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인물
비다 더튼 스커더(Vida Dutton Scudder 1861-1954)
- 새로운 세상을 꿈꾼 여성
비다 더튼 스커더는 재주 많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여러 역할을 해낸 인물인데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선 보스톤 웰리슬리(Wellesley)대학에서 41년간 봉직한 명망 있는 여교수입니다.
그 다음, 사회변화를 위해 꾸준히 일한 사회개혁가입니다.
마지막으로 문학비평, 사회경제적 논설, 소설, 전기 및 신앙적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쉴새없이 글을 토해낸 열성적인 작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역할 혹은 소명의 기반, 그 모든 일들을 하나로 꿰는 줄은 스커더의 신앙심이었습니다.
비다 스커더는 부자집 딸로 태어났습니다.
양친이 모두 보스톤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입니다.
인도 선교사였던 아버지는 비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서 홍수에 휩쓸리는 사고로 죽고 맙니다.
그래도 재산이 있었던 덕에 비다 스커더는 스미스대학이라는 좋은 학교도 나오고 어머니와 유럽여행도 다니고 합니다.
1887년부터는 웰리슬리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영어서신에 드러난 사회적 이상"이라는 과목은 개설된 이래 큰 인기를 끌어 스커더는 명 강의 교수로 이름을 높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고 모자랄 것 없는 생활을 하는데도 스커더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습니다.
훗날 1937년의 자서전에서 이때를 회고하며 스커더는 "내 날개가 창살에 부닥치고 있었으니 내가 속한 계급의 관습과 관념이라는 창살이었다"고 적습니다.
"폐쇄된 정원, 어쩌면 온실이라 할 곳에서 나는 우아한 행동거지와 좋은 음식, 안락함과 안전, 고상한 취미에 갇혀 있었다.
나는 향긋한 그 세계가 좋았다.
하지만 질식할 것만 같은 때도 있었다."
스커더에게 남과 함께 나눌 수 없는 특권이란 "막을 수 없는 부식"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커더는 영혼이 부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웰리슬리대학 직영 복지관을 뉴욕과 보스톤, 필라델피아에 세우고 학생들이 방학이면 와서 지내면서 배운 것을 빈민들과 나누고 또 빈민들에게 배우게끔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해서 미국 전역으로 퍼집니다. 그리고 스커더 자신도 방학이나 안식년이면 보스톤에 세운 데니슨 하우스에서 줄곧 지냅니다.
이후 사회개혁가로서 스커더 활동의 중심지는 이 데니슨 하우스가 됩니다.
이렇게 빈민들과 접하면서 스커더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가치들을 재고하게 됩니다.
스커더는 사람이 빚지지 말고 살아야 하며 행여 빚을 지면 꼭 갚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자선을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스커더가 빈민들을 접해보니 어느 계층보다 인내할 줄 알고 상냥하며 친절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스커더를 겸손하게 했고 기존의 가치관에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양심이라는 게 고작 자선이나 베푸는 것일까?
그런 걸로 사회적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을까?
나 같은 교수가 있는 돈 갖고 하는 일 말고 그 돈이 어떻게 생기게 되는지 따지는 것도 신앙적 양심의 표현 아닐까?
1894년 웨리슬리 대학은 건물도 신축할 겸 기부금을 모읍니다.
이때 록펠러 가문이 거금을 학교에 기부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스커더와 몇몇 교수들은 옳지 않은 경영과 노동착취로 모은 돈을 학교가 받아서는 안 된다는 운동을 벌여 학교 행정자들과 사이가 벌어집니다.
오늘날엔 별로 새롭지 않지만 노동문제가 그리스도교 신앙양심과 결부된다는 것을 발언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가 비다 스커더였습니다.
1912년 매사츄세스에서 파업이 일어났을 때 스커더는 “그렇게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면서 옷감이 만들어지는 한 나는 절대 모직 옷을 입지 않겠다”는 발언을 합니다.
이 발언은 미국 전역에 보도되고 그렇잖아도 학교 운영진과 사이가 좋지 않던 스커더는 더욱 거센 교수직 사임 압력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때쯤엔 사회문제를 확고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스커더는 눈 하나 깜짝 않습니다.
스커더가 이런저런 사회주의 운동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20대였던 1880년대부터지만 정작 사회당에 공식으로 입당하는 것은 1911년 즉 50세 되던 해의 일입니다.
한편으로 미국성공회 내에 사회를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을 목적으로 ‘교회 사회주의 리그’(the Church Socialist League)라는 것을 결성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12년에는 「사회주의와 품성」(Socialism and Character)라는 책을 내어 사회정의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계를 말하는데 스커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책에서 스커더는 그리스도인이 가난에 대해 보이는 세 가지 반응을 듭니다.
하나는 빈민에게 직접 돈을 쥐어주는 자선행위고 다른 하나는 빈민을 위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애초에 가난을 낳는 사회구조를 변혁하려는 행위를 꼽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앞의 둘이 별반 효과가 없음을 드러내므로 구조변혁을 위해 일하는 것이 옳다고 스커더는 씁니다.
스커더는 경제결정론(economic determinism)과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도 인간이해의 중요한 두 원리로 봅니다.
이는 데니슨 하우스에서 경험해 본 바 빈민여성들에게는 비록 저임금, 긴 노동시간이라도 그 열악한 경제조건이 소위 빈민 활동보다 더 영향력이 크더라는 자각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당연한 결론이지만 경제조건에서 비롯된 “우리 대 그들”이라는 분리된 계급의식이 인간세상을 갈라놓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사회질서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데 이때 스커더가 꿈꾼 세상이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임금을 지불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사랑과 자비의 관계를 맺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스커더는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사람이 내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따르지 않으면 사회질서를 바꿔도 이전 못지않게, 아니 더 나쁜 모습으로 타락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당시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스커더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내적변화가 외적변화와 하나여야 한다고 본 탓입니다.
스커더가 보기에 그리스도교는 세상 그 어느 종교보다도 새로운 세상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육신’(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삶과 제도, 일에 들어오셨다는 가르침의 의미로)과 ‘속죄’(하느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인간이 자기중심성이 아닌 자기비움으로 살아야 할 것을 드러내셨다는 의미로)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커더는 훗날 자서전에서 “내가 사회주의자로서 가졌던 확신은 궁극적으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적습니다.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과 신앙인이 되는 것이 스커더에게는 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시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스커더가 이해했던 것처럼 경제결정론과 계급의식을 골자로 하는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의 사회주의였습니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만 해도 스커더는 공산주의 실험에 대해 큰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교회가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한편 스커더가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십자가 옆에 붉은 공산당 깃발을 걸어둘 정도로 마음의 응원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소련 공산주의가 무자비한 체제임이 드러나자 스커더는 아, 이게 아니구나, 역시 그리스도교적 기초라 할 무엇, 사람을 내적으로 변화케 할 기반이 부족한 탓이로구나, 하며 공산주의 실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합니다.
말년으로 갈수록 스커더는 비폭력 평화주의자가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스커더의 신앙은 성인이 되어 수도원 영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더욱 깊어집니다.
1889년 스커더는 성가수도원 친구회(the Companions of the Holy Cross)에 가입하는데 이 단체는 미국성공회 여성들이 수도원 안에서 살지는 않지만 수도생활의 규칙을 따르며 정기적으로 피정을 하고 세상에서는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일하는 신앙단체입니다.
죽을 때까지 스커더는 이 친구회 회원으로 수덕생활의 규칙을 갖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한편 1901년 과로로 병이 생겨 2년 간 강의를 중단하고 이탈리아에 갔다가 두 명의 옛 성인을 알게 되는데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와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입니다.
이 둘에 매료된 스커더는 이때부터 이 두 성인이 “자신의 영적 안내자로서 여생을 이끌어 주었다”고 자서전에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성인에 관한 소설 및 연구 서적을 쓰기도 합니다.
프란시스를 연구하면 할수록 이 13세기 성인의 단순한 삶이 스커더를 사로잡습니다.
자기 유산을 포기하고 가난을 끌어안은 이 사람. 오늘날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사적소유권에 대해 성인의 삶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프란시스는 어려움과 좌절 속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자신 앞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환시를 보며 기쁨 속에 임종합니다.
신실하게 산다는 것, 인생의 승리와 패배란 또 무엇일까?
이후 프란시스 수도회가 줄곧 겪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은 또 무엇을 말해주나?
시에나의 카타리나가 14세기 유럽사회를 향해 품은 꿈은 20세기 미국을 향해 품은 스커더의 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카타리나의 희망과는 달리 유럽은 전쟁과 물질적 애착, 권력다툼으로 물듭니다.
그런데도 카타리는 제도교회에 한결 같은 충성을 보입니다.
스커더는 카타리나 성인에 대해 쓰면서 “자신이 낳은 가장 거룩한 이들을 또한 십자가에 못 박기 일쑤인 교회를 통해 모순과 생명을 놀랍게 드러낸 인물”이라고 적습니다.
프란시스도 그렇지만 카타리나 역시 스커더가 품은 의문 즉 인생의 승리와 패배란 무엇이고 신실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게 하는 성인이었던 것입니다.
비다 스커더의 가장 매력적인 글은 모든 짐을 벗어던진 은퇴시기에 나온다고 하지요.
91세의 나이에 쓴 마지막 책 마지막 문단은 이러합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침묵에 들어간다.
나를 기다리는 영원함, 그 하늘나라, 사랑이 통치하는 곳, 모든 것을 이기고 평화로운 거기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가?
아직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가차 없이 나를 호출한다면 들어야 하겠지.”
그 2년 뒤 1954년 10월 9일 스커더는 매사츄세스 웰리슬리의 자택에서 눈을 감습니다.
성육신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성공회 영성, 사회적 이념과 원리가 뿌리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 사고를 근간으로 하여 이를 통합하는 풍모, 개인의 신앙생활을 수도원적 수덕생활의 규칙으로 담으면서 교수, 작가, 사회개혁가로서 산 스커더의 삶이 무척 매력 있습니다.
천주교가 도로시 데이를 얘기한다면 우리 성공회에는 비다 더튼 스커더라는 걸출한 여성이 있습니다.
이주엽 신부 (프란시스, 분당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