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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58년 향불교 송년회 ②
-대각사(大覺寺) 대각성전(大覺聖殿)에서-
10시 50분 경 법당에 드니 법당에는 사시불공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법당보살 한 분 만
이 스님의 불공에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가만히 보니 사시불공도 끝나가고 축원이 이어졌
습니다. 이윽고 불공이 끝났는데 미소님께서 스님 앞으로 나아가 대각사 순례를 왔는데
여기서 108배를 해도 되느냐고 조심스레 여쭈니 얼마든지 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나아가 108배를 한 후 여기에 모여 앉아 이야기 해도 되느냐고 하니 좋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서 왔느냐고 하시기에 서울에서 왔는데 카페모임에서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법당
보살님께도 인사를 드렸더니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11시 무렵에는 우리만 남았습니다. 도심 속의 사찰인데 아무도 찾아 오는 사람
이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요학교를 열 정도로 포교의 중심지였는데...
목탁을 칠 수 없으니 죽비에 맞춰 삼배를 드리고 108배를 한 다음 축원을 올리고 반야심경
을 독송하고 사홍서원을 하는 순으로 끝맺고자 하였습니다.
우보처 지장보살 본존 석가모니불 좌보처 관세음보살
불법승 삼보님께 삼배를 올렸습니다.
귀의불 양족존 귀의법 이욕존 귀의승 중중존
歸依佛 兩足尊 歸依法 離欲尊 歸依僧 衆中尊
예불대참회문을 가지고 108배를 올렸습니다. -미소님 촬영-
부득이 하나 뿐이기에 제가 소리내어 참회문을 읽고 죽비 1타에 절을 올렸습니다.
대자비로 중생들을 어여삐보사
대희대사 베푸시어 제도하시고
수승하온 지혜덕상 장엄하시니
저희들이 정성다해 예배합니다. (절)
지극한 마음으로 금강상사(金剛上師)깨 예배합니다. -염화님 촬영-
거룩한 붓다ㆍ달마ㆍ상가에 귀의합니다.
여기 법회 사진은 모두 염화님과 미소님께서 번갈아 촬영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며
성문 연각 보살지위 구함 아니요
오직오직 최상승을 의지하옵고
아뇩다라 삼보리심 냄이오이다.
원하오니 시방세계 모든 중생이
모두 함께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절)
지극한 마음으로 온누리에 가득하신 모든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너는 뭐하니?
지극한 마음으로 온누리에 가득하신 모든 가르침에 예배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온누리에 가득하신 모든 선지식께 예배합니다.
지심귀명례 보광불 지심귀명례 보명불..... 지심귀명례 법계장신아미타불
마지막 회향게를 하는 모습입니다.
원하오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없는 진법계에 회향하소서.
이치에도 현상에도 막힘이 없고
불법이고 세간이고 걸림이 없는
삼보님과 삼매인의 공덕바다를
제가 이제 남김 없이 회향하오니
모든 중생 신구의로 지은 업장들
잘못 보고 트집잡과 비방도 하고
나와 법을 집착하여 내던 망견들
생각생각 큰 지혜가 법계에 퍼져
모든 중생 빠짐없이 건져지이다.
허공계가 다하하고 중생 다하고
중생없이 다하고 번뇌 다함은
넓고 크고 가이없고 한량없으니
저희들의 회향도 이러지이다. (108배)
행원 크신 보현보살 보현보살님
보현보살 마하살께 귀의합니다. (반배)
축원 올리는 모습입니다.
축원은 동참 대중과 향불교회원 모든 분들에 대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백우와 묘법님
송년회 동참자와 향불교 회원 축원명단을 보면서...
묘법님은 지긋이 정좌하시고...
참선자 의단독로 염불자 삼매현전 간경자 혜안통투 만사여의원만형통지대원
참선자는 의단이 드러나고, 염불자는 삼매가 나타나며, 간경자는 혜안이 밝아지며
모든 일이 뜻대로 원만 형통하여지이다.
사대강건 육근청정 복덕구족 신무일체 병고액난 심무일체 탐련미혹
四大强健 六根淸淨 福德具足 身無一切 病苦厄難 心無一切 貪戀迷惑
육신은 건강하고 정신은 청정하며 복덕이 구족하옵고
몸에는 일체의 병고 액난이 없기를, 마음엔 일체의 탐욕과 미혹이 없기를 바라옵니다.
일일유천상지경 시미무백해지재 심중소구 소망발원 만사여의원만 형통지대원
日日有天祥之慶 時時無百害之災 心中所求 所望發願 萬事如意圓滿亨通之大願
날마다 경사스러운 좋은 일이 있기를 시시각각 모든 재해 없어지기를 바라오며,
마음 속에 구하는 바 일체 모든 소망 발원이 이뤄지게 하옵시고 만사가 뜻대로 원만형통
하여지이다.
일일입어향불교 학불법이시법향 심전경작 도업항신
日日入於香佛敎 學佛法而施法香 心田耕作 道業恒新
향불교 법우님들이 날마다 향불교에 들어오사 불법을 배우고 법향(法香)을 나누시고
마음밭을 일구어 도업이 언제나 새롭기를 바라옵니다.
다음은 둘러 앉아 대각사는 어떤 절인가 용성 스님은 어떤 분인가 알아보고 있습니다.
이번 송년회를 통하여 도심 속의 사찰 대각사는 어떤 역사를 가졌으며 대각사를 세운 용성
스님은 어떤 스님인가 알아보고자 별지를 마련했습니다.
용성 스님에 대해서는 일찍이 3.1운동 33인 중 한 분으로 알려져 너무나 유명합니다. 만해
스님과 더불어 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자
세히는 이번 기회에 알아보고자 합니다.
대각사에 대한 내용을 염화님이 낭낭하게 낭독하고 계십니다.
대각사에 대해선 송년회 제1탄에 소개한 내용입니다.
대각사에 대한 소개가 끝나고 이어 용성 스님에 대하여 낭독하고 계십니다.
지현아 너도 잘 들어 둬~! ^^
용성 스님에 대하여선 아래에 자세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한 중에 김탁(철학박사) 선생이 용성 스님에 대한 글이 있어 옮겨 적어 봅니
다.
서쪽 벽에 모셔진 용성대선사 진영(龍城大禪師 眞影)
용성선사(龍城禪師 1864-1940)에 대하여
「용성(龍城)선사는 1864년(고종 1년) 음력 5월 8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 백씨(白氏)이며, 아버지는 남현(南賢), 어머니는 밀양 손씨
이다.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용성의 족보상 이름은 형철(亨喆)이고, 속명은 상규(相
奎)였다. (그의 어머니는 휘황찬란한 법의를 입은 스님이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용성을 낳았다고 전한다)
7세 때부터 마을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우던 용성은 어린 나이에도 빼어난 문재를 보였
으며 9세에 이미 '합죽선'이라는 한시를 지을 정도였다. 14세 때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
님의 수기(授記)를 받고 불경을 보기 시작하였고, 결국 가출하여 그가 찾아간 곳이 남원
교룡산 기슭의 덕밀암(德密庵)이었다. 당시 그 절의 주지인 혜월(慧月)스님은 부처님께서
자신의 꿈에 계시하실 때에 범종이 울렸다고 하여 그에게 진종(震鐘)이라는 법명과 함께
남원의 옛 지명인 용성(龍城)을 법호로 내려주었다.
그러나 용성의 첫 번째 출가는 말도 없이 가출한 맏아들을 애타게 찾아 헤매던 부친에 의
해 1년여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불법의 진리를 갈구하는 용성은 16세 때 해인사
극락암으로 재출가하여 화월(華月)스님을 은사로 하고 혜조(慧造)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정식으로 출가하였다.
전국의 명산 고찰과 선지식을 찾아 진리의 길을 찾으러 구도행에 나선 용성은 이듬해 의성
고운사(孤雲寺)의 수월(水月)스님을 찾아가 "나고 죽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일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날로 변합니다. 어떻게 해야 생사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 '나'의 성품
을 볼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수월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먼저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외울 것을 권했다고 한다. 수월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용
성은 대비주를 10만 번 외우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부지런히 외워 9개월에 걸쳐 대비주를
10만 번 외웠다고 전한다.」
용성대선사 진영(龍城大禪師 眞影) -東湖居士 畵-
「그가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서 수련하고 있을 때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에는 모두 근
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일까?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서 오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불현듯 솟아났다. 이 의문을 일념으로 용맹정
진한 지 엿새 만에 의문을 확연히 풀어 첫 깨달음을 얻었다.
이 때의 견도송(見道頌)이
五蘊山中尋牛客 오온산중심우객
獨坐虛堂一輪孤 독좌허당일륜고
方圓長短誰是道 방원장단수시도
一團火炎燒大千 일단화염소대천
오온산 가운데 참마음 찾는 나그네가,
텅 빈 집에 홀로 앉았는데 둥근 법륜이 외롭게 비치네.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은 구별을 뉘라서 도라 이르던가,
한 덩어리 불꽃이 온 세상 번뇌를 태우도다.
라고 전한다.
22세때에는 순천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전등록(傳燈錄)'을 읽다가 문득 세 번째
깨달음을 얻었고, 다시 여러 사찰과 암자를 오가며 치열한 수행 정진을 거듭한 끝에
용성은 1886년 23세 때 마침내 네 번째 깨달음의 희열을 오도송(悟道頌)으로 읊었다.
金烏千秋月 금오천추월
洛東萬里波 낙동만리파
漁舟何處去 어주하처거
依舊宿蘆花 의구숙로화
금오산에는 천년 달이요,
낙동강에는 만리 파도가 치는도다.
고기잡이 배는 어디로 가는고,
갈대밭에서 쉬는 것은 옛날과 같네.
용성이 그의 생애에서 기념비적 명저로 알려진《귀원정종(歸源正宗)》을 집필한 것은
1910년이었다. (이 책은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과 불교의 상대적 우수성을 밝히는
내용으로 1913년 6월 조선선종중앙포교당에서 발간했다)
1912년 49세의 용성은 한국 선종의 뿌리인 임제종(臨濟宗)을 바탕삼아 민족불교의 중
흥과 수호에 앞장서고자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세워진 조선임제종포교당의 개교사장
(開敎師長)을 맡아, 3년간 포교당의 주무인 만해(萬海)선사와 더불어 노력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고, 서울 시내의 신도가
3천여 명에 이르자 이에 힘입은 용성은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大覺寺)를 세워 포교
활동을 강화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의 대표로 만해와 함께
동참한 용성은 왜경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
서 함께 갇힌 기독교지도자들이 한글성경을 읽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용성은,
불경의 한글번역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겠다는 필생의 원력을 세웠다.」
바깥 담장에 설치된 석판화 용성조사
「1921년 3월 출옥한 용성은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불철주야로 번역을 시작
해 이듬해에는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펴냈고, 그 해 9월에는
불교사상의 요체인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정리한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을 출
간하였다.('심조만유론'은 2만여 권이나 반포되어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했을 뿐만 아
니라, 그 후의 불교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22년 사월초파일부터 용성은 불교 대신 대각교(大覺敎)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불
교라는 명칭이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여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라는
의미로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세존'을 '대각'이라고 표현했으며,
'스님'이라는 칭호를 '선생'으로 바꾸어 부르게 했을 정도로 불교의 새로운 이념을 실
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용성은 1924년까지 《신역대장경금강경강의》 《수능엄경선한연의》 《수심
정로》 《팔상록》 《원각경》 《선한문역선문촬요》 《각해일륜》 등의 방대한 분량
의 책을 펴내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1925년부터는 만일참선결사회를 추진했는데, 망월사에서 시작한 이 결사는 통도사로
옮겨 계속되었으며, 결사의 목적은 승려의 취처와 육식으로 대표되는 조선불교의 왜색
화와 타락에 대응하여 순수한 정통성을 이어가려는 것이었다.
한편 용성은 1926년 5월 127명의 승려와 연명으로 승려의 대처(帶妻)와 육식을 법으로
금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범계생활(犯戒生活) 금지]의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
하였다. 그 해 9월에도 같은 취지의 건백서를 제출했지만 조선불교의 일본 불교 예속
을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총독부에서는 이를 묵살하였다.
용성은 1927년 10월에는 80권에 이르는 《조선글 화엄경》의 번역과 간행이라는 기념
비적 업적을 이룩했다. 또 그는 불교의식과 염불을 우리말로 집전하였고, 직접 '왕생
가' '권세가'등의 찬불가를 작사 작곡하여 법의를 입고 법당에서 오르간을 치며 신도
들에게 가르쳤으며, 일요학교를 개설하는 등 현대식 포교방법을 모색했다.
1927년 계율의 파계가 극에 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용성은 마침내 해인사와 범어사
에 있던 자신의 승적을 과감히 버린 다음 대각교를 선언하여 지금까지의 불교와는 인
연을 끊고 새로운 불교로서 대각교(大覺敎)를 주창한다. 근본심성을 자기 스스로 깨치
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깨치게 하여 '자각각타(自覺覺他)' 이의 완성인 원만한 궁극적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이후 그는 만주 용정까지 가서 개간 작업과 함께 교당을 세우고 선사상을 포교하는 등
혁명적인 민중불교의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특히 사원경제의 자립을 위해서는
스님들이 농사짓고 경작하면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도 노동하였다.
이때 용성이 제자 학인들에게 항상 역설하고 교훈한 내용으로 '불교의 생활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지성화'가 전하며, "마음 가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차별현상의 일용
범사와 평등한 본체의 이치에 불공하라<心處存佛 理事佛供>"는 법어가 전한다.
용성은 1940년 음력 2월 23일 저녁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諸行之無常 제행지무상
萬法之俱寂 만법지구적
匏花穿籬出 포화천리출
閑臥麻田上 한와마전상
모든 행이 무상하고,
만법이 고요하도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네.
이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시자여, 대중이여, 그동안 수고했도다. 나는 간다" 라는 말
을 남기고 빙긋이 웃으며 앉아서 입적(入寂)했다.
용성은 불교의 중흥과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던 고승이자 역경(譯經)과 찬불가
작사를 통해 불법을 보다 널리 펼치고자 노력한 포교사였으며, 불교계를 대표하여 3.1 독
립운동에 앞장 선 애국승려였다. 그리고 그는 선의 대중화와 교단의 정화운동에 앞장섰
으며,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장하여 사원경제의 자립화를 도모한 실천불교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한편 용성의 법맥은 동산(東山) - 고암(古庵) - 성철(性徹)로 이어져 용성문중(龍城門中)
또는 범어문중(梵魚門中)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이루어 투철한 수행정신과 실천불교의 대
각사상을 이어받아 정진하는 스님들의 모범을 보였다. -김 탁 <철학박사>-」
법회가 끝나고 기념 사진
좌로부터 각현님, 염화님, 묘법님, 백우, 김지현, 그뒤 도솔님, 길상님입니다.
여기에 비니초님은 가친의 점심수발 등으로 인해 동참하지 못했는데 잠시 후 인사동에서
있을 점심공양에 오기로 했습니다.
염화님 자리에 미소님께서 앉으셨습니다.
다시 한 번!
법회를 마치니 12시 정도 되었습니다. 법당을 찬찬히 살핀 연후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음은 대각사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첫댓글 나무관세음보살()
우리가 108배를 하고 있을 무렵, 청안님은 열심히 일하고 계셨겠지요 _()_
그래도 마음은 여기에 오셨으니 간절히 축원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각사에서 법우님들과 함께한 108배와 축원에 이어 대각사의 내력과 용성스님의 발자취를 살펴본 시간은 참으로 소중하고 뜻 깊었습니다. 백우님 감사합니다. _()_
염화님과 미소님께서 번갈아 법회장면을 담아 주셔서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가 있네요.
그리고 대각사와 용성선사에 대한 설명문을 낭낭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하였습니다.
대각사에서 이런 시간을 가진 것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백우님의 죽비에 맞추어 108배 전 몇번은 빼먹었습니다. 사진찍는다고... _()_
송년법회가 끝나고 기념촬영 꼭 가족사진처럼 보이네요. 뜻깊은 순례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염화님과 미소님께서 제일 바쁘셨습니다. 두 분이 아니었으면 맹숭맹술할 뻔 했죠. ^^ _()_
기념촬영은 가족사진이지요. 향불교가족.
다음엔 많은 분들이 자리를 같이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45년 만에 찿아온 대각사 많이도 변했내요. 불교 첫 입문 할때 엄니 따라서 왔던 기억이 나는데 그땐 허름한 2층 다다미 방 이었는데~~
그당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학생(군종법사 1기생)들 사랑방 이었던 것으로 기억 나내요. 열심히 축원 하여 주신 백우님 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묘법님은 자당의 손을 잡고 곳곳의 절에 많이 다니시면서 불심을 키우셨네요. 저는 한 번도 다닌 적이 없는데...법사 1기라면 권오현법사 권기법사 등등... 그렇군요. _()_
허름했던 곳이 불기 2530년인 1986년에 크게 변모를 했군요. 다만 주차공간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군
대중불교 운동에는 군법사님들의 역활이 무척 컸었죠.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