카메라에 찍힌 사람들은 연계를 가지게 되고, 현실은 우연에 의해 상호 위해를 가하게 될 수도 있다. 사진사의 여자 친구는 사진사가 떠나자 자살을 시도하는데, 병원에 실려 갈 때 나오는 목소리는 혼혈소녀의 장난전화의 그것이다. 또한 결말 부분에서 경찰 팀장이 호텔 방문을 박차는 소리는 의사가 자살하는 권총소리와 중첩된다. 혼혈소녀의 어머니가 추억의 팝송을 듣다가 침대에 누워있는 딸을 어루만지는 장면의 배경음악이 흐르다가, 사진사의 여자 친구는 혼혈소녀의 사진을 보고 사진사와 다투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아마도 혼혈소녀의 어머니도 미국인 애인과 그렇게 사소한 일로 다투고 헤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후기 자본주의 대도시에서는 폭력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 의해 우연하게 발생하고 있다. 도시인은 이런 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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