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을 만나다|김곳-시집속 자선시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외 4편
병든 닭처럼
눈꺼풀이 내려앉는 한낮
금가루 뿌린 바다의 수면이
지하철 유리창에 일렁인다
도심을 질주하는 내내
귓가에 맴도는 수상한 주파수
청각장애인 둘이 마주 앉아
팔랑춤을 춘다
소리가 없는 그들은
손가락이 입술이고 글자다
손가락이 목소리고 노래다
천수 날개 돋는 나비였다가 벌새였다가
현란한 저 손놀림
개망초로 엉겅퀴로 쉴 새 없이 분주한
손가락 춤사위
나비들 짝 춤에 신나서 달리는 지하철 안 소리들이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닌다
수풀 떠들썩한 궁금증이 풀렸다고
허공의 손잡이들 흔들흔들 흔들흔들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수풀떠들썩팔랑손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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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구인 공고
당신도 저의 가족이 맞습니까?
당황스러운 질문에 ‘예’라고 답하셨습니까
방학이 아이에겐 방전 직전의 위기 탈출입니까
기차가 달리는 속도보다 먼저 도착한 풍선은 누구입니까
손가락 걸어본 적 없어도 묵언의 약속이 끈이고
그리움이라는 허기에는 수혈 가능한 핏줄만 희망이 됩니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부재의 대상은 누구의 무지개입니까
아빠 없는 아빠의 집에서 아빠를 기다리면 또다시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는 의문부호를 망치로 두드려
주시겠습니까
저도 당신 가족이 맞습니까?
아이가 자란 왕국은 금지된 항목이 많은 엄마의 집입니까
할아버지할머니삼촌숙모이모이모부까지대가족입니까
문득 없는 엄마, 모든 게 있지만 있어야 할 게 없어도 사랑입니까
앵두나무 아래에서 할머니의 빨간 눈물을 받아먹으면 잘 자랍니까
할아버지는 어디를 들이받을 줄 모르는 고장 난 트럭이 되었습니까
화단에 죽단화는 할아버지를 점령한 것도 아닌데
노란 꽃무덤은 왜 지겹도록 피는 겁니까
집 나간 삼촌이랑 이모는 돌아오는 길이 지겨우셨습니까
마당 귀퉁이에 캉캉 드레스 입은 채 서 있는
가이즈카 향나무에게 신나는 음악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저랑 같이 사실 분 구합니다
욕실에서 혼자 버블건을 발사하던 아이가
카톡 단톡방에 SOS를 날립니다
대가족 방이지만 대답 없는 방
아무 답이 없어도 아이는
계속 버블건을 쏩니다
메시지를 날립니다
★저랑 같이 사실 분 구합니다★
★저랑 같이 사실 분 구합니다★
★저랑 같이 사실 분 구합니다★
★저랑 같이 사실 분
구합니다★
★저랑 같이 사실 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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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마
많은 발을 가졌다는 건
고행 같은 먼 길을 부여받았다는 것
발의 개수가 좀 모자라도
파릇한 풀잎에 숨어
귀뚤귀뚤 노래하면 안 되나
찌르찌르 울어보면 안 되나
바람 든 허깨비 같은
소리 없는 발들만 왜 그리 많은지
마주치면 내가 소름 돋는 발, 발
너무 많은 흔적을 가지고 있다
온몸의 세포들이 받들어 총
하필 많은 것이 발이어서 뛸 수가 없겠다
발의 수만큼 필요한 양말은,
필요한 신발은
이십 사색 수채화 물감 색깔이면 좋겠다
발가락이 없는 발
발톱이 없는 발
뒤꿈치를 세우며 가는 발
신발인지 쉰발인지
지나간 길에 남겨진 간지러운 발자국엔
물 한 방울 없는 슬픔이 묻어난다
발의 흔적 감출 새라곤 없는
부산한 맨발이
오늘도 어느 반지하 장판을 빠져나오다 그만
생사의 건널목이 되고
너무 많은 발을 가진 기차가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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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너는 누구
수많은 자화상에 그날의 날씨를 그려낸 프리다 칼로
못자국마다 흘리는 핏물 가려운 이마를 습관처럼
문지른다
나는 매일 또 다른 자화상을 그린다
수십 년 함께 했던 얼굴 처음 나는 어디 있나
송곳을 세우던 당신의 차가운 심장이
오래된 사소함으로 지워질 때도 되었겠지
현관을 나가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부터
친절한 얼굴이 되고
수시로 다른 각도를 취하는 당신의 볼록렌즈는
몇 개의 얼굴이 될까
색이 다른 알 수 없는 당신에게 보여줄
수많은 나의 얼굴 메뉴를 고른다
취향에 맞는 오늘을 위해 함박웃음을 가진 수국인지
아니면 멜랑꼴리 한 날 맵고 짠 마라탕은 어떤지
순번을 매겨 두고 선택하는 건 희망적이잖아
오늘 나의 취향은 이 얼굴로 클릭할게
졸린 눈을 비비곤 하던 늘 같은 색 개그맨의
확 다른 얼굴
민머리에 두른 커다란 헤드폰은 왕관인지 머리띠인지
열광의 도가니로 불꽃 만개한 축제에
부처도 춤추게 한다는 다른 얼굴
그는 개그맨인가, 스님인가, 아니면 DJ인가,
슬픔을 반죽하고 음악을 풀어놓고
당나귀를 타고 달려요
당신의 얼굴은 몇 개인가요, 문밖을 나서는 그대
지금은 몇 번째 얼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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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 어때
몸속으로, 찢고 꿰매고 보형물이 들어간다
부풀려서라도 당당해지리라
각을 부여잡고,
용감한 자만이 아름다움을 차지할 수 있어
나는 짝짝이 박수라도 쳐 줄게
뽀빠이를 꿈꾸는 몸짱들이 근육을 키운다
바게트처럼 구워진 온몸의 표면에
슈퍼 근육들이 주먹 불끈 쥐고 자리 잡는다
당신의 몸은 풍선처럼 아름답다
세월에 흘러내린 엉덩이가 오늘을 허문다
보여줄 것이 없고 보이는 것도 없으니 나는 잠자리 눈을 달고
세상 구경이나 나서야지
섹시하고 빵빵한 애플 엉덩이
수술받다 죽을 뻔했다는 제시카는
가슴에 탱탱볼까지 두 개나 매달았다
남들의 시선이 칼을 받들 용기를 주었다나
눈에 불을 켠 채 잠자리 눈을 다섯 개나 굴리고 있는 나는
벌써 피곤해진다
바람이 빠질지라도 내일을 미리 볼 필요는 없다
나는 사이보그에 눈을 감는다
지구도 수술을 받는 중인지 화끈 달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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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곳 시인은 1963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문단 활동을 해오다 2012년 시집 『숲으로 가는 길』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국제신문에 ‘시와 그곳’을 연재해왔으며 계간 《부산시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숲으로 가는 길』, 『고래가 사는 집』이 있으며 『수풀떠들썩팔랑나비』는 10년 만에 펴내는 세 번째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