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무엇인가
임 어 당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인생의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자신의 즐거움, 가정생활의 즐거움, 나무 꽃, 구름, 시내, 폭포 그 밖의 삼라만상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또 어떤 형태의 마음의 교류, 시가, 미술, 사색, 우정, 유쾌란 대화, 독서의 즐거움 등이 그것이다. 맛있는 음식, 유쾌한 모임, 가족의 단란, 아름다운 봄날 소풍 등의 즐거움처럼 분명한 것도 있고, 시가, 미술, 자색의 즐거움처럼 그다지 분명치 않은 것도 있다.
이들 두 부류의 즐거움을 물질적인 것이라든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부르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이 구별을 믿지 않으며, 그리고 이렇게 분류하려고 생각할 적마다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남녀노소의 유쾌한 소풍 모습 등을 보고, 그들의 줄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지 구별할 수 있겠는가? 한 아이는 풀숲 위에서 깡총거리고, 다른 아이는 들국화를 따서 화환을 만들며 놀고 있고, 어머니는 한 조각의 샌드위치를 들고 있고, 삼촌은 잘 익은 사과를 먹고 있으며, 아버지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풀 위에 누워 있고, 할아버지는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다. 누군가가 축음기를 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멀리서는 음악이나 물소리가 아득히 들려 오기도 한다.
이러한 즐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 것이겠는가? 샌드위치를 먹는 즐거움과, 우리가 시정(詩情)이라고 부르는 경치를 감상하는 즐거움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음악의 즐거움이, 물질적이라 일컬어지는 파이프 취미보다 고급스런 즐거움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물질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구별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며, 그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기도 하거니와 별로 신통치 못한 사고방식처럼 생각된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엄밀히 구별하고, 참된 즐거움을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음미하지 않는 그릇된 철학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내 주장이 너무 독단적인 것일까? 또는 인생의 본래 목적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함에 있어 논점의 중심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생활의 목표는 그 참된 즐거움에 있다고 말해왔다. 사실이 그러니까 그렇다는 것뿐이다. 오히려 나는 '목표'나 '목적'이라는 말을 쓰기를 주저한다. 참된 즐거움을 취지로 하는 인생의 목표나 목적 등은, 인생에 대한 인간 본래의 태도가 어떠한가라는 그런 의식적 목적이 아니다. '목적'이라는 말은 공부나 노력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당면하는 문제는 이제부터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5, 60년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 발견되도록 인생을 규정해 나가자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과 같으며, 광대한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생의 신비적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내려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는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비하는 철학자들은, 처음부터 인생에는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고 독단하고 나서기 때문에 논리가 일목요연하지 않다.
서구의 사상가들이 너무나 맹렬히 파고든 이 문제가 오늘날에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신학의 영향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설계니 목적이니 하는 것을 지나치게 가정한다. 사람들이 이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 노력도 하고 논쟁도 벌이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같은 문제가 매우 헛되며 불필요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생에 목적이나 설계가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토록 난해하고 막연하며, 귀찮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두 가지이다. 즉, 신이 인간을 위해서 정한 신성한 목적 아니면, 인간이 자기에 대하여 정한 인간적인 목적 중 하나이다. 전자에 관한 한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의 배려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상상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능으로써 신의 지능을 추측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흔히 이 같은 이론의 최종 결과는, 신을 우리 군대의 기수로 삼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맹목적 애국자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으로 후자에 있어서 논점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것은 아니다. 즉, 실제 문제이지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것에 대해서라면 누구든 자기의 사고방식이나 가치판단을 들고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항상 논쟁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가치판단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너무 철학적이 아니고 좀더 실제적이면 족하다. 나는 인생에는 반드시 목적이나 의의가 있어야만 한다는 따위의 억측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월트 휘트먼도 말한다.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아마도 아직 수십 년이나 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해지고, 두 가지의 다른 해답이 나오지 않고 오직 한 가지만이 있을 따름이다. 즉, 인생을 즐기는 것 외엔 인생에 어떤 목적이 있는가. 모든 이교도 철학자에게는 커다란 문제인 이 행복론을 기묘하게도 기독교 사상가들은 등한시하고 있다.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큰 문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참혹한 말이지만 인류의 '구제'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침몰중인 배 안의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꼼짝없이 최후의 운명이라거나,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가를 생각하는 심정이다. '망해가는 그리스와 로마의 마지막 탄식'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기독교에는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구제라는 문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받아 이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하는 문제 속에서는 망각되어 있다.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은 생각하면서도 구제라는 것에 대해 왜 그토록 신경을 써야만 하는 것인가.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제라는 것에 너무도 열중하여 인생의 행복이라는 걸 별로 생각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그들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그저 막연히 천국이 있다는 것뿐이며, 인간이 거기서 무얼 하며 천국에 가면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성가소리가 들리고 백의의 천사가 날아다니고 있다는 극히 막연한 소리를 하는 데 불과하다.
그런데 그중 마호메트만은, 좋은 술과 과일이 가득하고, 검은 머리에 큰 눈을 한 정열적인 처녀들이 놀고 있는 천국의 행복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것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천국이라는 것이 좀더 분명하여 확신이 서게 되지 않는 한, 이 지상의 생활에 대한 것까지 잊어버리고 천국에 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누군가가 "내일의 씨암탉보다는 오늘의 계란"이라고 말했다.
여름휴가 계획을 세울 때 적어도 우리는 가려는 곳에 대해 이모저모를 알아보게 된다. 이때 관광 안내소가 전혀 아는 것이 없다면 싱겁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아무 곳에도 가지 말고 가만히 있는 편히 낫다.
진보와 노력을 믿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천국에도 진보와 노력이 있다고 믿으리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우리는 천국에서까지 분투 노력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인간은 이미 완전한 존재인데, 어떻게 그 이상 노력하고 진보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천국에서는 그저 무위도식하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천국생활을 준비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무위도식하는 법을 배워 두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만일 우리가 한 우주관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면, 모름지기 자아를 잊고 우주관을 인생에 한정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좀더 널리 생각하고, 우리의 생각 속에 바위나 나무나 동물 등 우주만물의 의의까지도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사물에는 일정한 짜임이라는 것이 있다(그러나 이 말은 내가 몹시 싫어하는 목표나 목적이라는 말과는 뜻이 다르다). 이 말은 자연과 사물에는 하나의 규범이 있음을 의미하며, 궁극론까지는 못 되더라도 이 온 우주에 대한 어떤 견해에 도달하고, 그 후에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를 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연과 자연 사이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은 자연과 분리시킬 수 없으며,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격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꾀하여 단번에 결론에 도달하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천문학ㆍ지리학ㆍ생물학ㆍ역사 등은 모두 우리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여 분명한 사고방식을 안출(案出)시켜 줄 것이다. 조화의 목적을 이처럼 크게 생각한다면 인간의 위치는 다소 빈약해지겠지만, 그런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위치가 있으므로 주위의 자연과 조화 있는 생활을 한다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해 실질적으로 분별 있는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
린위탕(林語堂: 임어당, 1895년 ~ 1976년)
중국의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
1930년대에 사회 풍자를 주로 다루고, 서구식 저널리즘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어 잡지를 여러 권 창간했다. 문학의 역할에 대한 중국공산당과의 논쟁이 유명한데, 중국공산당의 문학 비평가들은 순수 선전과 사회 교육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자기표현으로서의 문학을 지지했다. 중국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앙을 버리고 영어교수가 되었다. 하버드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진보된 학문을 공부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영어잡지의 편집자로 일했다. 1932년 <논어>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당시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유형의 서구식 풍자잡지였다. 린위탕은 <내 나라 내 민족> 등 수많은 영문 저서를 출판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중국에 대한 권위 있는 교과서로 간주되었다. 뉴욕으로 건너가 <북경호일>, <생활의 발견>, <폭풍 속의 나뭇잎> 등을 썼으며, <중국 명작 단편집>을 비롯해 중국 역사와 철학에 대한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