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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여포의 죽음 유 황숙 그리고 황제 폐하 만세!
조조는 마침내 하비성을 접수하고 사로잡은 적장들의 죄를 묻는다.
전날 조조의 간특함 때문에 그를 버리고 여포에게로 갔던 진궁, 조조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떳떳이 죽음을 택한다.
오랏줄에 꽁꽁 묶인 여포는 가련하게도 살려 달라 소리치는데...
하비성으로부터 후성이 적토마를 달려 조조의 진영에 도착했을 때 조조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부장이 그를 급히 깨우자 조조는 휘장을 젖히고 나오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하비성에서 후성이라고 하는 여포의 장수가 항복해 와 승상을 뵙겠다 하옵니다."
조조는 귀가 번쩍 뛰었다.
후성이라면 여포의 장수로 그 이름은 조조도 듣고 있던 터였다.
조조는 지체없이 그를 불러들였다.
후성이 항복해 온다는 것은 크게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를 기화로 하비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조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후성은 조조 앞에 이르자 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투항하게 된 연유를 이야기하고 타고 온 적토마를 바쳤다.
"무엇이, 적토마를?"
조조의 기쁨은 실로 컸다.
후성이 투항해 온 것은 진퇴양난의 어려운 궁지에 몰린 조조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닌가.
거기다가 적토마까지 받고 보니 그 기쁨은 비할 데가 없었다.
탐나던 명마를 얻게 됨은 물론이요,
적토마 없는 여포는 한 쪽 날개를 잃은 독수리에 지나지 않음이 아니던가.
"위속과 송헌, 두 사람이 성 안에서 내응키로 하였습니다.
승상께서 일거에 성을 공격하신다면 문을 열 것입니다.
성 안에 백기가 꽂힐 때를 기다려 공격하십시오."
조조는 더욱 기뻐하며 즉시 격문 수십 장을 써 화살에 달아 하비성 안으로 쏘아 보냈다.
이제 천자의 밝은 조서를 받들어 대장군 조조는 여포를 치려 한다.
만일 대군에 항거하는 자 있으면 그 일족은 모두 주살할 것이다.
그러나 성안에 있는 자, 위로는 장수로부터 아래로는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누구든지 여포를 사로잡거나 목을 바치는 자에게는 높은 벼슬과 상을 내리겠다.
이 방문을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리고 각기 명심하길 바란다.
성 안의 군사들과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한 격문이었다.
새벽녘이 되자 구름은 붉게 물들어 동쪽 하늘로 흐르고 있었다.
격문을 매단 화살이 수없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와 함께 북 소리와 군사들의 함성이 지축을 흔들며 수많은 조조의 군사가 일제히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여포가 요란한 함성에 놀라 두리번거리며 깨어났다.
벌어진 사태에 또 한 번 크게 놀란 여포는 화극을 든 채 황망히 성 안을 뛰어다니며 군사들을 배치시켰다.
"어젯밤에 적토마가 없어졌습니다."
여포는 대뜸 눈을 부릅떴다.
"무엇이?... 적토마가 없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여포는 장수들을 불러 사실을 물어 보왔다.
그제야 후성이 적토마를 훔쳐 동문으로 빠져 나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고함쳤다.
"위속은 물론 적토마를 지키지 못한 장수와 군졸들을 모두 참하리라."
그러나 여포는 당장 조조군을 물리치는 일이 더 급해 위속을 벌할 시간이 없었다.
조조군은 어느 새 만들어 두었는지 수많은 뗏목을 타고 탁류를 건너와 성벽 위를 기어올랐다.
앞쪽의 뗏목에 탄 군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면 뒤쪽의 뗏목에선 수많은 화살을 성 안으로 쏘아댔다.
여포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조조군을 찌르기에 바빴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은 찌르고 또 찔러도 끝이 없었다.
한낮이 지날 무렵에는 양군의 시신에서 흘러내린 피로 성벽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중천에 머무는 한낮이 되자 조조군도 공격에 지쳤는지 군사를 뒤로 물렸다.
꼭두새벽부터 물 한 모금 마실 틈 없이 싸운 여포였다.
조조군의 공격이 뜸한 사이 지친 몸을 잠시 문루에 두고 어느 새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이때 그의 동정을 엿보며 다가오는 한 장수가 있었다.
싸울 동안에도 여포 주위를 맴돌고 있던 송헌이었다.
송헌은 가까이에 있는 군사들을 물리쳐 쉬게 했다.
그런 다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위속에게 눈짓했다.
송헌은 먼저 여포의 화극부터 훔쳐 숨겨 버렸다.
송헌과 위속은 잽싸게 여포의 몸을 밧줄로 두 겹 세 겹으로 묶었다.
여포가 천하장사였지만 송헌과 위속 또한 장수들이었다.
그가 잠든 틈을 타 몸을 결박하니 온몸이 꽁꽁 묶여 버렸다.
여포가 깜짝 놀라 깨어나더니 주위의 군사들을 소리쳐 불렀다.
군사 몇이 달려왔으나 송헌과 위속이 칼을 빼들고 그들을 치려 하니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그때 위속이 심복에게 백기를 흔들게 했다.
위속의 심복이 망루에서 힘껏 백기를 흔들어대니 이것을 보고 있던 조조군이 다시 함성을 지르며 성을 공격했다.
"이미 여포를 사로잡았으니 어서 성 안으로 드시오."
위속이 동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그러나 조조군의 장수 하후연은 그 말이 곧이들리지 않는 듯 말을 멈추고 성 안을 살폈다.
송헌이 그것을 보자 여포의 화극을 그에게 던지며 성문을 활짝 열었다.
하후연이 보니 여포의 방천화극임에 틀림없었다.
그때서야 하후연이 성 안으로 말을 몰았다.
하후연이 성 안으로 말을 몰자 군사들도 밀물처럼 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성 안은 가마솥 끓듯 혼란스러웠다.
대장 여포가 사로잡혔음을 알자 성 안의 군사들은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왕좌왕하다 목이 달아나는 자, 재빨리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여 목숨을 애걸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고순.장요는 이미 싸움이 기운 걸 알고 휘하를 거느리고 서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물이 깊어 성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해 조조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남문에 있던 진궁은 밀려드는 적을 맞아 죽기를 다해 싸웠다.
그러나 조조 휘하의 영장 서황을 만나 그 또한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해가 기울 무렵,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하비성도 완전히 조조의 손안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성의 동쪽과 서쪽 누문에는 조조군의 깃발이 아침 햇살을 가득 받으며 펄럭이고 있었다.
조조는 성 안에 고여 있는 강물이 빠지도록 둑을 다시 막게 하고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다음 주각인 백문루의 누대에 높이 앉아 사로잡힌 1천여 명의 포로들을 끌어오게 했다.
조조의 곁에는 유비가 관우.장비의 시립을 받은 채 앉아 있었다.
첫 번째로 여포가 끌려 나왔다. 7척이 넘는 장대한 기골이었으나 왜소해 보일 만큼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백문루 아래 돌에 꿇어앉히자 밧줄이 심하게 옥죄이는지 조조를 쳐다보며 애원했다.
"이토록 욕되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소?
우선 묶은 밧줄을 조금 느슨하게 해 주시오."
조조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호랑이를 묶을 때는 느슨하게 묶지 않는 법이다."
여포는 조조 주위에 늘어선 장수들 중 후성.위속.송헌이 있는 것을 보았다.
여포는 그들을 보자 눈이 시뻘게지더니 물었다.
"내 그대들을 섭섭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나를 배반했느냐?"
후성이 입가에 비웃음을 날리며 대꾸했다.
"그 넋두리는 평소 장군이 사랑하던 처첩들에게나 하실 말씀이오.
우리 장수들은 장군으로부터 곤장을 맞거나 가혹한 속박을 받은 기억밖에 없소."
후성의 말에 여포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럴 동안 고순이 군사들에게 이끌려 왔다.
조조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할 말이 없느냐?"
조조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으나 고순은 아무 말이 없었다.
조조는 고순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으나, 고순이 대답을 안 하여 그를 목베게 했다.
이어 장수 서황이 진궁을 끌고 왔다.
"공대! 그대와는 실로 오랜만일세.
그간 별고 없었는가?"
조조가 입가에 반가움과 냉소가 뒤섞인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진궁이 고개를 쳐들며 답했다.
"보는 바와 같다.
그대의 마음이 바르지 않기에 그대를 버리고 떠난 것인데
어찌 아는 체를 하는가?"
"나를 보고 바르지 않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여포는 어떤 자인가?"
"여포는 우매하고 포악스러운 장수이나 정직하다.
그대같이 간교하거나 음흉하지 않아 거짓 정의를 앞세워 황실을 범할 그런 간웅은 아니다."
조조가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그대는 스스로 지모가 많다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랏줄에 묶인 패장이 되었음은 무슨 까닭인가?"
"승패는 시운에 달려 있는 법, 단지 여기 있는 이사람이 내 말을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궁은 옆에 웅크리고 있는 여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그대 따위에게 사로잡혀 이러한 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대를 어떻게 하면 좋겠나?"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서 내 목을 쳐라!"
조조는 진궁이 이렇게 말하자 가슴에 한 가닥 회한이 일었다.
조조가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장안을 탈출하여 달아나던 중 중모현에서 붙들렸을 때
자기를 살려 주고 벼슬을 버리고 함께 달아났던 그 진궁이 지금은 패군지장이 되어 조조 앞에 묶여 있는 것이다.
성고 땅에서 여백사 일가를 엉뚱하게 오해한 나머지 모두 죽이고도 태연히 말하는 조조에게
그같이 간특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며 홀홀이 떠나 버렸던 그 진궁이 아닌가.
조조는 진궁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하여 다시 물었다.
"그대에게는 노모와 처자가 있지 않은가.
그들은 어떻게 하겠나?"
조조의 말에 진궁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어 결연히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려는 자는 남의 어버이를 살상하지 않으며,
천하를 어진 정치로 다스리려는 자는 남의 후사를 끊지 않는 법이라 했다.
노모와 처자의 생사는 오직 그대의 마음에 달렸을 뿐이다.
나는 이미 사로잡힌 몸, 어서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
조조는 진궁을 살려 주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는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고 해야 맞는 말이었다.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진궁과의 사사로운 정은 그가 생사를 넘나들 당시에 싹튼 것이어서 그만큼 더욱 강했다.
진궁은 조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조가 마음에 품고 있는 갈등을 어렴풋이 엿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층계 아래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포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진 다음,
뚜벅뚜벅 사형장을 향해 긴 돌층계를 내려갔다.
조조는 좌우에게 그를 붙들게 하며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랐다.
그러나
진궁은 끝내 그들을 뿌리쳤다.
조조는 그의 뒤를 몇 걸음 뒤따르다 눈물을 흘리며 명을 내렸다.
"진궁의 노모와 처자를 허도로 보내 정중히 모시도록 하라.
이를 게을리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진궁은 그 말을 들으며 목을 내밀어 칼을 받았다.
진궁의 죽음과 조조의 애틋한 슬픔을 본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조조는 진궁의 시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사지내게 했다.
뒷날, 사람들이 그의 꿋꿋한 기상과 절의를 기려 노래했다.
죽고 삶에 두 마음 푸지 않았네.
대장부 지조 장하기 그지없구나!
주인 바꾸지 않는 그 도리 금석처럼 굳었으나
아까운 동량재 부질없이 받들더니
어머니와 하직하는 마음만 가슴이 메이도다.
백문루 아래에서 목숨 잃던 날
그대처럼 충절 지닌 신하 몇이나 되나!
진궁이 떳떳이 죽음을 택한 그 순간이었다.
여포는 조조가 내려가고 없자 유비를 보고 처량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유 공은 높은 자리에 앉고,
나는 층계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데 나를 위해 한 마다라도 해 주시지 않으려오?"
그 말을 듣자 유비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여포는 유비가 자기의 말을 받아들인 걸로 알고 조조가 다시 문루에 오르자 큰 소리로 말했다.
"승상에게 항시 걱정거리가 되어 온 이 여포는 이렇게 항복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나를 살려서 부장으로 삼으신다면 천하대사를 도모하는 데 어려울 게 없지 않겠습니까?"
여포의 애원에 조조는 옆에 있는 유비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춰 물어 보았다.
"유 공, 저 애걸하는 소리를 들어 줘야 하겠소, 아니면 처단해야 하겠소?"
조조의 물음에 유비가 차갑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지난날 정건양과 동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유비가 던진 뜻밖의 말에 여포는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자기를 위해 변호 한 마디라도 해 줄 걸로 알았던 여포였다.
유비가 조조에게 지난날 자기가 배반했던 주인을 들먹이자
여포는 집어삼킬 듯이 그를 노려보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닥쳐라! 내가 원문에 창을 쏘아 살려 준 일과 너의 처자를 살려 준 은혜도 잊었다는 말이냐?
네놈이야말로 신의가 없는 놈이다!"
이때 조조가 결연히 외쳤다.
"당장 여포를 끌어 내어 목을 치도록 하라!"
여포는 끌려나가면서도 유비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이 귀 큰 당나귀 같은 놈아! 지난날 패주하였을 때도 너를 받아들인 일을 잊었느냐?"
그러자 그런 여포를 큰 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포, 부끄럽지도 않은가. 죽게 되면 당당히 죽을 일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사람들이 소리나는 쪽을 보니 그는 도부수들에게 이끌려 오는 장요였다.
조조의 명을 받든 무사들이 밧줄을 들고 여포에게 다가갔다.
여포는 그때까지도 살려 달라며 날뛰었으나, 끝내 무사들에게 이끌려 밧줄에 목이 매인 채 죽고 말았다.
여포의 시신은 길거리에 효수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날 백문루에서 죽은 여포를 위해 시를 지었다.
홍수로 불어난 물에 하비성이 잠기고
천하의 영웅 여포 사로잡힐 때
천리를 달리는 적토마는 어디 갔나
방천화극 한 자루만 남았구나
호랑이가 묶여 애원하니 처량하구나
매는 배불리 먹이면 소용 없네
계집만 귀히 여기고 준궁의말 물리치더니
귀 큰 아이만 은혜 모름을 탓하네.
조조는 여포의 목을 매 죽인 후에야 계하에 끓어앉은 장요를 보고 문초하기 시작했다.
"음,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군!"
"복양성 안에서 만나지 않았더냐?"
지난날 진궁의 계교에 빠져 목숨마저 잃을 뻔했던 일이 떠오르자 조조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대도 잊지 않았군."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원통하여 잊을 수가 없다."
"무엇이 그렇게 원통한가?"
"그날 불길이 좀더 크게 일었더라면 오늘 네놈 같은 역적은 없었으리라!"
조조가 장요의 말에 화가 치솟아 소리쳤다.
"닥쳐라! 패장의 주제에 감히 나를 모욕할 셈이냐?"
조조는 금방이라도 그를 벨 듯이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장요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목을 빼어 칼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유비가 일어나 조조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하비성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곧고 바릅니다. 살려서 바르게 쓰시지요."
그러자 관우도 나와 조조 앞에 무릎을 꿇으며 청했다.
"그가 충의지사임을 평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그를 살려 주십시오."
조조는 칼을 내던지며 껄껄 웃었다.
"나 또한 문원(장요의 자)의 충의를 알고 있소.
그를 한번 시험해 본 것 뿐이오."
조조는 손수 장요의 결박을 풀어 주고 새 옷을 입힌 다음 자리를 높이 앉혔다.
조조가 이토록 정중히 대할 뿐만 아니라 유비와 관우가 그를 위해 간곡히
청하자 장요도 감사히 여기며 항복했다.
조조는 장요를 관내후로 봉하여 중랑장으로 삼고
그에게 장패를 설복시켜 휘하로 삼도록 하라고 일렀다.
장요도 이미 마음으로 항복한 터라 순순히 조조의 명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장요도 장패를 만나러 떠나기도 전에 장패는,
이미 여포가 붙잡혀 죽고 장요도 조조에게 투항했다는 소문을 듣자 거느리던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 왔다.
조조는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렷다.
장패는 손관.오돈.윤례를 설복시켜 한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창희만은 투항하지 않았다.
조조는 장패를 낭야상에 봉하고 손관 등에게도 벼슬을 높여 청주와 서주 일대의 바닷가를 지키게 했다.
조조는 하비성을 점령하고 여포를 효수한 뒤, 모든 뒷일이 끝나자 허도로 향해 개선길에 올랐다.
허도로 돌아가는 조조의 대군이 하비성을 떠나 서주에 이르렀을 때였다.
고을 주민들은 길가에 몰려 나와 향을 피우고 조조를 비롯한 장졸들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조조가 그들 앞을 지나려 할 때 한 무리의 촌로들이 길가에 무릎을 꿇은 채 간청했다.
"여포의 악정에서 벗어나 다시 화평을 되찾게 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현덕 공께서 이 고을을 떠나시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근심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현덕 공께서 다시 서주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촌로들의 간청에 조조는 말 위해서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대들의 뜻은 갸륵하나, 유공은 이번 싸움에서 공이 크신 분이다.
먼저 천자를 알현하고 난 뒤에 서주로 돌아와도 늦지 않으리라."
그 말을 듣고 연도에 나온 백성들은 함성을 우리며 다시 한 번 조조에게 감사하며 물러났다.
조조는 민심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유비에 대한 사람들의 신망에 문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놀라움은 어느 새 그에 대한 경계심과 시기심이 되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역시 유비는 무서운 인물이구나.
그를 내 장중에 가둬 놓으리라.'
조조는 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이 다짐했다.
조조는 거기장군 차주로 하여금 서주를 다스리게 한 후 다시 허도로 길을 떠났다.
며칠 뒤 조조는 허도로 개선했다.
조조는 공에 따라 장수와 장졸들에게 상을 내려 허도의 주민들에게는 사흘 동안 잔치를 베풀게 했다.
그리하여 허도에서는 며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축제가 벌어졌다.
조조는 승상부 가까운 곳에 집을 마련하여 유비를 머물게 하고 천자께 그의 군공을 상주했다.
이튿날, 조조는 조복을 입고 천자를 배알하러 가는 길에도 유비에게 권해 함께 수레를 타고 갔다.
허도의 주민들도 집집마다 향을 피우고 길을 청소하여 두 사람이 탄 수레가 지나갈 때는 길 옆에 엎드렸다.
유비는 조복을 갖추어 입고 궁궐에 입궐하여 전각 아래 층계에서 엎드려 천자를 배알했다.
헌제는 유비의 성이 유씨인 것을 알자 전상에 오르게 한 후 옥음을 내렸다.
"그대의 선조는 어느 곳의 뉘신가?"
헌제의 물음에 유비는 감격한 나머지 가슴이 막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문득 고향 누상촌에서 자리를 짜며 노모와 함께 보냈던 지난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자의 물음에 정중히 아뢰었다.
"신은 중산정왕의 후예로 현손인 유웅의 손자이며, 유홍의 자식이옵니다.
중조 되시는 유정께서는 한때 탁현의 육성정후에 봉해졌사옵니다."
천자는 유비의 말을 듣고 놀라운 듯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우리 한실의 일족이 아닌가?"
헌제는 급히 조정의 세보를 가져오게 하여 존정경으로 하여금 유비의 선조에
대한 세보가 적힘 대목을 읽어 보게 했다.
"효경 황제께서는 열네 분의 왕자를 두셨으며, 그 일곱째 분이 주산정왕 유숭입니다.
승은 육성정후 정을 낳고, 정은 패후 앙을 낳았으며, 유앙은 또한 장후
유록을 낳고 유록은 기수후 유연을 낳았습니다.
유연은 흠양후 유영을 낳고, 유영은 안국후 유건을 낳았습니다.
유건은 광릉후 유애를 낳고, 유애는 교수후 유헌을 낳았습니다.
유헌은 조읍후 유서를 낳고, 유서는 기양후 유의를 낳고, 유의는 원택후 유필을 낳고, 유필은 영천후 유달을 낳았습니다.
유달은 풍령후 유불의를 낳고 유불의는 제천후 유혜를 낳았습니다.
유혜는 동군 범령 유웅을 낳고, 유웅은 유홀을 낳았으되 홍은 벼슬에 오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유비는 그 유홍의 아드님이십니다."
한실 대대의 세보가 이어져감에 유비는 효경 황제의 일곱째 왕자의 휴예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경제의 일곱째 왕자 중산정왕의 후예는 지방관으로서 조정을 나온 이후
수대는 지방의 호족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여러 제후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사이 언제부터인가 가문을 잃고
토민으로 전락하여 유비의 양친대에 이른 것이었다.
"세보에 따르면 그대는 바로 집의 아저씨가 되오.
짐에게 현덕과 같은 황숙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오."
헌제는 유비를 편전으로 들라 하여 황공하옵게도 숙질간의 예를 갖춘 다음 조조를 불러 함께 주연을 베풀었다.
천자는 여느 때와는 달리 잔을 거듭하여 용안을 붉게 물들이며 흡족해 했다.
따지고 보면 가까운 촌수도 아니며 혈통 또한 바로 이어진 혈통이 아니었으나,
한실의 종친인 것만으로도 천자는 유비를 가까이 두리라 작정했다.
'조조가 권세를 쥐고부터는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조조가 나를 젖혀 두고 마음대로 국사를 주무르기 때문이다.
비록 촌수가 멀다 하나 숙부뻘이 되는 이런 영웅을 만나게 되었으니 뒷날 도움받을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헌제는 유비를 더욱 정중히 대하며 좌장군에 의성정후로 봉했다.
이후 조정에서나 백성들에게 '유 황숙'이라 불려지게된 것도 이런 연규에서였다.
그러나 유비가 이렇듯 천자에게 종친으로서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두터운
신임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승상부에서 대권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조조와 그의 휘하 여러 장수들이었다.
조조가 승상부로 돌아오자, 순욱을 위시한 모사들이 입을 모아 조조에게 간했다.
"듣자옵기로, 천자께서는 유비를 숙부라 부르며 신임을 두터이 한다합니다.
장차 승상께 이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하여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오.
유비가 황숙으로 대접받는 것은 어쩔 수 없소.
그러나 내가 황제의 조명을 받드는 이상, 내가 내리는 명을 그도 받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허도에 붙들어 둔 것은,
천자를 곁에서 모시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내 손아귀에 묶어 두기 위함이오.
그러니 공들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데에 있소."
순욱과 유엽 등은 자기들의 말을 가볍게 일축하며 불쑥 다른 말을 꺼내자 그 일이 궁금해졌다.
"다른 걱정거리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대위 양표는 원술과 친척간이니 그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가 원술과 내통하며 허도라도 넘본다면 반드시 큰 화가 될 것이오.
그를 그대로 두는 것은 환부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과 같소."
"그러나 아직 나타난 죄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를 죽인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오."
조조는 이윽고 태위 양표가 원술과 내통하여 허도를 넘본다고 소문을 퍼뜨린 뒤
그를 붙잡아들이고 만총을 시켜 문초케 했다.
때마침 북해태수 공융이 허도에 와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조조를 찾아가 진언했다.
"양 공은 4대에 걸쳐 올바르게 조정에서 일해 온 명문의 집안입니다.
그가 원씨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을 준다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조조는 공융의 말에 차갑게 대답했다.
"이는 조정에서 행하는 일이오."
그러나 공융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승상께서는 옛 주공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만일 성왕이 소공을 죽였다면, 그런데도 주공이 나는 이를 모른다 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닙니까?"
공융이 사리를 밝혀 끈질기게 그 부당함을 말하니 조조가 역정을 냈으나,
하는 수 없이 양포를 풀어 주는 대신 벼슬을 빼앗고 멀리 시골로 쫓아 버렸다.
이때 의랑 조언은 평소부터 조조가 권력을 전횡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히 여기고 있었다.
조언은 조조가 멋대로 대신을 옥에 가둔 일과 내쫓은 일을 널리 알리고 이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조조가 이를 알고 크게 노해 조언을 잡아들여 그를 죽였다.
조정의 백관들은 이후부터는 그런 조조를 두려워해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승상부에 모사 정욱이 찾아와 조조를 은근히 충동질했다.
"승상의 위명은 돋는 해와 같이 세상에 떨치고 있습니다.
이제 승상께서 하실 일을 하셔야 합니다."
"하여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조조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그야 왕패의 개혁을 결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왕도가 쇠퇴한지 오래 되어 천하는 제각이고 민심은 흉흉합니다.
새로운 패업을 백성들도 고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정욱의 말에는 분명히 조정을 뒤엎자는 반의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그것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이르오."
정욱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러나 정욱이 거듭 말했다.
"이제 여포도 죽고 천하는 주인을 잃은 배와 같습니다.
모두 갈 바를 몰라 변란과 혼미만 거듭되도 있을 따름입니다.
이럴 때 승상께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조조가 정욱의 말을 가로막았다.
정욱이 입을 다물자 조조가 이미 생각한 바가 있는 듯 입을 열였다.
"조정에는 아직도 구신들이 많이 남아 있소.
기회가 무르익기 전에 경솔히 움직이면 화를 자초할 것이오.
우선 백관들의 동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소.
천자께 청해 사냥을 가자고 하여 그들의 태도를 엿볼 것이오."
그 말과 함께 조조는 사냥 준비를 하도록 일렀다.
즉시 사나운 사냥개, 매, 좋은 말 그리고 활과 화살을 준비하여 성밖에 대기시킨 후 자신은 대궐에 입궐했다.
"오랜만에 허전으로 납시어 친히 신들과 함께 사냥을 즐기심이 어떻겠습니까?
마침 맑고 좋은 날씨가 이어져 야외의 대기도 한결 상쾌한 듯하옵니다."
갑작스런 조조의 청에 황제가 거절의 뜻을 밝혔다.
"경의 뜻은 잘 알겠소만 사냥은 제왕이 즐길 바 못 되오.
짐도 그래서 사냥은 좋아하지 않소."
천자의 말에 그대로 물러날 조조가 아니었다.
옛날 일을 들어 황제에게 다시 청했다.
"아니옵니다.
성인은 사냥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옛 제왕은 사계절에 걸쳐 이를 행하였습니다.
지금 사해가 어수선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폐하뿐만 아니라 공경들도 때로는 맑은 바람을 접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위엄을 천하에 떨치시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조조가 재차 권하니 천자로서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조조의 위압에 마지못해 사냥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천자는 소요마를 타고 보석을 아로새긴 보조궁과 촉을 황금으로 만든 금비전 화살을 메고 의장을 갖추어 궁문을 나섰다.
유비와 관우.장비도 옷 속에 엄심갑을 받쳐 입고 활과 화살을 안장에 매단 채 무기를 들고
십기의 날랜 군사를 거느려 황제의 뒤를 따랐다.
조조가 사냥에 몰이꾼으로 동원한 병사는 10만에 이르렀다.
기마, 보졸의 대열은 꾸불꾸불 궁문에서 도성을 뚫고 군성지를 지나 채운양에 이르는 2백 리를 메웠다.
거리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 이 장관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날 조조는 발톱이 노랗고 그 빠르기가 번개 같다는 조황비전마를 타고 화려한 사냥복 차림으로
천자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아 나아갔다.
조조는 천자와 겨우 말머리 하나 정도의 거리밖에 두지 않았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모두 조조의 심복 장수들이었고, 문무백관들은 훨씬 뒤에 떨어져 뒤따르고 있었다.
문무백관들은 감히 헌제 옆에 근접하기도 어려웠다.
문무백관들은 조조가 그렇게 위세를 부리자 속으로 불쾌하게 여겼지만
아무도 감히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이윽고 궁정 지정의 사냥터인 허전에 이르자, 허전 2백 리 둘레는 10만의 몰이꾼으로 메워졌다.
헌제가 말을 달려 허전에 이르니 유비는 말에서 내려 헌제가 지나는 길가에
물러서 있다가 겨우 천자를 뵈올 수 있었다.
"오늘은 황숙께서 사냥하는 솜씨를 보고 싶소. 황숙께서도 말에 오르시오."
"황송하옵니다."
유비는 천자에게 절을 올린 후 말 위에 올랐다.
이때 몰이꾼의 함성에 놀란 토끼 한 마리가 풀숲에서 튀어 나왔다.
천자가 유비에게 토끼를 가리켜보이며 일렀다.
"황숙께선 저 토끼를 쏘아 잡으시오."
유비가 말을 몰아 도망가는 토끼를 뒤쫓으며 활에 화살을 메겨 쏘았다.
흰 토끼의 등에 화살이 꽂히며 토끼는 풀 위에 나뒹굴었다.
"훌륭하오!"
그때서야 천자는 궁문을 나설 때부터 찌푸렸던 미간을 활짝 펴며 유비를 칭찬했다.
"저쪽 언덕으로 한번 가 보도록 하오."
일행이 천자가 가리킨 곳을 향해 말을 달릴 때였다.
언덕의 등성이를 돌아가는데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가시밭을 헤치며
불쑥 한 마리의 사슴이 튀어 나왔다.
천자는 손에 든 보조궁에 금비전을 메겨 쏘았으나 화살은 사슴의 뿔을 스치며 지나갔다.
두 번, 세 번 연달아 쏘았으나 화살은 계속 빗나가고 말았다.
언덕 아래로 도망쳤던 사슴이 몰이꾼의 함성에 놀라 다시 이쪽으로 뛰어왔다.
"이번에는 승상께서 쏘아 보시오."
천자가 활과 화살을 조조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조조는 천자의 보조궁에 금비전을 메겨 들고 사슴을 향해 쏘았다.
금비전이 사슴의 등에 깊히 박히자 사슴은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풀 위로 쓰러졌다.
공경 백관들은 금비전이 사슴의 등에 꽂혀 있자 모두가 천자가 쏘아 맞힌 것으로 알았다.
"황제 폐하 만세!"
그리하여 모두들 천자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그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조조가 급히 말을 몰아 천자의 앞을 가로막더니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활과 금비전을 두 손 높이 쳐들어 화답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모든 군신들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갑자기 만세 소리가 그쳤다.
유비의 등 뒤에서 이 모양을 지켜 보던 관우가 봉의 눈을 부릅뜨며
누에 같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조조를 노려보며 손을 칼집으로 가져갔다.
당장이라도 말을 달려 한칼에 조조의 목이라도 벨 듯한 기세였다.
이를 본 유비가 깜짝 놀라며 눈짓으로 관우의 노여움을 달랬다.
관우는 유비의 눈짓과 표정을 보고 가까스로 노기를 억눌렀다.
그때 문득 조조가 유비를 바라보았다.
유비는 관우의 행동을 조조가 눈치챌까 재빨리 웃음을 지으며 다가가 치하했다.
"승상의 활솜씨는 신기와 같아 따를 자가 없을 듯하옵니다."
유비의 칭찬에 조조는 거리낌없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이는 오로지 천자 폐하의 홍복일 따름이오."
조조는 그제야 말머리를 돌려 헌제에게 치하를 돌렸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그처럼 오만불손한 말도 없을 것이다.
자기 같은 유능한 사람이 있으니 천자는 복이 많다는 말이 아닌가.
조조는 천자의 보조궁과 금비전을 끝내 돌려 주지 않고 자신의 허리에 꿰찼다.
사냥이 끝나자 허전의 들에서는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화톳불을 놓아 그날 사냥한 짐승을 굽고 군신들에게 술을 내렸다.
그러나 군신들은 흥이 깨진 듯,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잔치가 파하자 천자는 서둘러 환궁하였다.
그날 밤 유비는 가만히 관우를 불러 물었다.
"오늘 허전에서 어째서 그와 같은 위험한 행동을 취했는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해 다행이네만,
근자에 볼 수 없었던 그대답지 않은 과격한 행동이 아닌가?"
"조조는 기군망상하며 기회를 엿보아 패도를 행할 간웅입니다.
그가 그와 같은 야심을 벌써 노골적으로 내보인 것입니다.
그를 죽여 나라를 구하고 역적을 제거하려 했는데 어찌하여 만류하였습니까?"
잠시 후 유비가 우선 머리를 끄덕여 같은 새각임을 표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우의 장한 뜻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닐세.
그러나 '쥐를 잡으려다 독을 깬다'는 속담이 있네.
그것이 염려되어서였네.
그때 조조와 천자와는 말머리 하나 사이로 가까이 있었지 않는가.
그리고 그 주위로는 조조의 심복들이 에워싸고 있었지 않았는가.
만약 아우가 한때의 분함을 참지 못하고 경솔히 움직였다가 실수라도 한다면
조조는 죽이지 못하고 천자만 상하게 할 수도 있었네.
만일 그렇게 됐다면 그 모든 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나?"
관우가 유비의 말을 듣고 보니 모두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들꿇고 있는 분한 마음을 달래지 못해 탄식했다.
"오늘 저 간웅 조조를 처치하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나라에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허전에서 설사 조조의 목을 베었더라도 그에게는 10만의 군사가 있지 않은가.
우리도 허전 땅에서 조조와 함께 흙이 되었을 것이네.
그렇게되면 제2의 조조가 또 나타날 것일세.
아직은 기다려야 하네.
장비라면 모를까 그대까지 그토록 성급하게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행여 그런 말을 비쳐서는 안 되네."
유비가 다시 한 번 관우를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