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2. 독립지사 향산 윤상태와 송석헌(松石軒)[첨운재]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
프롤로그
얼마 전 수성구 주민 30여 명과 달성군으로 역사 탐방을 가는 길이었다. 앞산터널을 빠져나와 달비골 입구에 다 달았을 때 한 회원의 질문이 있었다. “송선생! 오른쪽 숲 사이로 살짝 보이는 저 집이 뭐죠? 어느 날 출근길에서 발견했는데 일반 집은 아닌 것 같아요”. 출근길 차 안에서 그 집을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향토사에 밝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십중팔구 모르고 지나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달비골 초입에 자리한 그 집은 대구 출신 독립지사 향산(香山) 윤상태(尹相泰·1882-1942) 선생의 수택(手澤)이 남아 있는 송석헌[첨운재(瞻雲齋)·세심정(洗心亭)]이다.
대구 대부호 독립지사 향산 윤상태
향산 윤상태는 일제강점기 대구의 3천석 대부호이자 독립지사로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인물이다. 상인동에서 출생한 그는 고령과도 인연이 있다. 부친의 임지였던 고령 성산에 우거(寓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05년 1월 그는 24세 젊은 나이로 거제 군수가 됐다.[이를 연유로 세상에서는 그를 ‘윤 거제 어른’이라 칭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군수직을 사임하고 고령으로 낙향했다. 한일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그는 고령 우곡에 ‘일신(日新)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1915년에는 박상진·서상일·이시영·박영모·홍주일 등과 함께 대구 앞산 안일암[안일사]에서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결성, 최고책임자인 ‘통령’에 선임됐다.
그는 서상일의 태궁상점, 윤한병의 향산상회, 안희제의 백산상회 경영에도 참여했다. 1917년에는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에 가입해 경남 일원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는 독립자금 모금에 전력했다. 1919년에는 유림에서 작성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번역하고 전달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상인동 865번지에 회보당(會輔堂·1920년)과 덕산학교[1921년]를 세워 교육을 통한 항일운동을 지속했으며, 1932년에는 교남학교[현 대륜고] 설립에도 참여했다. 1942년 그는 다시 일경에 체포, 고문으로 같은 해 향년 61세로 졸했다. 그의 손녀인 윤이조 여사[1934년생]는 자서전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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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해인 1942년,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어느 날 할아버지가 안보이셨다. 아무도 할아버지가 어디 가셨는지 말해주지 않았고 어른들의 표정이 무거웠다. 우리도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중략) 밖에서 청지기 아저씨가 할아버지를 업고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업힌 할아버지는 온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께서 무진회사를 거점 삼아 독립자금을 상해로 보낸 것을 조선인 형사 앞잡이가 고발을 해서 일경에 잡혀가셔서 모진 고문을 당하시고 그 고발자에게 무진회사를 넘겨주기로 하고 풀려나신 것이라 했다. 그 후로 우리는 무진회사에 가지 않았다. 그 고발자는 그렇게 해서 잘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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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名)·자(字)·호(號)
옛날 우리네 선비들은 ‘명·자·호’ 세 종류의 호칭을 사용했다. ‘명’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진짜 이름이다. 자는 요즘의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계례 때 빈[賓·큰 어른]이 지어주는 별칭이고, ‘호’는 스스로 짓는 별칭이다. 옛 선비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어도 ‘호’만 알면 상대를 거의 정확하게 판단했다. 호는 스스로 짓는 것이기에 주인의 철학과 삶의 지향점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건물에도 호가 있다. 당(堂)에 붙인 당호, 헌(軒)에 붙인 헌호, 재(齋)에 붙인 재호, 집[宅]에 붙인 택호 등이 그것이다. 이런 당호·헌호도 마찬가지다. 그 집 당호를 보면 그 집 주인의 인물됨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당호·헌호는 그 집 주인의 호로 사용되는 예가 많았다.
자연에 거하다, 송석헌[첨운재·세심정]
달비골 초입 임휴사에서 달비골 방향으로 400m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우측으로 ‘첨운재’ 이정표가 보인다.[송석헌은 2018년까지 세심정으로 편액 되어 있다가 최근 정비 이후 첨운재로 편액 했다] 송석헌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 윤상태 선생이 건립한 것으로 정자·별서(別墅) 성격의 건물이다. 그가 상인동에 회보당·덕산학교를 설립할 즈음, 학교와 멀지 않은 이곳에 정자 한 채를 마련하고 송석헌이라 이름했다. 송석헌은 그의 개인 정자이기도 하지만, 시회(詩會)를 가장한 비밀독립운동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송석헌[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집], 첨운재[구름을 바라보는 집], 세심정[마음을 씻는 집]은 모두 자연에 은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득 산천의 주인이 되었으니 티끌 진 세상 성함과 쇠함에는 관여하지 않으리’로 끝나는 그의 ‘송석헌 원운시’에도 자연에 은거하고자 하는 바람이 잘 나타나 있다.
에필로그
앞서 언급한 손녀 윤이조 여사 자서전에는 여사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송석헌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송석헌 인근에 물레방아가 있었고, 큰 바위 옆 사립문 안쪽에 연못이 딸린 송석헌이 있었다. 정자에는 세심정, 마루에는 송석헌·첨운재 현판이 걸려 있었고, 마당에는 큰 배롱나무 두 그루와 자두나무가 있어 자두를 많이 따먹었다고 한다. 동쪽 툇마루 옆에는 집채만 한 큰 바위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었으며, 정자 아래 계곡에는 복숭아나무가 많았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흘러 멱도 감고 다슬기를 줍기도 했다. 가끔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오셔서 시회를 여셨는데 시회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모임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묘사의 상당 부분이 지금의 송석헌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정자 바로 앞으로 앞산터널이 뻥 뚫렸다는 것만 빼면. 여하튼 숲속에 꼭꼭 숨어 있던 송석헌이 앞산터널 덕분에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