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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리뷰
초현실적 가상 언어와 추상적 조형 언어
권성훈(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심연에의 정서가 격정적으로 내재 된 시는 가장 내밀한 자신 존재의 무의식에서 시작된다. 무의식에 저항하는 이 같은 시편은 가상과 추상을 억압하지 않고 대상화한다. 거기서 작품을 제작하는데 상상으로 탐색하며 언어의 세계로 견인한다. 유기적인 무의식을 통과하고 언어로 복원하는 세계는 대상의 변화와 역동성이 깃들여 있으며 비정형성의 구문으로 구축된다. 한 편의 시는 무의식에 내재된 시적 형식을 통하여 전개된 감정의 결정체로 나타난다. 이처럼 시인은 무의식의 정신적 활동의 주체이면서 대상자이며 그것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존재의 근원을 살피면서 세계정신의 영역을 파생시키면서.
이러한 시작은 무의식으로 산출 불가능하기에 의식적으로 사물들의 이미지를 교환시킨다. 오로지 무의식은 시인 안에서만 존재하는 분리할 수 없는 영역일 뿐. 이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일상성에서 유사한 소재를 교차시키는데 흔히 상징과 비유와 같은 문학에서의 수사가 된다. 일상성은 삶을 위한 무대일 뿐만 아니라 창작을 위한 삶의 영역이다. 시인의 권역은 자연적인 것과 동시에 감성적인 것, 체험과 동시에 무의식과 의식의 전반적인 위치를 통해서 사유에 관여하는 것에 있다.
이번 허형만과 윤이산의 신작 시편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달시킨 사유의 무의식이다. 그것은 무의식의 특수성을 세계로 환원시키는 데 있다. 이 사유는 시인은 물론 세계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거기에는 의식이라는 부분과 무의식이라는 무한대의 영역이 편철되어 있다. 무의식을 바다로 비유한 프로이트는 의식을 작은 섬으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언어는 섬이고, 시인의 사유는 바다이기 때문에 무의식에서 건져 올린 ‘사유의 바다’는 무한대로 확장되고 성장한다. 그러한 시작 가운데서 삶의 근원을 스스로 발견하게 만든다. “내 적인 삶이란 단순히 정신적인 삶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무의식이라는 기이하고 거대한 영역까지 포함하며 정신 활동으로써 그 원천을 찾아내는 일이다”여기서 원천이란 시인의 무의식이 생성해 내는 생명에의 근원을 말한다. 이를 위해 시인은 외적 세계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내적 사유의 테로 시선을 향한다. 그것은 시인 안의 꿈과 같은 무의식적인 현상으로 표출되는 것.
허형만의 「사랑의 방식」에서 “누워서 책을 보는데/베개가 졸음을 견디지 못해/나의 목을 껴안고/스르르 잠의 깊이에 빠져든다”에서 누워서 책을 보는 행위는 외부 활동이면서 체험적 사실이다. 또한 쏟아지는 졸음은 본능이면서 무의식이다. 이 무의식은 베개를 껴안고 꿈이라는 ‘은하’로 항해하는 ‘사랑의 부유물’이 된다. 사랑의 부유물은 사랑의 방식으로 통하고 ‘포옹의 건너편’에는 바로 ‘눈 뜬 꿈’이 존재한다. 누구나 잠을 자는 동안 무의식 세계로 나가며 의식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무의식은 깨어서 활동한다. 현실이 의식의 권역이라면 꿈은 무의식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윤이산의 「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의 경우 역시 “당신을 읽다가/한쪽 귀퉁이를 접어둔다”라는 독서 행위로 시작된다. 이것은 의식의 영역이면서 자신을 내려놓는 “나를 당신에게 걸쳐둔 채” 무의식으로 돌입한다. 이로써 나는 의식의 내가 아니라 횡단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된다. 마치 자아라는 나를 지우고 나면 전체 여백이 나를 흡수하듯이. 이같이 수렴된 자아는 무의식적으로 ‘오늘도 당신의 한 귀퉁이’가 된다. 게다가 무의식이 “가끔 당신을 덜어다 쓰기도 하는데/당신이 나를 얼마나 깊이 물들여놓았는지/내가 당신 행세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돌아와 또 꿈을 꾸면서” 무의식 “당신은 내게 너무 아득하고/나는 당신을 해독하는데 턱없이 서툴고”라는 사유의 바다에서 길을 잃는다.
이번 신작들은 시인들이 ‘사유의 바다’를 찾아가는 ‘무의식의 여정’으로 배여 있다. 현현된 ‘꿈’ 속에서 보이는 무의식의 사유는 자신 내부세계에서 들려주는 목소리다. 그것은 조금씩 심연 깊이 자리 잡은 무의식 세계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시인의 감각과 이성적 작용으로 지배되는, 의식의 공간이 아닌 무의식의 시간이다. 언어의 바다에서 사유하는 미지의 세계는 인식의 작용이 미치지 못하는 시공을 확대하고 조명하여 보여준다.
그것은 시인의 삶이나 경험에서 생성되는 자기의 망각이며 본능의 억압이다. 그러나 시라는 언어의 진화과정에서 생겨난 시적 유산으로 소급된다. 이러한 언어들은 모든 주체가 되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인과 집단적 무의식이 작용한다. 시인의 무의식은 개인의 무의식으로서 자신 삶의 체험 속에서 어떤 것들이 억제된 것이지만 집단적 무의식은 모든 인간 정신의 본능적 힘의 원천이다. 이를테면 시는 흩어진 체험에서 얻어진 잉여물이다. 체험은 개인적 무의식이고, 잉여물은 세계라는 집단적 무의식에서 포획된 것이다. 이를 감각적으로 유형화하고 구조적으로 범주화한 것이 사유의 원천이 된다. 여기서 시인들은 독특한 표현 기법들을 발휘하는데 ‘초현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허형만과 윤이산의 시를 통해 사유의 원천에 관여하는 초현실적인 표현과 추상적인 기법을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허형만의 시는 초현실적인 것으로 의식적인 사유가 아닌 무의식인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실제의 가시적 현상과 결합하여 나타난다. 그것은 새로운 환상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초현실적인 가상 언어’로 환원된다. 반면 윤이산의 시는 추상적인 것으로 외적 조건이 아닌 내적 필요성에 의해 자신만의 언어를 발견하다. 무의식 세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시인 내면세계와 감정을 ‘추상적 조형 언어’로서 빚어내고 있다.
허형만―초현실적인 가상 언어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세계의 가시적인 현상과 무의식적인 현상을 포함하여 현상세계와 가상 세계가 일치하는 초월적인 실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인간 실존을 구현하는 형식으로서 초현실주의의 정신적인 본질이다 구체적으로 초현실주의는 내면세계인 잠재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자동기술법을 발견해냈다. 무의식 상태에서 의식과 현실 사이에서 가동되는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에 있어 중요한 부분으로 이어진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의 세계를 대상화하는 작업이며 그러한 무의식적인 세계의 탐구가 바로 허형만의 초현실적인 가상 언어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아침 일곱 시
경로석에서 나이 든 노인이
졸고 있다
희미한 차창이 노인의
배경이 되어
나른하게 함께 흔들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침묵만이 꿈결처럼
보글보글 부풀어 오르는
아침 일곱 시
- 「아침 일곱 시」 전문
이 시는 ‘아침 일곱시’ 경로당에서 졸고 있는 노인이 시적 소재다. 오전 7시 잠이 들깬 상태로 졸고 있는 ‘경로석’에서 노인은 ‘희미한 차창’ 밖에서 보이는 현실의 ‘배경’이 된다. 이 배경은 노인의 잠재의식을 초월적으로 드러내면서 현실과 가상 세계 사이를 탐구한다. 희미한 무의식의 상태로 자동기술 되는 언어는 “나른하게 함께 흔들리고/사람과/사람 사이에서/침묵만이 꿈결처럼/보글보글 부풀어 오르는” 것으로 수면 상태에서 언어화된 것이다.
역시「나는 잘 놀랜다」에서도 화자가 “무념무상/멍 때리고 있을 때” 시가 시작된다. 그것은 시가 무의식적으로 다가와 언어로 기술되듯이 꺼질 듯 말 듯 “바람이 촛불을 건드리듯/시가 살며시 내 곁에 다가오면/나는 깜짝 놀랜다”면서. 허형만의 초현실적인 가상 언어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침묵이리라”(「아, 가을이 왔다」) 시인에게 침묵은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가상 언어로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놓인 현실을 실재를 초월하는 초현실이다. 이 가상 언어인 “침묵이면 그 자리 내 시가 씨앗을 품으리라”고 말한다. 이로써 현실의 공간을 넘어서 “목성의 정기를 받고 자란다는/쑥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받는”(「쑥차를 마시며」) 그의 시어들의 공급의 원천은 ‘목성’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정기’라는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그 정기를 받은 ‘쑥차’를 마시는 시인은 “내 시의 언어들도/목성의 정열과 야성을 타고난 쑥”이 된다. 이때 자신의 체온을 버리고 오직 ‘흙의 순결과 체온’을 음미하는 시인은 쑥이 되고, 쑥은 시인이 된다. 이 가운데 쑥도 시인도 초월한 것으로 ‘가상 언어’는 “은은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기를 희망”하는 순도 높은 ‘한편 시’로 우려진다.
윤이산―추상적 조형 언어
구체의 반개념이라고 할 수는 추상은 막연한 것이나 비구체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추상표현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집약적으로 형태화한 표현이며 예술 세계의 근간을 이룬다. 윤이산의 시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탐구된 인간의 감정과 표현양식으로서 추상적 조형 언어로 나타난다. 그녀의 추상적 조형 언어는 “무슨, 개 하품 뜯는 소리야”(「슬픔은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와 같이 외부의 현실적인 구상을 외면하며 추상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가능한 언어로 등장한다. 이는 “슬픔의 반대말이 뭐야”라고 하는 비의식과 충돌하면서 “지금껏 슬픔의 반대를 일러준 어른들의 말은/죄다 틀렸어”라는 모순된 세계에 대한 역설을 무의식적으로 함의한다.
슬픔의 반대말이 낮잠이라면 어때
소풍이라도 상관없지 아무려나
슬픔의 반대말이 슬픔을 다 덮는 것도 아닌데
라면을 끓이려 올려놓은 냄비에서
따글따글 물숨이 솟구치네 바짝 타들어가던
목구녕이 누글누글해지네
슬픔의 반대말은 아무래도
목구녕 하나 뎁히는 일일지도
- 「슬픔은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부분
이 시는 그동안 우리가 학습했던 일반화된 인식을 전복시키는 데 있다. 그러면서 행복과 불행이라는 감정 사이에 놓인 획일화된 인식이 아닌 수많은 보편적 의식을 무의식 안에서 추적하게 만든다. 막연하게 학습된 구상성을 상상력이라는 추상성으로 교환시킨다. 그것은 “슬픔의 반대말이 낮잠이라면 어때”에서 “소풍이라도 상관없지 아무려나” 등으로 슬픔을 ‘낮잠’이나 ‘소풍’으로 추상적으로 전치시키면서 조형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혼자 라면을 먹고 있는 삶의 외로움을 “목구녕 하나 뎁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슬픔의 이미지를 통해 더 깊게 각인시키고 있다. 슬픔보다 감도 높은 무의식의 언어로 ‘서정적 사유’를 불러온다.
그녀의 추상적 조형 언어는 “여러 개 줄로 기계장치에 몸을 옭아맨 무의식들”(「회回」)로서 “밤이면 더 길어지는 복도”에서도 만날 수 있다. “복도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 같고/거기가 죽음이 앉는 자리 같고/누군가 복도를 붙잡아 세우고 흐느끼는 소리”를 방면하는 “기록을 챙겨 들고 정기적으로 점검 다니는 필기구들”로 현현된다. 분명 죽음은 구상적인 삶보다 추상적으로 “죽고도 복도로 안 나가고 버티는 죽음”을 기록하는 것이 그녀 시의 자리다. “질주하는 차들이/다리 넷의 비명을 깔아뭉개고/멀어져 가는/저물녘”(「면목 없다」) 개들의 죽음을 면목 없이 바라보면서. “이, 개 같은 세상!”이라는 사람의 말을 “이, 인간 같은 것들!”이라는 시인의 말로 치환한다. 이로써 “욕 같은 건 인간 같은 것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개보다 못한 인간은 개보다 못한 개가 된다. 이처럼 일상성의 구상적 영역을 제거하고 역설적으로 돌파하여 무의식적으로 구축하는 추상적인 조형 언어가 윤이산의 시다.
우리는 허형만과 윤이산이 무의식의 한 가운데서 시가 생성되는 것을 보았다. 시인도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사이 언어는 변화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산출하고 있다. 그것은 경험에서 휘발된 것으로 시인의 무의식에 잔존하고 있는 ‘잉여의 음영’이다. 잉여의 음영은 시인의 마음속에 잔상을 만들면서 언어적 소비를 일으키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시편들은 의식의 확장을 통해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막연하게 감지되었던 무의식의 세계는 의식적으로 지각되며 미지에 있던 시인의 사유를 보여준다. 그것은 허형만의 ‘초현실적 가상 언어’와 윤이산의 ‘추상적 조형 언어’를 통해 시적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데 주요한 요소로 쓰인다.
권성훈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 치료의 이론과 실제』, 『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 『정신분석 시인의 얼굴』,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편저 『이렇게 읽었다―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 등이 있다. 고려대 연구교수 역임, 경기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