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가 만들어낸 희소성 만점 핑크 다이아몬드, 비결은 초대륙 충돌
2018년 11월, 세계적인 경매업체 크리스티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한 경매에서 보석 하나가 나온 지 5분 만에 5천37만5천 스위스프랑(한화로 약 574억 원)으로 낙찰됐다. 주인공은 바로 색상·강도 모두에서 가장 높은 ‘팬시 비비드’ 등급을 받은 19캐럿의 에메랄드 컷 핑크 다이아몬드 ‘핑크 레거시’였다. 2022년 11월에 열린 동일 경매에서도 18캐럿이 넘는 핑크 다이아몬드가 2,850만 달러(한화 약 390억 원)에 낙찰됐다. 2017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핑크 다이아몬드인 ‘핑크 스타(59.6캐럿)’가 보석 경매 역대 최고가인 7,100만 달러(한화 약 800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그림 1. 유색 다이아몬드, 그중에서 ‘핑크 다이아몬드’는
희소가치가 높기로 유명하다. 출처: Shutterstock
다이아몬드는 특유의 투명함과 단단함, 높은 굴절률이 만들어내는 영롱한 광채 덕분에 옛적부터 귀한 보석으로 여겨졌다. 무채색도 값어치가 크지만, 색상을 가진 유색 다이아몬드는 더 큰 희소가치를 갖는다. 미국 보석학회에 제출되는 다이아몬드 중 유색 다이아몬드는 3% 미만이라고. 그중 은은한 분홍빛을 띠는 ‘핑크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 10만 개 중 1개꼴로 나오기 때문에, 특히 희귀하기로 유명하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핑크 다이아몬드 성지’였던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아가일(Argyle) 광산에서 연간 채굴된 다이아몬드 중 핑크 다이아몬드의 비율은 0.01% 수준이었다. 다이아몬드 1,000개를 캐면 1개 정도 발견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천연 핑크 다이아몬드 중 90% 이상은 이 아가일 광산에서 채굴됐다. 아가일 광산에 무슨 특별한 점이라도 있는 걸까? 학자들은 아가일 광산이 다른 다이아몬드 광산처럼 대륙 한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에 있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추측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휴고 올리어룩(Hugo Olierook) 호주 커틴대학교 지구동역학 박사 연구팀이 약 13억 년 전 일어난 초대륙 ‘누나(Nuna)’의 붕괴가 핑크 다이아몬드 생성의 원인이라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했다. 어떤 원리로 핑크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는지 함께 알아보자.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고, 색까지 입혀지는 원리
핑크 다이아몬드의 기원을 살펴보기 전, 무색투명한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이아몬드는 탄소 원자로만 이뤄진 원소 광물이다. 지표면에서 발견되지만, 만들어지는 장소는 지표보다 온도와 압력이 훨씬 높은 지하 150km 부근의 맨틀이다. 탄소는 같은 탄소 원자와 곧잘 화학적으로 결합하는데, 상온·상압에서는 주로 흑연으로 존재한다. 다이아몬드는 1,500°C에 이르는 고온과 6만 5,000기압에서 만들어진다.
흑연과 다이아몬드는 탄소 동소체지만, 결합 형태가 다르다. 연필심의 원료인 흑연은 각 탄소 원자가 다른 3개의 원자와 결합해 육각형을 이루며 얇은 판을 형성해 잘 부서진다. 반면 다이아몬드는 각 원자가 4개의 다른 원자와 정사면체 형태로 튼튼하게 붙어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이아몬드는 화산폭발 같은 자연현상으로 인해 지표로 운반된다.
그림2. 같은 탄소라도 구조에 따라 흑연과 다이아몬드로 나뉠 수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다이아몬드는 땅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형성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탄소 원자 자리에 질소, 산소, 수소, 황 등 다른 원소가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들이 다이아몬드에 색을 입힌다. 원소의 구성 변화로 결정 구조가 바뀌면서 각자 고유한 파장의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탄소 자리를 미량의 질소가 꿰차면 다이아몬드가 노란색을 띠고, 탄소 대신 붕소 원자가 들어가면 파란색을 띤다. 하지만 핑크 다이아몬드는 예외다. 탄소 외 원자가 섞여서가 아니라, 결정 구조가 외력에 의해 뒤틀려서 분홍빛을 내기 때문이다.
‘누나’의 충돌과 붕괴가 구조를 뒤틀고 핑크빛 만들었다
그렇다면 어떤 힘이 아가일 광산 부근에서 핑크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냈을까. 휴고 올리어룩 박사 팀은 이를 알아보기 위해 방사성 측정법을 이용해 아가일 광산에서 채취한 암석 샘플의 연대를 측정했다. 그 결과 핑크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아가일 광산 암석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대략 12억5,700만~13억1,100만 년 전에 지표면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핑크 다이아몬드가 약 12억 년 전에 지표면에 출현했는데, 이는 곧 핑크 다이아몬드가 생성된 지 1억 년 후에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연구팀은 “약 13억 년 전은 초대륙 ‘누나(Nuna)’가 더 작은 대륙으로 분열되는 시기였다”고 말했다. 여기서 초대륙이란 작은 대륙들이 하나로 뭉친 거대 대륙을 말한다. 지질학자들은 과거 시기별로 3∼4개의 초대륙이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18억 년 전에는 누나, 약 10억 년 전에는 ‘로디니아(Rodinia)’, 3억 년 전에는 ‘판게아(Pangaea)’라는 초대륙이 각각 존재했지만, 판 구조에 변화가 일어나고 판이 계속 이동하면서 지금 같은 여러 대륙으로 갈라졌다는 것이다.
그림 3. 누나 대륙이 분열되는 과정. 연구팀은 이 과정에서
핑크 다이아몬드가 아가일(Argyle) 지표면으로 나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출처: Nature
연구팀은 “대륙 충돌로 누나가 생겼을 때, 지하 150km에서 형성된 무색 다이아몬드가 핑크 다이아몬드로 변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약 18억5,000만 년 전, 현재 호주 북부와 서부 지역을 형성하고 있던 두 대륙이 분열되고 누나라는 초대륙으로 합쳐졌다. 이 과정에서 대륙 간 충돌이 발생했는데, 여기서 발생한 외력으로 인해 다이아몬드의 결정 구조가 뒤틀리고 빛을 다르게 반사하면서 분홍색으로 변했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핑크 다이아몬드는 이제 없다? “새로운 발굴지 찾을지도”
한편 아가일 광산은 지난 2020년 37년 만에 폐쇄돼 현재 채굴 활동을 하지 않는다. 아가일 광산이 값싸고 작은 다이아몬드를 다량 생산해 전 세계적으로 공급과잉을 불러오고, 이 과정에서 수익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캐럿당 15~25달러에 팔리던 아가일 광산의 다이아몬드는 급기야 2018년 12월, 호주 서부에 있는 리오틴토의 일부 고객사들로부터 구매 거부 사태까지 맞았다.
그림 4. 호주 아가일 광산의 광경. 아가일 광산은 한동안 가장 많은 양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한 동시에 핑크빛이 나는 고급 다이아몬드가
산출되는 곳으로 유명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현재는 사실상 새로운 천연 핑크 다이아몬드를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다. 연구를 이끈 얼리어룩 박사는 “더 많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몰랐던 정보를 아는 것은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캐나다,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누나가 분열됐던 대륙 가장자리 부근의 산악지대가 새로운 핑크 다이아몬드 성지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글: 김우현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